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2
‘오늘은 멀쩡해 보이네.’
나는 이전부터 대주교의 행동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종종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오락가락하는 그의 태도는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대주교 예하. 남문에서 전서조를 띄웠을 테니,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겠지?”
“대략적인 사정은 들었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지 않겠나? 여기 모인 모든 성직자들에게 경의 위대한 업적을 알릴 겸 해서 말이야!”
“…….”
한번 했던 이야기를 구태여 또 하게 만드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성직자들의 눈빛을 보니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린 부제부터 나이 지긋한 노사제까지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모습이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 같았다.
“여기 이 개구리는 남부의 푸른 용인데, 과거 검은 용의 공격으로 본래의 육신을 잃고…….”
결국 두 번째 설명을 시작했다.
남문에서 했던 설명과 똑같았지만, 나후타야를 살려 둬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용이 한 마리만 남으면 과거의 권능을 되찾는다. 용은 두 마리 이상 살려 두거나, 일시에 모조리 죽여야 해. 아도나이께서 직접 일러 주신 가르침이지.”
나후타야를 당장 처형할 수 없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아도나이의 가르침이라는 말에 성직자들도 납득하는 모양새였다.
게다가 나후타야를 이미 생포한 상태이니, 언제든 검은 용만 제압하면 두 용을 동시에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으니 이래저래 핑계만 늘어나는군.’
아도나이와 용들이 맺은 맹약을 성직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줄 수는 없었다.
그걸 설명하려면 아도나이가 사실은 인간이며, 전지전능한 창조신 따위가 아니라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것도 설명해야 하니까.
다행히 내 엉성한 설명에도 의심하는 성직자는 없었다. 그들은 푸른 용을 생포해 르망으로 가져온 성기사에게 축복과 경탄을 전하느라 바빴다.
“대주교 예하, 푸른 용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크로우 백작 각하의 설명을 들어 보니, 동방의 검은 용이 암살을 시도할 게 불 보듯 뻔한데요.”
얼마간의 찬양 시간이 지나고, 성직자들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율리오 대주교는 짧게 고민하더니, 답변을 내놓았다.
“역시 ‘봉마(封魔)의 전당’에 가두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방법도 잠깐 생각해 봤지만, 역시 구관이 명관이지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대주교의 대답에 여러 성직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봉마의 전당?”
“아, 크로우 경은 모를 수도 있겠군. 봉마의 전당은 대교구 심처에 위치한 일종의 감옥이야. 간혹 지상에 출몰하는 악마나 타락한 성직자를 구금하는 곳이지.”
설명하는 율리오의 얼굴에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봉마의 전당은 수감자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가두는 감옥이라고 했다.
어떤 방법으로도 벗어날 수 없고, 지금껏 누구도 탈출한 적 없는 절대 감옥, 그것이 바로 봉마의 전당이었다.
‘곤륜산의 쇄상마옥(鎖像魔獄)과 비슷한 곳인가 보군. 하긴, 아도나이 교회처럼 거대한 종교 단체에 마귀를 가두는 시설 정도는 당연히 있겠지.’
나는 구태여 이것저것 캐묻지 않고 성직자들의 판단을 믿었다.
어차피 나후타야를 대교구에 맡기기로 결심한 이상, 뒷일은 대교구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크로우 경, 경의 귀환과 업적을 칭송하기 위한 연회를 준비하겠네. 하지만 그 전에 푸른 용부터 봉인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되네.”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시간 끌 것 없이 곧장 봉인하는 게 좋겠어. 새장을 하도 오래 들고 다녔더니 팔이 아프군.”
시답잖은 농담에도 성직자들은 하하호호 웃었다. 내가 울면 따라서 울고, 내가 웃으면 따라서 웃을 기세였다.
‘이래서 다들 권력에 환장을 하나?’
새삼 명성이란 게 좋긴 좋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율리오에게 나후타야가 든 새장을 넘겼다.
“이 새장은 두 천사의 힘으로 푸른 용의 마법을 차단하고 있다. 새장에서 꺼내면 푸른 용이 탈출을 시도할 수도 있으니, 새장째로 봉인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네. 최소한 용의 영혼을 봉인하기 전까지는 새장에서 꺼내지 않아야겠군.”
율리오는 직접 새장을 받아 들고 자리를 떴다. 정예 전투 사제 네 명이 그의 곁을 지켰다.
봉마의 전당은 오직 당대의 대주교에게만 허락된 공간으로, 심지어 성녀조차 출입할 수 없다고 했다.
‘율리오만 들어갈 수 있다고? 이거 어째 불안한데…….’
사파에서 온 용사
대주교의 비밀
율리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주변의 성직자들이 나를 안심시켰다. 내 눈빛에 심정이 드러난 모양이다.
“마음 놓으십시오, 각하. 대주교 예하께서 손수 봉인 의식을 치르실 테니, 푸른 용은 죽었다 깨어나도 봉마의 전당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율리오 대주교가 손수 봉인한다는 점이 불안한 것이지만, 성직자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테오도르조차 눈치채지 못한 대주교의 이상 징후를 다른 성직자들이 눈치챘을 리 없었다.
‘율리오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숨기고 있더라도, 설마 푸른 용을 풀어 주진 않겠지. 나후타야를 풀어 줘서 대교구가 얻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율리오 대주교가 사실은 나후타야와 한패였다거나, 정신지배에 걸린 추종자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다면 내가 푸른 용을 죽이겠다며 남부로 출정할 때부터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붙잡았을 터다.
‘아니, 그러기 전에 요한나에게 정체를 들켰겠지. 독심술을 가진 요한나가 율리오를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그가 대교구에 해를 끼칠 만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니란 뜻이야.’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내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율리오가 수상해도 그건 대교구의 사정이지, 내가 나서서 그의 정체를 파헤치고 고발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다 끝난 일이다. 나후타야의 처분은 대교구에 맡기는 게 맞아.’
나는 마음속 찜찜함을 거두고, 성직자들을 돌아봤다. 여기까지 온 김에 잔칫상 한번 거하게 얻어먹고, 반가운 얼굴도 보고 갈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아우레오는 어디 갔어? 이 자식은 형님이 오셨는데 나와 보지도 않네? 테오도르는 또 어디 간 거야?”
내 말에 다른 성직자들이 웃었다. 나의 투박한 말버릇도 빼어난 업적이 더해지자 유쾌한 개성으로 변모했다.
성직자들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아우레오와 테오도르의 소재를 알렸다.
* * *
한편, 대교구 지하의 모처에서는 율리오 대주교가 호위 사제들을 대면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기다리세요.”
“예, 대주교 예하.”
전투 사제들과 헤어진 율리오는 홀로 어두운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갔다.
흔한 횃불이나 양초도 없는 캄캄한 계단이었다. 그의 육중한 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에 들린 새장이 덜렁덜렁 흔들렸다.
“…….”
나후타야는 말이 없었다.
분명 그녀도 봉마의 전당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그곳에 도착하면 자기가 영원히 봉인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별다른 저항 없이 새장 안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푸른 용이여, 혹여 난잡한 마법으로 탈출할 생각일랑 마시게. 이 몸은 각종 성물로 무장하고 있으니 말이야.”
“…….”
율리오의 경고에도 나후타야는 대답이 없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녀였다.
율리오도 더 이상의 엄포는 필요 없다고 판단했는지, 한동안 말없이 걸음만 옮겼다.
봉마의 전당으로 가는 길은 복잡했다.
한참 돌계단을 내려간 뒤에도 미로 같은 옛 지하 수도원을 빠져나와야 했고, 중간중간 신성 결계도 몇 차례나 통과해야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다.
비대한 몸의 율리오는 봉마의 전당까지 오는 동안 점점 숨이 가빠지더니, 도착할 때쯤에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뚱뚱한 율리오가 아니더라도, 평소 꾸준히 신체를 단련한 사람이 아니라면 꽤 힘들 여정이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이곳이 바로 봉마의 전당이다. 어떠냐? 네가 영겁의 시간을 보내게 될 장소인데, 마음에 드나?”
“……형편없는 곳이군.”
율리오의 이죽거림에 나후타야가 담담히 말했다. 어쩐지 율리오의 말투가 조금 변한 것 같았지만, 나후타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봉마의 전당 내부를 훑어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후타야의 평가처럼, 봉마의 전당은 살기 좋은 곳이 아니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거대한 지하 광장에 빛이라고는 천장에 박힌 흐릿한 야명주가 전부였다.
오래된 지하 시설이 다 그렇듯 퀴퀴한 곰팡내가 진동하고,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웠다.
벽면에는 군데군데 커다란 석판이 박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흉악한 마귀의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숫자는 수십 개에 달했다.
“저 석판 하나하나가 감옥이다. 태고의 축복이 깃든 바위를 정교하게 잘라 만든 석판이지.”
성물 ‘봉마판석’은 대교구가 가진 비장의 무기 중 하나였다. 그 어떤 악귀나 망령이라도 한번 봉마판석에 갇히면 빠져나오지 못했다.
봉마판석은 그 안에 갇힌 존재의 형상을 표면으로 드러내는데, 각 석판에 양각으로 새겨진 마귀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너를 봉마판석에 가두면 어떤 형상이 나올까? 태곳적 용의 모습일까, 아니면 한때 가졌던 용인의 모습일까? 껄껄, 석판마저 개구리의 모습으로 새겨진다면, 네게는 그것 또한 분한 일이겠구나.”
지금껏 말없이 가만히 있었던 나후타야지만, 이것만큼은 참기 힘든지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율리오는 파르르 떨리는 나후타야의 눈꺼풀을 보고 만족한 듯 웃으며 새장을 열었다.
“이제 나와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섣부른 마법은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약해 빠진 네 마법으로는 내 몸에 지닌 성물을 뚫을 수도 없을뿐더러, 역으로 튕겨 나온 마법에 되레 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율리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다양한 성물을 몸에 두르고 있었고, 그중에는 공격 마법을 시전자에게 되돌리는 기상천외한 성물도 있었다.
나후타야도 율리오의 자신감이 진심이란 걸 느꼈는지, 순순히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우웅-.
율리오의 손에 막강한 신성력이 모였다. 아도나이 교회의 대주교다운 농밀한 신성력이었다.
덥석.
빛나는 손이 나후타야를 잡았다. 율리오는 자기 손을 감싼 신성력을 단단히 믿고 있는 듯, 손놀림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체념한 듯 기다리던 나후타야의 표정이 변했다.
‘큭큭, 걸렸구나.’
속으로 숨죽여 웃는 나후타야.
그녀의 피부는 촉촉한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몸뚱이가 개구리이니 피부가 촉촉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감싼 물기는 단순한 체액이 아니었다.
‘내가 정말 모든 걸 포기했다고 생각했느냐? 멍청한 인간들아, 너희가 믿고 따르는 대주교는 몽환의 비약을 만졌다. 이놈은 오늘부터 나의 하수인이야!’
나후타야가 피부로 내뿜는 점액은 푸른 용들이 대대로 사용해 온 정신지배 비약이었다. 그녀가 엘프들을 홀릴 때 사용한 것과 같은 것인데, 그 농도에 차이가 있었다.
‘엘프들은 숫자가 많았기 때문에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옅게 희석한 비약을 사용했지. 그 탓에 정신을 완전히 잠식하는 데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고. 하지만 이놈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어.’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대교구에서도 심처 중에 심처인 봉마의 전당. 당장 율리오를 정신지배로 굴복시켜도 누구 하나 목격할 사람이 없었다.
나후타야는 극도로 농축된 몽환의 비약을 뿜어냈다.
이 정도로 진한 몽환의 비약을 피부로 흡수하면, 제아무리 수행이 깊은 대주교라도 굴복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흐흐, 신성력은 삿된 마력을 막아 주지. 하지만 몽환의 비약은 마법 같은 게 아니야. 말 그대로 약물이다. 네가 아무리 높은 신성을 쌓았어도 무용지물이란 뜻이지.’
율리오는 나후타야에게 마법을 쓸 생각일랑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지만, 정작 푸른 용에게는 마법이 아니어도 율리오를 굴복시킬 수단이 있었던 것이다.
나후타야는 이제 대놓고 웃었다. 이미 율리오의 손이 몽환의 비약으로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건방진 뚱땡아, 속이 더부룩하고 눈앞이 아찔하지? 킥킥, 조금만 참아. 금방 편해질 테니까. 초기의 불쾌감이 사라질 때쯤이면, 네놈은 나의 충실한 수족이 되어 있을 거야.”
“……아, 그래?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데?”
“……?!”
신나게 이죽거리던 나후타야가 눈을 부릅떴다. 율리오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어, 어떻게……?!”
“여전히 조잡한 수를 쓰는군. 너희 푸른 용들은 도무지 발전이 없어. 비겁하고, 겁 많고, 허약한 데다 어리석고 근시안적인 족속이지.”
율리오가 모욕을 쏟아 냈다. 나후타야를 깔아 보는 그의 눈빛에 경멸이 가득했다.
표정은 얼음처럼 싸늘하고, 동공은 파충류처럼 세로로 길어졌다. 그의 외모는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기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그 눈……! 그 불길한 금빛 눈은……!”
나후타야가 율리오의 눈을 보고 경악했다. 그녀는 율리오의 세로 동공이 아니라, 눈동자의 색깔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그, 금빛 용이 어떻게 대주교의 몸에……?!”
나후타야는 율리오의 눈을 보는 순간 그 정체를 간파했지만, 차마 믿지 못하고 혼잣말을 지껄였다. 너무나 충격적인 대주교의 정체에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큭큭, 놀랐나? 놀랄 만도 하지. 우리 일족은 진작에 지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말이야.”
율리오가 둔중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