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lantern RAW novel - Chapter 23
23
“미안해.”
“…….”
미안해할 일도 아니건만, 최환이 거듭 사과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줄곧 백발을 쫓았다고 했다. 그러다 승수를 통해 윤희가 곧 파리로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고, 오늘 지젤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공연을 틈타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고. 평소엔 늘 석우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항상 붙어있으니 접근이 쉽지 않았다며.
석우의 말이 맞았다. 사람은 사람 사이에 숨어있는 것이 가장 눈에 띄지 않는 법이었다. 환이 백발의 뒤를 밟았던 것처럼 백발도 역으로 환을 그렇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수많은 군중 속에 숨어서. 그러다 이정후와 윤희를 보고 그만 정신이 나가버렸던 것이 아닐까, 석우와 환은 그렇게 추측했다.
중환자실 앞 복도에 묵직하게 깔린 한숨만큼 우울한 얘기들이 환의 입에서 무겁게 떨어져 내렸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네 시. 어느 순간부터 말이 없어진 환의 고개가 균형을 잃고 기울었다.
시선을 들다가 맞은편 의자에 앉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붉게 충혈된 눈과 마주쳤다. 자상이 깊어 힘들다는 의사의 말에 순식간에 바위처럼 굳어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르던 석우의 커다란 등. 잠든 환을 제외하면 복도에는 이제 석우와 윤희 둘밖에 없는 셈이다.
서로 응시한 채로 다시 수분이 흘렀다. 어색한 침묵이 견디기 힘들어질 때쯤, 갑자기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정후 환자 보호자 계신가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새벽 네 시. 면회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보호자를 부르는 이유는 뭘까. 상태가 좋아진 걸로 굳이 보호자를 부를 필요가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문득 오늘 밤이 고비라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석우도 같은 생각인지 가뜩이나 어둡던 얼굴에 한층 더 짙은 그늘이 졌다.
5분, 10분, 15분, 20분.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문 앞에서 석우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기 수분 째, 마침내 다시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석우가 걸어 나왔다. 윤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석우의 얼굴 근육이 씰룩이며 온통 일그러지더니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세상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을 것 같던 거구가 울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처럼 크게, 자지러지게 울었다.* * *최고로 만들었으니 최고로 행복하게 살라는 이정후의 말과는 반대로 파리에서의 윤희는 최악이었다. 시시때때로 불안정하고 우울했으며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이어졌다. 그럴 때면 토슈즈를 들고 연습실로 향했다. 몸을 혹사시키고 나면 무겁게 머리를 둘러싼 검은 상념 덩어리들이 조금은 옅게 흩어지곤 했다. 종아리에 쥐가 나 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몽롱해질 때쯤에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차디찬 바닥에 닿아 제 몸도 같이 식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것이 싸늘했던 이정후의 마지막을 닮았기에.
“강윤희. 윤희야.”
“음…….”
부름에 눈을 뜨려 했으나 속눈썹을 파고드는 햇빛이 너무 밝다. 몇 시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담요 같은 것이 떨어졌다. 동시에 걱정과 힐난이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최환과 마주쳤다.
“또야?”
또 이런 거냐고 묻는 너 또한 잠 못 이루고 나를 따라 새벽같이 여기에 온 것은 마찬가지라 하려다가, 소모적인 언쟁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먹고 해.”
“고마워.”
대부분의 아침은 이런 식이다. 간단한 샐러드와 진한 블랙커피, 그리고 침묵. 균형대도 없이 홀로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윤희의 아슬아슬한 심리 상태를 최환도 잘 알고 있다. 언제 줄에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하다는 환에게 윤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는 것뿐이지만.
‘그런데 환아, 그거 알아? 난 말이야, 차라리 그 줄이 끊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시간이 지나 속속 단원들이 도착하자 잘하라는 의미로 어깨를 한 번 꾹 눌러주고 최환은 자리를 떴다. 스스로를 최악이라고 여기는 자신과 달리 세상의 평판은 다른 모양인지, 팀의 에이스들이 서는 바의 앞자리,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는 언제나 윤희 차지였다.
발등을 둥글게 굴렸다가 발끝을 쭉 뻗으며 발과 발목의 상태를 점검하는 윤희에게 루이제가 다가왔다.
“윤희. 어제도 밤새 연습했어?”
“그냥.”
살갑게 말을 붙여오는 루이제지만, 뒤에서 은근히 절 험담하고 다닌다는 걸 알기에 대강 대꾸했다. 루이제의 고양이 같은 호박색 눈이 윤희를 찬찬히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 드디어 지젤을 뽑는다는데, 들었지?”
웃음 뒤에 감춰진 교활함이 번득였다. 저번 호두까기 인형에서 마리 역할로 윤희가 뽑혔을 때 분함을 감추지 못하던 루이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호두까기 인형은 고전 발레 중 여자 주인공의 비중이 적은 편인데, 그걸 맡은 것만으로도 그렇게 공연 내내 시기하는 티를 냈었다. 덕분에 공연 내내 신경 쓰였었는데, 여주인공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젤을 윤희가 따낸다면 또 얼마나 귀찮게 굴지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났다. 그런 건 하나도 관심 없는데. 이정후 없는 세상에서 지젤 따위.
‘다음에 공연하면 데려가 줄게.’
‘우와, 우와, 정말? 진짜로? 세상에,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요!’
약속은 지켜졌다. 비록 사고로 인해 공연을 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깟 공연 보지 않아도 된다며 그를 말릴 텐데. 지젤 같은 거 평생 모르고 살아도 당신만 곁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최고가 아니어도 최고로 행복하다고.
멍하니 지난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단장이 단원들을 집합시켰다.
“모두 주목! 가운데로 모여!”
루이제가 얘기했던 대로 지젤을 선발하기 위한 오디션이 시작됐다.
“파드샤는 역시 루이제가 최고군.”
고양이처럼 폴짝폴짝 뛰어 이동하는 파드샤를 훌륭하게 소화한 루이제의 얼굴이 만족감에 빛났다. 사랑스러운 처녀 지젤에게 딱 맞는 동작이었다. 이어 치마를 부풀리듯 나풀거리는 발로네도 깔끔하게 마쳤다. 단장도 흡족한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젤론 루이제가 유력해 보였다.
‘이번 시즌은 시달리지 않아도 되겠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기하다, 호명에 대강 발목을 풀어준 후 앞에 나가 담담히 연기를 펼쳤다.
발끝으로 온몸을 지탱하는 정적인 아라베스크 연속 다섯 동작에 이어, 통통 튀는 상쥬망 후 바로 도약하여 하늘을 날 듯 그랑 쥬떼.
짝짝짝!
연기를 마치고 나자 단장의 박수가 터졌다.
“훌륭해.”
“감사합니다.”
루이제처럼 표정 연기를 한 것도, 특별히 동작에 신경을 쓴 것도 아니었으니 으레 하는 칭찬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다음 차례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단장이 윤희를 똑바로 가리켰다.
“이번 지젤은 윤희 너야.”
“네?”
얼떨떨해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리도록 앙다문 루이제의 아랫입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날카로운 고함소리도.
“말도 안 돼요! 윤희의 파드샤에선 전혀 사랑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구요!”
“알아. 루이제. 넌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지젤이 될 거야.”
“그런데 왜 저 계집이 지젤이냐구요!”
그건 윤희도 묻고 싶은 말이었다. 도대체 왜. 왜 하필 저란 말인가. 다른 역은 다 맡아도 지젤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루이제.”
단장의 한껏 날 선 루이제를 부드럽게 달랬다.
“지젤의 포인트는 사랑스러움이 아니라 처절함이야.”
“뭐라고요?”
“윤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지젤이 되겠지. 아니, 이미 가장 슬픈 지젤이야. 동적인 동작이야 거기서 거기지만, 정적인 아라베스크에서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발레리나는 몇 없어.”
단장의 말에 루이제의 고개가 조금씩 숙어지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연습실을 뛰어나갔다. 뒷모습임에도 분을 이기지 못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구체적인 일정 발표 후, 제일 먼저 최환을 찾았다.
“다음 달 말에 한국간대.”
“지젤 축하해. 진짜 자랑스럽다.”
“하고 싶지 않아. 생각해 본다고 했어.”
“그럼 루이제가 더 화냈겠네.”
최환이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마. 화장실까지 쫓아와서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던 걸. 너 따위 정말 지젤처럼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다 보니 실소가 터졌다. 루이제는 알까. 그거야말로 윤희가 바라마지 않는 소원이라는 것을. 이정후가 하얗게 재로 변해버린 날, 윤희의 심장은 까맣게 타버렸다는 것을.
“나는 네가 했으면 좋겠어.”
따라 웃던 최환이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권했다.
“네가 바라던 거잖아. 예전부터. 그 사람도.”
“…….”
“분명 네가 하길 원했을 거야.”
“…….”
이정후가 원했을 거라는 그 한 마디에, 흔들리던 마음이 겨우 잡혔다.* * *‘망할 최환.’
말만 번드르르해서. 최환의 마지막 말에 흔들려 승낙한 제 잘못이다. 하필 공연장이 이곳이었을 줄이야. 이정후의 목숨 줄을 앗아갔던 공연장에서 연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공지가 내려왔겠지만 연습 말고는 관심이 없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결과였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지젤을 맡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 역할에 임하는 길만이 윤희의 앞에 놓였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건 알지만 어쩐지 이정후의 영혼이 와서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녀의 모든 역량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혼마저도 불살라야 하는 이유였다.
“윤희, 대단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야! 들려? 이 함성은 다 너를 위한 거야!”
연기에 몰입해서인지 마지막 날은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잔뜩 들뜬 단장의 모습과 이제 다 끝나간다는 후련함, 그러면서도 마지막인 만큼 최고로 마무리하겠다는 욕심과 다짐, 그리고 긴장감 등이 어우러져 대기실의 분위기도 이전과는 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 남미 쪽 어때? 아무 생각 말고 쉬다 오자.’
제 모든 걸 쏟아부은 탓일까. 고작 일주일 연기했을 뿐인데 점점 지젤의 유령처럼 변해간다고 최환이 해쓱해진 볼을 쓰다듬으면서 여행을 제안했다. 이미 동거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단둘이 여행을 간다는 건 어쩐지 망설여져 대답을 하고 있지 않자, 일단은 공연에 집중하라며 화제를 돌렸었다.
‘오늘 마지막 무대가 끝나고 나면 답을 내려줘야겠지.’
최환은 지나가듯 무심하게 말을 꺼냈지만, 긴장한 듯 울렁이던 목울대에서 여행에 다녀온 후엔 둘의 관계가 사뭇 달라져 있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윤희, 준비 다 됐어?”
“응. 이것만 좀 조여 줘.”
윤희의 몸에 딱 맞던 지젤의 하늘하늘한 치마가 일주일새 헐렁해졌다. 허리 부분을 단단히 조여 준 안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무 무리한 것 아냐? 야위었어.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옷이 늘어난 걸 거야.”
“그럴 리가. 아무튼 굉장해, 윤희. 루이제도 어젠 은근히 네 칭찬을 하던걸. 비극적인 분위기만큼은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면서.”
“……고마워.”
비극이 어울리는 삶이라. 잠시 곱씹어 보다가 대기를 알리는 목소리에 장막 뒤에 자리를 잡고 포즈를 취했다. 검붉은 막이 서서히 올라갔다.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음악이 시작됨과 동시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윤희를 비췄다. 불빛이 켜지기 전에 잠시 하얗고 어깨가 넓은 그의 모습을 객석에서 발견한 것도 같다. 착각이겠지만, 정말로 그가 있다면 제 몸이 산산이 부서져도 좋으니 모든 걸 바쳐 보여주고 싶다. 맹세컨대 그날 이후 단 한 순간도 이정후를 놓아본 적이 없는 애타는 제 심정을.
1막의 마지막 장 mad scene. 사랑하는 알브레히트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 미쳐가는 지젤. 처음 Ange noir에 발 들였을 때, 첫 손님이 되어달라고 빌자 끝끝내 모진 말과 함께 뒤돌아섰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점점 미쳐가는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피해 좌절하며 바닥에 뒹구는 동작에 서슴없이 차가운 무대에 몸을 던져 굴리자 깜짝 놀랐는지 객석에서 신음이 들여왔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아프지만 감히 그때의 고통에 비할까. 완전히 실성한 지젤을 비추던 조명이 꺼지고 이어서 무대 전체가 어둠에 휩싸이자 귀를 찢을 듯한 박수 소리만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1막이 끝나고 20분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화장을 점검하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분위기에 눌려 아무도 섣불리 윤희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루이제를 제외하곤.
“네가 진짜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
“뭐, 칭찬이야.”
“고마워. 네 마르타도 멋져.”
루이제가 연기하는 윌리들의 여왕, 마르타의 독무도 꽤 호평받고 있다. 냉혹한 마르타의 절제된 춤사위가 특히 돋보인다는 기사를 읽은 루이제의 멋진 호박색 눈동자는 하루 종일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럼 수고해.”
“너도, 수고.”
짧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심호흡을 하며 2막을 위해 숨을 골랐다.
죽은 지젤의 영혼이라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알브레히트. 비정한 유령 무리에게서 구해내기 위해 지젤은 밤새도록 춤을 춰 윌리들의 시선을 따돌린다.
‘있잖아요, 그날 왜 그랬어요?’
알브레히트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당신은 어째서, 왜 그렇게 가버린 건데요. 그거 알아요? 전 당신이 바라는 지젤이 될 수 없어요. 당신 없는 세상에서 의미 없는 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젤 자격 박탈인걸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광기,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일념이 뒤섞인 처절한 춤사위가 끝나고 마침내 새벽이 오자 윌리들이 빛에 쫓겨 사라진다. 이젠 알브레히트와도 영영 이별할 차례. 안식처로 돌아가는 지젤을 향해 뻗는 간절한 손끝과 생사를 달리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떠나야 하는 가련한 지젤의 영혼이 교차됐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 뺨을 뜨겁게 적셨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어. 다시는. 혼령이라도 좋으니 찾아와만 준다면 좋으련만. 그럼 새벽빛 속에 사라져가는 지젤을 향해 알브레히트가 그랬던 것처럼, 목이 잠겨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고백하고 또 고백할 텐데. 그에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고백을.
장엄한 연주가 끝나고 조명이 모두 꺼졌다. 객석은 쥐죽은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고요함 속에 서서히 막이 내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다시 한 번 이정후를 똑 닮은 인영이 잡혔다. 눈을 깜박여 찾으려 하지만 이미 막이 다 내려진 상태였다.
다시 막이 오르고 무대 인사를 하는 동안 허리를 숙이는 것도 잊고 정신없이 객석을 둘러보지만 발견할 수 없다. 헛것이라도 본 걸까. 뒤늦게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정말 그의 영혼이 절 보러 온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윤희, 정말 뒤풀이 안 올 거야?”
“미안. 완전히 탈진 상태야. 단장님껜 이미 말씀드렸어.”
“그래도 네가 주인공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다 똑같은 주인공이야. 정말 도저히 못 갈 것 같아.”
“알았어. 그럼 쉬어.”
마지막까지 뒤풀이에 가자며 조르던 안나 마저 떠난 대기실. 사방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최환은 제가 뒤풀이에 가는 줄 알고 미리 숙소에 가 있겠다고 했으니. 어쩌면 2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 밤은 완전히 혼자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방해받지 않고 자고 싶어.’
와인이라도 한 잔 홀짝거리면 딱 좋겠다. 일부러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고 대강 둘둘 뭉쳐 가방에 쑤셔 넣은 후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었다. 긴 통로 끝, 관객도, 공연 팀도, 관계자도 모두 빠져나가 아무도 없는 홀을 작은 실내등만이 비추고 있다. 아니, 저 말고도 한 사람이 아직 홀에 남아있다. 미처 떼지 못한 포스터가 줄지어 늘어선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자세히 보니 기댄 게 아니라 포스터에 천천히 입술을 맞추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구지.’
실내등이 흐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윤희가 기억하고 있는 게 맞다면 저쪽 벽에 걸린 건 지젤의 단독 포스터, 그러니까 윤희의 단독 포스터였다.
‘팬인가.’
만약 저를 알아보면 인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싶었다. 지금은 도저히 누굴 상대할 기분이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복도를 되짚어 돌아가 조금 더 대기실에 있다가 오기로 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때까지도 포스터에 입 맞추던 고개가 서서히 떨어졌다. 문득 돌아본 건,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옆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아!”
좀 더 상체를 기울여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절로 짧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건,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정후가 여기 있단 말인가.
“…….”
상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인 듯 놀란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
윤희는 알까. 공연하는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절 보러 오야가 다녀갔다는 것을. 공연이 끝난 후 다른 이를 통해서라도 꽃다발을 전해줄까 말까 수십 번을 망설이다, 결국 모두 빠져나간 틈을 타 포스터 앞에만 두고 갔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마음이 수백 송이, 수천 송이 꽃이 되어 덧없이 이울어 갔다는 것을.
오늘도 받아 줄 이 없는 붉은 꽃다발이 뒷좌석에 실렸다. 공연이 끝나면 윤희는 다시 파리로 돌아갈 테고, 오야는 혼자 남아 잔을 기울이다 술기운에 잠드는 날이 또다시 반복되겠지.
‘젠장.’
오늘도 어두운 홀 안에 서서 몇 시간이고 홀린 듯이 포스터 앞에만 서 있을 오야를 생각하니, 석우의 속이 다시 쓰려오기 시작했다. 포스터 안에서조차도 뒷모습만 보여주는 윤희건만, 무에 그리 예쁘다고 질리지도 않고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지.
“그렇게 최고, 최고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뒤틀린 속이 결국 빈정거림을 낳았다. 그 새벽, 칼에 맞은 오야가 죽은 줄로만 알고 허둥지둥 들어간 중환자실에서 저에게 뭐라고 했더라.
‘석우라면 있을 줄 알았지.’
그래, 저라면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힘겨워 보이지만 안정적인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이정후가 좋아하는 윤희를 데려와야겠단 생각이 앞섰다.
‘윤희도 밖에 있는데, 지금 당장 데리고 오겠습니다.’
허겁지겁 왔던 길을 돌아 나가려 하자, 누워있는 와중에도 제 손을 꼭 잡아 세웠던가.
‘석우, 지금부터 난 죽은 사람이야.’
이어지는 말은 실로 기가 막힌 것들뿐이어서 석우 자신은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실은 아까부터 정신이 들어 있었어.’
‘…….’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도 계속 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
‘복수가 복수를 낳고, 칼부림이 또 칼부림을 낳고.’
‘…….’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살겠지. 윤희 말이야, 내 옆에 있으면.’
‘…….’
‘결국, 내가 없어지면 끝날 일이야.’
넋을 놓고 있다가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더랬다.
‘후환이 없도록 모두 처리하면 괜찮을 겁니다.’
다급하게 설득하자 진지하게 물음이 돌아왔었다.
‘아무리 그동안 생판 남처럼 지냈다 해도 자기 혈육을 건드린 나를 윤희가 편히 볼 수 있을까?’
‘그거야…….’
‘좋아, 그렇게 다 처리해서 아무 원한 관계도 남지 않았다 쳐. 석우, 난 뭐지?’
뭐라니. 그런 질문은 머릿속에 담아 본 적도 없었다.
‘오야는, 오야께서는.’
더듬거리는 석우를 보며 피식 웃은 이정후가 단호하게 결론지었다.
‘그 애는 앞으로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 될 거야. 그러니 나 같은 어둠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게 좋아.’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차근차근 지시하는 장례절차가 몹시도 상세해서 어쩌면 오래전부터 윤희를 곁에서 떼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시기가 이번 일로 앞당겨졌을 뿐이라고.
‘화장이 좋겠어. 아예 세상에선 없어졌다고 믿게 해.’
‘…….’
‘간소하게 진행하고.’
‘…….’
‘그게 뒷골목 인생에 어울리는 마지막 아니겠어.’
듣는 석우는 온통 가슴이 먹먹해져서 대답조차 못 하고 듣고 있는데, 말을 마친 이정후는 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석우만 믿을게. 알지? 나한텐 석우 밖에 없다니까.’
뭐라고 대답하고 나왔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중환자실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윤희의 말간 눈동자를 보자마자 울음이 왁, 터져 나왔던 것밖에는. 윤희의 미래고 뭐고, 석우에게는 그저 스스로 그림자가 된 제 주인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간소하다 못해 초라한 가짜 장례가 끝나고, 눈속임용 횟가루가 담긴 단지를 들고 강으로 향하던 새벽엔 사방에 안개가 자욱했었다. 바로 지금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윤희는 2년 전과 달리 오야의 바람처럼 최고가 되었다는 점뿐.
슬픔에 몸서리치다 혼절한다는 점에선 지젤을 연기하는 지금이나 당시의 윤희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뭐가 되었건, 오늘이 지나면 오야는 다시금 스스로가 만든 암막 속에 숨겠지. 윤희는 아무 일 없었던 듯 제자리로 돌아갈 테고. 어쩐지 배알이 꼬였다. 오야의 그림자가 짙어 제가 빛나는 줄도 모르고.
“애초에 그냥 적당히 키워서 팔아버릴 걸, 공들이긴 왜 그렇게 공들여 키웠답니까?”
윤희가 최고가 되었으니 이제 만족하냐는 앞선 물음에 별 대답이 없자, 뒤를 향해 다시 한 번 불퉁한 소리를 던진다. 혼자 지난날을 곱씹으며 야속함이 커진 까닭이었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을 하극상이지만, 2년간 독한 술을 대작하면서 간도 같이 부은 모양이다.
“그러게.”
석우의 서운함을 읽은 탓인지, 말투가 부드러웠다.
“나도 모르게 정신 차리니까 이미 그러고 있던걸.”
“그게 뭡니까.”
“가장 좋은 것만 해주고 싶었어.”
윤희하고 함께 지낼 때를 생각하는지,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엷게 걸렸다. 그 모습에 속이 상해 괜히 애꿎은 가속페달만 세게 눌러댄 덕분에 공연장엔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다.
“끝나고 연락할게.”
“네,”
마지막이니만큼 뜻깊은 시간 보내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혀끝에서나 맴돌 뿐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석우는 일없이 주변을 배회했다. 대중가요가 익숙한 석우의 귀에 고전 음악 같은 건 잘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처음엔 나비처럼 사뿐사뿐한 움직임이 신기해 집중해 보다가도 곧 번번이 잠들기 일쑤라, 표 값을 날리느니 주변 순찰을 자처한 것이다.
사실 순찰이라 봤자 이제 조심할 건 아무것도 없다. 이정후의 재산을 얼마간 정리해서 환과 윤희에게 떼어준 후, 함께 유학을 보내고 나자, 그 보답이었는지 환의 생부인 칼자국이 청룡파 두목을 끝까지 추적해 기어이 처단했다는 전언을 몇 개월 후 보내왔었다. 증거물과 함께. 그것으로 모든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졌다.
잠시 회상하며 주위를 조금 어슬렁거리다 차로 돌아와 의자를 뒤로 길게 빼 누웠다. 시간을 확인하니 공연이 끝나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
‘끝나고 보통 한 시간 정도 후에 단원들이 이동하니까 두 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지.’
아니, 오늘은 마지막이니까 좀 더 남아서 여운을 즐기려나? 윤희는 보통 거의 마지막에 환과 함께 나오곤 했었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환이 다정스레 뭐라고 속삭이면, 잔뜩 지친 얼굴의 윤희가 바닥을 응시하면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일주일 내내 볼 수 있었다. 윤희의 입에 걸린 억지웃음이 석우에게 조금 위로가 되었다면 심보가 너무 고약한 걸까.
오야의 말이라면 하늘같이 떠받드는 석우지만, 환을 윤희 곁에 붙이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심하게 반대했었다. 그저 곁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생판 남인 자기도 이렇게 속이 뒤집혀 불에 덴 마냥 홧홧한데, 제 여자 옆에 다른 놈을 세우는 그 심정이 오죽 괴로울까 싶어서. 최환도 그 제안만큼은 의외였던지, 미심쩍은 눈초리로 물어왔었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뭔데요.”
그건 석우가 묻고 싶은 말이었으나, 꾹 참고 오야가 했던 답을 그대로 읊어줬었다.
“너 때문이 아니라, 윤희를 위해서야.”
“…….”
“어쨌거나 이제 너만큼 걜 챙기고 아껴줄 사람도 없을 테니까.”
석우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환은 수긍한 모양이었다. 이내 알았다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벌떡!
생각하니 열불이 나 자리에 바로 앉았다. 그새 공연이 끝났는지 둘씩 셋씩 짝을 지어 저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르르 한 무더기의 인파가 지나고 인적이 드물어져, 석우도 모시러 갈 채비를 마쳤다.
포스터 앞에 서 있는 뒷모습이 쓸쓸하지 않도록 조용히 그늘진 아래 지키고 서 있는 것이 석우의 할 일이었다.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거슬러 가다 보니 멀찍이 윤희가 속한 발레 단원들이 왁자지껄 몰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 중에 윤희도 있겠지. 막눈인 석우가 보기에도 처연하고 아름답던 지젤이.
‘일주일간 수고했다.’
속으로 인사를 건네고 홀 쪽에 들어서자, 예상대로 미등 아래 이정후의 그림자가 외로이 늘어졌다. 다정하게 마주 선 모습이 마치 포스터 속의 여인과 대화라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행여 방해가 될까 입구의 가장 어두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복도의 불도 다 꺼지고, 홀 안의 전등도 몇 개만을 남겨 놓고 있다. 완벽한 적막 속, 한참을 미동 없던 오야가 문득 서서히 몸을 기울였다. 포스터 속 계집의 곧추세운 발등에 입술이 닿았다. 가슴이 너무 아파 차마 볼 수가 없어, 석우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바짝 힘준 눈꺼풀을 뚫고 뜨거운 것이 흘러넘쳤다.
‘젠장!’
욕설을 뱉으며 눈을 비비는데, 어두운 복도 저 너머 희미한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눈을 세게 비빈 탓인가, 찬찬히 깜박이며 다시 그 쪽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
별안간 그림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오야도 제가 본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그쪽을 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림자가 주춤거리며 홀 안으로 들어섰다.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크게 놀라 벌어진 눈을 하고서. 동시의 석우의 입도 쩍 벌어졌다.
‘저건!’
윤희다. 남은 단원은 이제 없는 줄 알았는데. 당황한 석우가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상황판단을 하기도 전에 윤희의 두 다리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악령들의 시선을 따돌리려는 지젤처럼, 순식간에 날듯이 달려가 포스터 앞의 남자에게 안겼다. 다시는 놓치지 않으려는 듯 허리를 감은 두 팔이 어찌나 세게 힘을 주었는지 하얗게 질렸다. 이어 절규와도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절규와도 같은 고백이 이어졌다. 애타는 부르짖음에 그때까지도 석상처럼 움직일 줄을 모르던 오야의 손이 천천히 자리를 옮겨 윤희의 뒤통수와 어깨를 감더니, 품에 안고 지그시 눌렀다. 석우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번졌다.* * *“음, 향긋하다. 역시 생화가 제일 좋아, 그죠 아저씨?”
석우가 어깨를 으쓱해 뵌다. 한없이 무뚝뚝하지만, 어떤 꽃다발을 고를까 고민하는 윤희 앞에 꽃집에서 가장 크고 비싼 걸 집어다 계산대 위에 놓은 건 바로 석우다. 비록 계산은 이정후, 그가 했지만.
한 손으론 꽃다발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론 이정후의 팔을 꼭 조여 안았다. 그 날 이후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다시는 저만 두고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 건 여전했다.
‘또 죽은 척할지 알게 뭐람.’
해서, 부러 감은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제 생각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이정후에게 기대면서.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것까진 좋았는데, 문득 저를 보는 눈빛이 변했다.
‘왜?’
“귀걸이 또 잃어버렸어?”
후우, 신호 대기 중인 틈을 타 뒤를 살피던 석우가 그 말을 듣곤,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년 전, 그날도 그랬다. 이정후의 아파트로 향하는 차안, 말없이 저를 꼭 껴안아 한참을 토닥이다 마침내 입을 연 첫마디는 이랬다.
‘귀걸이 잃어버렸어?’
은근 오야의 첫 마디가 어떨 것인가 기대하고 있었던 듯, 얼굴은 안 보이지만 운전석에 앉아 눈에 띄게 김샌 티를 내던 석우. 그가 줬던 마지막 선물을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른 가방 깊숙한 곳, 소중히 보관해 두었던 보석함을 꺼내 보이자 만족스럽게 웃은 이정후가 귀걸이를 직접 귀에 걸어주었었다.
오늘은 다이아가 촘촘히 박힌 화려한 레이스 모양 목걸이에 역시 만만치 않게 번쩍이는 티아라 핀까지 했는데도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깜박했어요.”
“석우, 차 세워.”
잠시 갓길에 차를 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이정후의 손엔 작은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저를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급한 마음에 투덜거렸다.
“이러다 늦겠어요.”
“석우가 알아서 잘 밟아 줄 거야. 귀 대.”
볼멘소리를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내용물을 꺼낸다. 차고 있는 티아라와 비슷한 모양의 귀걸이였다.
“또 다이아에요?”
“최고한테는 최고가 어울리니까.”
“누가 이렇게 촌스럽게 목걸이에 귀걸이에 다 하냐구요. 포인트로 한 개만 해야 예쁜데.”
“최고는 최고로 예쁘게 꾸며야지.”
역시 들은 척도 안하는 이정후에, 그만 포기하고 그가 보석 사러 다녀오는 동안 잠시 풀었던 팔을 다시 감아 안았다. 단단한 팔의 온기에 기분이 좋아져 그대로 고개를 들어 올려 보자, 기다렸다는 듯 촉, 가벼운 입맞춤이 이마에 떨어졌다.
하아아.
더더욱 깊어진 석우의 한숨 소리와 함께 창밖 풍경도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갔다. 도착한 곳은 환의 데뷔작인 ‘Eclipse’ 공연장이었다. 현대 무용극 중에서도 전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표현법이 돋보인다는 평답게 역동적인 춤사위가 무대를 가득 메웠다. 특히 극 막바지에 이르러 달에게 물어뜯긴 해를 묘사하는 최환의 솔로 부분은 평론가들이 공통적으로 손꼽는 압권 중의 압권이었다.
“저 사람 신들린 것 같아.”
“어떻게 춤을 저렇게 추지?”
공연이 끝나자 옆에 앉은 사람이 최환을 가리키며 동료에게 속삭이는 모습을 보자, 괜히 제가 칭찬을 들은 마냥 뿌듯해졌다. 서둘러 대기실을 찾아 반갑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최환, 축하해, 정말 멋졌어.”
“어? 강윤희, 혼자 왔어?”
“아니. 둘은 밖에 있어.”
“그렇구나, 와줘서 고마워.”
“당연히 와야지. 네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석우가 골라준 꽃다발을 내밀자, 누가 골랐는지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받아든다. 그 위에 작은 장미 한 송이가 살포시 얹혔다.
“남자끼린 남사스러워서 안 하려고 했는데. 첫 공연이니까.”
“세상에! 권승수! 어떻게 시간 냈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찾지 못한 승수는 여전히 방황 중이다. 이정후가 여행비용을 대준다고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다가 석우 아저씨가 ‘춘재의 몫‘이라며 내민 통장을 한참을 바라보다 받아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이라 해도, 이정후의 곁에 있는 이상 윤희도 승수가 불편한 건 매한가지라 얼른 둘에게 안녕을 고하고 차로 돌아갔다.
“축하 잘하고 왔어?”
“네. 꽃다발이 특히 마음에 든대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이정후의 팔을 꼭 감아 안았다. 그가 제 옆에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확인하기 위해. 그러다 팔만으로는 아쉬워 좀 더 자세를 낮춰 허리를 안고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등을 몇 번 다독이다가 귀걸이와 함께 도톰한 살을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는 긴 손가락. 손닿은 곳이 간지럽더니 점차 뜨겁게 열이 올라 숨이 밭아졌다.
흠흠.
석우가 헛기침을 내더니,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하늘하늘 고운 연등이 곳곳을 수놓은 고즈넉한 절간. 법당 뒤쪽, 고불고불한 길을 따라가면, 가장 깊숙한 암자에 그의 어머니가 머문다고 했다. 창호 바른 문을 사이에 둔 모자가 소리 없이 대화하는 그곳. 오늘도 끝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 같은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석우가 조금은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전해주었다.
이정후의 손에 의지해 돌아 내려오는 어둑한 산길, 자정을 맞아 하나둘씩 켜지는 불빛 아래 마주 웃는 두 얼굴이 환했다.연등이 밝았다.
외전 – 붉은 밤
남자의 어깨가 반쯤 기울어 있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팔을 휘감아 안은 여자 때문이었다. 그건 남자를 다시 만난 후 여자에게 새로 생긴 습관이기도 했다. 자세가 꽤 불편할 텐데도 남자는 내색 한 번 없이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여자가 무어라 속살거릴 때마다 남자의 눈매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가끔가다 시원한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워낙 말수 적고 표현 적은 남자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인데, 여자는 그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종종 석우에게 불평을 늘어놓곤 했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건 석우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유해졌다고는 하나 이정후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오야의 편을 들고 싶은 건 윤희를 담은 눈빛이 깊어서였다. 깊다 한들 다 같은 깊이가 아니듯, 애정의 깊이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단언컨대 오야의 깊이를 따라갈 사랑은 없다. 아무리 깊고 깊은 바다라 해도 그 저변엔 바다를 떠안은 대지가 있기 마련이듯.
이런 얘기를 섣불리 입에 올리지 않는 건 함부로 그 마음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야가 표현이 적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까? 한 귀퉁이라도 내보일라치면 뒤따라오는 감정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새삼 궁금해져 멀찍이서나마 다시금 둘을 들여다보는데, 때마침 활짝 핀 연인의 웃음꽃에 왜 웃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따라 웃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러웠다. 그 사건이 있기 전엔 음지에 놓인 식물처럼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던 두 사람이었다. 지금은 햇살 받은 새순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너무 화사해서 눈이 부실 정도라 하면 지나친 걸까.
무튼 그때의 둘과 지금의 둘이 다른 사람이 아닐진대 분위기는 정 반대라 해도 좋을 정도니, 오랫동안 둘을 보아온 석우는 그게 신기하면서도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마냥 감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었다. 얘기를 마치고 이정후와 떨어져 이쪽으로 오는 윤희를 낚듯이 잡아챘다.
“알아냈어?”
“아니요. 필요한 거 없대요.”
“필요하지 않더라도 갖고 싶은 건 있을 거 아냐?”
대답 대신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윤희를 보며 석우는 실로 오랜만에 가슴이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하긴.’
운영하고 있는 바만 해도 벌써 몇 개인가. 원하는 건 굳이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을 기다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생일 선물로 딱히 필요한 게 없다는 사정도 이해가 됐다.
“아무튼 더 분발해보자고. 나도 더 알아볼 테니까.”
“알겠어요.”
분발해보자곤 했지만,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가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윤희가 쳐놓은 것이었다. 사실 생일 같은 건 이정후를 비롯해 전 오야는 물론이요, 자신 생일조차도 한 번 챙겨본 적 없지만 윤희가 워낙 동동거리니 괜히 자기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는 석우였다.윤희로 말할 것 같으면 압박을 넘어 초조할 지경이었다. 재회 후 처음 맞는 그의 생일이었다. 석우는 언제부터 이정후의 생일을 챙겼었냐며 의아해했지만, 윤희로서는 그동안 어째서 생일을 챙기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그만큼 윤희가 수동적이었다는 방증이었다.
이정후를 영영 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후회했던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서, 추억할만한 거리를 만들지 않아서, 그가 이끄는 대로 받기만 해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고백할 텐데. 시시때때로 솟아오르는 제 마음을 고르고 고른 예쁜 말로 들려줄 텐데. 평생 간직할 소중한 기억을 가능한 많이 쌓을 텐데.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거짓말처럼 그를 제게 돌려주었다.
기적 같은 재회 후 다짐했던 것을 하나하나 실천 중인 윤희인 만큼 일 년에 하루뿐인 그의 생일을 맞아 특별한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데, 이정후는 요지부동이었다. 한사코 가지고 싶은 건 너뿐이라는 말장난이나 해가며 안달 난 그녀의 모습을 즐겼다.
“전 이미 가졌잖아요. 다른 거.”
“아직 부족한데.”
기어이 눈을 흘기게 만든다. 있는 힘껏 째려보는 윤희의 눈에 항복하듯 양손을 든 이정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럼, 음…….”
지금껏 장난으로 일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윤희의 가슴이 두근댔다. 무엇을 원하든 최고로 좋은 걸 선물할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선물할 때 그리하듯이. 하지만 잠시나마 부풀었던 기대감은 이어지는 짤막한 소원에 파삭 사그라졌다.
“잠.”
“…….”
“푹 자고 싶어.”
“그런 거 말고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윤희의 공연 스케줄에 따라 파리에서 런던으로, 런던에서 뉴욕으로, 뉴욕에서 다시 파리로 동행하는 그니까. 윤희는 공연이 끝나면 쉴 수나 있지 이정후는 틈틈이 한국에 들러서 일을 처리하곤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단 표현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생일 선물로 잠이라니, 그걸 어떻게 선물해? 대신 자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실망으로 툴툴대는 윤희가 귀엽다는 듯 쿡쿡 웃는 모습에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생일날 확 다른 약속이나 잡아버릴까 보다.”
그제야 내내 띠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정색한 얼굴을 보니 은근 기분이 풀렸다. 이제 웃는 건 이쪽이다.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배짱을 부렸다.
“그럼 혼자서 잠 푹 잘 수 있고 좋겠네요.”
어깨까지 으쓱 올린 윤희의 모습에 정색하고 있던 이정후가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너무 여유 부렸나. 다시 걸린 웃음에 속이 상했다.
“됐어요, 됐어. 부족한 거 없다 이거죠? 그럼 케이크나 사고 말래요. 아니야, 그것도 안 살래. 필요한 것도 없는데 케이크는 사서 뭐 해?”
“케이크 괜찮네.”
“나만 애 닳지. 죽었다고 속였을 때부터 알아봤어. 사실은 은근히 혹 뗐다고 좋아한 거 아녜요?”
“재밌네. 더 해 봐.”
“뭐라고요?”
기가 막혀서 반문하자 더 기막힌 반응이 돌아왔다. 어린애 취급하듯 볼을 꼬집는 게 아닌가.
“귀여워서 그래.”
그야말로 김이 샜다. 정말 다른 약속 잡아버릴까 보다. 그래도 다시 만나고 첫 생일인데, 따로 보낸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서운했다.
“나만 좋아하나 봐.”
“서운한데.”
“몰라요, 미워요.”
“나도 미워해.”
“그 미워해 말고요! 정말 밉다고요! 꼴도 보기 싫은 미워해 라고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윤희의 안색을 살피며 이정후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원하는 게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뭔데요?”
이제 와서 달랜답시고 아무거나 대기만 해봐라. 그땐 진짜 혼자서 실컷 잠이나 자게 해주리라. 단단히 각오하고 귀를 기울였는데 뜻밖의 단어가 들려왔다.
“그날.”
“그날? 그게 뭐예요.”
“우리 재회한 날.”
“공연장에서요?”
끄덕, 이정후의 고개가 가볍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날 뭐요.”
“그걸 알아내는 건 숙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그날을 어떻게 선물한단 말인가. 다시 만났을 때의 그 벅찬 마음을 느끼게 해달라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리송해 더는 얘기하지 않겠다는 이정후를 졸랐다.
“정확히 뭘 원하는 건데요? 네? 알면 나 정말 잘할 자신 있는데.”
“숙제래도.”
“힌트라도 줘봐요, 그럼. 너무 어렵단 말이에요. 숙제 포기하는 꼴 보고 싶어요?”
“그날.”
“네, 그날, 어?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열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목덜미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물에 대해 캐내느라 상태가 안 좋은지 미처 몰랐다. 발끝을 세우며 이마를 짚는 윤희를 피해 이정후가 마저 말을 맺었다. 그마저도 말끝은 흐렸지만.
“그날 네가 나 묶어놓고…….”
“아…….”
그제야 붉어진 얼굴이 아픈 것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윤희도 같은 이유로 어느새 그와 꼭 닮은 얼굴색을 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그답지 않게 시선까지 피한 채였다. 한편으론 신기했다.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나저나…….’
그의 취향이 당하는 쪽이었다니. 의외였다. 관계에 있어서 언제나 주도적으로 움직였던 그였으므로. 뿐인가, 윤희가 흐느끼기라도 하면 눈에 띄게 기꺼워하지 않았나.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맺히는 날엔 거센 허리놀림에 다음날 반나절은 침대에서 꼬박 앓아야 할 정도였다.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눈치가 뭐람. 아예 그런 쪽으로는 생각도 하지 못한걸.
그렇다면 이토록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철저히 숨겨왔던 취향을 선물로 받고 싶다니, 완벽하게 보답하리라 다짐했다. 그러려면 빈틈없는 준비는 필수.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가만히 앉아 ‘그날’을 되짚었다.* * *운명처럼 다시 만난 연인이 향한 곳은 이정후의 아파트였다. 새 거처는 인적 드문 외곽에 있던 본가와 달리 도심 한가운데 자리해 있었다. 높이 솟은 빌딩숲과 늦도록 꺼질 줄 모르는 조명이 거울처럼 비치는 강이 내려다보였다. 멋진 야경에 감탄하던 순간에도 윤희의 두 팔은 그를 꼭 감아 안고 있었다.
“커피 타줄게. 앉아있어.”
“싫어요.”
공연장에서 이곳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찰싹 붙어 왔지만, 그래서 그의 체온도, 숨결도, 눈빛도,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생생히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손을 놔 버리면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이정후가 타는 커피라니. 겸사겸사 매달려 있는 윤희에게 한 팔을 맡긴 이정후가 익숙하게 물을 끓이고 원두를 걸러 커피를 내렸다. 군더더기 없는 솜씨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짐없이 지켜보는 윤희의 이마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기습적이었지만 서두르지도 않았다.
촉, 가벼운 접촉에 어쩐지 목이 탔다. 동시에 그가 몹시도 고팠다. 간간이 저를 살피는 조심스러운 시선이 언제까지나 제게 딱 고정되었으면 했다. 오로지 저만 바라보도록, 다시는 제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두고 싶다는 열망이 윤희를 휘감았다. 저도 모르게 스카프를 풀어낸 건 순전히 충동이었다.
“나만 봐요.”
주의 깊게 잔을 들여다보는 그의 두 뺨을 붙잡아 완전히 제게 고정시켰다. 시선이 마주치기 무섭게 입술을 물었다. 조절을 못 하고 세게 빨아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지만, 이정후는 신음 한 번 흘리니 않고 순순히 응했다. 가까운 의자에 밀어 앉힌 후, 서툰 손놀림으로 양 손목을 모아 묶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윤희의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흥미진진하단 표정을 하고서.
“장난치는 거 아녜요, 나.”
이쪽은 심각한데 마냥 미소 띤 얼굴에 오기가 솟았다. 그대로 무릎에 걸터앉아 뒷목을 감싸 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귓불에서 쇄골까지 이어지는 빗근을 잘근잘근 씹어 내려갔다. 언젠가 그가 제게 그러했듯이.
처음 그와 관계를 나눌 때였다.
‘손님 앞에서 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면서요. 안 울 거예요. 손님이니까.’
‘그럼 손님이 만족할 때까지. 어디 한 번 제대로 응해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울었던가. 그나마도 힘에 겨워 흐느끼는 윤희를 고쳐 안은 후엔 그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였던 그를 기억했다. 낙인을 찍듯이 집요하게 그녀를 탐하던 입술도. 그가 남겼던 무수한 낙인 중 하나를 되돌려 줄 때였다. 이정후, 당신도 내 거라는 증거로.
셔츠 단추를 풀고 상체를 숙여 가장 박동이 큰 곳을 찾아냈다. 유연하게 휜 허리에 작은 탄성이 들려왔다. 부어오른 입술을 심장 바로 위 살갗에 대고 진하게 빨아들였다. 혀를 둥글려 간질이다가 이를 세워 기습적으로 깨물었다. 순간, 이정후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문득 올려다본 시야에 붉어진 눈자위가 잡혔다. 여유 같은 건 흔적조차 없었다. 갈급을 이기지 못하고 좁아진 미간에 쾌감을 느꼈다. 비록 승리에 도취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어, 어어?”
이정후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윤희를 번쩍 들쳐 업은 건 순식간이었다.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나서도 몇 걸음이 지나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했다.
“손 언제 풀었어요?”
“처음부터.”
뭐라 대꾸할 새도 없이 하늘이 빙 돌았다. 침대에 윤희를 눕힌 이정후가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서로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처음 맞이한 단잠이었다.“어휴.”
당시를 회상하자니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요란하게 손부채질을 해댔다. 굳이 그날을 콕 집어 선물해 달라니, 이번에는 단순히 입맞춤만으로 그치지 않으리라. 요는, 절대 매듭이 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정말 최선을 다해 꽁꽁 묶었는걸.’
지금이라고 해서 더 잘 묶을 자신도 없었다. 아직도 이정후가 어떻게 스카프를 풀었는지 수수께끼였으니.
‘어쩐다.’
고심 끝에 석우를 찾았다. 석우라면 한때 그쪽 세계에 몸담았던 만큼 사람 하나 꼼짝 못 하도록 묶는 것쯤이야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판단에서였다.
“꼼짝 못 하도록 묶는 법?”
석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팍 구겨졌다.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쓰게?”
누군가 윤희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성큼 다가와선 어깨를 꽉 잡더니 진지하게 눈썹을 치켰다.
“차라리 나한테 말해라.”
어떤 놈인지 다신 못된 짓 못 하게 손봐줄 테다, 무언의 다짐이 전해졌다. 한창 때 성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험악한 눈빛에 윤희가 얼른 둘러댔다.
“그냥 골탕 좀 먹이려고요. 장난으로요.”
“장난?”
“네, 장난이요, 장난.”
“…….”
“진짜로요.”
여전히 미심쩍어 하는 석우를 윤희가 최선을 다해 안심시켰다.
“아주 잠깐만 놀려주려고 하는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런 거라면 알려줄 수는 있다만.”
“정말요?”
곧바로 강습이 시작됐다. 생각보다 단순했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있었다. 같은 매듭이어도 아귀힘이 달라 아무리 당겨 묶어도 윤희의 매듭은 느슨해졌다. 몇 번이고 윤희의 매듭을 풀어내는 석우를 보며 맥이 탁 풀렸다. 코가 쑥 빠진 윤희가 안 되어 보였는지 석우가 다른 제안을 했다.
“말이야, 세게 묶는다 해도 놈이 발버둥이라도 치면 도리어 당하기 십상이거든. 어떤 놈이 얌전히 묶으라고 대주고 있겠어?”
그 어떤 놈이라면 어디 한 번 해보라며 대주고 있을 게 분명하지만 윤희는 잠자코 석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깟 끈 대신 아주 쉽고 빠른 방법이 있지.”
“그게 뭔데요?”
화색이 돌기 시작한 윤희의 낯에 석우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펴 보였다.
“수갑.”
“수갑……이요?”
한 쌍의 차가운 쇠붙이를 떠올린 윤희가 잠시 당황했다. 좀 과하지 않나. 그러다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시간이 촉박한 지금으로선 달리 대안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경찰들이나 갖고 있는 것 아닌가. 이 방법이나 저 방법이나 요원하긴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의견을 내준 석우의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실망을 누르며 물었다.
“그걸 구할 수 있어요?”
“당장 오늘 밤이라도 가능해.”
“진짜요? 와, 다행이다!”
“…….”
수갑을 구할 수 있느냐며 조심스럽게 묻던 때와는 딴판으로 눈에 띄게 환해진 윤희의 얼굴을 살피는 석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장난이라곤 하지만 장난이 아닌 게 분명했다.
‘진짜로 필요한 거다. 그것도 절실하게.’
그렇지 않고선 이럴 순 없는 거다. 이것 봐라. 오야에겐 비밀이라며 눈까지 찡긋거리지 않는가. 생전 안하던 짓까지 하는 걸 보니 차마 말하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비밀 꼭 지켜주셔야 해요! 아셨죠?”
“알았다.”
석우는 생각이상으로 윤희를 아꼈다. 어떨 때는 오야보다 윤희를 더 위했다. 충성심에서 비롯된 마음이니만큼 이번 일을 좌시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저씨, 꼭이에요?”
“알았대도.”
때문에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당연히 이정후는 예외였다.“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심각하다 못해 비장감이 감도는 석우를 바라보는 이정후의 눈빛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누군가 윤희를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뭔데?”
대답 대신 잠자코 수갑을 내밀어 보였다. 번쩍이는 은빛 사슬에 비친 이정후의 표정이 묘했다. 어처구니없어 보이기도 했고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몰랐단 얘기로군.’
멋대로 결론 내린 석우가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요절을 낼 것처럼 으르딱딱거렸다.
“대체 어떤 망할 자식일까요? 혹시 짐작 가는 놈이라도?”
“……전혀.”
“허!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당장에 박살을 낼 텐데.”
“…….”
어두워진 이정후의 낯빛에 석우의 목소리도 더욱 음습해졌다.
“듣기론 질투도 많았다고 하던데, 역시 같은 단원 중 하나겠지요. 전에도 있었잖습니까? 그, 이름이 뭐였더라…….”
“루이제.”
“맞습니다. 그런 이름이었죠. 가만, 혹시 루이제일까요?”
석우의 추측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이정후가 신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섣부른 의심은 옳지 않아.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지. 더는 신경 쓸 것 없어. 석우, 알았지?”
오야의 태도가 유난히 다정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하지만 그 이면엔 더 이상의 관여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냉정함이 깔려 있었다. 그 이중성에 부르르 몸을 떨면서도 한편으론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걱정됐다. 차라리 저에게 걸렸으면 혼쭐만 나고 말 것을, 이 치밀한 남자에게 걸려들었으니 누군지 몰라도 그놈은 이제 끝장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이건 전해주겠습니다.”
보였던 수갑을 다시 챙겨 넣고 막 문을 나서는 석우를, 이정후가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말씀하십시오.”
“혹시 스페어 키 있어?”
“네, 여기.”
실핀처럼 가느다란 열쇠를 받아든 이정후가 뭘 생각하는지 씩 웃었다. 벌써 윤희를 괴롭히는 놈을 어떻게 손볼지 계획이 선 모양이다. 전율이 흐르는 가운데에도 요즘 줄곧 자신을 괴롭혀 온 한 가지를 떠올린 석우가 물었다.
“참, 생일선물로 정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거한 건 아니더라도, 아니 거한 거라도 괜찮습니다만.”
“이미 받았어.”
“네?”
“그러니까 나가 봐.”
두 번은 말하지 않는 오야의 성격을 잘 아는 석우였다. 윤희 건이야 오죽 알아서 잘 처리하랴 싶어 마음이 놓였다. 생일선물도, 자신은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건만 이미 받았다니 어쨌든 한시름 놓았다. 고민거리 두 가지를 한 방에 해결한 석우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한달음에 달려가 윤희에게 수갑을 전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이 정도쯤이야.”
“저기…….”
“얘기 안 했다. 걱정 푹 놔라.”
혹시나 싶은지 안색을 살피는 윤희의 말머리를 뚝 잘라먹으며 안심시켰다. 걱정 푹 놓을 대상은 물론 비밀 유지가 아니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오야와 윤희, 둘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 석우는 뿌듯하다.* * *철컥.
경쾌한 소리에 윤희도 덩달아 의기양양해졌다.
“봤죠?”
수갑 열쇠를 이정후의 눈앞에서 달랑달랑 흔들어 보인 윤희가 보란 듯 뒤로 던졌다. 조그마한 열쇠는 바닥 어딘가에 부딪혀 제 크기처럼 작은 마찰음을 냈다. 동시에 이정후가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손을 뒤로 묶여서, 그것도 수갑에 갇혀 꼼짝도 못 하는 처지에도 여유로운 건 여전하다. 부러 손목을 흔들어 찰카닥거리는 소리를 내곤 윤희를 칭찬했다.
“멋진 선물인데.”
“고마워하긴 아직 일러요.”
“준비한 게 더 있어?”
“그럼요.”
윤희의 장담에 이정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잘하면 귀여움으로 사람도 죽일 수 있겠다는 달콤 살벌한 농담까지 던져가면서. 평소라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을 보며 덩달아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면에 그득한 저 웃음기를 지우고 싶다. 잔뜩 달떠서 끙끙 앓았으면 좋겠다. 이쯤 되고 나니 윤희가 흐느낄 때마다 거칠어지는 이정후의 속내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얼마나 짜릿할까. 쾌락을 이기지 못해 단정한 눈매가 물렁하게 풀어진다면, 눈꼬리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면.
벌써부터 꼬리뼈가 저릿저릿 울리는 걸, 더는 지체하지 않고 벌어진 이정후의 무릎에 가볍게 올라탔다. 타이트한 스커트 자락이 반쯤 말려 허벅지까지 올라갔다.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가려진 다리 사이에 자동적으로 이정후의 시선이 닿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목을 그러안아 귓가에 속삭였다.
“맞춰 봐요.”
“뭐를?”
“나, 입었게요, 안 입었게요.”
줄곧 빙글거리던 입매가 일자로 다물어졌다. 평정심이 흐트러진 게 눈에 보이는데, 아직은 여유가 남았는지 괜한 호기를 부린다.
“어차피 벗을 거 아니었나?”
윤희도 지지 않고 도발했다.
“벗으면, 뭘 할 수나 있어요?”
묶여있는 손목 쪽을 향해 눈썹을 까딱이자 다시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흥, 허세도 지금이 마지막이다. 가소로이 넘기며 지퍼에 손을 댔다.
“난 할 수 있는데.”
그제야 윤희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정후가 서둘러 윤희를 제지했다.
“윤희야.”
아랑곳 않고 드로즈 밖으로 그의 남성을 꺼냈다. 튕겨지다시피 모습을 드러낸 성기는 이미 흉흉하게 솟아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정후가 정신 못 차리도록 희롱해야 했지만, 막상 실물을 대하니 막막해졌다. 입으로 그를 만족시켜준 적은 한 번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눈앞에서 자세히 본 것도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그 동안 제 몸에 드나들었다고? 이렇게 큰 게?
보고도 믿기가 힘들어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윤희의 당혹감을 눈치챈 정후가 부드럽게 달랬다.
“입 맞춰줘. 그거면 돼.”
“…….”
“어서, 정말 그거면 된대도.”
다정한 음성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은 물론 없었다. 기둥을 쥐자 따듯하고 단단한 감촉이 전해졌다.
“윤희야.”
분명 말리려는 의도였을 테지만, 부름을 신호 삼아 눈을 꾹 감고 그의 것을 머금었다. 동시에 손에 쥔 기둥이 꿈틀, 흔들렸다. 그 바람에 혀끝에 둥근 귀두가 닿았다. 단단한 이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핥듯이 굴렸다. 억눌린 신음이 낮게 흘러들었다.
욕심을 내 조금 더 목구멍 쪽으로 밀어 넣었다. 반사적으로 고인 침을 삼키다가 생각보다 훨씬 깊숙이 물게 되었다. 흘러넘친 타액이 손가락 사이를 적셨다.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윤희의 입안을 들락거리게 된 기둥이 번들거렸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서 위로, 움직이는 윤희의 고개에 맞춰 그의 허리가 서서히 따라왔다. 묘한 일이었다. 받는 건 그인데 윤희의 아래가 뜨끈해진 건. 볼이 홀쭉해지도록 빨아들이면, 감응이라도 하듯 질도 힘껏 수축했다. 결국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라선 마치 불덩이가 오르내리는 듯했다.
흥건해진 속옷은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이런 상황은 윤희의 예상 어디에도 없었기에. 의기소침해진 윤희를 눈치챈 정후가 골반을 최대한 뒤로 뺐다.
“힘들지.”
“아니요.”
엄밀히 말하면 힘들었다. 그의 질문 의도와는 다른 의미였기에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갑자기 중단된 행위에 바르르 경련하던 질구에서 왈칵, 말간 분비물이 쏟아졌다. 강렬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읏!”
의아해하면서도 걱정스레 살피는 이정후의 시선과 맞닥뜨리자,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어졌다. 이 무슨 창피란 말인가. 상대를 애무해주다가 혼자서 가버리다니. 게다가 그의 것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에 윤희가 쥐었을 때 보다 더 부풀어 올랐다.
“선물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제 쉬자, 응?”
윤희의 상태를 어딘가 몸이 불편한 것으로 오해한 정후가 다시금 달랬지만,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렇게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취향까지 밝혔는데, 이제는 윤희가 용기 낼 차례였다.
“답, 가르쳐 줄게요.”
몸을 세워 스커트 속으로 손을 넣어 천천히 속옷을 내렸다. 완전히 젖어 겉까지 미끌미끌한 속옷을, 정후가 뚫어지게 바라봤다. 윤희의 불편이 어디에서 온 지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대로 위에 오르는 윤희를 더 이상 막지 않았다.
“아…….”
다급한 마음에 아래를 겹치긴 했지만, 이쪽도 미숙하긴 마찬가지였다. 입에 머금을 땐 눈으로 가늠이라도 할 수 있었지, 지금처럼 입구에 대보는 것만으로는 겁만 났다. 어설픈 움직임에 축축하게 젖은 음모가 비벼졌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허리를 내렸다. 뭉툭한 살덩이가 잠시 여린 살점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연스레 젖혀지며 그를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젖혀지기는커녕 짓이겨지는 느낌에 다시 발끝을 꼿꼿이 세운 탓이었다. 두려움이 덜컥 몰려왔다. 다시 시도하기엔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엉거주춤한 채 서있는 것도 잠시, 갈망 섞인 이정후의 한숨소리에 앞뒤 잴 것 없이 발끝의 힘을 풀었다.
“큿…….”
“아윽, 흑!”
몸의 중심이 찢기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아랫배가 꽉 들어찼다. 흡사 거대한 일물에 꿰뚫린 것 같았다. 명치까지 치받치는 무지막지한 고통에 숨 고르는 것조차 힘들었다. 쌕쌕 몰아쉬는 불규칙한 호흡을 안정시키려는 듯, 정후가 정수리에 이마를 맞대왔다.
“윤희야,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꼼짝이라도 하다간 이대로 아랫도리가 갈라질 것 같았다. 정상위로 할 때도 좁은 길에 애를 먹곤 하던 그녀였다. 하물며 지금에서야.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힘들어 정후의 품에 기댄 채 축 늘어졌다. 그때였다.
달칵.
어디서 이질적인 금속음이 들린다고 생각한 순간, 이정후가 앉은 자세 그대로 윤희를 들어 올렸다.
“아……?”
여전히 그의 물건이 박힌 채였다. 발끝에 채는 허공에 저도 모르게 다리로 이정후의 허리를 힘껏 감쌌다. 반사적으로 조여드는 내부에 그가 선채로 신음했다. 윤희도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그의 손길이 닿은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빠듯하게 맞물려 있던 아래도 조금씩 오물거렸다. 이대로 멈춰있는 게 감질난다는 듯이. 그래서 앓았다.
“안아줘요.”
물기 어린 속삭임에 윤희를 위해 참고 있던 본능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툭, 이정후의 눈빛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져 나가는 게 마주한 동공 안에 비쳤다. 그대로 벽에 밀쳐져선 부서져라 파고 들어오는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냈다. 허공에 뜬 채 몇 번이고 자지러졌다. 그야말로 공중을 나는 느낌에 아득해져선 종내는 정신을 놓고 말았다.* * *어떻게 풀었어요? 열쇠도 없이…….
혼미한 와중에도 궁금해하는 윤희를 다독여 재웠다. 한쪽만 풀어진 수갑이 아직까지 손목에 매달려 있는 걸 보니 실소가 터졌다. 맹세코 그런 취향은 아니었다. ‘그날’의 핵심은 묶인 손목이 아니라 그다음에 이어진 입맞춤에 있었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Ange noir에서 있었던 경험에 대한 반향 때문인지 관계에 있어 꽤 소극적으로 굴던 윤희였다. 그랬던 윤희가 그를 묶어서라도 가지고자 했다. 비록 매듭 솜씨는 형편없었지만, 뜨겁게 덮쳐오던 입술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무척 기뻤어.”
비록 오해에 의한 행동이긴 했지만, 수갑을 채워놓곤 생전 해본 적 없던 오럴을 시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령도 없이 열심인 그녀가 그저 사랑스러웠다.
“선물 고마워. 최고의 선물이야.”
잠든 윤희에게 뒤늦게 설명하며 가만가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직까지 속눈썹에 맺혀있는 눈물도 조심스레 문질러 닦았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빠르게 마르는 물기 위로 지난밤의 대화가 스쳐 갔다.
‘역시, 거짓, 읏, 말이야. 사실은, 울리는 쪽, 아응, 이잖아요.’
‘음?’
‘울면, 흑, 더, 거칠어지면서.’
이 오해는 언제 풀 수 있으려나. 우는 여잔 질색이었다. 침대에서라면 더더욱. 다만 윤희가 눈물을 보일 때 더욱 흥분하는 건 그에게도 상처로 남아있는 그녀와의 처음 때문이었다.
‘안 울 거예요. 손님이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키워준 값으로 대신하겠다는 말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게 해준 건 꾹꾹 눌러 참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흘러버린 눈물이었다. 가득 고인 눈물이야말로 그가 손님이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그 후로는 안을 때마다 강박적으로 눈물을 확인했다. 그래야만 비어있던 한구석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젖어서 발개진 눈가가 몹시 색정적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윤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말갛기만 한 윤희도 예쁘지만, 발그레 물들어선 젖은 뺨을 한 윤희는 지나치게 예쁘다. 울리고 싶을 정도로.
한 번 더 울릴까.
잠결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궁금해졌다. 한편으론 그렇게 시달렸는데 쉬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두 마음이 마구 반목하고 있을 때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동시에 문이 열리고 석우가 우락부락한 모습을 드러냈다. 초에 불까지 붙인 케이크를 들고 들어선 참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 생일 축하합니다!”
“쉿!”
“어이쿠, 해가 중천이라 아직까지 침대에 계실 줄은, 이런, 실례했습니다.”
“조용히!”
한 손으론 조용히 시키고 다른 손으론 서둘러 그의 흔적으로 메워진 윤희의 상체를 시트로 덮었다. 그런데 석우의 눈은 윤희가 아닌 정후에게 향해있었다. 정확히는 정후의 손목에.
“그걸 왜, 오야께서…….”
대롱대롱 매달린 수갑을 발견하곤 심히 흔들리는 동공에 귀찮은 오해가 하나 더 늘었음을 직감했다. 굳이 해명할 마음은 없었다.
“나가, 석우. 당장.”
“네…….”
얼빠진 대답과 함께 거구가 순순히 돌아섰다. 육중한 다리는 휘청거리고 문고리를 잡아 쥔 손은 떨렸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윤희가 돌아누웠다.
“뭐예요?”
“아무것도, 더 자.”
잠결이었던 듯 곧 고른 숨소리가 이어졌다. 조심조심 일어나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열쇠를 찾아 남은 한쪽을 마저 풀었다. 그대로 버릴까 하다가 기념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석우가 이 수갑의 의미를 아는 일은 평생 없을 거라 확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