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Rank Supporting Role’s Replay in a Prestigious School RAW novel - Chapter 1107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1107)
125. X (7)
흑호는 무서운 말을 듣고 전하는 데에는 익숙했다.
여전히 그 말이 지닌 의미나 숨은 계략을 파악하지도 못하고 조리 있게 전달하지는 못하지만, 참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미친 곰들이 나누는 대화가 길어질수록 흑호는 참기 어려워졌다.
‘안 돼!’
들키면 안 된다는 일심으로 버텼지만, 흑호는 제호를 위해 모은 나뭇잎 중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흑호의 손을 떠난 나뭇잎은 바람을 타고 흘러 나갔다.
‘다행이야. 멀리 날아갔어! 나는 안 보일 거야!’
흑호는 여전히 완벽히 모습을 죽이고 있었고, 바람이 불고 있어 낙엽이 몇 개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흑호가 놓친 나뭇잎은 바닥에 떨어져 다른 낙엽과 섞였다.
진웅팔선의 필두인 증오의 곰이 한 번 시선을 줬으나 그뿐이었다.
하지만 탐애의 곰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흑호가 떨어뜨린 나뭇잎을 조금 길게 응시했다.
‘어? 이 기운은…….’
순간, 탐애의 곰으로부터 끔찍한 기운이 느껴졌다.
외적 사이에 잠입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웅족이 외적이랑 손을 잡았던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으나 흑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탐애의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 해요. 곧 태풍이 몰려올 겁니다. 태풍이 지나가면 후예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된답시고 호족의 수장이 직접 다른 진족도 초대해 성대한 잔치를 열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후예의 존재감이 커지면 웅녀를 설득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겁니다.”
웅족들이 곧바로 움직일 생각인 듯했다.
흑호는 긴장하여 저들의 계획을 곱씹으며 숨을 죽였다.
저들은 은신처에 숨긴 천칭을 들고 곧바로 웅녀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적호랑 웅녀에게 알려야 해! 은호한테도!’
흑호의 발이라면 저들을 앞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적호 부부는 호족과 웅족의 영역 경계 즈음에 살고 있기에 거리상 은호나 다른 호족을 만난 후에 찾아가면 늦고 말 것이다.
천익산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이용하더라도 시간이 아슬아슬할 것 같으니, 먼저 적호 가족을 만나는 걸 우선시하기로 했다.
진웅팔선이 나누는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흑호는 자신이 떨어뜨린 나뭇잎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 *
태풍의 도래를 앞두고 해가 지자 하늘은 평소보다 더욱 어두웠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진웅팔선이 자리를 뜨자 흑호는 역풍을 맞으면서도 서둘러 목적지로 향했고, 무사히 진웅팔선보다 먼저 도착했다.
“그 쓰레기들이 그런 짓을 꾸미고 있다고요?”
흑호가 횡설수설 떠들었는데도 웅녀는 단숨에 이해하고 이를 믿었다.
흑호를 신뢰하고 있었고, 그가 전한 내용은 진웅팔선, 특히 탐애의 곰이라면 할 법한 짓거리였기에 바로 수긍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적호가 있다면 당장 미친 곰을 사냥하러 가겠다며 뛰쳐나갔겠지만, 태풍 도래에 대비해 물자를 조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웅녀라면 자신보다 잘 적호에게 말을 전달해 주리라 생각한 흑호는 곧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럼 난 은호랑 황호한테 알리러 갈게!”
하지만 창밖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진 웅녀가 흑호를 제지했다.
“그자들이 왔어요. 몸을 숨기세요.”
“벌써!”
“내게 생각이 있어요. 무슨 말이 나와도 놀라지 말고 듣고 계세요. 이참에 진웅팔선을 해산시키고 천칭을 박살 내야겠으니까요.”
웅녀는 마치 전시를 연상하게 하는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저렇게 전의가 넘치는 웅녀는 최전선에서 적호와 공투했던 때 이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흑호는 소리 없이 입만 벌려서 ‘알았어!’하고 짧게 답한 후에 몸을 숨겼다.
웅녀는 잠든 제호 주변에 결계를 친 후, 살기를 감추고 손님을 맞이했다.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찾아온 곰은 셋이었다.
증오의 곰, 성노의 곰, 대욕의 곰.
흑호가 목격한 자리에 있던 곰들 중 번민의 곰과 탐애의 곰은 없었다.
‘번민의 곰은 환희의 곰과 의구의 곰을 설득하러 간다고 했지. 그런데 탐애의 곰은 왜 없지?’
가장 적극적으로 작전을 입안한 번민의 곰이 부재중인 게 이상했으나, 웅녀가 혐오하는 곰을 협상 자리에 데려오지 않는 건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웅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싸늘하게 세 곰을 상대했다.
증오의 곰은 웅족이 호족에게 지배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이며 웅녀와 제호는 웅족인 점을 냉정하게 설명하고, 성노의 곰은 다짜고짜 천칭을 들이밀며 언성을 높였고, 대욕의 곰은 호족이 천신의 축복을 잃으면 웅족의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냐며 설득했다.
자꾸 천칭이나 제호를 들먹이는 게, 사실상 수틀리면 천칭에 제호를 올리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반박하던 웅녀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지다가 이내 무언가를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 저도 생각한 게 있답니다.”
“생각보다 빨리 이해했군. 낮에 그리도 매몰차게 굴더니.”
“변하지 않는 생각도 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생각도 있는 법이죠.”
웅녀는 평소 버릇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신을 끌고 간 후, 호족의 수장이 다시 들렀어요. 당신에게 어떤 벌을 줄 건지, 또 태풍이 지나간 후에 제호를 소개하는 연회에 대해 말해 주었답니다.”
“그 연회가 어떻단 말인가?”
“황호는 제호를 호족의 후예로만 여기고 있어요. 웅족의 후예라는 걸 잊고 있는 것 같았죠. 웅족의 처지가 어떤지는 황호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에요.”
물론, 웅녀는 웅족의 처지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진족의 후예고 나발이고 제호는 적호와 웅녀의 자식일 뿐이었다.
지금 웅녀가 이런 소리를 입에 담는 건 제호를 지키고 진웅팔선을 망하게 할 계획을 획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당신들의 뜻은 알겠어요. 제가 무엇을 하면 되죠? 그 뜻이 아무리 좋다 하여도 적호나 제 아들이 위험하게 될 일은 하지 않겠어요.”
“드디어 내가 알던 그 기재가 돌아온 것 같군. 비탄의 웅녀, 부탁할 일은 두 가지다.”
첫째, 적은 대가를 치르고 천칭을 움직일 수 있도록 개량할 것.
둘째, 적호가 호신총을 부수도록 설득할 것.
두 번째 제안에 웅녀가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않자 증오의 곰이 다시금 설득했다.
“웅족과 호족이 동등하고 공평하게 지내기 위해선 천신의 은총이 사라져야 한다. 호족이 압도적인 힘을 지녔기에 우리의 말이 닿지 않고 있지 않은가. 땅은 척박해지겠지만, 두 진족이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호신총은 그 수가 워낙 많아 위치를 전부 파악하기 어려웠고, 강력한 힘을 품고 있어서 부수기는커녕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신화적인 전공을 쌓은 데다가 호족인 적호가 부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가는 호족이 적호를 용서할 리가 없어요.”
“안다. 우리가 적호의 뒤를 봐줄 것이다. 은호나 황호도 힘의 균형을 생각하면 허튼짓을 하려고 들지 않겠지.”
증오의 곰이 하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적호의 행위가 호족에게 용서받지 못한다면, 적호는 웅족을 등에 업고 무마시키려 하진 않을 것이다.
적호는 자진하여 벌을 받으려 들 게 뻔했다.
웅녀는 이를 알고 있었으나 진웅팔선은 알지 못했다.
웅녀는 고민하는 척하다가 ‘제호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변명조의 서두를 꺼낸 후, 그들의 말에 찬성했다.
“우리 제호는 웅족의 피를 잇기도 했죠.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적호도 알아줄 거예요. 설득해 볼게요.”
“서둘러야 한다. 태풍이 닥치면 호신총 주변의 인적이 드물어질 것이다. 폭풍우를 틈타 일을 처리하면 호신총을 부수기 수월하겠지.”
“좋아요. 먼저 천칭을 보여 주겠어요?”
웅녀는 그들이 건넨 천칭을 세심한 손길로 만졌다.
웅녀가 다루는 정교한 형태의 기가 천칭을 감싸자 성노의 곰도 노하는 걸 그만두고 연신 감탄했다.
아주 짧게 매만졌을 뿐인데 천칭이 품은 힘이 더욱 커진 것 같았다.
천칭을 건네받은 증오의 곰은 떠나기 전, 한마디 말을 남겼다.
“가장 먼저 부수어야 할 호신총이 있다.”
설명을 들은 비탄의 웅녀는 적호를 잘 유도하겠다며 말을 마무리했다.
저자들이 먼저 부수고 싶어 하는 호신총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흑호가 전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 외진 곳에 있는 영인의 호신총을 먼저 부수려 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계략을 세우는 데에 이용하기로 했다.
진웅팔선이 모두 떠나고 기척이 깨끗하게 사라진 후, 웅녀가 흑호가 숨은 방향을 향해 말을 걸었다.
“곧 적호가 올 거예요. 저는 적호가 호신총을 부수도록 설득할 거예요.”
“어? 왜? 왜 부숴야 하는데!”
“제 남편은 지나치게 사랑스럽고 솔직하니까요.”
적호는 늘 반려와 자식을 향한 사랑과 제 성품을 숨기지 못했다.
웅녀는 적호가 연기를 못한다는 말을 애정 어린 말로 돌려 말했다.
흑호는 왜 갑자기 웅녀가 남편 자랑을 하는지 몰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웅팔선, 특히 그 필두인 증오의 곰은 의심이 많답니다. 적호가 저와 대화를 나눈 후 이곳을 나서자마자 계속 그를 감시하겠죠. 호신총이 부수어지는 것까지 지켜보고, 이후엔 협조도 할 거예요.”
“어, 그런데?”
“이 태풍 속에서 호신총 주변에 완전무장한 웅족이 얼쩡거리면, 그 자체가 증거가 되지 않겠어요? 이 자리에 오지 않았던 진웅팔선 외의 협력자도 꽤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흑호가 ‘아!’하고 짧게 탄성을 뱉었다.
웅녀는 흑호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느린 어조로 말했다.
“진웅팔선은 아주 성가셔요. 초대 웅족의 수장을 암살한 건 분명 그들일 텐데도 증거가 없어서 잡지 못했죠.”
“진짜? 초대 웅족의 수장은 착하고 똑똑했는데! 걔들이 죽였어?”
“네, 그럴 거예요. 그러니 이번엔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해요. 그자들이 호신총을 부수기 위해 모략을 펼친 증거가 있다면 나락으로 보낼 수 있을 거예요..”
웅녀가 흑호가 쥐고 있던 나뭇잎을 하나 받아 들고 짧게 글을 썼다.
적호를 이용해 영인의 호신총 주변에 함정을 팠으니 부디 현장에 대기하여 배신자들을 일망타진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웅녀는 나뭇잎 위에 비탄의 인장을 새기며 말했다.
“흑호의 나뭇잎에, 흑호가 전하는 글이라면 바로 움직여 주겠죠. 행여 믿지 않더라도 당신이 증언하면 적호의 친우들은 믿을 거예요.”
“응! 내가 본 거랑 들은 거 다 전할게!”
흑호는 의욕에 차서 말했다.
흑호는 웅녀의 계략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자신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 착한 웅족의 수장을 죽였던 곰들을 처리하고, 적호네 가족도 지킬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적호를 조금 길게 붙잡아 둘게요. 앞질러서 준비해 주세요.”
“응! 맞다, 제호한테 잘 자라고 전해 줘!”
“그럴게요.”
흑호는 짧은 배웅을 뒤로하고 천익산을 향해 뛰었다.
어느덧 강풍에 섞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흑호는 부지런히 천익산의 지름길을 이용해 달렸다.
한편, 아주 멀리서 이 지름길을 응시하고 있던 자가 있었다.
작은 발자국이 바닥에 찍힌 것을 본 탐애의 곰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의 손에는 마치 썩은 것처럼 바싹 마른 나뭇잎이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