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10
“흡!”
숨이 멎었다. 주춤주춤 뒷걸음하는 서현의 심장은 터져 버릴 듯한 공포로 가득 찼다.
얼굴이 길고 가느다란 눈매가 몹시 사나워 보이는 사내가 옆에 내려 두었던 칼집을 잡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서 잡히면 다시 관으로 끌려갈 것이다. 도망의 벌로 오른쪽 뺨에 비(婢) 자를 새기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지엄한 국법으로 자자형(刺字刑)을 금한 지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지금도 암암리에 행하여지는 끔찍한 형벌이었다.
‘안 돼. 안 돼. 아니야,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괜히 섣불리 야단스럽게 굴 필요 없어. 나를 잡으려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
그러나 서현을 바라보는 추노꾼의 얼굴에는 득의연한 조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추격자의 본능으로 도망자 특유의 기색을 알아챈 것이다.
“게 섯거라.”
칼을 흔들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추노꾼을 보며 서현은 홱 몸을 돌렸다. 그런데 별안간 단단한 것에 쿵 하고 부딪쳤다. 그 반동으로 나동그라지려는 서현의 팔을 억센 손이 꽉 붙들며 뇌까렸다.
“네년이 감히 도망을 쳐?”
무자리였다.
귀신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이자는 악귀 그 자체가 아니던가. 서현은 제 기막힌 처지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세상천지 모다 그녀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자들로 가득할 뿐이었으니.
하지만 예서 포기할 거였다면 애초에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죽더라도 순순히 잡혀서 끌려가느니 끝까지 도망치다 죽는 길을 택할 것이다. 지난밤처럼. 절대로 아까와 같은 치욕은 두 번 다시 겪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죽을 것이다. 반드시.
서현은 홱 팔을 뿌리쳤다.
“이거 놓…… 악!”
그런데 갑자기 무자리가 서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느닷없는 고통에 서현은 차마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렇게 서현의 머리채를 단단히 틀어쥔 무자리가 그녀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짚신이 벗겨지고 발꿈치가 땅에 쓸렸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을 만큼 고통스러웠으나 서현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이 짐승 같은 자에게 다시 끌려갈 수는 없었다.
“이년, 돌아가서 두고 보자.”
“아악! 이거 놔!”
머리털이 죄 뽑히고, 머리 가죽이 잡아 뜯기는 끔찍한 통증에도 서현은 온 힘을 다해 악다구니를 썼다. 그러나 무자리는 가차 없었다.
“잠깐, 멈추시오.”
그때 추노꾼 하나가 그들에게 성큼 다가왔다. 서현과 눈이 마주친 그자였다.
“뭐냐?”
“잠시 확인 좀 하고 싶소만.”
추노꾼이 허리를 숙이더니, 서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얼굴을 가렸다. 그 탓에 일순간에 머리카락이 모조리 뽑히는 듯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덜덜 떨면서도 이를 악물며 참았다.
그러자 추노꾼이 숫제 손을 내밀어 서현의 턱을 쥐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무자리가 삽시간에 칼을 들어 그자의 턱 아래에 겨누었다.
“어디 이 무자리의 계집에게 손을 대 보거라. 당장 멱을 따 버릴 테니.”
무자리의 단호한 위협에 본래 무관 출신인 추노꾼이 멈칫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나무 아래 다른 추노꾼들이 즉시 칼을 쥐고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무자리에게 감히 덤비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냐!”
“아, 그것이……. 내, 내가 보니 아무래도 이 계집이 이레 전에 관아에서 도망쳤다는 역모 죄인의 딸과 비슷한 듯하여 확인하고자 하였네만, 이자가…….”
“확인? 그래,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보려무나.”
무자리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한 손으로 서현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는 큰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추노꾼들은 무자리에게 조금의 빈틈도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 아랫것들이 모여 사는 백정 마을에서 봉두난발하고 대낮에 시퍼런 칼을 들고 다니는 자는 필시 도한이거나 망나니임이 확실했다. 게다가 그 눈빛과 온몸에서 흐르는 살기가 실로 섬뜩했다. 괜히 성난 호랑이를 건드려서 좋을 게 무엇인가. 저자는 필시 사람을 잡아먹는 흉악한 맹수임에 틀림없는데.
추노꾼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해를 한 듯하오. 미안하게 되었수다.”
얼굴 긴 추노꾼의 말에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추노꾼이 제 손에 든 용모파기를 보며 입맛을 쩍 다셨다.
“하긴, 우리가 찾는 계집은 얼굴에 흉한 부스럼이 가득하다고 하지 않았나.”
“하, 그러게. 이년이 분명히 어제 제 오라비 죽는 걸 보러 이리 왔을 줄 알았더니만.”
“어쩌면 제 어미 있는 곳으로 곧장 갔을 수도 있지.”
그 순간, 서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출렁, 단 한 번의 흔들림, 단 한 번의 파문이었으나 잔잔하던 밤의 호수가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에 정신없이 철썩이는 것은 삽시간이었다.
“아니면 그 동생이 있다는 곳일 수도 있네. 그곳이 오히려 관아에서 더 가깝지 않은가.”
“하면 일단 그곳으로 가 보자고.”
“가세나.”
추노꾼들은 곧 말을 매어 둔 당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서는 절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했다. 아우가 있는 곳이 가깝다고 했다. 서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마음이 이미 그들을 따라 내달렸다. 추노꾼들이 올라탄 말의 꼬리라도 붙들고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어머니와 아우가 있다는 그곳으로.
“어, 어머…….”
저도 모르게 그 마음이 소리가 되어 나오려던 참이었다. 철썩! 무자리의 무지막지한 손바닥이 서현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꺅!”
“네년이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아니 들은 게지. 기어이 발가벗겨서 저자에 내돌려야 정신을 차릴 테냐?”
“날 내버려 둬! 저리 가! 제발!”
“정녕 죽고 싶구나!”
“아악!”
한 번 두 번 연이어 두툼한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그러곤 충격과 아픔에 정신 못 차리는 서현을 제 어깨에 둘러메고는 큰 걸음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무자리의 어깨에서 무력하게 흔들리는 서현의 흐릿한 시야에 멀어지는 추노꾼들의 모습이 아스라하게 보였다. 사력을 다해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닿지 않았다. 이내 한 점 점처럼 삽시간에 멀어지고 말았다.
“아, 안…… 돼…….”
안타까움과 서러움에 북받쳐 흐느끼던 서현은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서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저녁 어스름이 사방을 덮고 있었다. 작은 방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발딱 몸을 일으킨 서현은 본능적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무자리였다.
“왜? 천한 백정에게 깔리느니 저자에 오가는 뭇 사내에게 가랑이 벌리는 게 낫겠느냐? 아니면 색주가 창기가 되어서 아무 사내가 네년한테 올라타도 상관이 없다 이거지?”
고개를 돌리자 방 한구석에 앉은 무자리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작은 개다리소반 위에는 술병 몇 개와 사발이 놓였을 뿐, 안주도 없이 육포 몇 점이 고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좁은 방 안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그 반반한 얼굴 덕에 관기가 되겠구나.”
서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 악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빈 사발에 콸콸콸 술을 따르며 무자리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가라. 반촌의 춘생이 패거리 아니면 추노꾼이 네년을 잡겠구나.”
그 말에 서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더욱 꼭 입술을 깨물었다. 관아를 도망쳐 나와 이레 동안 그녀는 추노꾼에게 쫓기고, 천복이라는 망나니에게 속고, 반촌 무뢰배들에게 팔렸다. 죽으려 했으나 마음대로 죽지도 못했다.
그게 세상이고, 그게 자기 앞에 놓인 엄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창기가 되거나 추노꾼에게 잡히거나, 어느 쪽이든 어머니와 아우를 다시 보지 못하고 끝날 수는 없었다, 결단코.
서현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극히 좁다는 걸 깨달았다. 그 어느 쪽도 끔찍할 테지만 그래도 최악(最惡)과 차악(次惡) 중에 고를 수 있다면 그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그들과 거래를 하였나요?”
서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무자리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무자리가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꽤 많은 술을 마셨을 텐데도 음성은 물론 낯빛도 말짱했다.
“그들?”
“반촌의 그 무뢰배들 말입니다.”
“하하, 왜? 네년을 얼마에 넘기기로 하였나 궁금하냐?”
무자리가 비릿하게 웃으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아뇨, 호랑이 사냥 말입니다.”
그 말에 무자리가 멈칫했다.
무자리는 이명수 따위에게 호랑이를 잡아 바칠 생각 따위는 결코 없었다. 그러나 움막에서 서현이 도망치는 걸 보고 춘생의 수하들이 빠르게 뒤쫓아 가려 하는 걸 막아섰다.
장담했듯 무자리가 그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춘생의 말대로 관군이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것을 다 막아 낼 수는 없다. 하여 무자리는 춘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뭇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애당초 춘생의 패거리가 계집을 잡아가든 말든 내버려 두고 호랑이 따위 잡아다 주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무자리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름도 모르고, 단 두 번 본 것이 다인 계집이었다. 그런데도 무자리는 그리하지 못했다.
‘미친놈, 머저리 같은 놈. 빙충이가 따로 없구나!’
그런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연유 또한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어이해 그러한 것인가? 천복이의 담보라서?
‘이깟 계집이 없어도 천복이 놈한테서는 얼마든지 돈을 받아 낼 수 있다.’
그뿐 아니었다. 추노꾼들에게 잡힐 뻔한 서현을 부득불 데려왔다. 춘생에게서 호피의 선금과 더불어 계집의 값도 받았으니 이미 이득을 본 셈이었다. 그런데도 무자리는 기어이 서현을 데려다가 제집 안방에 눕혔다.
그러고는 답답하고 속이 타서 이리 술만 퍼마셨다. 자기답지 않은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가 속에서 펄펄 끓었다.
‘이 천하에 반편이 같은 놈!’
그러나 무자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답했다.
“사냥은 본시 내 업이다.”
갑자기 서현이 한 걸음 무자리를 향해 내디디며 절박하게 말했다.
“그럼 소녀하고도 거래하셔요.”
“뭐?”
뜻밖의 말에 무자리가 홱 눈을 치켜뜨자 서현이 굳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자리는 불현듯 그녀가 자신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전과 다름없이 까만 눈동자였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 미친 게 틀림없었다. 하여 이렇듯 저답지 않은 생각과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하하하!”
무자리는 헛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이 무자리가 네깟 것의 푼돈에 움직일 거로 생각하는 거냐?”
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천복에게 주기로 했던 잔금을 숨겨 두기는 했으나 이 사내를 움직이기에는 분명히 턱없이 적은 돈일 것이다. 하여 서현은 제 주먹을 꼭 쥐면서 떨리는 입을 떼었다.
“……저, 저를 드리겠습니다.”
그녀로서는 어렵게 꺼낸 말이었으나 무자리는 즉시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네년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게냐? 아니면 내가 계집이라면 누구나 상관없이 덤벼드는 발정 난 개새끼로 보여서 만만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