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133
제 133 화
식사를 마친 유림과 은하는 학교의 남쪽에 있는 거대한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치 전문적인 경기장처럼 거대한 타원형 모양으로 이루어진 연무장은 그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투기장에 가까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흙밭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단단했고,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관람석 위에는 반원 모양의 돔이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사람 엄청 많아!”
형별 토너먼트가 강가에 모여 응원하는 형식이었다면, 클레이즈 최강자전의 예선은 연무장에서 해서 그런지 마치 장날의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클레이즈 축제 5일 차.
유림이 지나칠 정도로 정신없는 일정을 보냈음에도 축제는 착실하게 흘러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특히 모든 학생들의 목적이자 클레이즈의 대표 세 가지 행사 중 마지막 행사인 ‘클레이즈 최강자전’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 학생들의 들뜸은 평소의 배에 달했다. 물론 전날의 숙취로 인해 1/5 이상이 기권한 상태이지만 말이다.
“형별 토너먼트에 나가게 될 줄 알았으면 이거 신청 안 하는 건데.”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는 유림이 질린다는 투로 말하자 옆에 있는 은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래도 이게 제일 재미있대! 막 1:1로 싸우고 그러니까.”
그건 알고 있다. 그래서 신청을 한 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축제 기간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터질 줄 알았다면, 신청 안 했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도 은하가 기분 전환 겸 가자고 하지 않았다면 기권하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유림과 은하가 북적거리는 장소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두 사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레이먼과 데몽이 서 있었다.
“둘이 여기 있었네.”
“여 깜둥, 어젠 잘 들어갔냐?”
레이먼의 인사에 은하가 툴툴거렸다.
“몰라. 완전 치사해! 너까지 가서 완전 달달 볶였다고.”
“알아- 그래서 루아가 지금 못 일어나고 있지.”
“루아가 왜?”
“뻗었거든.”
……이것들 대체 어제 어떻게 논 거야.
“형별 토너먼트 뒤풀이가 최강자전 탈락자를 만들기 위한 행사라는 소문이 맞긴 맞구나…….”
“그니까.”
유림의 말에 데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은 어제 나가지 않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머지들은?”
“맞아. 테오들도 뻗었어?”
“아니, 테오랑 륜은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온다 했고, 디하르는 하민이랑 먼저 나갔어.”
“오늘은 룸메이트끼리 다니네.”
“그러게 말이야.”
유림을 비롯한 네 사람이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에서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을 때, 데몽의 주머니에 넣어둔 키르가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통신을 받으니 키르를 통해 테오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들 어디야?」
“우리 지금 중앙 쪽.”
「동쪽 입구로 와. 아 씨. 사람 겁나 많아! 왜 이렇게 남자들이 많은 거야? 끔찍하게!」
“…….”
「여기 륜하고 하민이 디하르까지 있어.」
“그래. 이쪽은 유림이랑 은하 있어. 같이 갈게.”
「진짜?! 나의 루아는?!」
“루아는 숙취로 기권.”
순간 키르를 통해 테오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루아 씨가~’로 시작되는 별 쓸데없는 소리였다. 데몽은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여기고 통신을 끊었다. 그러곤 동쪽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럼, 이동해 볼까?”
“그래.”
네 사람은 인파를 뚫고 테오들이 있다는 동쪽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손을 흔들며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는 테오 덕에 유림은 쉽게 친구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이 있던 중앙과 달리 이것저것 복잡한 것들이 설치된 동쪽 입구의 모습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왜 하필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유림의 불만 어린 투정에 테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자마자 연락한 거거든. 뭐하러 귀찮게 들어가냐 이거지~ 거기다 입구 쪽은 노점이 많으니까.”
“정말?! 뭐 맛있는 거 있어?”
테오의 말에 은하가 즉각 반응했다. 유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뜩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디하르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지 제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그냥? 표정은 그냥이 아닌데?
혹시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입을 여는 유림이었으나 그녀의 질문은 먼저 입을 연 디하르에 의해 묻혀 버렸다.
“혹시 무슨…….”
“어제 소원은 잘 빌었어?”
그리고 이 말에 옆에 있던 하민이 손뼉을 짝 치며 물어봤다.
“맞다, 림! 소원 어떤 거 빌었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소원’이라는 단어에 모두의 시선이 유림에게로 모였다.
“맞다. 너 어제 가서 따로 소원 빌었지?”
“무슨 소원 빌었어?”
“젬 마구 늘려달라 했어?”
“한유림이라면 그럴지도.”
수긍하는 테오의 모습에 유림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어이, 나 그 정도로 궁하진 않거든?”
설마 내가 이사장님과 따로 만나 그런 소원을 빌었을 거라 생각한 거냐…….
유림은 자신의 이미지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하는 때아닌 고민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뭣 좀 물어봤어. 그거에 대한 답이 소원이었고.”
“엥? 고작 그거?”
내용을 들으면 고작이란 말이 쏙 들어갈 텐데…….
“뭐…… 좀 그런 내용이었어. 그리고…… 너희가 알아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고.”
유림의 말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그들의 주위에 번졌기 때문이었다.
본능이란 건 참으로 무서웠다. 어째서 저 한마디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걸까.
“……연구와 관련된 일이야?”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데몽이었다. 유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확히는 나와 관련된 일이야.”
“그럼 우리하고도 관련이 있겠네.”
“어느 정도는……. 일단 자세한 건 축제가 끝난 뒤에 이야기 해줄게. 지금 하면 다들 머리가 복잡해서 즐기지 못할 거 같으니까.”
유림은 그리 말했지만, 사실 데몽이나 디하르는 속 시원하게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거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유림을 조금 배려해 주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선 말도 길어질 거 같으니 일단 넘어가지.”
“그래. 오늘내일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고. 내일 최강자전 끝나고 후야제 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하자고.”
“응.”
테오가 씨익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럼 슬슬 최강자전도 시작할 텐데 그 전에 마지막으로 뭣 좀 입에 물까?”
“이제 곧 시작할 텐데?”
“들고 다닐 수 있는 걸로 사면 되지. 최강자전이 왜 오후에 하겠냐. 먹을 거 먹고 오라는 거잖아.”
그건 또 무슨 논리지?
어쨌든 유림은 이 기회를 냉큼 잡았다.
“오~ 테오가 사는 거야?”
“아니, 륜이 사는 거래.”
“엑?!”
륜은 ‘내가 왜?!’ 라는 표정으로 테오를 쳐다봤다. 그러나 테오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그런 륜의 애처로운 눈빛을 상큼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이왕 얻어먹는 거 비싼 걸 사 먹겠다며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가게로 향했다.
륜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갑을 꺼내 그 속의 젬을 세어봤다.
“…….”
자신의 한 달 용돈, 그리고 오늘이면 사라질 돈이 들어 있었다.
륜이 계속 지갑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륜을 보며 유일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던 하민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힘내.”
“응…….”
“내가 조금 보탤게…….”
“고마워.”
륜은 시합은 하나도 하지 않았음에도 돌덩이처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모두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환호성이 터졌다. 형별 토너먼트와 비슷하지만, 그보단 좀 더 거칠고 열정적인 분위기가 퍼졌다.
유림은 두 귀를 막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좁아터진 곳에-사실은 엄청 넓은 장소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밀집되어 함성을 지르고 있다니…….
진짜 기권할 걸 그랬나 하는 때늦은 후회가 일었다.
클레이즈 최강자전.
말 그대로 클레이즈의 최강자를 뽑는 경기로 예선을 제외한 모든 경기는 대전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우승자는 오직 단 한 명이며, 정해진 룰 안에선 어떠한 기술과 공격을 해도 상관없었다. 또 시합의 특징상 2형과 3형이 가장 좋아하는 경기이기도 했다.
“오~ 시작하려나 보다.”
테오는 손에 들린 양꼬치를 한입에 다 집어넣었다. 은하 또한 입안 가득 꼬치를 베어 물며 우물거렸다.
“그러게.”
“야, 깜둥. 흘리지 마. 진짜 칠칠치 못하게.”
“그럴 수도 있지 뭐!”
“둘 다 좀 닥쳐 볼래? 지금 저기에 교수님 나오셨거든?”
데몽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중앙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떠 있는 영상 창으로.
중앙에 존재하는 거대한 원판, 그리고 그 주위엔 멀리 있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게끔 큼직한 영상 스크린 네 개가 사방으로 각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곳엔 평소의 옷차림과 달리 기사들이 주로 입는 갑옷을 입은 리리아가 서 있었다.
물론, 전쟁이나 정식 대련이 아닌 심판을 하는 거였기에 무겁고 육중한 갑옷이 아닌 가벼운 장식용 갑옷이었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그런지 왠지 경건하게 보였다. 더욱이 항상 길게 풀어헤치던 탐스러운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려서 그런지 멋스러워 보였다.
“리리아 교수님 멋있다.”
유림의 말에 테오와 디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디하르가 리리아 교수님을 존경하는 것은 동아리 사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테오까지 이러는 것을 보니 새삼 리리아 교수님이 달라 보였다.
유림은 스크린을 응시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클레이즈 최강자전을 맡게 된 리리아라고 합니다!!”
교내 최고의 미녀 교수님이란 칭호를 달고 있는 사람답게 남자아이들의 함성이 끊이질 않았다.
리리아는 학생들에게 진정하란 의미로 가볍게 손짓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클레이즈 최고의 핵심 경기인 최강자전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최고의 시합을 처음 하는 신입생들을 위해, 또 작년에 즐기지 않았을 학생들을 위해 간단히 규칙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리리아가 말을 이었다.
“최강자전은 크게 예선과 본선으로 나누어지며 오늘인 금요일엔 예선만, 그리고 축제의 마지막 날인 내일 본선이 치러집니다. 예선은 총 네 개의 조로 나뉘며 3회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각 조에서 단 여덟 명만이 결승에 올라가게 됩니다. 즉 조당 여덟 명씩 해 총 서른두 명이 본선에 오릅니다.”
유림은 리리아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네 개의 조? 어디선가 본 듯하다? 갑자기 왜 입학시험 2회전이 생각나는 거지?
유림은 옆에 서 있는 데몽을 팔꿈치로 쿡쿡 쳤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