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mpion from Sapa RAW novel - chapter 69
“파블로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걸까요? 도시 전체가 비통에 잠긴 때에 굳이 청문회라니…….”
“늙은이들 불러 놓고 기강을 잡겠다는 뜻 아니겠어?”
아우레오의 물음에 대충 대꾸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제로 파블로 왕은 그런 의도로 이 자리를 마련했을 공산이 컸다.
청문회장에 들어서자 한가운데에 마련된 단상과 옥좌가 눈에 들어왔다.
자리가 비어 있는 걸 보니 아직 파블로 왕은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옥좌를 중심으로 주교공 세력이 정면에, 북부정교회는 오른쪽에, 잿바위 드워프들은 왼쪽에 모여서 기다렸다.
“국왕 전하께서 곧 도착하실 테니, 다들 복장을 정돈하시오.”
궁정 대신으로 보이는 늙은이가 사람들에게 알렸다.
주교공과 그의 기사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했고, 북부정교회 장로들은 죄인처럼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반면, 눈치 없는 드워프들은 나를 보며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그때 청문회장 내실의 문이 열리고, 궁정 대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하나같이 꼬장꼬장한 인상이었다.
궁정 대신에 이어서 근위 기사단이 들어오고,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젊은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놈이 파블로 겔라구예비치인가? 젊은 왕이라더니, 생각처럼 애송이는 아니군.’
권좌에 앉은 파블로 왕은 나이가 서른은 족히 넘어 보였다. 아마 선대 왕이 백 살이 넘도록 살았던 탓에 젊은 왕이라 불리는 듯했다.
“예하, 오랜만에 보는군요.”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전하.”
파블로 왕과 주교공 사이에 의례적인 인사가 오갔다.
왕은 웃고 있었고, 주교공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작금의 처지를 대변하는 듯했다.
“본래 위로연부터 열 계획이었는데, 궁정 대신들의 반대가 거세더군요. 부득이하게 청문회를 먼저 진행해야겠습니다. 이해하시지요?”
“……이해합니다.”
대답하는 주교공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파블로 왕은 그런 모습이 썩 마음에 드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장내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는 순간,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음?’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파블로 왕의 얼굴에 스쳐 간 감정은 분명 분노였다. 마치 찾아 헤매던 원수를 발견한 듯한 표정.
‘왜 저러지? 저놈이 날 아나?’
아무리 생각해도 파블로 왕은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왕의 표정은 워낙 빠르게 스쳐 갔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미 미소를 되찾은 파블로 왕이 나와 아우레오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아, 저는 중부에서 온 사제 아우레오…….”
“테온, 늑대 도살자 테온이다.”
아우레오가 대답하는 걸 끊고 내가 먼저 신분을 밝혔다.
“호오, 그대가 그 유명한 늑대 도살자였군. 힘릿에게 듣자 하니, 꿈을 통해 계시를 받고 짐의 드워프 광부들을 구해 주었다지?”
“…….”
나는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파블로 왕은 만족한 듯 웃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그대에게 내릴 포상은 청문회가 끝나고 결정하지.”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전하. 늑대 도살자 테온은 구석으로 물러나 있으시오. 중부에서 온 아우레오 사제도 마찬가지요.”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궁정 대신이 한 발 나서며 나와 아우레오를 물렸다.
청문회가 시작되고, 파블로 왕은 처음부터 본론을 꺼냈다.
“예하는 이번 참사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알고 계시지요?”
“…….”
왕의 질책에 보론초바 주교공은 대답이 없었다.
파블로 왕도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돌려 북부정교회를 향해 입을 열었다.
“최고장로, 그대 또한 이번 참사에 큰 책임이 있어요. 알고 계시지요?”
“예, 전하.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북부정교회의 최고장로, 무드리예스가 기다렸다는 듯 읍소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미 그는 모든 야욕을 버린 듯했다.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유적에 묻힌 유물을 탐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죄인데, 거기에 더해 윈스크 교구의 성기사단과 싸움까지 벌였으니, 제가 어찌 용서를 바라겠습니까?”
“……?”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고, 보론초바 주교공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최고장로가 하는 말은 사실과 교묘하게 달랐다.
최고장로는 주교공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거짓말을 이어 갔다.
“전하, 저의 죄를 잘 알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자비를 간청합니다. 저와 주교공은 한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한 것이지, 결코 신앙을 저버리거나 전하를 배신하려던 것이 아닙니다.”
“무드리예스, 지금 무슨 말은 하는 것이냐?”
결국 듣다못해 주교공이 입을 열었다.
사파에서 온 용사
비밀이 많은 왕
“누가 유물 따위에 욕심을 낸단 말이냐? 심지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유물을 말이다. 난 그저 불온한 마력이 흐르는 유적을 정화하려 했을 뿐이다.”
“예하는 지금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오오, 이렇게 뻔뻔할 수가! 예하, 죄 없는 기사가 수십 명이나 죽었습니다! 사제와 신관도 마찬가지고요!”
“그만.”
파블로 왕이 손을 들어 최고장로의 말을 막았다. 그러자 최고장로는 군소리 없이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는 보론초바 주교공의 얼굴이 어두웠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미 최고장로와 파블로 왕은 물밑에서 말을 맞춘 듯했다.
“예하의 주장이 어떻든, 나는 무드리예스 최고장로의 말에 더 믿음이 갑니다.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고해하는 성직자를 의심해서야 되겠습니까?”
“…….”
보론초바 주교공은 젊은 왕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며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듯했다. 겉으로는 표정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지만, 그의 내면에 일렁이는 분노와 살기가 나에게는 똑똑히 느껴졌다.
“처분을 내리겠다. 서기관은 왕명을 기록하라.”
“예, 전하.”
파블로 왕이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권좌에서 일어났다. 그의 발치에 모인 궁정 대신들이 왕의 명령을 복창했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귀한 북부의 기사들을 잃어버린 두 성직자를 벌하노라. 먼저 북부정교회의 최고장로 무드리예스, 그대는 금괴 스무 개를 지출해 유족에게 보상하고, 마차 백 대 분량의 양곡을 윈스크 시민에게 나누어 주어라. 또한 ……중략…… 마지막으로, 삼 년간 북부정교회 수도원에서 근신하며 망자를 위해 기도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엄청난 처벌이었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거나 양곡을 푸는 건 별게 아니지만, 삼 년 동안 수도원에 갇혀 지내는 건 사실상 정치적 사망선고였다.
폭탄선언을 마친 파블로 왕의 시선이 이번에는 보론초바 주교공에게 닿았다.
“다음은 블라토프 보론초바 주교공을 벌하노라. 그대 또한 ……중략…… 마지막으로, 삼 년간 윈스크 교구의 수도원에 머물며 망자를 위해 기도하라.”
“……죄송하지만, 전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교공이 왕의 처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자 궁정 대신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향해 독설을 쏘아 댔다.
“그럴 수는 없다니? 예하는 지금 왕명을 거스르는 것이오?”
“전하께서는 예하에게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오! 예하는 왕혈(王血)의 권위에 복종하고, 처벌을 달게 받으시오!”
평소라면 주교공 앞에서 큰소리는커녕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작자들이지만, 이미 세상이 뒤집힌 마당이었다.
주교공은 양손에 들고 있던 성기사단과 세속 기사단을 동시에 잃었고, 도시에 퍼진 추문으로 민심도 기울고 있었다.
반면, 파블로 왕의 근위 기사단은 건재했고 수도 상비군은 물론 멀리는 국경 수비대도 있었다.
게다가 드워프들을 미리 선점하고 구조 작전에 투입한 덕분에 민심도 끌어간 상태였다.
스윽.
파블로 왕이 우아한 동작으로 한쪽 손을 들었다. 그러자 촉새처럼 쪼아 대던 궁정 대신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주교공은 주교인 동시에 공작이니, 귀족의 권위를 참작해 수도원이 아닌 자택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보론초바 공작 가문의 저택에서 삼 년간 망자를 위해 기도하라.”
파블로 왕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교묘하게 반걸음 물러서며 주교공이 빠져나갈 구실을 차단한 것이다.
동시에 근위 기사단이 천천히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의 말대꾸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이쯤 되니 아무리 대가 센 보론초바 주교공이라도 처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결국 붉은 곰이 젊은 왕에게 굴복했다. 침통한 주교공의 얼굴과 그 주변으로 고개를 떨구는 공작 가문 기사들의 모습이 비참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과 달리, 주교공의 눈동자에는 한순간 굳은 결의가 스쳐 갔다.
‘역시, 쉽게 꺾일 양반이 아니지.’
비록 정치적으로 추락했을지언정 보론초바 주교공의 마음까지 꺾인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 재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파블로 왕의 한마디가 불타는 그의 마음에 기름을 부었다.
“무드리예스 최고장로는 주교공과 달리 스스로 죄를 고하고 반성했으니 그 또한 참작해야 마땅하다. 앞서 말한 모든 배상은 그대로 하고, 삼 년 기도는 칠 일로 줄이겠다.”
“바다 같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칠 일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기도하겠습니다!”
무드리예스는 넙죽 엎드려 왕의 은혜를 칭송했다.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은 보론초바 주교공의 눈동자에 불똥이 튀었다. 짜고 치는 촌극에 자기 혼자만 겔라구스의 정치판에서 밀려난 꼴이었다.
“청문회는 이것으로 마친다. 처벌도 확정했으니 재판은 따로 열지 않겠다. 시종장은 연회를 준비하라.”
왕의 명령에 사람들은 일제히 흩어졌다.
보론초바 주교공도 기사들을 이끌고 장내를 벗어났다. 그는 연회에 불참하고 저택으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파블로 왕은 사람들이 나가는 걸 한동안 지켜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라?’
젊은 왕의 걸음걸이가 약간 이상했다. 기품 있는 상체와 달리, 땅을 딛는 발걸음이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마치 발목이라도 베인 놈처럼…….’
게다가 체형이나 움직임도 어딘가 모르게 눈에 익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특징이지만, 한평생 무림에서 굴러먹은 나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동굴에 나타났던 그놈이다!’
나는 그제서야 파블로 왕이 왜 나를 보고 표정이 변했던 건지 깨달았다. 놀랍게도 유적에 나타났던 신비인은 파블로 왕이었다.
‘그때는 몸에 비늘이 돋아 있었는데? 그것도 일종의 마법인가?’
정체를 파악하려면 몇 가지 확인이 더 필요하겠지만, 심증으로는 거의 확실했다.
“테온, 우리도 이만 돌아가죠.”
“아니, 난 연회에 참석하겠다.”
“주교공 예하께서는 연회에 불참하실 겁니다. 한데 우리만 참석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아요.”
“내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쓰더냐? 이번 기회에 왕이 따라 주는 술 한잔 얻어먹고 갈 테니, 너 먼저 돌아가라.”
아우레오는 내가 굳이 연회에 참석하는 게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연회에 참석해야 할 이유가 방금 생긴 참이었다.
* * *
파블로 왕이 개최한 연회는 역시 화려했다. 명목상 죽은 이를 기리고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연회라지만, 곳곳에 배치된 악단과 무용수, 산처럼 쌓인 음식과 물처럼 흐르는 술은 지상의 낙원이 무엇인지 보여 주려는 듯했다.
“껄껄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하하, 모르셨나 보군요!”
왕실파의 핵심 인사라고 할 수 있는 궁정 대신들이 여유롭게 술과 음식을 즐기며 웃음꽃을 피웠다.
무드리예스를 필두로 한 북부정교회의 생존자들도 나름대로 희미한 미소를 띠며 연회에 섞여 들었다.
반면, 귀족들은 똥 씹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마저도 찬밥 대접에 실망해 자리를 뜨는 자가 대다수였다.
‘북부의 실세가 누구인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군.’
지배 계층의 연회는 당대의 권력관계를 보여 주는 축소판이었다.
예전 같으면 보론초바 주교공을 필두로 교회와 귀족들이 연회의 분위기를 이끌었겠지만, 이제 그들은 철저한 주변인 취급을 받았다.
지금 북부를 장악한 것은 저 높은 연단 위에서 연회를 내려다보는 젊은 왕, 파블로 겔라구예비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