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6
나는 도시를 벗어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지역까지 간 다음, 은신술을 풀고 운해비영을 최대로 펼쳐 설원을 가로질렀다.
* * *
도착한 옛 유적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크기였다.
영구동토는 사방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광야인데, 그중 한 곳에 커다란 동혈이 뚫려 있었다. 어찌나 깊고 컴컴한지 꼭 한빙지옥으로 통하는 명계의 입구처럼 보였다.
입구 주변에는 드워프 광부들이 설치한 각종 토굴 장비가 위용을 뽐내고 있었고, 내부로 이어지는 통로에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건 갑옷 입은 사람의 발자국인데? 주교공이 벌써 도착한 건가?’
나는 경신법까지 펼쳐서 주교공을 앞질러 도착했다. 그런데도 갑옷 입은 기사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북부정교회에서 성전사까지 동원해서 유적을 개척하고 있거나, 주교공이 선발대를 미리 보내 놓았거나.
‘둘 중 어느 쪽이든 좋지 않군.’
내 목표는 유적을 독식하는 것이다. 나보다 앞서 도착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나는 운잠홍으로 기척을 숨기고 유적으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꽤 커다란 입구와 달리, 유적 내부는 급격히 좁아졌다. 시야는 듬성듬성 꽂혀 있는 횃불에 의지해야 했고,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광물 운반차가 간신히 통과할 만큼 좁은 구간도 있었다.
갈림길이 많고 경사도 제각각이라 유적 전체가 하나의 미로처럼 느껴질 만큼 복잡했다.
무려 한 식경 이상 내려간 뒤에야 통로는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지하 광장이군. 벽면을 보니 오래된 장소 같은데.’
잿바위 드워프들이 새로 뚫어 낸 통로와 달리, 이 광장은 벽면의 마감이나 바닥이 아주 오랫동안 다져진 것 같았다.
그곳에 백의와 청의의 성직자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북부정교회도 이미 와 있고, 주교공도 역시 선발대를 보내 놓았었군. 내가 한발 늦었어.’
각 종파의 인사들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북부정교회의 성직자들은 왜 여기에 주교공의 성기사단이 나타난 건지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윈스크 교구의 사제와 성기사 들 아니십니까? 이곳엔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요?”
북부정교회의 사제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당당한 태도를 보이려 애썼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는 걸 숨기지 못했다.
“그러는 북부정교회의 신관과 성전사 들은 이런 음침한 유적에서 무얼 하고 있는 게요?”
윈스크 교구의 사제가 날 선 목소리로 맞받아쳤다. 그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멸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저희는 이 고대 유적을 정화하러 왔습니다. 여러분도 유적 입구에서부터 강력한 마력을 느끼셨겠지요?”
“정화? 흥, 북부정교회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정말 순수하게 유적을 정화하려 했다면, 왜 윈스크 교구에 미리 알리지 않았소?”
“북부정교회가 윈스크 교구에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합니까? 사제께서는 아직도 우리가 아도나이 교회의 산하 조직으로 보이시나요?”
“뭐라고? 아류 종파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를……!”
사제와 신관의 말다툼이 과열되는 조짐을 보이자, 오히려 싸움을 말리고 나선 것은 북부정교회의 성전사들이었다.
“자 자, 진정들 하시고……. 이왕 이렇게 마주하게 된 거, 마력 결계를 함께 처리하는 게 어떻습니까? 같은 목적으로 모였으니 힘을 합쳐야지요.”
“뭐라고요? 경은 지금 저 오만한 자들과 손을 잡자는 말입니까?”
신관이 펄쩍 뛰며 말하자 성전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귓속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이 이곳에 왔다는 건 이미 유적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숫자도 만만치 않고, 몇 명이나 더 올지도 모르지요.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사달이 날 겁니다.”
성전사의 의견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신앙과 원칙을 목숨처럼 여기는 사제나 신관, 성기사와 달리, 북부정교회의 성전사들은 실리적인 성향이 강했다.
그들은 굳이 위험한 싸움에 몸을 던지고 싶지 않았다. 그 싸움이 대화로 피할 수 있는 싸움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들의 귓속말까지 천리지청술로 엿듣고 있었다.
‘북부정교회 쪽은 자기들이 정말 이 유적을 정화하러 왔다고 믿는 모양인데? 자세한 내막은 모른 채 온 건가?’
지금 윈스크가 돌아가는 정세를 고려할 때, 북부정교회에서 하릴없이 좋은 일 하러 여기까지 올 여유는 없었다. 오히려 국왕과 한통속이 되어 유적을 개척하고 유물을 차지하러 왔다는 추론이 타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유적을 정화하러 왔을 뿐이라는 북부정교회 신관의 주장은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진실은 우두머리만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저들은 정말 유적을 정화하기 위해 온 줄 아는 거야.’
현장에서 결계를 해제하는 실무자에게까지 숨겨야 할 무언가가 유적에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내 기대감도 점점 커져 갔다.
사파에서 온 용사
동토의 유적 (2)
자세한 내막을 모르기는 윈스크 교구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광야에서 옛 마법 유적이 발견됐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왔을 뿐, 이면에 어떤 복잡한 정치적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마 주교공의 속내를 제대로 알고 있는 건 후발대로 도착할 공작 가문의 세속 기사단 정도일 것이다.
“서로 적개심을 갖고 대하니 불필요한 다툼이 일어나는 것 같소. 이렇게 깊고 어두운 마법 유적에서 우리끼리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소?”
“음, 그건 귀측의 말에 일리가 있군. 이곳은 안 그래도 불길한 마력이 감도는 곳이니, 일단 서로를 향한 미움은 거두고 마력 결계부터 해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생각보다 중재는 쉽게 이루어졌다. 낯선 마법 유적에 어떤 위험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양측 모두를 자중하게 만들었다.
두 종파는 말다툼을 멈추고 유적 개척부터 계속 진행했고, 나는 운잠홍으로 몸을 숨기고 은밀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나 혼자서는 유적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력 결계를 뚫어 낼 재주가 없으니, 어찌 보면 절묘한 시점에 합류한 셈이었다.
‘차라리 늦게 도착한 게 잘된 일이군. 혼자 왔어도 결계를 뚫지 못했겠어.’
유적을 감싼 마력 결계는 종류도 다양하고 위력도 강했다.
단순히 강력한 마력으로 접근을 차단하는 것부터, 열기를 내뿜거나 길을 뒤섞는 등 온갖 진법을 총망라해 놓은 구성이었다.
광산 개발에서 둘째라면 서러운 잿바위 드워프들이 첫 지하 광장에서 막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한 것도 결계 탓이었다.
“자, 또 하나의 마력 결계를 해제했으니, 이제 드워프들 차례입니다.”
사제가 신성력을 거두며 말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잿바위 드워프들이 곡괭이와 삽 따위를 들고 통로에 달라붙었다.
몇 번 손발이 안 맞는 구간을 지나 이제는 완전히 작업 순서가 확립된 모습이었다.
사제와 신관 들이 신성력을 집중해 마력 결계를 해체하고, 그동안 성기사와 성전사 들이 그들을 경호했다.
마력 결계가 해제되면, 드워프들이 들어가서 돌과 흙을 파내고 통로를 개척하는 방식이었다.
“아직 통로 개척 단계인데 벌써 유물이 쏟아지는군.”
“그러게. 최하층에는 뭐가 있을지 궁금해지는데?”
성전사들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말대로, 유적에서는 이미 귀금속과 마법 스크롤 등 온갖 진귀한 물건이 쏟아지고 있었다.
혹여 마정석이 나올까 싶어 나도 몸을 숨긴 채 예의 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군.’
일이 손에 익는 만큼 탐사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상황은 좋은 방향으로만 풀리지 않았다.
“이봐, 방금 주머니에 뭔가 숨겼지?”
“무슨 소리요? 그런 짓 안 했소!”
“거짓말하지 마. 방금 마력이 사라지는 순간 뭔가 주워서 품에 넣었잖아.”
사제와 신관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생겼다. 성기사들은 언제라도 싸움에 나설 것처럼 칼자루에 손을 올렸고, 성전사들은 전전긍긍하며 싸움을 말렸다.
‘음?’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 내가 낯선 인기척을 느낀 것은 어찌 보면 우연에 가까웠다.
나는 천장에 자란 종유석 틈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나 말고도 천장에 숨어 있는 놈이 한 명 더 있었다.
‘저쪽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군. 누구지?’
정체 모를 신비인도 나와 조금 떨어진 종유석 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아마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상의 사람들은 감정싸움이 격해지고 있었다. 누구라도 선을 넘으면 당장이라도 싸움이 시작될 기세였다.
우우웅-.
그때 신비인이 숨어 있는 장소로부터 미약한 내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천장에서 시작된 내력은 가느다란 실처럼 흘러 몇몇 젊은 성전사에게 닿았다.
“에잇, 씨팔! 보자 보자 하니까 너무하는군! 이젠 사람을 도둑 취급하는 거요?”
“네 이놈, 성기사의 면전에 대고 욕을 해? 이 기사 같지도 않은 반푼이 성전사 놈이 실성을 했나?”
“네놈은 뭐가 그리 잘났는데? 사람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계속 참고 있으니까 우리가 배알도 없어 보여?”
신비인의 마력에 노출된 성전사가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갑자기 화를 냈다. 그의 거친 언행에 장내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성기사들은 칼을 뽑으며 사제들 앞으로 나섰고, 대경한 신관들은 성전사들 뒤로 숨었다.
대부분의 성전사는 싸움이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 교활한 놈이 싸움을 붙이네?’
천장에 숨어 상황을 지켜본 나로서는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숨어 있는 신비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은 사술을 부려 두 종파의 싸움을 부추기고 있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술법인가? 어쨌거나 마법을 쓰는 놈이렷다.’
유적에 마법사가 숨어 있다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놈을 향해 은밀히 접근했다.
아래에서 싸움이 벌어지건 말건, 나는 저놈만 잡아먹으면 그만이니까.
그때, 결국 두 종파가 칼부림을 시작했다. 격노를 참지 못한 성기사 한 명이 성전사의 팔을 찌르고, 그걸 신호탄으로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놈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이단을 척결해라!”
“누가 이단이냐! 저 기득권에 찌든 돼지들을 죽여라!”
성기사와 성전사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사제와 신관 들도 공격력만 없을 뿐, 후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전사들을 지원했고, 강렬한 빛을 내뿜어 상대의 시야를 가렸다.
‘서로 신성력이 통하지 않으니, 싸움이 지루하게 길어지는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싸움은 이내 일방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윈스크 교구의 성기사들이 광휘의 검을 꺼낸 것이다.
양쪽이 같은 신을 섬기는 탓에 신성력은 통하지 않았지만, 광휘의 검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성전사들의 피육을 베어 나갔다.
상대적으로 수준이 떨어지는 북부정교회 성전사들은 대부분 광휘의 검을 다루지 못했고, 이는 승패에 직결됐다.
우우웅-.
그때 신비인이 또 한 번 마력을 방출했다. 여전히 은밀하지만, 아까보다는 과감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마력 파동은 성기사들의 눈과 손가락에 엉겨 붙어 그들의 전투를 방해했다.
“뭐야, 이거!”
푸욱!
성기사의 시야가 가려진 순간, 성전사의 칼날의 그의 갑옷 틈새로 파고들었다. 목덜미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성기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내가 이딴 오합지졸에게 당하다니……!”
“이 이단자들이 마법을 쓴다!”
“누가 마법을 쓴다는 거냐!”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신비인은 교묘하게 북부정교회를 지원하며 힘의 균형을 맞추고 있었고, 그 탓에 한쪽이 승기를 잡지 못하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요놈 봐라? 양패구상을 바라고 있네.’
몸을 숨긴 신비인은 생각보다 더 교활한 놈이었다.
성기사와 성전사, 사제와 신관 들은 대부분 죽거나 의식을 잃었고,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도 피칠을 한 채 힘겨운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마저도 체력이 다해 헐떡이는 모습이 더 이상의 혈투도 어려워 보였다.
신비인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신비인은 남은 사람들을 향해 쇄도했다. 직접 숨통을 끊으려는 듯했다.
“어딜!”
놈이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나도 놈의 등 뒤로 쇄도했다.
타탁!
재빠르게 지법을 펼쳐 신비인의 마혈과 아혈을 동시에 점했다.
하지만 신비인은 기습에 놀랐을 뿐, 점혈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처럼 몸을 움직였다.
‘이 새끼도 점혈이 안 먹히네? 이자벨라도 그렇고 요즘 왜 이렇게 점혈이 안 통하지?’
물론 지법이 안 통한다고 놈을 상대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나는 즉시 파쇄추를 펼쳤다.
빡!
“커헉!”
뒤통수에 팔꿈치를 한 방 먹여 주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공중에서 크게 얻어맞은 신비인이 바닥으로 거칠게 처박혔다.
“끄으……! 웬 놈이냐!”
“그걸 맞고도 멀쩡하네? 너야말로 웬 놈이냐.”
신비인은 의식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위력을 조절했다지만, 철갑옷도 구겨 버리는 파쇄추를 후두부에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했다.
후우웅-.
신비인이 기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 무시무시한 기의 파도에 유적 전체가 떨리는 듯했다. 이 세계에서 만나 본 상대 중 가장 강력한 마나 파장이었다.
‘엄청난 기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