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3
나후타야는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뭘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용이 어떻게 교회의 대주교 행세를 하고 있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용이 아도나이의 눈을 피해 중부에서 돌아다니는 거야? 아니지, 애초에 어떻게 금빛 용이 지금까지 살아 있지?”
나후타야의 속사포 같은 물음에 율리오는 대답 없이 웃음만 계속 흘렸다. 그러다 무언가 결심한 듯, 품에서 작은 인형을 꺼냈다.
“굳이 너에게 설명해 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말해 주마. 킥킥, 이 기발한 계획을 나 혼자만 알고 있다는 게 답답했거든.”
율리오가 품에서 꺼낸 인형은 그 생김새가 무척 독특했다.
둥글게 깎은 나무에 사람 얼굴을 그려 놓고, 속을 파내어 마치 속이 빈 달걀처럼 만든 인형이었다.
“이건 북부의 인간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마트료시카’라고 부르더군.”
율리오는 인형을 소개하며 위아래를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인형 가운데가 퐁 하고 열리더니, 내부에서 똑같이 생긴 인형이 하나 더 나왔다.
“이런 식으로 큰 인형 안에 작은 인형을 숨겨 두는 거야. 작은 인형을 열면 더 작은 인형이 또 나오지.”
“너, 너 설마…….”
“그래, 바로 그 설마다. 나는 내 영혼을 잘게 쪼개어 이 뚱뚱한 인간의 영혼 속에 층층이 숨겼어. 북부인의 장난감, 마트료시카가 이 기막힌 계획에 영감을 주었지.”
율리오의 몸에 숨어 있던 존재는 다름 아닌 중부의 금빛 용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강대한 정신력을 타고난 인간을 골라 옮겨타며 수백 년을 버텨 왔다.
“그 과정에서 숙주가 된 인간의 의식이 분열하는 부작용이 있었지만, 파편화된 정신을 최대한 통일성 있게 가공해서 주변의 의심을 피했다. 이 짓도 하다 보니 요령이 붙더군.”
초기에는 산중에 칩거하거나, 인적 드문 곳에서 외부와 교류를 끊고 지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 방식은 도시화된 중부에서 오히려 주변의 시선을 끌었고, 숙주의 수명이 다할 때 새로운 숙주를 찾기도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또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해냈지. 당대의 인간들은 빛의 힘을 신성력이라 부르며 숭상하니, 차라리 교회의 고위 인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거야.”
사파에서 온 용사
나후타야의 최후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금빛 용의 허를 찌르는 계획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신성력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간인 양 행세했다. 금빛 용의 권능 자체가 빛을 다루는 것이니, 그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를 바 없었다.
또한, 수백 년 전 신성제국에서 유희를 즐기던 시절부터 연습한 인간 연기는 르망의 사교계에 섞여 들기 충분했다.
“흐흐, 어디 그뿐인 줄 아느냐? 지근거리에 머무는 성녀도 내 정체를 간파하지 못하니, 다른 인간들은 감히 의심조차 하지 못했지.”
거짓을 간파하는 성녀의 권능으로도 인간의 영혼 뒷면에 숨어 있는 금빛 용은 색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녀가 그의 신분을 보증해 주는 꼴이 되었다.
“말도 안 돼……. 인간들 틈에 숨어 사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신성제국의 대침공에서 살아남았지? 그날 금빛 용들은 모래알처럼 많은 인간 군대에 둘러싸여 몰살당했는데?”
“그래, 맞다. 그날 분명 모든 금빛 용은 죽었어. 나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나는 동족들과 달리 ‘육체만’ 죽었다.”
율리오가 웃었다.
나후타야에게는 더없이 끔찍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일족이 몰살당하던 날, 나는 전생술을 시험하고 있었지.”
덕분에 그의 육신은 힘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인간 성기사들에게 갈가리 찢겼다.
하지만 전생술을 시험하느라 영혼과 이성을 몸 밖으로 안전하게 옮겨 둔 상태였고,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이승에 남을 수 있었다.
“나는 치욕을 씹어 삼키며 인간의 군대가 떠날 때까지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그렇게 단 하나의 금빛 용이 죽음의 위기를 넘긴 거야.”
일족 전체가 죽고, 자기 육신까지 잃어버렸지만, 그의 정신만은 지상에 남았다. 비록 반쪽짜리지만, 멸종하지 않고 금빛 용의 계보를 이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율리오, 아니 율리오의 몸속에 숨어 있던 금빛 용의 영혼이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눈앞이 깜깜했다. 영체 상태로 지상에 계속 머무를 순 없고, 그렇다고 아무 육신이나 차지하면 금방 인간들에게 발각될 것 같았지.”
심지어 육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권능이나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당장이라도 아도나이에게 들켜 소멸당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게 마트료시카였어. 나는 스스로 내 영혼을 쪼갰다. 용의 용혼을 인간의 영혼으로 덮는 게 가능할까 싶었지만, 수백 등분을 내어 보니 충분히 가능하더군.”
“영혼 위에 영혼을 감싸 아도나이의 눈을 피한 거냐? 저 장난감처럼?”
“그렇다. 이 방법이 아니면 천상에서 내려다보는 아도나이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었어. 기껏 살아남았는데,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지하에 처박혀 있을 순 없잖아?”
금빛 용은 자기 계책이 썩 마음에 드는지 흐뭇하게 웃었다. 일견 우쭐하는 모습도 보였다.
“평소에 내 영혼은 이 뚱보의 영혼으로 둘러싸여 있다. 내가 원할 때만 바깥으로 드러나지. 흐흐, 나는 아주 긴 세월을 인내했어. 수십 명의 인간을 갈아타며 암중에서 때를 기다렸지. 이렇게 대놓고 내 존재를 드러내는 건 네가 처음이다, 푸른 용 나후타야.”
“나, 날 어쩔 셈이냐? 넌 나에게서 얻을 게 없어! 난 거체도 없고, 용인의 몸도 없단 말이야! 차라리 날 풀어 줘!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무언가 좋은 방법이……!”
“내가 너에게서 얻을 게 없다고? 큭큭, 그렇지. 하지만 널 죽여서 얻을 건 있다.”
“그, 그게 무슨 뜻…… 우웁!”
율리오의 뚱뚱한 손이 나후타야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렸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사람 엄지만 한 수정 구슬을 밀어 넣었다.
“꿀꺽, 푸하!”
“네가 먹은 건 간단한 마법 수정구다. 내가 지닌 다른 수정구와 연결되어 있지. 이미 예상했겠지만, 한쪽 수정이 깨지면 다른 수정구도 함께 깨지는 물건이야. 당연히 스스로 토해 낼 수도 없고.”
율리오의 설명에 나후타야가 사색이 됐다. 그 말인즉, 지금 율리오는 원할 때 언제든 나후타야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를 죽일 셈이냐? 아니지, 죽이려면 당장 죽였을 터. 굳이 이런 걸 먹여 가며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거냐?”
“마음 같아서는 내 계획을 전부 말해 주고 싶지만, 역시 이건 나만 알고 있는 게 좋겠군. 이만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가거라, 나후타야.”
율리오의 손이 금빛으로 빛나고, 봉마판석이 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의 실체는 마지막 금빛 용이었지만, 그가 가진 대주교로서의 지식과 실력은 진짜였다.
“아, 안 돼! 아악!”
나후타야가 준비한 비장의 한 수, 대주교 세뇌는 허무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봉마의 전당에는 새로운 석판이 하나 생겼다.
귀여운 개구리가 양각으로 새겨진 석판이었다.
* * *
악수라도 한번 하기 위해 벌 떼처럼 달려드는 성직자들을 따돌리고, 홀로 대교구 내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테온 경! 하하, 경이 대교구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지!”
“오, 테오도르.”
뒤를 돌아보니 테오도르와 요한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멋진 승마복을 입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보기 좋기도 했다.
‘테오도르가 갑옷을 벗은 모습은 처음 보는군. 저 귀신 들린 계집이 제대로 옷을 갖춰 입은 모습도 처음 보고.’
“흥, 저도 좋은 옷 많이 있거든요!”
요한나가 그새 내 속내를 읽고 쏘아붙였다. 그러더니 금방 표정을 풀고 물었다.
“남부의 푸른 용을 생포하셨다면서요? 대단한 업적을 이루셨네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요한나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테오도르도 허탈하게 웃었다.
“테온 경, 경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한 기사라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범접하지 못할 영역에 가 있다는 느낌이 드네.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적적한 기분이야.”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뭐, 칼 재주가 점점 늘긴 했지만.”
이건 겸양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현경에 오른 게 대단한 성취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공의 성장일 뿐이다.
나는 나의 성품이나 이성 같은 본질적인 부분이 딱히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색륜을 천사의 훈륜으로 믿고 있는 테오도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우레오는 같이 안 왔나?”
성직자들에게 듣기로, 아우레오는 르망의 지하 수도원에서 면벽(面壁)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르망으로 돌아온 첫날부터 시작한 그의 칩거는 내가 나후타야를 생포해서 돌아올 때까지 몇 주째 이어지고 있었다.
“같이 안 왔네. 하지만 경이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부제를 보냈으니, 오늘내일 중에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올 거야.”
“지하 수도원이 그렇게 깊은 곳에 있나? 나오는 데 하루씩이나 걸리다니…….”
“하하, 지하 수도원은 대교구 예배당 아래에 있네. 거리로 따지면 코앞인 셈이지. 아우레오 사제가 늦는 건 그만큼 정리할 생각이 많아서겠지.”
‘아우레오는 내가 왔다고 하면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 나올 녀석인데, 하루나 뜸을 들이다니……. 이번에 얻은 심득이 가볍지 않은 모양이군.’
신념에 따라 마력 폭풍 속으로 걸음을 옮겼던 아우레오. 그는 그날의 결단으로 오른팔을 잃고, 대신 큰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팔이 잘린 이후 그에게서 묘한 현기와 여유가 느껴졌는데, 르망에 도착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면벽에 매진할 정도라면 그 심득의 크기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다시 만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듯, 아우레오처럼 총명한 소년은 짧은 시간에도 격을 몇 단계나 끌어올릴 잠재력이 있었다.
“테온 경, 이번에도 곧장 떠날 생각인가? 대교구에서 경을 위한 연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니, 온 김에 아우레오의 얼굴을 보고 갈 생각이다. 녀석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테니 늦어도 사흘 안에 면벽을 마치고 나오겠지.”
내 대답에 테오도르와 요한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당분간 대교구에 머무른다는 사실이 그들에겐 기쁜 소식인 모양이었다.
“잘됐군. 지금쯤 연회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거야. 함께 가세.”
“중부식 연회라면, 그 침상에 누워서 음식을 주워 먹는 추태를 얘기하는 건가? 바닥에 찌꺼기를 뱉어 대면서 말이지.”
내가 질색하며 말하자 테오도르가 웃었다. 그는 내가 중부식 연회를 싫어하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경은 간혹 뜬금없는 불호를 드러내는군. 최고의 기사이면서 팡크라티온의 알몸 대결은 싫어하고, 술과 미식은 좋아하면서 지상에서 가장 풍족한 만찬인 중부식 연회는 비위가 상한다니…….”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희가 이상한 거야.”
“하하, 이상할 게 있나? 좌우지간, 이번 연회는 경의 취향을 고려해 입식(立式)으로 준비했네. 연회장 곳곳에 높은 식탁을 두고, 참석자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먹고 마시는 방식이지.”
입식 연회는 주로 여인네들의 사교 잔치에 쓰이는 방식이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자리에 누워 돼지처럼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중부식 만찬보다 거부감이 덜한 방식이었다.
“다행이네. 이번에는 눈살 찌푸리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겠어.”
“옛날엔 쉰밥 한 숟갈에 기뻐하던 사람이 출세했다고 이렇게 비위가 약해지나?”
“…….”
요한나의 핀잔에 나는 입을 다물었고, 테오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성녀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남의 거지 시절 이야기를 왜 꺼내냐? 종아리에 회초리질을 해야 입을 조심할 테냐?’
내가 마음속으로 엄포를 놓자, 요한나는 혀를 빼꼼 내밀고 앞서서 연회장으로 향했다.
테오도르는 피식 웃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나도 두 사람을 따라 연회장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코끝에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스치고 있었다.
* * *
연회가 끝난 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높은 산마루에 올라와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드넓은 운해(雲海)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깎아지른 산봉우리가 몽둥이처럼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세차게 부는 산바람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고, 산마루 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초옥이 정겨웠다.
‘……또 자각몽인가?’
초옥 앞마당에 서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물지 않은 고사리손, 어린 소년의 손이다.
고개를 살짝 들어 보니, 평상에 한량처럼 누워 뒹굴거리는 사내가 보였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얼굴과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보나 마나 음란한 춘서를 넘기며 히죽거리고 있을 터다.
“……사부.”
“…….”
사부는 늘 그렇듯 대답이 없었다. 이 양반은 내 부름에 즉각 답을 하는 경우가 잘 없었다.
항상 나를 성가신 날파리 대하듯 했는데, 그런 태도에 비해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내거나 엄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사부.”
“아, 왜.”
“혼자서 뭘 그렇게 재미있게 보슈?”
“……도사가 도가 경전 말고 뭘 보겠느냐?”
사부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지껄였다. 그 익숙한 반응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춘서를 읽고 있다니……. 그 일관된 취향에 내심 존경심마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