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42
42화
42. 나쁘지 않았어
방희는 진천의 주먹을 피할 수 없었다.
‘이대로 맞으면 죽을 거다.’
그래서 양손 가득 공력을 응집시켜, 금나수의 수법으로 충격을 줄이겠다고 작정했다.
통할지 자신할 수는 없었으나, 그녀가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방 누님의 앞으로 탁발이 끼어들어 막아섰다.
“바보야, 미쳤어!”
외공이 뛰어난 탁발이지만, 진천의 권력은 신체의 강건함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탁발도 몸으로 막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파풍도를 방패처럼 앞세웠다.
광-
진천이 왼 주먹으로 파풍도의 면을 때리자 종을 친 듯 둔중한 울림이 터지고, 탁발은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났다.
“여보야, 버티지 마!”
방희는 양손으로 탁발의 허리와 등을 받쳤다 뗐다, 빠르게 반복하며 뒷걸음쳤다.
하지만.
“큭!”
밀려나는 속도가 더 빨라 둘은 함께 뒤엉켜서 날아가, 전장 건물 벽에 부딪히고 떨어졌다.
“진 공자!”
“그만하시오!”
“우린 적이 아니잖소!”
한 박자 늦게 도착한 남궁쾌 등이 진천을 둘러쌌다.
서허전장으로 오기 전 금제가 풀려 이전의 기력과 체력을 8할 이상 회복한 그들이었지만, 얼굴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지금 진천은 단순히 감당할 수 없이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수십 명을 가차 없이 때려죽일 만큼 살심에 그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방희와 탁발을 가차 없이 공격할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천에게 맞섰다.
마치 처음 만났던 때를 재현하듯 일격 일격에 이리 날리고, 저리 나뒹굴었지만, 어느 한 명 포기하지 않았다.
진천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진천아, 제발 그만해!”
다시 일어난 방희와 탁발도 합류하여 진천을 막았다.
그러나 결국 모두 지쳐 제대로 일어날 수도 없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크게 다치거나, 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의식 속에서 방희 등을 인지하고 손속에 사정을 두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진천의 관심은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들 멀찍이 밀려나 쓰러져 있다 보니, 가장 먼저 계단 아래로 떠밀려 내려온 점원이 진천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방희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넘겼을 때 바로 도망쳐야 했지만, 서슬이 퍼런 공방이 난무하는 광경에 질려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거다.
진천은 점원에게 다가갔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살, 살려주십시오!”
점원은 부들부들 떨다가 주저앉으며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애걸했다.
순간 진천의 동공이 흔들렸다.
점원의 얼굴엔 아무런 티끌도 묻어 있지 않은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두려움은 어둡고 부정적이었으나, 진천의 갈증을 채워줄 만큼 순수했고, 놀랍게도 진천의 내면에서 휘돌던 여러 감정 중 하나에 힘을 실어주었다.
수치심.
옳지 못한 선택과 행동,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는 이 감정은 진 상궁의 유산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결코 알지 못했을 테니까.
메마른 사막에 모래폭풍이 일듯 진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는 이를 공포로 몰아넣었다는 걸 인지한 순간 정신없이 휘돌던 선천지기의 일부가 상단전으로 돌아가 침묵했고, 수치심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수치심의 크기는 광증을 진정시키긴 했어도, 주화입마를 동반한 광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만큼 충분하진 않았다.
그때였다.
“진 아우, 이들을 죽이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걸세!”
진재문이 양팔을 벌리고 점원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점원을 동정해서 나선 게 아니었다.
지하실의 아이들에게서 진서정과 몇 명이 구태길의 지시로 수금원들에게 끌려 나갔다는 말을 들었고, 진서정의 행방을 알려면 구태길이든 점원이든 죽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천은 진재문에게서 또 다른 순수함을 보았으니,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음도 감수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진천이 느끼는 수치심은 더욱 커졌고, 그 위력은 주화입마에서 벗어나 광증을 떨쳐낼 정도로 강력했다.
“아…….”
퍼뜩 정신을 차린 진천.
짧은 사이 자기가 벌인 일들이 뇌리를 스쳐 가고, 그는 형용할 수 없이 끔찍한 자책감에 휩싸이며 털썩 주저앉았다.
“미, 미안합니다.”
연방 머리를 조아리는 진천에게 방희가 기어서 다가왔다.
방희는 진천이 무엇 때문에 지독한 살심에 물들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마주 앉아서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주며 위로했다.
방희의 뒤로 비틀거리며 다가온 탁발이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을 뻗어 진천의 어깨에 얹었다.
남궁쾌 등도 엉금엉금 몰려와 주위를 둘러싸고 말없이 진천의 어깨와 등에 손을 올리며 묵묵히 진천을 다독였다.
* * *
무사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제갈신기 등은 돌무더기에 덮인 팽찬의 시신도 끌어내기 위해서 찾다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뭐야, 여기 없는데?”
그렇다면.
“죽은 게 아니었나 보군.”
“맹투도라고 하면 낭인들 사이에서 무가를 상대로도 두려움을 모를 만큼 투지가 강한 자로 유명한데, 몰래 도망을 치다니. 실망스러운걸.”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낭인들 사이에 이런 말도 있잖아.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다. 맹투도도 낭인이니 다를 게 없지.”
팽찬에 대한 관심을 접은 제갈신기 등은 다시 주변을 정리해 갔다.
정리를 끝낸 제갈신기 등은 계단 여기저기에 앉거나 누워 휴식을 취했다.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지하실에서 구한 아이들이, 오른쪽에는 점원들이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을 구해주었기에 조금 눈치를 살피는 정도였으나, 잔뜩 겁을 먹은 점원들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남궁쾌는 문득 처음 진천에게 제압되었던 때가 떠올라 점원들에게 연민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
“우릴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당신들의 생사는 우리가 아니라, 진 공자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까. 살고 싶지?”
점원들은 조심스레 남궁쾌와 시선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 살고 싶습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당신들이 살아 있을 자격을 증명하면 돼.”
“자격이라 하시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만회하는 거지. 이를테면, 전주의 지시를 받아서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수행했던 비정상적인 일들을 능동적인 의지로 고쳐놓는 거야.”
점원들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전장의 입구를 바라봤다.
“저희는 글을 모르는 이들을 속여 자산의 가치를 낮추어 계약하고, 계산하지 못하는 이들을 속여서 이자를 높이는 방식으로 원금을 부풀렸습니다.”
“그래서?”
“전주가 만들게 한 장부를 고쳐서 빚을 없애고, 돈도 돌려줘야지요.”
“괜찮은 생각이군. 물론, 충분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추가 방안은 차차 고민하도록 하고, 일단은 그렇게 시작해 보자고.”
남궁쾌는 장부를 보러 들어가자고 점원들에게 손짓했다.
“무사님도 같이 보시게요?”
“당신들을 어찌 믿고 그냥 맡겨. 내가 잘하는지 꼼꼼하게 감시해야지.”
장부 정도라면 글에 해박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너희도 들어가자.”
남궁쾌가 당무독과 제갈신기에게도 권했으나.
“난 따로 생각할 게 있어.”
“돈 문제는 너한테 일임하지.”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당무독은 진재문의 집에서 읽은 의서를, 제갈신기는 왕후비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꼬르륵
갑자기 아이들의 배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남궁쾌는 눈치를 살피는 아이들에게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 자기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한참을 먹지 못했군.”
진재문의 집에서 이미 허기를 느껴 뭔가 만들어 먹으려고 하지 않았던가.
당무독과 제갈신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배를 어루만졌다.
“뭐든 좀 먹어야겠어.”
“뭘 먹어야 하나?”
“글쎄. 아무거나?”
남궁쾌 등은 진서정을 되찾아 오기 위해서 구태길을 앞세워 진재문 등과 함께 떠난 진천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진 공자가 요리해 주면 어떤 음식이든 다 맛있을 텐데.’
* * *
다각다각.
구태길은 멋들어진 가림막을 달고, 사방이 뻥 뚫린 이두마차를 몰았다.
평소 이두마차는 그의 자랑거리였다.
정확히는 성공했음을 자랑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용도가 없었다.
가격도 비싸고, 보유와 관리에도 돈이 들고, 성공한 부자의 상징이랄까.
하지만 이는 마부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양털을 겹겹이 깔아서 푹신하게 만든 뒷자리에 앉아 대로를 달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받았을 때의 이야기.
지금처럼 고삐를 쥔 마부 노릇을 하고 있자니, 울화만 치밀 뿐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바로 뒤에, 방희의 입을 빌어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목을 부러트리겠다고 경고한 탁발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혈이 눌려 입도 뻥긋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너희의 기고만장도 잠깐이다.’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진서정을 비롯한 여아 셋을 데려간 자들은 매우 강하고 무서운 자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 어린놈의 무위가 대단하여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그들 수장의 무위가 더 대단하다는 게 구태길의 생각이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으나, 잔뜩 풀이 죽어서 마차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는 진천은 서허전장에서 보았던 살벌한 고수의 풍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주인에게 엉덩이를 차이고, 비까지 맞은 똥개 새끼 같달까.
그러나 심적인 측면에서 진천이 그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진 것도 사실이긴 했다.
이를 안쓰러워하면서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을 지키고만 있던 방희가 입을 열었다.
“난 노예였어. 10살 무렵에 전쟁에 휩쓸려 가족과 친인척은 다 죽고, 여러 가지로 대단한 가문에 팔렸거든. 그리고 태상가주의 몸종이 되었어. 뭐 걱정했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았어. 일이 크게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삶은 이전보다 풍요로웠지. 의식주를 걱정할 일도 없었으니까.”
과거를 회상하려는지 방희는 눈을 감았다.
“열셋쯤 되어서는 날 예뻐한 태상가주가 글과 무공도 가르쳐주고, 열다섯쯤에는 태상가주의 첩까지 되었어.”
다시 눈을 뜬 방희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스무 살 무렵까지는 남부러울 게 없었지. 태상가주의 첩이니까, 가주조차 내게 함부로 대하질 못하니, 누가 내게 뭐라 할 사람이 있었겠어. 그래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이 남자든 저 사내든 비밀연애도 하면서 마음껏 즐기며 살았다.”
고개를 든 진천과 시선을 마주한 방희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어느 날 멀쩡하던 태상가주가 갑자기 죽었는데, 가주는 내가 태상가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면서, 나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순장을 결정하더라고. 그때 깨달았지. 아 난 저들에게 내내 노예였을 뿐이었구나.”
방희의 눈동자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가 지하실에 갇힌 아이들을 보고 분노했던 건 당연해. 감정적으로 과잉되어서 조금 격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그럴 수 있지. 전혀 이상할 게 아니야.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생각해. 넌 똑똑하고, 무공도 대단하지만,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후회하고, 반성하는 건 좋지만, 스스로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마. 넌 내가 보았던 그 누구보다 착하고, 순수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진천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무서워요.”
진 상궁이 곁에 없는 세상이.
진 상궁이 없어서 무미건조한 내면에 숨겨진 광기와 잔혹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그래서 주체하지 못해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웠다.
방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겠지. 하지만 너는 극복할 거고, 그만큼 성장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견뎌보자.”
과거 그녀는 삶이 나쁘지 않았고, 풍요로웠고, 남부러울 것 없이 즐겼다고 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이 말을 되뇌곤 했었다.
“조금만 더 견디다 보면, 아무리 나쁜 기억도 추억이 될 수 있으니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나쁜 기억은 좋은 기억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기억도 희미해지고 볼품이 없어지더라.’
반면 자신은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은 그 시간 동안 단련이 된 덕에, 악몽을 꾸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분명 그때는 지금보다 더 견디기 쉬워질 거야.’
지금의 자기가 그러하니까.
하지만 말해주진 않을 것이다.
경험하며 알아가지 않으면 와닿지 않은 말이니까.
결국, 진천도 스스로 알게 될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방희는 웃었고, 진천도 따라 미소 지었다.
“오! 우리 동생, 제대로 웃게 되었네.”
방희는 제법 많이 자라서 머리카락이 귀밑까지 흘러 찰랑거리는 진천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때.
움머~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소의 울음이 들려왔다.
진 형님이 잔뜩 긴장한 음성으로 말했다.
“곧 평천우명교(平天牛明敎)가 보일 거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