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181
“그래서?”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으니, 그에 걸맞은 야망도 갖고 있었지. 아스칸다르는 다른 용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대단한 일을 두 가지나 저질렀어.”
아스칸다르가 벌인 두 가지 일은 과거 용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첫 번째, 그는 동방에 새로운 유일신교를 전파했고, 동방인들이 강대한 신정일치 국가를 건국하도록 유도해 아도나이 교회의 동진(東進)을 막았다.
“심지어 그 신앙의 대상이 누군 줄 알아? 바로 검은 용이야! 모래알처럼 많은 동방인들이 검은 용 아스칸다르를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고 있다고!”
아스칸다르는 아도나이가 신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고, 자기도 아도나이처럼 인간들의 신앙을 이용해 신격을 얻고자 했다.
아스칸다르는 인간으로 둔갑하고 선지자로 행세하며, 검은 용을 숭상하는 종교를 창시했다.
그리고 스스로 칼리파의 자리에 앉아 엉터리 교리를 전파했다.
두 번째는 아크리치 제작이었다.
오비데우스가 분신을 만들어 서부를 벗어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스칸다르의 아크리치 제작 성공도 그에 못지않게 모든 용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크리치가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거였어?’
성직자들이 귀가 닳도록 이야기했지만, 나는 아직도 내심 아크리치를 얕보고 있었다. 하지만 용에 필적하는 언데드를 만드는 건 신의 영역이라 치부될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검은 용은 아크리치를 완성하자마자 남부를 공격했다.
“아스칸다르는 아크리치를 이용해서 다른 용의 영역을 빼앗을 생각이었어. 새로운 땅에 동방인을 이주시켜서 자기 추종자를 늘릴 셈이었지.”
신이 되기 위해 동족의 땅을 침략하는 용. 그것이 바로 검은 용 아스칸다르였다.
“어째서 북부가 아닌 남부를 공격했지? 북부의 키르케네스는 미숙아로 태어난 탓에 모든 용 중에 가장 약했다면서?”
“북부에는 다양한 토착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어. 동방인들을 이주시켜 봤자 동방회교가 번창하긴 어려운 상태였지.”
또한, 연중 혹한이 몰아치는 북부는 사막에 살던 동방인들이 진출하기에 적절치 않았다. 척박한 북부를 차지해서 얻는 곡식보다, 이주를 위해 소모하는 물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비용은 많이 들고, 얻는 것은 적은 정복인 셈이다.
“반면 남부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하지. 초입의 삼각주만 차지해도 엄청난 양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어. 동방회교의 신자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단 말이야.”
아스칸다르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동방의 괴수 군단을 동원해 요정숲 외곽을 공격하고, 아크리치를 숲 깊숙한 곳으로 은밀히 침투시켰다. 정석적인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였다.
“아크리치의 힘은 과연 대단했어. 놈은 내 어머니를 죽이고, 나에게도 치명상을 입혔다.”
아크리치는 절묘한 시점에 남부를 침공했다.
나후타야의 어미가 나후타야에게 거체를 물려주려던 그 순간, 두 마리의 푸른 용이 가장 약해진 때를 정확히 노리고 쳐들어온 것이다.
“그 아크리치가 카라히사르란 놈이지?”
“그래, 맞아. 카라히사르는 검은 용의 맹독 마법까지 자유자재로 사용했어. 자연 마법 중에서도 수계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푸른 용에게는 최악의 상성이지.”
나후타야의 어미는 급히 거체로 돌아와 카라히사르와 맞섰다.
하지만 그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울어진 승기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첫 기습에 강력한 맹독 마법을 허용한 게 치명적이었다.
“내가 용인의 몸으로 급히 돌아왔을 땐 이미 싸움이 거의 끝난 상태였지. 어머니가 죽고 나면 다음은 당연히 내 차례였어.”
그 처절한 싸움에 푸른 용의 거체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나후타야도 맹독 마법에 당해 신체의 대부분이 녹아내린 상태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나후타야의 어미는 거체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파괴하겠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어머니는 죽음의 순간에 스스로 거체를 붕괴시켰지. 아름다운 용의 거체는 한 줌 핏물이 되어 사라지고, 남은 건 녹색 뿔 하나였어.”
그나마 다행인 건, 나후타야의 어미가 죽기 전에 최후의 힘을 모아 나후타야에게 강력한 보호막을 부여했다는 것이었다.
온몸이 녹아내린 나후타야는 보호막 뒤에 숨어서 간신히 근처에 있던 개구리의 몸으로 옮겨 갔다.
보호막을 몇 번 두드리던 아스칸다르는 이내 포기하고 푸른 용의 뿔만 챙겨서 돌아가 버렸다.
그날 이후 나후타야와 아스칸다르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나는 매일 복수를 꿈꿨어. 오죽하면 시건방진 오비데우스에게도 동맹을 제안할 정도였지. 하지만 복수의 기회를 잡는 게 쉽지 않더군.”
아스칸다르는 본신의 무력도 나후타야보다 훨씬 윗길이고, 휘하에 셀 수 없이 많은 동방인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나후타야가 그에게 복수할 기회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가 용들의 뒷이야기야. 너, 테온 크로우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역사지.”
나후타야는 나의 등장을 시대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등장한 이후 용들의 처지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최후의 용이 굴레를 벗는다는 건 진작부터 모든 용들이 알고 있었지만, 다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지. 용의 개체수가 아무리 줄어도, 최소한 넷은 유지될 테니까.”
용은 나이만 충분히 먹으면 암수가 짝을 짓지 않아도 혼자서 알을 낳을 수 있다. 게다가 아무리 이전보다 약해졌어도 다른 짐승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니, 최소한 자기 영역에서는 목숨을 잃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네가 나타나서 키르케네스와 오비데우스를 죽여 버린 거야. 그들은 알도 낳지 않은 상태였는데……. 졸지에 대륙에 용이 단 두 마리만 남게 된 거지.”
이건 나후타야와 아스칸다르에게 큰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특히 신격을 얻는 것만 생각하던 아스칸다르에게는 굴레를 벗을 길이 하나 더 열린 셈이었다.
“지금까지 아스칸다르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동방의 신앙을 조작하는 데 힘썼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남부 침공을 시도할 거야. 나를 죽이기만 하면 인간의 신앙이 없어도 옛 권능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나후타야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아크리치도 만들고, 성급하게 용인의 몸으로 전생술도 시도했던 것이었다.
하찮은 개구리의 몸으로 옮겨 가는 것과 달리, 동격인 오비데우스의 몸으로 영혼을 옮기는 건 오랜 준비가 필요했다.
이런 다급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섣불리 시도하지 않았을 터다.
‘이런 빌어먹을, 내가 행한 일들이 이 세계에 이렇게 큰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니……. 골치 아프게 됐군.’
나후타야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스칸다르는 앞으로 집요하게 나후타야를 노릴 것 같았다.
이번에는 태양전사만 보냈지만, 다음에는 어떤 놈을 보낼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푸른 용과 싸울 때 손상된 카라히사르를 고쳐서 암살에 투입할지도 모를 일이다.
‘상황을 보니 협상의 여지도 없을 것 같고……. 영락없이 내가 나후타야를 지켜 줘야 하는 꼴이 되었군.’
아스칸다르가 옛 용의 권능을 되찾는 걸 막기 위해서는, 내가 팔자에도 없는 경호원 역할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천년만년 남부에서 지내며 나후타야를 지켜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새장에 들어 있는 나후타야를 평생 데리고 다닐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하자.”
고민은 짧았다. 어차피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엘프들이 깨어날 때까지만 요정숲에 머무르겠다.”
엘프들이 깨어나고 나면, 짧게 안면을 트고 오비데우스의 마법 연구 자료의 번역을 맡긴 뒤, 곧장 중부로 갈 생각이었다.
“나후타야는 중부 대교구에 넘겨야겠다. 검은 용이 아무리 잘났어도, 고작 암살조 따위를 파견해서 중부 대교구 한가운데에 있는 나후타야를 죽이진 못하겠지.”
율리오 대주교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면, 중부 대교구도 역량을 총동원해 나후타야를 지킬 것이다.
나후타야는 루아르토 성채 지하 깊은 곳에 영원히 봉인되겠지만, 그건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후타야를 중부 대교구에 봉인하면 아스칸다르도 암살을 포기하고 다시 동방회교의 번창에 매진하겠지. 나는 그동안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다.’
이제 무공도 현경에 이르렀으니, 중원으로 돌아가는 걸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얼굴을 이자벨라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이감(移監)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자벨라가 이견을 제시했다.
“우리가 남부를 떠나면 동방의 괴수 군단은 누가 막아요? 지금은 검은 용이 요정숲 내부의 사정을 모르니 공세를 늦추고 있지만, 숲에 엘프와 다크엘프만 남았다는 걸 알면 옥토를 빼앗기 위해 총공세를 펼칠 텐데요?”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나후타야는 남부의 필요악(必要惡)이었다. 그녀 때문에 엘프와 다크엘프들은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녀 덕분에 아스칸다르가 섣불리 남부로 병단을 보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자벨라 네가 요정숲에 남아 줘야겠어.”
“제가요?”
“그래, 내가 나후타야를 중부로 이감(移監)하고 올 때까지 요정숲을 동방 괴수들로부터 지켜 주고, 엘프들이 자료 번역에 매진할 수 있게 도와줘.”
이자벨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는 중부로 가는 게 내키지 않았던지라, 차라리 남부에 남아 달라는 게 더 반가운 제안이었다.
한 가지 의외였던 건, 나후타야가 별다른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이대로 대교구에 끌려가면 어떤 대우를 받을지 알 텐데도,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긴, 자기한테 선택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즉시 중부로 향했다.
시시각각 검은 용의 암살조가 다가오는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 * *
나후타야를 데리고 대교구까지 가는 길은 무탈했다.
요정숲에서 르망까지 가려면 경신법을 펼쳐도 며칠이 걸리는 먼 길인데, 단 한 번도 동방 세력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아스칸다르는 우리의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 놈의 정보력이 흑해 너머까지는 닿지 않는 모양인데?”
“맞아. 오랜 시간 동안 아스칸다르의 관심사는 오직 동방 평정이었으니까. 그 외 지역에까지 정보망을 펼쳐 두지는 않았겠지.”
나후타야가 내 의견에 동의했다.
키르케네스나 나후타야가 정보에 민감했던 것과 달리, 오비데우스나 아스칸다르는 딱히 정보 수집에 열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본신의 무력이 막강하다 보니, 주변의 소식에 전전긍긍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키르케네스는 미숙아였고, 나는 개구리의 몸에 갇혀 버렸으니, 그만큼 생존을 위해 바쁘게 정보를 모을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오비데우스는 그런 나를 보며 좀스럽다고 비웃었어. 아스칸다르도 말은 안 했지만 비슷하게 생각했을 거야.”
나후타야의 목소리에 자조적인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다른 지역의 용들에 비해 초라한 자기 모습을 비관했다.
“이미 포로가 된 처지니까 하는 얘긴데, 사실 나 같은 건 더 이상 용이라고 부를 수도 없지. 쳇, 선조들이 내 모습을 보면 땅을 치겠군. 개구리의 몸에 갇힌 채 인간과 뱀파이어의 눈치를 보는 꼴이라니…….”
“…….”
나는 딱히 나후타야를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처지 비관에 동의하고 싶지도 않았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졌어도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모르면 남의 칼에 죽는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살고도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다니, 용이란 짐승은 의외로 멍청한 구석이 있군.’
용들은 답답할 만큼 정보와 계략을 천대했다.
욕심은 온 세상을 차지하고 싶어 할 만큼 지독하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세계라 여길 만큼 자아도취적이며, 옛 권능을 되찾기 위해 동족을 살해할 만큼 이기적인 짐승이지만, 정작 그에 걸맞은 책략은 갖추지 못했다.
‘하긴, 용들이 타면자건(唾面自乾),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성품을 지녔다면 지금 같은 처지가 되지도 않았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용은 멍청하다기보다 쓸데없는 자존심이 너무 셌다. 워낙 강대한 힘을 가진 탓도 있고, 타고나는 기질 자체가 그러했다.
“쳇, 내가 어머니의 거체만 제대로 물려받았더라면…….”
“입 좀 닥쳐라. 중부에 도착할 때까지 푸념을 늘어놓을 셈이냐?”
“…….”
싸늘한 면박에 나후타야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속상한 나후타야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살기 위해 정보를 모으는 게 좀스럽다고? 아스칸다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놈의 목을 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군.”
나후타야는 내 말에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헤 벌렸다. 마치 내가 자기를 위로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별 뜻 없이 진심을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나 역시 천하가 좁다 하며 강호를 종횡무진 누볐다. 하지만 정보에 어두워 믿었던 이들에게 살을 맞았지.’
아무리 무력이 강해도 성질대로 살아서는 제명을 다 채울 수 없다.
당장 나부터도 패도련주의 내심을 읽지 못해 허망한 죽음을 맞지 않았던가?
심지어 내 숨통을 끊은 건 나보다 무공이 한참 떨어지는 월광지 백종일이었다.
‘나후타야의 말이 사실이면 좋겠군. 아스칸다르가 계략을 싫어하고 무력에 의존하는 성격이면, 그만큼 내가 공략할 수단이 늘어나니까.’
아직 검은 용의 습격이 없는 걸 보면 나후타야의 평가가 정확한 것 같았다.
그렇게 온갖 대화와 생각을 나누며, 나후타야와 나는 르망에 입성했다.
* * *
중부에 도착했다.
르망의 남문에서 신분을 밝히자 인근의 모든 성직자들이 버선발로 뛰어와 나를 마중했다.
“가, 각하! 기별도 없이 오시다니요!”
“분초를 다투는 일이라 따로 파발을 보내지 않고 곧장 출발했다. 아, 그리고 이 개구리는…….”
나는 성직자들에게 나후타야가 든 새장을 보여 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새장에 든 개구리는 남부의 푸른 용이 둔갑한 것이며, 모종의 이유로 동방의 검은 용이 이 개구리를 노리고 있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이 개구리가 남부의 푸른 용이라고요? 이런 세상에!”
“푸른 용의 수급만 가져와도 비할 데 없는 업적인데, 생포를 하셨단 말입니까?!”
남문에 마중 나온 모든 사람이 놀라 자빠질 기세였다. 하기야, 용을 산 채로 붙잡아 온 기사는 고금을 통틀어 나 하나뿐일 터였다.
성직자들에게 안내받아 루아르토에 입성했다.
내성에 들어서니, 대교구의 요인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율리오 대주교도 체통 따윈 집어치우고 먼저 와서 나를 마중했다.
“빛에 찬미를! 오오, 가장 위대한 성기사가 여기에 있었군!”
뚱뚱한 율리오 대주교가 뒤뚱뒤뚱 뛰어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기름지고 물렁물렁했다.
대주교는 평범한 기운을 흘렸다. 깨끗하고 맑은 눈빛, 신성력이 은은하게 묻어 나오는 기파가 전형적인 고위 성직자의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