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les of the Demon Faction RAW novel - Chapter 804
외전 154화. 피에 젖다 (4)
“이건 뭔가?”
“하하, 근래 공사가 다망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어르신께서 무얼 좋아하시는지도 잘 몰라서 인사드리는 김에 가져왔습니다.”
공무외가 건넨 것은 질 좋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금존청이었다.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예끼, 이 사람아. 무얼 좋아하는지 모른다는 사람이 콕 집어서 금존청을 가져오나?”
“민망할 따름입니다.”
백골신마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 바로 금존청이었다. 다른 마왕들과 달리 크게 뇌물을 받는 일이 없어서 그조차도 자주 구하지 못하는 명주였다.
공무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얼굴 한번 뵈었으니, 저는 이만…….”
“시간 내서 예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해서 쓰겠는가. 앉게. 자네가 선물해 준 술, 무슨 맛인지 목구멍 정도는 적셔 봐야지.”
“영광입니다.”
정자에서 나간 백골신마가 직접 술상과 잔을 가져왔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던 공무외는 깜짝 놀라서 정자 밑으로 내려왔다.
“어, 어르신? 어찌 어르신께서 직접……?”
“아랫것들에게 휴가 좀 줬네. 손님이 오셔도 일해 줄 사람이 없으니 집주인이 직접 해야지.”
“말씀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가 직접 가져왔을 터인데.”
“어디에 무슨 집기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가져오길 뭘 가져오나. 수선 떨지 말고 앉게.”
“제가 들겠습니다.”
“어허, 가서 앉으래도.”
공무외는 결국 정자에 도로 올라가 어색하게 앉을 수밖에 없었다.
술상을 놓은 백골신마가 웃으며 금존청의 마개를 땄다.
“오호? 이거 오래 묵은 놈이구만? 족히 십 년은 됐겠어.”
“대단하십니다. 향만으로 아시는 겁니까?”
“사실 나도 모른다네. 그냥 주향이 진해서 멋대로 주절거리는 것뿐이야.”
“하하.”
이 금존청은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물건이었다.
오래 묵은 것만이 명주는 아니다. 술에는 술 나름대로 향과 맛이라는 게 있다. 찻잎도 팔팔 끓인 물만 넣는다고 다가 아닌 것처럼, 취향에 따라 금방 만든 게 좋을 수도 있고 오래 묵은 게 좋을 수도 있다.
물론 공무외는 이 술이 신상(新商)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모른 척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자, 한 잔 받게.”
“제가 먼저 따라 드리겠습니다.”
“자네는 참 사람 무안하게 하는군. 어여 받아.”
“……그럼, 먼저 받겠습니다.”
공무외의 잔을 채워 준 백골신마가 자신의 잔도 채웠다.
공무외는 그 모습을 보며 하나 더 깨달을 수 있었다.
백골신마는 허례허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걸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허례허식을 아주 싫어하는 것도 아니어서 적당히 예의 차려 주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결국은 선이다. 백골신마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중간 어딘가에 선이 있다.
평생을 욕심 많은 권력자들만 봐 왔던 공무외에게는 참으로 독특한 인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괜찮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 선이 어디쯤인지 명확히 알기 전까지는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물론 안다고 해서 함부로 할 수도 없지만.
“마셔 보세.”
“예.”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크허! 좋구먼. 빈속에 마시니 온몸이 주향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아.”
“제가 안주라도 좀 만들어 올까요?”
“자네, 요리도 할 줄 알았나?”
“간단한 거라면 저도 할 줄 압니다.”
“허허, 괜찮네. 이 좋은 향기를 음식 맛으로 가려 버리고 싶진 않군.”
“하하.”
“자, 한 잔 더 받게.”
“선물 드린 건데, 제가 이렇게 넙죽넙죽 받아 마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확실한 사람이야. 자네 마시는 거 꼴 보기 싫었으면 처음부터 주지도 않았다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귀한 금존청을 연거푸 석 잔이나 마셨다.
“좋구먼. 그래도 나이 좀 먹었다고 허겁지겁 마시니 벌써 취기가 도는 듯해.”
“어르신께서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사실 분입니다. 젊은 제가 이런 말씀 드리면 조금 건방질 수 있지만, 어르신께서도 한창이라고 생각합니다.”
“푸하하! 떽! 이 사람아, 사람 그만 놀리게. 한창은 무슨, 고목에 꽃 피는 거 봤나?”
“제 눈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곧은 거목이십니다.”
“어디 가서 아부 대회 하면 최소한 결승은 따 놓은 당상이겠네.”
“어르신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지요.”
“허허허.”
백골신마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곤 물었다.
“교주 앞이라도?”
“……!!”
공무외가 움찔했다.
“교, 교주님이시라면…….”
“허허, 됐네. 농 한 번 했다고 그렇게 얼어 버리니 내가 다 민망하이.”
“하하하.”
백골신마가 난간에 등을 기댔다. 편안한 자세였다.
“그래, 단순히 인사차 온 것 같지는 않고. 석 잔 술이나마 마셨으니 이제 하고 싶은 얘기를 해 보는 게 어떤가?”
“어르신. 저는 정말로…….”
“자네가 처음 나를 찾아와 이런 말을 했었지.”
“…….”
“혼란스러운 본교에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린다고 말이야.”
“예, 그러했습니다.”
“지도든 편달이든 하고 싶어도 학동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별무소용이라네. 훈장질이 그래서 어렵지.”
백골신마가 고개를 내리곤 공무외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은 지도 편달이 필요 없나?”
“…….”
잠시 말없이 백골신마를 보던 공무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허허, 학동이 마음을 열었으니 잠깐이나마 고생한 훈장질도 보람이 있구먼.”
“다만, 말씀드리기 민망한 사안이라 주저했습니다.”
“자네 나이 때는 다 그렇지 뭘.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 나이 먹어서도 혈기방장한 어린애들 못지않게 속 좁은 사람 많네. 나도 비슷해. 젊었을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약간의 인내심이 더 생겼다는 것 정도지.”
공무외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천상에게 선물을 하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물이라? 글쎄, 그걸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백골신마가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잖나? 내게는 정적이 많다네. 내성의 주요 인사도 아니고, 외성 전투 부대의 일개 각주에게 칼을 건넸다면 눈에 불을 켜고 노리기 시작할 게야.”
그렇다.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정확히는, 그렇게만 들어 보면 선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공무외는 알고 있었다. 이천상이 죽음의 늪에서 살아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그 칼이 진짜 선물이 된다는 것을.
애초에 무인이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병장기를 건넸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다. 속내가 어떻든, 그만큼 상대를 신경 쓴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공무외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교내 인재들에게 가르침을 내려 주신다면, 그것은 큰 홍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천상 그 녀석은 저와도 연관되어 있으니 미리 언질을 주셨다면 중간에서 더 부드럽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골신마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도 참 어지간하구먼. 내게 아랫사람 취급을 받지 못해서 분한 겐가?”
“죄송합니다. 제가 속이 좁아서 어르신의 큰 뜻을 헤아리지…….”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정신이 이상한 것 같은데?”
공무외는 또 한 번 움찔했다.
정신이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긍정적이지 못한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봐야지. 나 같은 사람의 아랫사람을 자처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닌가?”
백골신마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그 발언이 농이라는 걸 깨달은 공무외가 쓰게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누가 뭐라 해도 어르신께서는 제 우상이요, 믿고 따를 만한 분이십니다.”
“허허, 그렇게 봐 줘서 고맙군.”
“제가 한 잔 따라 드리겠습니다.”
백골신마가 마저 잔을 비웠고, 공무외가 공손하게 잔을 채웠다.
잔을 채우는 공무외의 모습을 보며 백골신마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그 녀석, 놀라운 재능을 타고났더구먼.”
공무외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만한 재능을 타고난 신진(新進)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녀석이 자네 사람이라는 거야 자네 입으로 직접 들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나. 다만 임무가 겹쳐 얼굴을 보았고 흥미가 생겼네. 자네가 신경 쓰는 칼이라면 한번 제대로 키워 줘 봐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
“……!”
“좋은 칼이 될 거야. 살아난다면 말이지. 물론, 죽고 사는 거야 하늘의 뜻이니 죽어 버리면 나도 할 말이 없다네.”
“어르신.”
“앞으로는 자네에게 꼭 말해 주도록 하겠네. 나름 신경을 쓴다고 했는데, 괜스레 자네 머리를 복잡하게 했군.”
공무외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그저…….”
“허허, 아네. 알아.”
“앞으로 쓸데없는 생각은 안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오래 사귄 벗도 아닌데 오해는 언제나 쌓일 수 있는 법이라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곧잘 터질 게야. 사람 사이라는 것이 갈등 한번 없이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
“자네 사람은 내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앞으로도 내 나름대로 잘 챙겨 줄 걸세. 이왕이면 자네에게 언질을 주겠지만, 내 성질머리가 워낙 고약해서 중간중간 까먹을 수도 있네. 그건 자네가 이해해 줬으면 하네.”
공무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지만, 지금껏 윗사람이 한 번도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이것은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그릇이 큰 것이다. 공무외는 백골신마의 신중하고도 부드러운 어조에 크게 감격했다.
“부족한 소인을 받아 주신 것만으로도 일생의 영광입니다. 제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어르신을 모시겠습니다.”
“허허허.”
“한 잔 더 따라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이? 날 취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먼?”
“저는 이미 어르신의 자애로움에 만취했습니다. 저만 취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놈의 혓바닥, 참 달달하기도 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자리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다가 반 시진 뒤에 끝이 났다.
공무외가 떠난 자리.거처에 묵혀 둔 아무 술이나 가져온 백골신마가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그 사람 참, 앞으로는 오래 묵은 놈으로 가져오려나?”
그가 정자 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취기로 물든 백골신마의 눈이 이내 흐릿해졌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 그런 게지.”
공무외는 백골신마의 말에 감격했으면서도 끝까지 진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무외는 자신이 아랫사람의 도리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백골신마가 자신을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건지 의심해서 온 게 아니었다.
백골신마가 자신보다 이천상을 더 위하는 게 아닌가 의심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진실은 단순한 법이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본심은 그것이었다. 한데도 그 진심을 꺼내지 않았다.
“첫 잔부터 반만 따라 주는데, 내가 어찌 자네 잔을 가득 채워 줄 수 있겠나.”
백골신마가 잔을 기울였다.
얼마 묵지 않은 놈이라도 확실히 금존청 맛이 좋긴 했다. 평소에 즐기던 술인데도 맛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저나 이천상 그놈은 아직도 절절매고 있나? 허허, 움직이지 않는 자의 발은 무거워지는 법이거늘.”
백골신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괴물 같은 재능이 괴물 몸뚱이에 들어갔는지, 범부의 몸뚱이로 들어갔는지 어서 확인 좀 시켜 주게나. 나이가 늘려 준 인내심이라도 그리 깊진 못해, 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