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56
외전 206화. 일원만화(一元萬化) (6)
이천상이 고개를 저었다.
“잠시나마 태양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그럴 수 있지.”
“령주님께서도 짐작하시겠지만, 절대다수의 야차는 그런 것을 원치 않을 겁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령주님께서는 신교 내에서도 흔치 않은 제대로 된 수장이라 생각합니다.”
이천상의 눈이 깊어졌다.
“무모하게 부하들을 사지로 이끄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럼 자네가 날 실패로 이끌었군.”
“령주님.”
“자네로 인해 나는 벌써 실패했어. 나는 자네를 믿었지만, 자네 수하들을 믿진 않았네.”
“예?”
“그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확신했네. 당연하지. 그들은 자네와 달라. 그런데도 난 일 조장을, 십 조장을 자네에게 보냈네.”
“……!!”
“그리고 다른 조장들도 보낼 생각이었지.”
이천상의 눈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떨어지는 달빛이 나무의 가지와 잎들을 비집고 들어와 양백호의 얼굴에 점점이 부서졌다. 창백한 점은 섬뜩했고 점과 한 몸이 된 선들은 질감을 지닌 물건처럼 서늘해 보였다.
“내가 오롯이 이천상이라는 개인을 위해 그들을 보냈다고 생각하나? 천만에.”
“…….”
“나는 유능하고 가능성 있는, 그리고 야차사령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부하를 위해 죽을 확률이 지극히 높은 사지로 조장들을 보낸 잔혹한 수장이라네.”
양백호가 눈을 감았다.
어둡게 고개 숙인 나뭇가지들이 성벽 위에 둘러쳐진 쇠망인 것만 같았다. 헤아리기 어려운 쇠망을 바탕 삼아 서 있는 인형의 얼굴에 찍힌, 창백한 월점(月點)들은 더 이상 섬뜩해 보이지 않았다.
어둠에 빠진 그림자를 빛으로 인도하는 달의 배려였다. 태양이 되진 못하더라도, 밤하늘을 뒤덮은 무수한 점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주는 달의 속삭임이었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가치가 있다네. 나 역시 나만의 가치를 좇으며 살아오다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네.”
“…….”
“나는 자네가 되고 싶었네.”
“예?”
“올바름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안고 잘못된 것을 뒤바꾸고자 하는, 너무나도 당연하기에 지탄받을 수밖에 없는 멍청한 혁명가가 되고 싶었지.”
“……!”
“나는 실패했네. 현실에 안주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 나에게는 능력이 없었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했네. 그래, 어쩌면 그때 나는 현실에 안주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
“…….”
“그러나 자네는 달랐어. 자네는 답답하리만치 완고한 그 가치를 안고 여기에 서 있네. 내전의 마인들 속에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동조자들까지 얻으며 작은 바람을 일으켰지.”
양백호가 다시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러나 다시 예전과 같은 꿈을 꿀 수 없는 비참한 실패자만이 보일 수 있는 회색의 눈동자였다.
그는 다시 꿈을 꿀 수 없었다. 꿈을 꾸기를 바랄 뿐.
그러나 정작 그의 꿈은 다른 사람이 대신 꿔 주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꿈은 관람이 가능한 꿈이었다. 목숨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특등석은 아니었지만, 젊은 시절의 열정을 일깨울 수 있을 정도의 거리는 되는 자리였다.
양백호는 걱정했고 기뻐했으며 비참해했고 좌절했다.
그리고 그 다채로운 감정들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의지가 그의 사지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 의지의 이름을 사람들은 재도전이라고 불렀다.
재도전을 하는 순간, 다시 한번 목숨을 불태우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
그 순간, 그의 인생은 완성될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실패자의 삶에서 벗어날 것이며, 동시에 노력이 부족했던 주제에 세상을 원망한 머저리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양백호는 그 머저리란 자격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머저리라는 불쾌한 칭호와 동시에, ‘아직’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실패는 최선을 다해 보지 못한 자들이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만만한 단어가 아니므로.
“자네를 보며, 비로소 나는 깨달았네. 내게 부족했던 것은 능력이 아니라는 걸. 능력이란 나의 목표를 이루게 해 주는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네.”
“…….”
“자네는 나의 은인이야. 한 번뿐인 삶에 스스로 실패자라는 직인을 찍어 버린 배부른 돼지를, 아직은 성공 중이라고 되뇔 수 있는 배고픈 각자(覺者)로 만들어 주었어.”
이천상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는 그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양백호가 미소를 지었다.
사나운 인생을 뚜벅뚜벅 걸어왔던 사자의 얼굴에도 저런 미소가 자리 잡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얼굴이었다.
“해서 나는, 다시 한번 얻은 날개가 불타는 한이 있더라도 태양이 될 생각이라네.”
“야차들이 죽습니다.”
이천상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가라앉아 있었다.
“야차들은, 자신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겁니다.”
“그만하게.”
“령주님.”
“이미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진리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지 말게. 자네는 알고 있지 않나.”
“……무엇을 말입니까.”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걸.”
“……!!”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러나 우리는 마인이야. 그것도 천마신교의 정통 마인이지. 그리고 우리 마인들은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해 죽고 살아.”
이천상의 눈에 격동이 일었다.
“천마(天魔).”
“아직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분이지. 난 어릴 적 입교한 사람이 아닌데도, 재림하는 천마를 보고 싶네.”
“…….”
“물론 그 천마가 누가 되든 상관없어. 이왕이면 신다운 사람이 천마가 되기를 바라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웃기는 말이지. 천마는 신의 대리자야. 신의 대리자가 어떤 성격이든, 우리는 그를 위해 죽고 살 수 있다네.”
양백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숲을 보고 있었지만, 왠지 신교 전체를 둘러보는 것 같았다.
“내가 죽기 전에 천마가 나지 않아도 상관없네. 그리고 나는 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몰라. 하지만 왠지, 이렇게 더럽고 협잡 가득한 제단에 강림해 주실 것 같지는 않군.”
“…….”
“천마를 위해, 올바름을 위해, 나 자신을 위해 이제는 날아오를 때가 되었네.”
“령…….”
“그리고 그것은 모든 마인의 소망이야. 그것을 바라지 않는 자, 마인(魔人)의 자격이 없는 법. 나는 내가 바라보는 곳에 욕계마왕(欲界魔王)이 강림할 거란 신념을 갖고 살 것이야. 설령 천마가 강림하지 않는다 한들, 마인이 마인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에 한 손 거든다면 이야말로 가치 있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양백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전에 자네가 말했지? 상관의 권위는 책임에서 나온다고.”
“……!”
“나는 비로소 내 인생에 책임을 지려 하네. 내 인생도 책임지지 못하는 자가 상관다운 상관이 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
“지금 이 순간, 나는 야차사령의 사령주가 되었네. 그리고 나는 우리의 야차사령이 계륵과도 같은 조직이 아니라 진정 신교를 위해 싸우는, 천마도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조직이 되기를 갈망하네.”
양백호가 이천상의 어깨를 두들겼다.
“각주직을 포기한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 보게. 정말 각주직을 포기할 텐가?”
흔들리는 눈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곧고 곧았다.
“그렇습니다.”
양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뗀 양백호는 품에서 작은 문서를 꺼내 들었다.
이천상의 눈이 커졌다. 좌측 하단에 사령주 양백호의 직인이 찍힌 그 문서는 명령서였다.
“오늘부로 야차사령 일각의 각주 이천상을 해임토록 한다.”
“…….”
“이 시간 이후, 일각주였던 이천상은 신교의 일반 마인으로 돌아간다. 외전 조직법상 다시 사령이 되려면 삼 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스스로 사직 의사를 밝혔을 뿐 파면 조치가 아니기 때문에 재입대 시 능력 여하에 따라 그에 걸맞은 보직으로 들어올 수 있다.”
흔들리는 눈으로 양백호를 보던 이천상이 포권을 취했다.
“그간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양백호가 마주 포권했다.
“그간 못난 수장을 보필하느라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그리고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예를 푼 양백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야차사령은 동료로서가 아닌, 새 시대의 첨병이 될 자를 위한 든든한 방벽으로서 존재할 것이네.”
“령주님. 다시 한번 생각을…….”
“조장들부터 보낼 것이야. 한 명씩, 한 명씩.”
“……!!”
“자네와 마찬가지로 해임시킬 걸세. 물론 그들이 원한다면.”
“령주님.”
“사령이 쪼개지는 꼴 보고 싶지 않다면 자네도 열심히 하게. 우리를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 이제부터는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도 괜찮네. 우리의 인생이 신교의 정상화를 위해, 진정 신을 위해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야.”
양백호가 몸을 돌렸다.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거야.”
* * *
양백호는 떠났고 이천상은 남았다.
그는 이 숲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양백호와의 대화가 뜻밖의 혼란을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이천상은 진정 혼란스러웠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양백호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야차사령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의 빈자리가 작지는 않겠지만, 크지도 않아.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각주가 되면 내가 빠진 아쉬움도 금세 희석될 수 있다.’
그렇게 사령이 제자리를 지켜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천상은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백호는 야차사령이란 거대한 조직을 신교 개혁을 위한 선봉 부대로 만들고자 한다.
부대의 수장은 부하들의 생명권을 부여받는다. 야차사령은 여느 저잣거리의 흔한 왈패 집단이 아니었다. 군부대보다도 더 군부대 같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진짜배기 조직인 것이다.
당연히 상관이 그러라고 하면 그래야 한다. 그것은 모든 부대가, 조직이 비슷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남들보다 감정이 무뎌서 목숨도 쉽게 내놓을 수 있는, 조금 독특한 짐승에 불과한…….’
그때였다.
한 줄기 기괴한 기척이 혼란 가득한 이천상의 상념을 끊어 내 버렸다.
이천상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달빛조차 다가서기를 꺼릴 만큼 음울한 그림자를 끌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우우웅.
의문이 드는 순간, 내공이 알아서 울음을 토했다.
이천상은 상당히 놀랐다. 내공의 진동이 평소와 달랐다. 강자를 보며 긴장하는 반응이 아니었다.
이 진동은 마치, 공명과도 같았다.
‘여자?’
그때였다.
스르릉.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어두운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파아악!
문답무용, 갑작스레 땅을 박차 돌진하는 여인의 손에서 한 줄기 묵직한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밑도 끝도 없는 선공이었다.
하지만 이천상은 여인의 선공이 아닌, 그녀가 펼친 무공에 깜짝 놀랐다.
“만압금마장?!”
거대한 장력이 이천상의 몸을 휩쓸었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