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150. 우열을 가리고자
오직 선공의 유흥을 목적으로 제작된 크고 화려한 배의 내부는 사람들의 대화로 북적거리고, 먹고 마시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안 어르신과 전화가 선착장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고, 근위병들을 지나쳐 갑판에 오르는 그들을 빤히 주시했다.
여러 의미로 둘의 등장을 썩 반기지 않는 분위기랄까.
그런데.
“진나라의 하수인 따위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응?
“만병부당! 죽을 자리를 골라 찾아왔느냐!”
알고 보니 진천을 향한 적대감이 두 사람에게 가지는 불편한 감정보다 더 큰 게 아닌가.
전화는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이럴 거라 했잖소.”
그의 우려대로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 진나라의 내전으로 원한을 품게 된 이들이 꽤 많았던 거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맑은 거울이 되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칼에는 칼, 혹은 예의에는 예의로 대응하면 그뿐.’
그러나 선공의 초대를 정식으로 받은 게 아니었고, 안 어르신의 배려로 참석한 만큼, 안 어르신의 명예를 고려해서 한 박자 쉬어가기로 했다.
“어르신, 이곳에는 저와 싸우기를 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저들의 의리와 제가 누구인 줄 알고도 기꺼이 생사를 걸고 싸우고자 하는 패기를 외면할 수 없어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르신 덕에 승선할 기회를 얻은 손님에 불과하니, 어르신의 허락을 먼저 받고자 합니다.”
진천을 성토하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예상과 달리 진천이 겁을 먹고 몸을 사리기는커녕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하자 당황하고 주눅이 들었던 것.
설마, 설마, 하다가 진천의 진중한 표정에서 정말로 싸우고자 하는 의지를 읽어낸 이들은 슬며시 시선을 피하고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안 어르신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진 방주, 억울한 마음은 알지만, 이 자리는 공께서 연회를 열고 전속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어찌 피를 보려 하는가. 저들의 언행이 경솔한 건 분명하지만, 혈육과 친지, 아끼는 수하들을 잃고 분노하면서, 이를 원망하고 탓할 대상을 찾아 슬픔과 자책을 지우려는 것은 사람이라면 보통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이야. 그러니 나를 봐서라도 자네가 참아주길 바라네.”
안 어르신이 정말로 좋은 자리에서 피를 보기 싫다는 마음으로 만류하는 건 아니리라.
정작 본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꺼이 죽을 각오로 이 자리에 참석했으니까.
그렇기에 평소 원망하고 다투던 형제자매라고 해도, 남의 손에 죽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심정으로 반대하는 거라고 짐작했다.
어쨌든, 안 어르신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고, 허락을 구하겠다고 약조한 바도 있으니, 더는 일을 키우지 않고 자중하겠다고 대답하려는데.
“안 대부 참으로 실망스러운 조언이구려.”
선실에서 나온 선공이 다짜고짜 안 어르신을 질책했다.
낯빛이 잔뜩 붉어져 있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고도 비틀대는 걸 보면, 이미 안에서 술을 잔뜩 마셔 취한 상태임이 분명했다.
“옛말에 불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 하고, 말로만 들어왔던 만병부당의 무공을 직접 관전할 기회이니, 재상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소. 안 그렇소, 전 재상?”
건장한 사내 둘이 앞뒤로 서서 어깨에 의자를 메고 선공을 뒤따라 나왔는데, 그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이 선공보다 위세가 더 높다는 재상, 전상이었다.
문제는 새하얀 여우 가죽으로 만든 담요를 목 아래로 꽁꽁 동여맨 전상이 기운 하나 없이 빼빼 마른 얼굴로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다더니,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식물과 다름없는 상태로 보였다.
그런데 의자에 바짝 붙어 있던 전속이 장정들에게 의자를 내려놓게 하고는, 잠시 전상의 메말라 굳은 입에 귀를 바짝 붙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공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공께서 본인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으시답니다.”
작정만 하면 십 장 밖에서 돌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던 진천은 어이가 없었다.
‘전상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전속이 관심법이라도 익혔다는 말인가?
물론, 전상의 눈동자에는 어떤 의지가 실려 있기는 했다.
하지만 싸움 구경을 통해 자기 생일을 축하받으려는 갈망 따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선공은 전속의 거짓 전언을 듣고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허허허, 내 그럴 줄 알았지. 역시 전속이 유일한 친아들이라서 부친과 소통이 잘 되는구나.”
순간 전화의 표정이 어두워졌으나, 지금 그의 안색을 살피고 걱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재상과 함께 일을 도모한 세월이 얼마인가. 설사 말로 듣지 못한다고 해도 그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만큼 쉬울 것이야. 그렇지 않으냐?”
진천에겐 선공의 말이 헛소리로 들렸다.
그러나 시녀들.
“맞는 말씀이시어요.”
그리고 전속의 무리.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갑판 위에 중진들까지 일제히 머리를 숙이며 화답했다.
선공은 어이없어하는 진천을 보며 말했다.
“만병부당. 그대는 거지들로 무리를 이룬 강호 방파의 수장이라지?”
“개방의 방주입니다.”
“그래, 진 방주. 진나라의 고수들을 모두 격파한 그 무공실력으로 이 뜻깊은 자리를 빛내주게.”
때를 맞추어 전속이 신호를 보내자, 배가 호수의 중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천은 대답했다.
“저들과는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안 대부의 반대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말게. 나의 요청이라고 하면, 안 대부도 계속 고집을 피우진 않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안 대부?”
선공은 반박할 줄 모르는 전상의 속은 잘 알아도, 언제든 반박할 용기로 마음을 채운 안 어르신은 너무 모르고 있었다.
‘혹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걸지도.’
그래서 안 어르신이 선공의 심기를 상하게 할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거절했다.
“이젠 안 어르신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싸우지 않을 겁니다. 또한 공께서 요청하셔도 응하지 않겠습니다.”
선공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꿈틀했다.
“왜지?”
“애초부터 저들은 직접 싸울 의지도 없었으면서, 이곳이 자기들의 앞마당과 다름없어 자기들의 처지가 유리하고,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나를 만만히 보고, 내가 겁을 먹으며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리란 잘못된 믿음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니까요.”
선공은 웃으며 말했다.
“실수라면 고치면 되는 것이고, 의지가 없다면 내가 싸우라고 명령하면 될 것이네.”
“싸우겠다는 생각이 실수이면 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저보고 하수들을 상대로 결과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하란 말입니까?”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러나 내 신하 중엔 무공이 높은 무장도 다수이고,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도전한다면 아무리 진 방주라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걸세.”
“저는 진나라를 대표하고 천하의 고수로 꼽히는 고수들을 모두 굴복시켰습니다.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병력을 홀로 대적하여 무너트린 적도 있습니다. 하니, 저들 모두가 동시에 나서서 합공한다고 해도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공의 명령 이전에 복수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제가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하는 건 저들과 저들의 죽은 친인들까지 모욕하는 것이니, 호랑이가 호랑이를 상대하듯 최선을 다해 임할 것입니다.”
“누가 최선을 다하지 말라고 했는가?”
“이해를 못 하셨군요. 저는 싸워야 한다면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선공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공께서 제나라를 떠받치는 기둥 수십 개가 뽑혀 나가도 개의치 않으신다고 하면, 저도 마음을 고쳐먹고 저들과 힘껏 싸워보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제 무공을 구경하고 싶으십니까?”
선공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젊을 적의 패기를 잃고 늙고 지쳐 술과 여자에 빠져버린 무능한 군주여도, 저 많은 중진이 이곳에서 죽어도 괜찮다고 말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안 어르신이 희망을 놓지 않고 목숨을 내놓으려 하시면서까지 선공에게 경고하려는 걸까?’
선공이라면 전속이 재상이 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그러나.
“선공 님, 우리 제나라는 그동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의지를 세우지 않았을 뿐, 모든 방면에서 저 북쪽의 진나라보다 뛰어나다는 게 저의 믿음입니다. 무공의 고수라고 해서 다를 게 있겠습니까. 진 방주가 자존심이 상해서 하수를 상대하기 싫다고 하니, 우리도 제나라의 이름 높은 고수를 내보내시지요.”
선공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전속의 뒤에 서 있는 장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자네가 있었지. 자네가 제나라 제일의 고수라고 했지? 그 무림영웅록이란 강호의 기서에도 이름이 올라간 천하의 고수라고 했지?”
전속의 눈짓을 받은 장고는 힘차게 대답했다.
“오군의 일인, 극창 장고라고 하옵니다.”
전속이 바로 말을 받아서 다른 이들도 소개했다.
“선공님, 이곳에 있는 고수는 극창만이 아닙니다. 제나라의 방파 중 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구도방 방주와 구도방에서 손꼽히는 열 명의 고수가 선공 님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장고보다 한 걸음 뒤에 있던 장만, 그리고 근위병들과 함께 선실 주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열 명의 구도방 고수들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전속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공을 부추겼으니.
“저들은 충심이 넘쳐, 선공 님께서 명령만 하시면 거센 불길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 것입니다. 그런 저들이 소문으로만 들어왔고, 의구심이 들 만큼 몸도 편치 않아 보이는 어린 거지 고수와의 비무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진천을 바라보는 선공의 시선에도 의심하고 무시하는 감정이 어렸다.
“진 방주. 제나라에서 극창의 명성은 진 방주가 감히 대적할 수도 없을 정도네. 그러니 실력이 모자라 진 방주가 쉽게 목숨을 빼앗을 걱정도 없을 테지. 즉, 이제 하수라서 싸우기 싫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전속이 선공을 거들었다.
“오히려 극창의 명성을 고려하면 진 방주에게는 과분한 상대라 할 수 있습니다.”
“옳거니. 그럼 다른 고수를 내보내는 게 좋겠군.”
“장만 방주는 제나라에서 제일을 자랑하는 구도방의 수장인만큼, 아무리 같은 방주라도 급이 맞지 않습니다.”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선공이 경계를 서고 있는 구도방의 고수를 살피자, 전속의 눈짓을 받은 장만이 세 명을 지목해서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구도방에서 수위에 꼽히는 고수들입니다. 저들 중에 셋은 장로이기도 하지요.”
“셋이라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거 같군.”
“진 방주도 불만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선공이 진천을 보며 웃었다.
“진 방주, 저들 셋이면 상대로 충분하겠지? 만약 부담이라면 저들 중 둘을 고르게. 물론, 한 명만 선택해도 진 방주가 겁쟁이라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야.”
오히려 둘을 선택하면 겁쟁이로 보이게 하는 도발이었다.
그러나.
“셋이건 하나이건, 저는 싸우지 않겠습니다.”
단호히 거절했다.
선공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의 감정이 깔렸다.
다른 이들이 코웃음을 치는 소리도 들렸고.
선공은 물었다.
“요구에 맞춰주었는데도 또 회피하는가? 이제는 진 방주가 정말 소문만큼의 고수인지 의심이 드는군. 그래, 어디 이번엔 무슨 변명을 하려는가?”
“처음 시비를 일으킨 저들은 저와 직간접적으로 은원이 있다고 주장하고, 저 또한 일부 수긍할 수 있어 생사를 걸고 싸울 만합니다. 하지만 장 방주가 내세운 무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문이 막힌 선공이 반박을 못 하자, 전속이 나섰다.
“진 방주, 강호의 무인들이 강함을 증명하고, 우열을 가리고자 비무를 하는 건 비일비재한데, 어찌 새삼스레 이유를 따지는가.”
“스스로 마음이 일고, 서로 합의가 되어 목숨을 걸고 비무를 하는 것과 다른 이들의 흥미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싸우는 걸 어찌 같다고 하십니까.”
“내게는 구차한 변명으로만 들리는군. 그냥 두렵고, 자신이 없어서 싸울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게.”
여기저기서 전속의 말에 호응하는 비웃음과 야유가 터졌다.
그러나 진천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설사 천자가 명령한다고 해도, 다른 이들의 볼거리가 되어 목숨을 빼앗는 싸움은 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선공이 분노를 터트렸다.
“이놈이 오냐오냐 받아주었더니,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한낱 강호의 무지렁이 따위가 감히 제후를 조롱해! 뭣들 하느냐! 저놈을 붙잡아 내 앞에 꿀리고 사지를 자른 후에, 살려달라 애걸도 못 하도록 혀를 뽑아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