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28
제 228 화
앞서 걸어가는 아슈팔과 자신을 부축하는 샨의 행동에 유림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며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아슈팔을 따라가곤 있지만, 신경이 자꾸 탑으로 쏠렸다. 저 차가운 탑 아래 교수님이 계신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죽을 것 같았다.
아슈팔은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마치 이정표처럼 새하얗게 남은 아슈팔의 발자국을 쳐다보며 유림은 외투를 여몄다.
그제야 잊고 있던 추위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덧붙여 손과 발의 아픔도.
잿빛 하늘에서 쏟아지는 새하얀 눈송이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바람.
그렇게 한참을 걷던 아슈팔은 이사장의 온실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유림이 해명을 구하는 표정으로 아슈팔을 바라봤으나, 그는 별도의 설명 없이 두 사람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밖에 있다가 따뜻한 실내에 들어와서 그런 걸까.
몸이 녹는 것과 동시에 발바닥의 통증이 한층 더 심해졌다. 마치 수백 개의 칼날에 찔리고 베인 것 같았다.
아슈팔은 절뚝거리는 유림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걷다, 온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을 발견하곤 샨을 멈춰 세웠다.
“샨, 넌 여기서 기다려.”
“나도……!”
“기다려.”
단호하게 떨어지는 음성에 반박하려던 샨이 결국 알겠다며 고갤 끄덕였다.
유림은 샨을 바라보다, 아슈팔이 안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곤 발을 옮겼다.
반년 가까이 온실을 들락날락거렸지만 테이블 안쪽으론 더 들어가 본 적 없었다.
유림은 가면 갈수록 무성해지는 풀과 고요한 분위기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뜩 제 앞쪽에 아슈팔 말고도 사람이 한 명 더 있단 것을 깨달았다.
누군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곧이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이사장님?”
아슈팔이 유림을 데려올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가 자연스럽게 유림을 반겼다.
“드디어 깨어났구나.”
“…….”
“손은…….”
덴 케이는 엉망이 된 유림의 손을 보더니 안쓰럽단 표정을 지었다. 아마 무엇을 하다 왔는지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마치 파형처럼 허공이 작게 일렁이더니 이내 전혀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였다.
온실 안에 이런 게 있었다니…….
“들어가자.”
케이의 말에 유림이 고갤 끄덕이며 그를 따라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 안쪽은 바깥의 온실과 크게 다를 것 없었다. 다만 좀 더 많은 무성한 풀들이 청명할 정도로 깨끗한 늄을 흩뿌리며 방의 모든 늄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런 환경을 처음 접해본 유림은 두 눈만 깜빡이다 중앙에 하얀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단 것을 깨달았다.
“아…….”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유림은 비척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격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교수님…….”
히야스가 누워 있었다,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정리가 하나도 안 된 부스스한 잿빛 머리와 새하얀 가운, 까칠해 보이는 눈매와 고집스러운 입매. 여느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유림은 침대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 위로 미약하지만 고른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을 때야, 참았던 눈물을 토해낼 수 있었다.
살아 계셨다.
돌아가신 게 아니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유림은 히야스의 옷자락을 잡은 채, 아이처럼 소리 내 울었다.
케이와 아슈팔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유림이 참고 있던 불안과 안도를 모두 토해낼 때까지 말이다.
***
아이들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한 은하는 잔뜩 붉어진 눈을 비비며 방을 나섰다.
레이먼과 루아가 방까지 데려다 준다 했지만 혼자 있고 싶었기에 괜찮다며 거절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해서 그런 걸까. 다리에 힘이 없었다.
림은 깨어났을까? 아직도 자고 있겠지?
만약 방에 딱 들어갔을 때, 림이 깨어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그간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털어놓고, 또 펑펑 울면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할 텐데.
은하는 유림이 일어났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짙은 그늘을 띄운 채, 우울한 얼굴을 했다.
늘 있었던 일을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고 서러웠다.
림이 깨어났든 말든 그냥 붙잡고 울어야지.
샨 앞에선 창피하니까, 그만 가라고 해야겠다.
은하는 그리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대로 뚝 하고 굳어버리고 말았다.
“……어?”
시선이 침대에 못 박혔다.
좀 전까지만 해도 누워 있던 유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대신 구겨진 이불과 싸늘한 공기만 내려앉아 있었다.
유림을 돌본다 했던 샨 또한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림……?”
은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화장실이나 옆방에 있을까 싶어 문이란 문은 다 열어젖혔으나 그 어디에도 림은 없었다.
혹시 그사이 깨어나서 어딜 간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는 아닌 것 같았다.
림의 키르는 책상 위에 있었고, 외투를 비롯해 뭐 하나 사라진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신발조차 그대로였다.
사라진 것은 오직 단둘. 림과 샨, 두 사람뿐이었다.
뭐지? 왜 둘 다 없는 거지?
은하는 심호흡을 하며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 뒤 두 눈을 꼭 감고 유림의 늄을 잡기 위해 집중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유림의 늄을 잡는 덴 도가 트지 않았던가. 분명 금방 찾을 것이다.
은하는 숨까지 죽인 채, 늄을 추적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유림이 얼음 서고에 갔었을 때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그곳에 갔을 린 없었다.
애당초 유림은 얼음 서고에 가는 법을 모르고, 그나마 그곳까지 데려다 주던 히야스는 시신조차 못 찾은 상황이 아니던가.
안젤리카 또한 어딜 갔는지 안 보였기에 이 짧은 시간 동안 유림이 그를 만나 얼음 서고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림은 어디에 간 걸까.
애초에 림이 깨어난 건 맞을까?
만일 누군가가 림을 데려간 거라면…….
“아…….”
끔찍한 생각에 은하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방을 비우는 게 아닌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방에 남아 있는 건데…….
은하는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굵은 눈물을 떨군 채 방을 뛰쳐나갔다.
***
눈물과 함께 모든 불안감을 한차례 쏟아낸 유림은 아직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지 훌쩍이며 눈을 비볐다. 너무 많이 울어 눈이 팅팅 붓다 못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골도 울렸다.
“괜찮아?”
아슈팔의 걱정 어린 말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왈칵하고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아직은 안 괜찮구나…….”
“으…… 죄송해요. 근데 자꾸 눈물이 나와요.”
케이는 눈을 꾹 누르며 눈물을 참는 유림에게 괜찮다며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히야스 교수님은…… 정말 무사하신 거죠?”
“그래. 물론 눈을 뜰 때까지 장담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야. 늄도 회복되겠지. 애당초 그러기 위한 방이니까.”
케이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이곳에 있는 식물들이 왜 이렇게 깨끗한 늄을 뿜어대고 있나 했더니, 히야스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나 보다.
8형은 타인의 늄을 빼앗아 제 것처럼 쓸 수 있는 존재였다.
자신이 히야스의 늄을 제 늄으로 바꿔 살아 있듯, 히야스도 식물들의 늄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물론 시간은 좀 걸릴 수 있겠지만…….
“근데 히야스 교수님은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유림의 질문에 케이가 아슈팔을 바라봤다.
“내가 모셔왔어. 좀만 더 빨리 갔으면 좋았을 텐데…….”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그의 미소에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히야스 교수님과 알고 함께 지내온 그였다. 더욱이 교수님을 돕고 구할 힘이 있었음에도 늦었으니 얼마나 저 자신을 탓하며 원망했을까.
차마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애먼 소맷자락만 만지작거리자 아슈팔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더 늦지 않았음에 감사해야지.”
“히야스 교수님이 살아계신 거……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건가요?”
“그래. 말할 수가 없었어. 또 이곳에 있는 걸 들키면 안 됐고.”
“들키면 안 됐다뇨? 누구한테요?”
“내부의 적.”
짤막한 대답에 유림이 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히야스의 일에 정신이 팔려 그들이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분위기를 보니 제가 잠든 사이 무찌르거나 한 건 아닌 것 같네요.”
“그래. 한심하게 완패하고 말았지.”
완패.
유림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케이는 유림이 잠든 동안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내부의 적이 정체를 밝힌 것과 리리아를 제한 전임 교수는 물론 클레이즈에 큰 타격을 입힌 것, 그리고 목적을 이룬 채 사라진 것까지.
“……정말로 참담하게 깨졌네요. 거기다 진유 교수님도 내부의 적이었다니…….”
기절하기 전 다단과 해우의 정체는 알았지만, 설마 진유까지 한패일 줄은 몰랐다.
전임 교수 중 내부의 적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은 했지만 설마 반이 이에 해당할 줄이야.
유림은 암담함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케이가 절망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최악인 건, 클레이즈에 남아 있는 교수들이야. 회복과 치료가 계속 필요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으니까.”
그 소린 전임 교수님들 중에선 유일하게 이사장님과 리리아 교수님만이 움직일 수 있단 게 아니던가.
아무리 이 둘이 대단하다 해도 그 넷을 쉽게 상대할 순 없을 것이다. 거기다 연인인 해우 교수님의 배신에 리리아 교수님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 몸은 멀쩡해도 분명 정신적으론 큰 타격을 받았을 테지.
유림은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입을 열었다.
“내부의 적이 원하는 게 얼음 서고죠?”
“……그래.”
“근데 거긴 그냥 갈 수 없잖아요.”
“그래. 네 말대로 거긴 아무나 갈 수 없어. 안젤리카와 히야스가 다닐 수 있는 것도 세룬 교수님의 허가가 있어서 가능한 거지.”
“세룬 교수님? 그럼 설마 얼음 서고를 관리한다는 분이 세룬 교수님이셨어요?”
“그래. 그분이 전대 문지기한테 열쇠를 계승받았지. 그리고 그걸 교수님의 눈에 심어놓았는데…… 다단이 이를 눈치채고 열쇠를 가져갔더군. 그 탓에 안젤리카뿐 아니라 그 누구도 그곳에 갈 수 없게 됐어.”
“이사장님도요?”
“……나는 클레이즈를 벗어날 수 없어. 내가 없으면 클레이즈는 유지가 안 되니까. 거기다 녀석들이 거길 점령한다 해도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그곳에 있는 얼음은 안젤리카가 없으면 녹이지 못하거든.”
그러고 보니 서고의 얼음은 안젤리카가 만든 거였다. 빙계에 깐깐한 데몽이 칭찬할 정도로 견고한 마법.
더욱이 이사장님이 이리 말하는 걸 보면, 그곳에 있는 전임 교수들이나 일반 마법사들의 실력으론 녹이지 못할 게 분명해 보였다. 물론 장기전으로 가면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녀석들도 곧 그걸 깨닫겠지.”
확실히 맞는 말이었기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다 문뜩 좋지 않은 생각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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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