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vel 2 assassin wants revenge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희생 1
* * *
이내, 바닥이 갈라지며 반물질 축퇴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카인은 두 눈을 부릅떴다. 발밑에서 블랙홀을 닮은 무언가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조직의 수천 년 역사를 지탱한 원동력.
전 대륙에 흩어진 나노 마테리얼이 어떻게 공명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이곳에서 생성되는 에너지를 십분 활용한 걸 테지.
이론상 반물질 축퇴로는 영구 기관에 버금가는 출력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원리 때문에 선천적으로 불안정했다. 지금이야 정해진 루트를 따라 순환하고 있지만, 그것도 머지않았다.
자신의 패배를 염두에 둔 오메가가 폭탄으로 사용했으니까.
‘외통수군.’
설령 사전에 알았다고 해도 피할 방도는 없었을 거다. 반물질 축퇴로가 폭주하는 걸 막고자 중앙 제어 시스템을 멈추지 않았다면 나노 마테리얼이 온 대륙을 집어삼켰을 테니까.
“폭발을 취소하겠다.”
“그래, 그렇겠지. 빌어먹을.”
고개가 절로 내려간다.
두 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 정련정심의 극의를 깨달은 덕분에 재생이 진행되고 있지만, 극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1분 안에 오의를 사용하는 건 불가능했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이 없으니 함부로 반물질 축퇴로를 건드릴 수도 없었다.
이브가 내려온다면 활로가 생길지도 모르나, 그녀는 지상에 있었다. 제시간에 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체할 수 없었다.
고심하는 순간에도 초침은 줄어들고 있었으니.
쿠구우웅.
이명이 들릴 정도로 큰 소음과 함께 천장이 더 낮게 가라앉았다. 비명을 내지른 철골은 보기 처참할 정도로 휘기까지 했다.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한계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30초 남짓.
이게 터지면 칼라만티아 협곡에 있는 토벌대는 전부 죽을 게 분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륙 전도에 지워지지 않을 점 하나가 남을 터.
답답한 마음에 이마를 내리찍었지만, 그런다고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반물질 축퇴로는 어중간한 일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 번에 끝내지 않으면 그레이 구에 버금가는 재앙으로 변할 수 있었다.
여기, 사건을 인지한 이는 한 명.
더불어 그 사건과 마주할 수 있는 이도 한 명.
외면할 수도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 시점에서 답은 나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인은 눈을 감았다.
이 몸을 불사른다면 확실하게 반물질 축퇴로의 폭주를 막을 수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건 그때.
[10초.]길고 긴 여정이 드디어 끝났다.
미래는 바뀌었고,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그 차이점을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카인은 절감했다.
더 이상 과거의 잔재가 현재를 급습할까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오늘을 살아갈 거다.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5초.]후회는 없었다.
어차피 누군가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한 사람만으로 그 대가를 치를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차라리 이 자리에 있음에 감사했다. 반물질 축퇴로를 막을 수 있는 이는 대륙에서도 제한적이었으니까.
[1초.]이다음엔 어떻게 될지 카인도 몰랐다.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 희생에 의미가 있기를.’
빛이 되어 사라지는 카인의 머릿속에 한 소녀가 스쳐 지나갔다.
* * *
“아리아.”
“네.”
“기분은 어떻습니까?”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잠은 잘 자고 있는 거겠죠?”
“예전이랑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답하는 소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이브는 탁상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조직의 수장인 오메가가 죽어서 그런지 귀신들에게 걸린 족쇄도 상대적으로 느슨해졌다. 구태여 광증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걸리는 게 없으니, 건강해져야 마땅하건만 그녀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눈가에는 무언가 마른 듯한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어젯밤에도 울었으리라.
연례행사나 다름없는 일인지라, 힘내라는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조직과의 혈전이 끝난 지도 벌써 1년.
카인은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가주님은 살아계신 거겠죠?”
“그라면 지옥에서라도 올라올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이 중에서 가장 끈질긴 사람이니까요.”
힘없이 일어나는 아리아의 뒷모습을 쳐다본 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세간에서는 카인의 죽음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게, 그가 들어간 직후 칼라만티아 협곡이 가라앉을 정도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하에 파묻혀 나오지 못했을 거라는 게 정론처럼 퍼졌다.
리벨리온이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남아 수색하고 있지만, 이렇다 할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총제적인 난국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브도 도움을 주고 싶었으나,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없었다.
고작해야 반물질이 쌍소멸을 일으키며 폭발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
사실 원인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화두는 어디까지나 카인이 무사하냐는 것이었으니까.
기분 전환 삼아 밖으로 나간 이브는 정처 없이 걸었다.
성 밖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테마파크는 연일 기록을 갱신하면서 이례적인 호황을 누리는 중이었다.
불과 1년 전에 헬 게이트가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헤브니아는 조금씩 제모습을 되찾았다. 신기는 엄격하게 규제되었고, 성황교의 주도 아래 해체되었다.
각국에서도 긴밀하게 협조해 신의 시대와 관련된 안건은 엄중히 다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스테리스크는 절차를 밟아 자연스레 와해되었다. 조직이 사라진 이상, 초법적인 기관의 존재는 거치적거릴 뿐이었으니까.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가는 듯싶었지만, 적어도 슈발체베인가는 아직도 바람 잘 날 없었다.
카인의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들이 몰려든 탓이다.
슈발체베인가는 제삼자의 눈에서 보면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다. 테마파크라는 돈줄도 있고, 공작령인지라 크기도 큼지막했다.
더구나 그 주인 되는 카인은 미혼인지라 슬하에 계승권을 지닌 자식도 없었다.
말 그대로 처음 차지한 사람이 임자였다.
그래서일까.
귀신같이 나타나 제 권리를 주장하는 이가 부쩍 늘어났다.
변변찮더라도 모두 슈발체베인가의 방계인지라 제지할 명분이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가주님의 아이를 임신했다면서 나타난 사람도 있다니까요. 말이 되나요? 1년 전에는 가주님이 막 실종되었을 때인데?”
“뭐, 욕심이 눈을 가린 거겠죠.”
피아의 넋두리에 이브는 적당히 그녀가 좋아할 만한 말을 내뱉었다. 이 대화도 아리아 때와 마찬가지로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였다.
무시해도 되지만 이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피아가 먼 산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던 것이다. 겉으로는 활기찬 척 연기하지만, 그녀도 속은 곪은 상태였다.
하지만 거론한다 해도 부정할 게 분명했기에 구태여 입에 담지 않았다. 애당초 삐거덕거리는 건 비단 그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예의 그 손님은 아직도 성안에 있는 겁니까?”
“네, 아예 눌러앉을 생각이더라고요.”
호른이 가주 대행으로 활동하고 있다지만, 그게 슈발체베인가의 안정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언제까지 가주 자리를 공석으로 놓아둘 수만도 없었다.
다른 가문이었다면 국가 차원에서 후보를 선정했을 테지만 다행히 세라가 막아 준 덕분에 제법 유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영세한 남작가도 아니고, 무려 공작가였다. 1년 동안 어영부영 운영되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
“이거 피아와 이브가 아닌가.”
어딘가 모르게 밉쌀맞은 목소리.
이브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민폐 덩어리가 나타났다.
“서슴없이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어차피 내가 슈발체베인 공작이 되면 자주 마주칠 사이가 아닌가. 미리미리 얼굴을 익혀두는 편이 낫지 않겠어?”
능글맞은 화법에 이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앞의 중년인은 하루 종일 자신을 치장하는 데 여념이 없는 인간이었다.
과할 정도로 매끄러운 피부와 손톱. 가지런하다 못해 새하얀 치아. 그리고 기름이라도 바른듯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까지.
그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가 역겹기 짝이 없었다.
라프만 슈발체베인의 사촌 되는 중년의 이름은 마르한 프르미움. 승냥이들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이였다.
원래부터 자작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하는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자주 혼동하는 편이었다.
“죄송하지만, 자작님이 공작위에 오를 가능성은 낮을 겁니다.”
“아직도 그가 생환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마르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카인에 대한 소문은 많이 접했다.
십좌를 잡아먹는 십좌, 운수대통 공작, 사상 최연소 무신.
그리고 대륙을 구한 구세주.
목격자가 많은 만큼 그가 일군 위업은 결코 허명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죽은 자에게는 모두 쓸모없는 명패일 뿐.
“충심은 이해하지만, 그쯤 하는 게 어떻겠나? 1년이나 지났지 않은가. 이제 슬슬 잊을 때도 되었어. 거기에 새로 작위를 받는 내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을 텐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가만히 관망하던 피아가 끼어들자 마르한이 진정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결론이 뻔한 일을 가지고 빙빙 돌아가지 말자는 거지. 어차피 서로 힘만 빠질 텐데?”
“아직, 시간은 남아 있어요.”
“자네들만 믿고 감내하는 그 시간 말이지.”
벌써부터 공작이라도 된 것처럼 으스대는 마르한의 모습에 이브는 한숨을 내쉬었다. 으슥한 곳에 가서 묻어 버리는 것도 해답이 될 수 있으나, 정답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차기 가주로 누가 지정되는 건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작령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상태.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면 의심을 받는 건 결국 가신들이었다. 카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물론 카인이 들으면 밑도 끝도 없이 묻어 버리라 명할 테지만, 책임자가 있는 것과 없는 건 천지 차이이지 않겠는가.
‘저도 모르게 물들었군요.’
쓰게 웃은 이브는 금방에라도 뛰쳐나갈 듯한 피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가주님이 돌아오시면 경을 칠 테니까요.”
* * *
“화병만 날 테니까 그 사람의 헛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하지만 가주님을 가지고……!”
분을 견디지 못한 피아가 일어나려고 하자 호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는 집무실이라고? 그리고 나는 공무 집행 중이고.”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피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산처럼 쌓인 보고서를 한쪽으로 밀어낸 호른이 베일 정도로 예리하게 웃었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나도 슬슬 화가 치밀던 참이거든.”
허락도 없이 진흙 발로 들어온 불청객을 호른이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마르한이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명분을 제멋대로 휘두를 때부터 그는 조심스레 정보를 모았다.
“그렇지 않아도 재미있는 흔적을 발견했어.”
“흔적이요?”
“마르한 말이야. 누군가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