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 (Shin Yun-hee) RAW novel - chapter 37
“제가 처음으로 사람 멱을 딴 게 몇 살 때인지 기억하십니까?”
등 뒤로 느껴지는 침착하고 서늘한 살기에 부사리의 이마에서는 주르륵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핏물을 뒤집어쓰고 태어난 잔인하고 냉혹한 도살자, 그것이 바로 무자리였다. 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바로 부사리였다.
그러나 그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두, 두억시니 같은 놈! 네놈이야 태어났을 때부터 생모의 배를 가르고 그 피를 빨아먹고 살아남은 살모사 같은 놈 아니여!”
무자리가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조용히 수긍했다.
“하하하, 맞습니다. 옳아요. 그러니 아무리 육친이라 한들 내 여기서 아버지의 멱을 따는 것이 그른 것은 아닐 겝니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었다.
부사리가 비로소 서현의 멱살 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켁켁!”
서현이 힘겹게 숨 토하면서도 등을 돌려 허겁지겁 제 옷고름 매는 것을 바라보던 무자리가 칼 쥔 손에 도리어 힘을 주며 부사리에게 당부했다. 그것은 위협이며, 경고였다.
“발이 넓고 정보에 능통한 자로 보내 주십시오. 또한, 입이 무거운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내 오늘 예 왔던 것을 누구에게라도 입 벙긋하면 그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니.”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처네를 들어서 서현의 어깨에 덮어 주고는 그녀를 데리고 현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보며 부사리가 외쳤다.
“이놈! 이 짐승 새끼보다 못한 놈! 두억시니보다 악랄한 놈!”
그러나 무자리는 무시하고 걸어 나갔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이름에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소사가 말했지. 니놈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에게 물어뜯겨 죽을 팔자라고.”
악담을 퍼붓는 부사리에게 무자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으나 서현을 붙든 손아귀에는 힘이 들어가고, 눈빛은 차디차게 가라앉았다.
“잊지 마십시오. 세책가 앞의 객점이니.”
무자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이 부사리의 부아를 돋우었다.
“니놈 때문에 소사도 죽은 거여!”
그러자 무자리가 갑자기 홱 몸을 돌리더니 부사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검푸른 안광이 번뜩이는 눈동자는 사나운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윽다문 턱 선이 강직되어 떨렸다. 막 덤벼들려는 야수처럼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 뒷모습에 대고 부사리는 저주의 말을 이어 갔다.
“니놈이 발 디디는 곳마다 피로 웅덩이를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네 혈육이 너로 인해 죽는다 혔어! 지집, 잊지 마라! 그게 저놈이다! 니 서방이여! 크하하하!”
큰 소리로 웃어 대던 부사리는 피 고인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더니 이내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대고는 벌컥벌컥 마셨다. 치켜든 그의 목에는 가늘고 기다란 혈흔이 선명했다.
잠시 후, 술병을 입에서 떼고 손등으로 술 묻은 입술을 훔치며 부사리가 중얼거렸다.
“두억시니 같은 놈. 내 그때 너를 죽여야 했어. 그때…….”
::: 十 :::
서현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온 무자리가 골목 어귀에 이르자 비로소 그 손을 놓았다. 묻는 음성과 표정이 사뭇 초조하고 언짢았다.
“괜찮아?”
“예, 예…….”
“그래 저 늙은이가 네게 뭐라 하더냐?”
언성은 높이지 않았으나 그의 어조에서 몹시 분노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싸늘한 냉기마저 감돌았다. 하여 서현은 조심스레 답했다.
“소녀가 문제를 일으켰음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녁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면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래서?”
“예?”
“그래서 너는 뭐라 답하였는데?”
“모른다고…….”
서현의 대답에 무자리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잘하였다. 잘 대답하였어. 급살 맞아 죽을 노인네 같으니라고. 나이를 먹더니 더 음흉해지는구나.”
거칠게 뇌까리던 무자리가 문득 서현의 어두운 낯빛을 보더니 퉁명스레 물었다.
“왜 내 말이 듣기 싫어?”
서현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무자리가 차갑게 덧붙였다.
“안됐지만, 세상 모든 부모자식지간이 너희처럼 애틋한 것은 아니다.”
서현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고개만 수그렸다.
그러자 무자리도 입을 꾹 다문 채 앞장서 걸어갔다. 서현은 처네로 제 얼굴을 꽁꽁 가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오가는 행인에 휩쓸려 성큼성큼 걷는 무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종종걸음 치면서. 그리고 불현듯 서현은 무자리의 커다란 등이 유독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 * *
그날 해거름 무렵, 무자리와 서현이 머무는 객점으로 차부 한 명이 찾아왔다. 체격이 우람하고 당당하며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는 무자리를 보자 대뜸 청했다.
“술이나 한잔 사시오.”
“좋소. 내 한 상 거하게 차리라 하지.”
“하, 내게 긴히 물을 게 있다 들었는데 이런 객점에서 무슨! 에잉!”
입맛을 쩝쩝 다시는 사내의 말뜻을 알아들은 무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내 채비하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들이 머무는 방으로 돌아온 무자리가 서현에게 잠시 나갔다 오마 하고 말했을 때, 서현은 저도 따라나서겠다고 했다가 제지당하고 말았다.
“저도 동석하겠습니다.”
“되었다. 내 알아서 할 터이니 넌 예서 기다려라.”
“하지만 제가 물어야 합니다.”
“낯선 계집이 있는 자리에서 사내가 입을 열겠느냐?”
“하면 남자 복색이라도 하면 되지 않습니까. 세세한 정황을 모다 아는 이는 저입니다.”
“아니, 안 된다.”
“하지만…….”
“그만해라. 안 돼.”
서현은 필사적으로 무자리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무소용이었다. 그는 단호했다. 하여 저도 모르게 울 듯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무자리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태 전에 역모의 죄로 참수당한 부총관 문학선, 그리고 그 이듬해에 그 여죄를 추궁당하여 죽은 문학선의 장자가 문원진, 너는 그 문학선의 장녀 문서현이고, 네 어린 아우는 문원우.”
무자리가 서현의 가족에 대해 하나하나 나열하자 서현의 검은 눈동자가 자디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저 이름을 듣는 것뿐인데도 그립고 그리운 애틋함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네 어미와 네 아우, 그리고 너를 뒤쫓는 자는 조민준, 형조판서 조중원의 아들이며 네 정혼자였던 자이지. 맞느냐?”
그러다 조민준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서 감파란 안광이 일어나는 것을 무자리는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그것은 증오와 분노의 빛이었다.
“맞습니다. 그래도…….”
“네가 날 못 미더워하는 건 잘 안다만, 네가 나서면 저 완고한 호상인이 퍽도 술술 불겠구나.”
서현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무자리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따져 물었다.
“네가 바지저고리 입는다고 그 몸태가 바뀐다더냐? 곱상한 얼굴이 어딜 가?”
“하지만…….”
“거칠고 힘쓰는 자들이다. 계집 옆에 끼고 술이라도 한잔하여야 입을 뗄 텐데, 네가 술시중이라도 들 참이야?”
“그렇게라도 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을 수…… 꺅!”
아직도 미련을 떨치지 못해 무자리에게 매달리던 서현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저 마음이 급해서 정신없이 말하던 서현은 무자리가 갑자기 제 턱을 억세게 움켜쥐자 깜짝 놀랐다. 노려보는 무자리의 시선에 담긴 것은 서슬 퍼런 살기였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어?”
분노로 거칠어진 그의 음성이 낮고 사납게 들려오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저는…….”
“네년 그 잘난 몸뚱어리로 나 같은 백정 놈 한번 후리고 나니까 왜, 세상 사내들을 다 네 치마폭에 감쌀 수 있을 거 같아?”
“아닙니다. 아니어요.”
소스라치게 놀란 서현이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대체 무어라 말을 한 것인가. 그러나 무자리의 화를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으득, 어금니를 윽문 사이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년은 아직 멀었다. 그동안 세상천지에 네년을 가질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하나뿐임을 명심해.”
“압니다……. 말실수였습니다. 죄송해요.”
“하, 말실수? 죄송?”
“예. 정말로…….”
“어디 다른 새끼 앞에서 눈웃음이라도 한번 지어 보려무나. 그 잘난 입으로 죄송하단 말을 지껄이기도 전에 내 그놈 눈깔을 파내 버릴 테니까.”
“절대 안 그럽니다. 좀 전에는 제가 너무 흥분하여서……. 읏!”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무자리가 거침없이 서현의 사타구니를 손으로 덥석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고통과 자극에 서현은 하얀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살갗에 땀이 맺혔다. 그러나 무자리는 더욱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아래를 그대로 잡아 뜯을 것처럼 억세고 거칠었다.
“넌 내 거야. 그리고 난 내 것은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아. 차라리 죽여 버리지.”
무자리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서 싸늘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서현은 온몸으로 퍼지는 서느런 소름을 느꼈다. 이 남자는, 이 사내는 정녕 자기를 죽이고 말 것이다.
검게 타오르는 싸늘하고 냉혹한 눈빛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낱낱이 훑었다. 그리고 물어뜯듯이 입 맞췄다.
“명심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네년, 죽여 버린다.”
“예…… 예.”
서늘한 공포에 압도당한 서현은 선선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무자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오늘도 못 들어온다는 짧은 기별만 객점으로 보내왔다. 심부름 온 계집아이는 반촌 어느 주막집 딸이라 하였다. 막 처녀 태가 나기 시작했는데, 퍽 되바라진 아이였다.
“꼼짝 말고 예 있으라고, 곧 돌아온다네.”
“곧? 언제? 오늘 저녁이라고 하셨니? 아니면 내일?”
“아, 그 집 양반 곧이 언제인지 내 알 게 뭐람!”
“그래, 그렇구나. 그러면 그이 동행하신 이를 보았니?”
“눈이 이렇게 찢어진 비리비리한 따라지하고 깍짓동처럼 퉁퉁한 눈딱부리랑 왔던데.”
처음에 객점에 왔던 차부는 아니란 말이었다.
“왜, 거기 서방이 혹 나갈 때는 야리야리한 계집이라도 끼고 나갔나 보지? 하긴 이런 연생이 같은 마누라랑 살자면 숨이 턱 하니 막히기도 하겠지. 그런 헌헌장부가.”
계집아이는 명백하게 서현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서현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