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0
제 9 장 행보여수에 낙각사채니?
홍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언강이 놈. 어린 제자를 들였다고 내게 자랑을 하러 와? 흘흘. 나도 이제 제자가 생겼다 이거야.”
속가로 시작하고 자신의 밑으로 들일 수 있는 정식 제자도 아니지만, 직접 가르칠 수 있는 소림의 문하다.
그나마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하다못해 어디 가서 자기가 가르쳤다고 큰소리 떵떵 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말년에 얻은 심득을 담보로 장건을 요구할 만큼 홍오는 절실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방장에게 장문령으로 사부의 유명을 풀어 달라 했으나 거절당했던 참이다.
홍오는 신이 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강이 네놈의 제자도 자질은 꽤 뛰어나 보인다만, 자질만 따지자면야 내 제자가 훨씬 낫지. 5년? 3년이면 충분히 내 제자가 네 제자를 앞지를 게다. 끌끌끌.”
그런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까 생각하다 보니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아니, 안도의 한숨부터 나온다.
젊은 시절, 귀찮아서 제자라고는 굉목 하나만 둔 게 다였다. 가르치는 것보다 강호를 돌아다니는 생활이 더 좋았다. 무공을 배우는 재미에 제자는 뒷전이었다.
나중에 필요하면 한 명 들이면 되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영영 제자를 두지 못하는 처지가 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뿐인 제자 굉목이 제자를 두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그때 느낀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부터 가르쳐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오히려 행복이구나! 이놈아, 열심히 하거라. 네가 잘만 따라준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전수해 주마.”
홍오는 껄껄대고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맑은 날이다.
유구한 세월 정체되어 있던 소림이 다시 웅비하는 것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 ☆ ☆
다음날 아침.
장건은 아침 공양이 끝나자마자 설거지를 마치고 암자의 앞에 나와 앉았다.
밝은 아침 햇살이 상쾌하게 얼굴을 간질였지만 장건은 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한 거지?’
한 가지 의문이 밤새도록 떠올랐던 까닭이다.
‘왜 따라할 수가 없지?’
어제 보았던 검성 윤언강의 사과 깎는 모습이 계속 뇌 언저리에 남아 장건을 괴롭히고 있었다.
채공승들의 움직임은 확연히 떠오르는 데 비해 검성의 모습은 희미할 뿐이다.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평범한 사람들이 사과 깎는 모습처럼 생각나는 게 없다.
‘평범한 것이라…….’
장건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평범하게 걷고 평범하게 숨을 쉰다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덜 움직이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만 생각해 왔었다.
평범하게 사과를 깎았다는 것은 군더더기는 없지만, 더 아낄 수 있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적은 투자로 최대의 이문을.
그것이 이제까지 장건이 지켜온 행동 법칙이었다.
그런데 검성은 장건의 입장에서 보자면 ‘보통의 투자로 극대의 이문을’ 남긴 셈이다. 검성이 깎은 사과에 비하면 장건이 깎은 사과는 초라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장건이 깎은 사과는 ‘적은 투자로 적당한 이문을’ 남긴 것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자를 좀 더 해야 할까?
그럼 그 방법은?
장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런 산중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확인할 서책도 없고 상담할 만한 이도 없다.
‘아냐.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나중에 아버지를 따라 거상이 되려면 그런 방법을 찾아내야 해.’
그래도 아직은 그런 방법이 뭐가 있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휴우.”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때 누군가 장건을 불렀다.
“웬 한숨이냐?”
굉목이 멀찌감치 서서 뚱하게 장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노사님!”
“오늘부터 홍오 사부님께 무공을 배우러 가야 하지 않느냐. 어서 채비하고 갈 것이지 무슨 한숨이냐. 나이도 어린 녀석이.”
퉁명스러운 말투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라 퉁명스럽지 않은 게 더 이상하다.
“헤헤.”
장건이 웃으면서 소리도 없이 일어섰다. 앉아 있던 시체를 일으킨 것 마냥 딱딱하고도 간결한 동작이다. 그냥 툭 하고 나무토막을 세우듯 일어난 것 같다.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그런 사소한 동작을 볼 때마다 굉목은 기괴하기만 하다.
장건이 일어나 말했다.
“어제 윤 어르신이 깎은 사과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검성의…… 사과를?”
“네.”
“흠.”
굉목은 홍오가 내밀었던 사과를 떠올렸다. 유난히 표면이 반질반질한 것이 보통 사과와는 달랐다.
그러나 굉목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홍오가 유난을 떨었으니 그런가보다 싶었지, 지나치다 보았다면 무심코 넘어갔을 것이다.
‘내 성취가 부족한 탓이지.’
어차피 무공에 뜻이 없는 굉목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장건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도 그렇게 사과를 깎을 수 있을까요?”
굉목은 순간 마음 한구석이 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알아보지 못한 것을 건이는 알아보았단 말인가?’
굉목이 가만히 장건을 보다 물었다.
“너는 그 사과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럼요. 맨손으로 깎은 사과잖아요. 게다가 껍질이 깨끗하게 벗겨졌잖아요. 노사님은 그게 특별하지 않으세요?”
장건은 반문했다. 특별한 게 당연하다는 투여서 굉목은 괜히 심사가 꼬였다.
맨손으로 사과를 깎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명색이 검성이니 손으로 검기를 일으키는 건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껍질이 깨끗하게 벗겨졌다는 의미는 이해할 수가 없다.
“검성이 사과를 깎은 것이 아니라 사과가 스스로 껍질을 벗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제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어요.”
굉목은 대답하지 않고 장건의 말을 곱씹었다.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니 정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저도 그런 사과를 깎으려면 30년은 연습해야 할까요?”
“30년?”
“네. 윤 어르신은 30년 동안 연습을 하고 나서야 그렇게 사과를 깎을 수 있었다고 하셨거든요.”
“허어.”
굉목은 그제야 사과에 깃든 의미를 알아차렸다.
30년이란 세월을 무공에 정진한 후에야 깎을 수 있게 된 사과 하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검성의 평생 무공 정수가 사과 하나에 담겼다는 뜻이 아닌가!
굉목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검성이 그렇게까지 건이를 탐냈단 말인가?’
홍오가 난리를 부린 것도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그러나 굉목은 애써 홍오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입에서는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사과를 깎고 싶었으면 검성을 따라 화산으로 갔어야지. 왜 뒤늦게 한숨이나 쉬느냐!”
장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굉목을 보았다.
“제가 왜 윤 어르신을 따라가요?”
“검성처럼 사과를 깎고 싶다면서?”
“에이!”
장건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고작 사과 깎는 거 배우려고 30년씩이나 따라다녀요? 묘기 부리는 약장수가 될 것도 아닌데 맨손으로 사과 잘 깎아서 뭐하게요. 전 상인이 될 거예요.”
굉목은 자신이 기분 나빴던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혼자서 강호를 오시(傲視)할 수 있는 천하의 검성이 30년간 맨손으로 사과 깎는 묘기를 연습한 약장수가 된 순간이다.
장건은 굉목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리고 전 죽으나 사나 여기서 10년을 지내야 하는 거 아시잖아요. 전 그냥 그렇게 사과를 깎는 방법이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장건이 마냥 밉지만은 않다.
‘이 녀석이…….’
굉목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장건을 타박했다.
“험험. 아무튼 빨리 채비하고 올라가거라.”
장건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대답했다.
“후우후우. 마음의 준비만 하면 돼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장건은 예의 변함없는 딱딱한 발걸음으로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던 굉목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픽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고작 사과 하나란 말이지.”
그러나 이내 굉목의 얼굴에는 음울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장건이 말하는 그 고작 사과 하나에 호들갑을 떨던 인물이 생각났다.
“산에서 7년이나 산 녀석이니 세상물정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를 텐데, 사부님께 이용당하지나 않을지……. 걱정이구나.”
부디 자신처럼 홍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기를.
굉목은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껏 누군가를 걱정하는 말을 내뱉은 것은 처음이라는 걸 자각하지도 못한 채.
☆ ☆ ☆
홍오가 거처하는 암자는 담백암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걸어서는 반시진이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비탈이 심하고 산세가 험해 실제로는 반시진이 더 걸렸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았던 듯한 좁은 오솔길을 걸어 오르자 가파른 절벽 아래 고즈넉이 자리한 작은 암자가 보였다.
바로 아래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있었다. 태실산과 소실산을 아우르는 숭산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장소였다.
장건은 ‘와! 멋지다’ 라고 감탄을 내뱉으려다가 낭떠러지 끄트머리에 홍오가 좌선을 한 채 앉아 있는 걸 보고 그리로 향했다.
장건은 합장을 하며 인사했다.
“홍오 대사님, 저 왔어요.”
“왔구나. 너도 와서 여기 앉거라.”
장건은 홍오의 곁으로 가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몸을 한 바퀴 타고 미끄러지며 흘러간다.
“어떠냐.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절로 느껴지지 않는고?”
장건이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침의 서늘한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소실산의 첨봉을 둘러싼 운무는 사라지지 않고 짙게 배어 있다. 소실산의 산자락에 희끄무레하게 소림사의 본산 전체가 내려다보였다. 소림사의 본산은 마치 장엄한 산맥의 일부인 듯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절벽을 타고 오르는 바람이 갑자기 시리게 느껴진다.
장건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저는 무서운데요.”
“무섭지.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전혀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넌 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지도 않을 것이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발을 헛디뎌 떨어질 염려도 없질 않으냐.”
“대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마음먹기에 따라 대장부가 될 수도 있고, 겁쟁이가 될 수도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사람 마음이요, 또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사람 마음이니라.”
홍오는 말을 하면서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장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3년 뒤에는 저 집에 갈 수 있는 거죠?”
“물론이지. 속가제자는 어느 정도 성취만 이루면 언제든지 강호로 나갈 수 있단다.”
물론, 검성과의 내기가 기다리겠지만.
장건은 그것도 모르고 좋아했다.
홍오도 주름진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얘기 들었을 테지만, 나는 네게 앞으로 무공을 가르칠게다. 궁극적으로는 무량무해까지 이르도록 할 생각이다.”
이미 홍오는 장건에게 무량무해를 가르칠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 있다.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하다가 밤을 꼬박 샜을 정도다.
“무량무해요?”
가만 생각하던 장건이 물었다.
“아! 용조수와 불영신보라는 그런 건가요?”
“응?”
홍오는 미소를 머금던 그대로 살짝 굳었다.
‘그런 거라니?’
무공을 모르는, 아니 무공이란 말의 뜻도 모르는 사람이나 할 말이다.
“엄밀히는 무량무해도 무공이나, 초식이 없는 무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무학이라 할 수 있지.”
“초식이요?”
홍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장건을 보았다.
“굉목이 그런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네. 노사께서는 그냥 제가 물어보면 대답만 해주시고 다른 건 일절 가르쳐 주거나 하지 않으셨어요.”
“헐.”
굉목을 따라하기만 했지 무공은 안 배웠다는 말이 사실이었던가?
홍오는 의심을 애써 감추며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혈도에 대해서는 들어 봤느냐?”
“아뇨.”
“내공심법이나…….”
“아뇨.”
“기혈이나 경락 같은 건?”
“기혈이 뭔지는 모르지만 제 몸 안에 있다는 건 예전에 들었던 것 같아요.”
“헐!”
내공도 적당히 쌓였고 나름 상승 수법인 용조수와 불영신보를 하고 있길래 기본은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무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다니?
‘내공도 혈도도 모르는 아이가 용조수와 불영신보를 했다? 말이 되는 얘긴가?’
홍오는 계인이 찍힌 맨머리를 매만졌다.
“허허, 거 참.”
불현듯 굉목이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장건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굉목은 고지식하고 깐깐한 성격이다. 승려의 표본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 융통성 없는 굉목이 뭔가 일을 꾸밀 리가 없다.
‘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군.’
하나 당장은 이 아이가 문제다.
‘어떻게 한다?’
무공에 관련된 용어나 단어만 모른다면 쉬운 일이지만, 만약 빗나간 방향으로 무공을 익히고 있다면 그게 문제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두 시진인데, 처음부터 다시 길을 잡으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에잉, 굉목 이놈. 가르치려면 제대로 좀 가르쳐 놓던가.’
홍오는 애먼 굉목만 욕하며 해맑게 웃고 있는 장건을 보고 애써 웃었다.
“뭐 상관없다.”
“예?”
“용어야 천천히 배우면 되는 것이고, 무공이야 당장엔 글을 몰라도 배울 수 있는 게다.”
“다행이네요.”
장건이 겸연쩍게 웃었다.
“우선 네가 모른다고 했던 무공이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 줘야겠구나. 무공이란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니라.”
장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오의 말에 따르면 굉목이 매일 하던 느릿느릿한 운동도 무공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럼 7년이나 무공을 배웠던 건가?’
다른 사람들이 어딘가 불편하게 보이는 것도 무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홍오가 말했다.
“우선 네가 무공을 잘못 익히진 않았는지 확인을 좀 해야겠구나.”
혼자서 굉목을 따라하다 무공을 익혔다니 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장건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방법도 잘못될 수 있는 건가요?”
“보통은 크게 잘못될 일이 없단다. 욕심을 부리거나 방향을 잘못 잡았을 때 그런 일이 생기지.”
장건이 눈을 또르르 굴렸다.
‘기를 많이 먹으려고 욕심을 부렸나? 하지만 그건 욕심을 내도 괜찮은 건데.’
알쏭달쏭했다.
“어려워요.”
홍오가 웃었다.
“무학의 이론이란 원래 그렇단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주 쉬운 것이지. 심신을 단련하는 것, 단지 그뿐이니까.”
“예. 알겠습니다.”
장건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몇 번이나 조그맣게 ‘심신의 단련’이라고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움직임을 안 하고 최대한 힘을 아끼는 것도 심신의 단련이니까, 이것도 무공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보다.’
장건은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홍오가 수염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자, 그럼 마보(馬步)를 해보거라.”
“마보요?”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해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홍오는 양다리를 벌리고 무릎을 반쯤 굽힌 말 탄 자세를 취했다.
“이 자세가 모든 무공 수련의 기본이다. 하체가 튼튼해야 중심을 잡고 상체에 힘을 밀어줄 수 있는 법이다. 소림의 일절이라 알려진 정권도 이 자세에서 나오지.”
‘아하. 저게 마보였구나.’
굉목과 건신동공을 할 때 매일 했던 기본 동작이었다. 7년이나 매일 해온 동작이라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다리를 굽히고 서자, 건신동공을 할 때처럼 실타래가 풀리며 장건의 전신을 감쌌다. 곧 의자에라도 앉은 것처럼 몸이 편안해졌다.
홍오는 무릎을 두드리며 자세를 풀었다.
“에구구. 나이가 드니 힘들구나. 이제 네가 한 번 해보거라.”
“이렇게 하면 되나요?”
“호오, 잘하는구나. 살짝 주먹을 쥐어 배꼽 아래에 두거라. 그래. 그렇게 한 이다경 정도 할 수 있으면 기본은 다 되었다 할 수 있느니라.”
말이 이다경이지 마보의 자세로 이다경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갓 무공을 배우는 아이들은 일다경도 채 못 채우고 주저앉기 마련이다.
하나 장건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보법을 밟을 줄 아니 이다경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대로 마보부터 배워 보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것조차 어려울 테지만.
장건이 마보를 하는 동안 홍오는 무공에 대한 얘기와 무림에 대한 전반적인 얘기를 풀어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장건은 맞장구도 치고 웃기도 하며 홍오의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주로 질문이 더 많았다. 장건이 모르는 말들이 계속 튀어나와 이해할 수가 없던 까닭이다.
한참 얘기를 하던 홍오가 가만히 장건을 보니 장건은 별로 힘든 기색도 없이 마보를 하고 있었다.
보통은 이쯤이 되면 다리를 후들후들 떨어야 했다. 아니, 힘들다고 그만둘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다.
“안 힘드냐?”
“괜찮아요. 벌써 이다경이 됐나요?”
홍오는 어이없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반 시진이 다 됐다.”
“아? 너무 오래했나 봐요?”
홍오는 어이가 없었다.
‘거 참, 희한한 녀석일세.’
마보를 거의 반 시진을 해놓고도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긴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오래됐나요?”
“아니 아니, 괜찮다. 그건 오래할수록 좋은 거야.”
홍오는 가만히 장건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지칠 것 같지 않아서 그게 더 이상했다.
‘아무리 기본이 잘 되어 있다 하더라도 저 나이 때 반 시진을 하면 힘들어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젊었을 적엔 마보를 반 시진하고 나면 땀이 줄줄 흘렀는데, 흐음.’
장건은 장건대로 이게 무슨 수련이 되나 생각하고 있었다. 무려 7년간 매일 두시진 동안 굉목을 따라 건신동공을 해왔다.
굉목과 함께 한 건신동공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는 수련법이었다. 그것을 매일 거르지 않고 두 시진 동안 했으니 가만히 서 있는 건 장건에게 일도 아니다.
‘무공이라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건 아니구나.’
앞으로 홍오에게 무공을 배우며 보내야 할 3년이란 시간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일부러 덜 움직이려 하는데 오히려 가만히 있으라니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가만히만 있으면 배도 안 고프고 더 좋을 것 같다.
장건과는 반대로 홍오는 잠시 고민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보 하나만큼은 소림의 일대, 이대 제자와 맞먹겠구나. 도대체 이 아이의 몸은 어떤 상태인 게지?’
눈으로 봐서는 알 수 없으니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 이번엔 저걸 들어보자꾸나.”
홍오는 암자 앞마당에 놓인 물지게를 가리켰다. 긴 장대 끝에 큼지막한 두 개의 물통을 달아놓은 평범한 물지게다.
물통도 비어 있었기에 장건은 별 어려움 없이 지게를 졌다.
홍오가 말했다.
“소림사에 처음 들어온 신입 제자들은 보통 이 수련을 가장 먼저 하지. 물지게를 지고 걷는 것은 균형감각을 키워주는 데 아주 좋은 수련 방법이란다.”
정작 홍오는 물지게 수련을 한 기억이 없었다. 아마 했어도 며칠 정도였을 것이다.
“자, 날 따라오너라.”
“어딜 가는데요?”
“헐헐, 물지게로 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물을 길러 가는 게지.”
홍오는 뒷짐을 지고 암자 옆을 돌아 산을 올랐다. 장건은 물지게를 지고 홍오의 뒤를 따랐다.
이제까지 들은 얘기를 생각해 보면 이불 하나 접는 것도 무공이고 걷는 것도 무공이었다. 물을 길러 가는 것도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럼 사과를 깎는 것도 무공이었던 걸까?’
장건은 아직도 검성 윤언강의 사과 깎는 모습이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렇게 맛있게 사과를 깎을 수 있다면 어딜 가서도 자랑할 수 있을 텐데. 난 언제 그렇게 깎을 수 있을까?’
부러운 일이다.
곧 장건은 다른 생각을 하다가 홍오를 놓칠까봐 얼른 홍오의 뒤를 쫓아갔다.
한참을 오르다보니 공기가 희박해져서 숨을 쉬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홍오가 거하는 암자 자체도 소림사 본산 전체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상당히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홍오는 장건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헉헉대며 땀을 흘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엥?’
홍오는 다시 한 번 기대가 어긋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희열이 느껴졌다.
장건은 조금 얼굴을 찡그렸을 뿐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숨쉬기가 쉽지 않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반적으로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세장심균의 요체를 깨달아 평소에도 조식법을 행하고 있는 장건이었다.
평소에도 기를 먹는다고 가늘게 숨을 쉬는 연습을 하다 보니, 급하게 숨을 몰아쉴 만큼 격렬하게 움직이지 않는 이상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올랐지만 장건은 크게 힘든 기색 없이 홍오를 잘 따라왔다.
“아직 멀었나요?”
“다 왔다.”
홍오가 멈춰 선 곳은 깨끗한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작은 옹달샘이었다.
“여기서 물을 길어 가자꾸나.”
“예.”
장건은 시키는 대로 물지게를 내려놓고 물통에 물을 채워 넣었다.
“와아,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하네요.”
“소림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물이란다. 예로부터 물터만 좋아도 삼대가 건강하다 했다. 좋은 밥과 좋은 차, 그리고 좋은 술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물이 필요한 법이지.”
“굉목 노사님께 이 물로 밥을 해드리면 좋아하시겠네요.”
굉목과 장건은 생쌀을 물에 불려 먹었으니 밥을 짓는 것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좋은 물로 밥을 불려 먹으면 굉목이 좋아할 것 같았다.
그런 장건의 마음도 모르고 굉목의 얘기가 나오자마자 홍오는 콧방귀를 뀌었다.
“굉목 녀석은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 그런 나쁜 놈 이름은 내 앞에서 입에도 담지 말거라.”
“예예.”
정말 사이가 좋지 않은 사제간이다.
장건은 홍오의 눈치를 보다가 물통에 물을 다 채우고 어깨에 짊어지었다.
“어어.”
한데 물통의 물이 흔들리며 잠시 몸이 기우뚱했다. 장건은 급히 중심을 잡아 바로 섰다.
“무겁지 않으냐?”
“무, 무거워요.”
어른도 벅찰 만한 크기의 물통 두 개를 들었다. 무겁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럼 나 먼저 내려갈 테니 천천히 오거라.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물통의 물을 흘려서는 아니 되느니. 반 이상 흘린다면 너 혼자 다시 올라와 떠와야 한다.”
장건은 몇 번 기우뚱하다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아까운 물을 흘릴 수야 있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그래. 물론 그래야지.”
홍오는 몰래 웃음을 흘리며 먼저 돌아섰다.
‘요놈아. 이번엔 좀 힘들 것이다.’
양쪽으로 물지게를 지고 비탈길을 내려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물통 안의 물이 굉장히 무거운 데다 끊임없이 출렁거리기 때문에 중심이 자꾸만 흔들리게 된다.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순간순간 변하는 중심을 맞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균형감이 필요하다.
물지게 지기를 오래하면 균형 감각과 더불어 다리의 근력이 키워져 하체가 단단해지며 허리가 올곧게 펴져 무술에 적합한 자세를 만든다. 소림 무술의 특징인 견고함과 강맹함은 이런 기초 수련이 바탕이 된다.
보통 소림에 갓 입문한 제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 물동이 지기를 하는데, 익숙해지기까지 최소 반년에서 3년이 걸린다.
‘자, 요 녀석은 얼마나 할 수 있나 볼까?’
홍오는 대나한선보로 훌쩍 거리를 벌린 후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이번만큼은 장건도 고전했다. 금방 따라오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거리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어, 어어.”
평탄한 길도 아니고 가파른 비탈길이라 자꾸만 물이 출렁거렸다. 무게도 꽤 나가기 때문에 조금만 중심을 잘못 잡아도 물통에서 물이 흘러 내렸다.
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도 했다.
“아! 아까워.”
물이야 또 길으면 되지만, 한 번에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해야 한다는 건 장건에게 있어 매우 심기가 불편해지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지?”
장건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했다.
“흘리지 않고 내려가려면 어깨가 흔들리지 않아야겠는걸?”
어깨를 움직이지 않고 걷는 건 쉽게 할 수 있었지만, 물지게가 얹히니 평소처럼 잘 되지 않았다.
장건은 생각을 거듭하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어깨를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중심을 잡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깨가 아프다고 힘을 주니까 더 몸이 기우뚱거려.’
평상시에는 움직임을 거의 없게 해서 걷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지금은 방법을 달리 해야 했다. 물통이 흔들리는 만큼 어깨가 상하로 움직여 주어야 물통 안의 물이 출렁이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스르륵.
단전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역근경의 내공이 풀려 나왔다.
내공의 실타래가 허리를 단단히 감아 지탱하며 다리로 내려갔다. 무거웠던 물지게가 한결 가벼워지고 등허리는 꼿꼿하게 펴졌다.
대신 어깨에는 힘을 풀어 물지게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도록 했다.
장건은 실타래가 이끄는 대로 조심스럽게 걸었다. 천천히 발을 내딛되 발끝으로 강약을 조절해 보았다.
‘어? 된다!’
살짝살짝 흔들리기는 하지만 물이 쏟아질 정도는 아니었다. 중심축인 허리는 움직이지 않고 어깨와 발끝으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힌 것이다.
‘생각보다 쉽네.’
장건은 힛, 하고 웃으며 편하게 걸었다. 처음이 어려웠을 뿐이지 한 번 하고나니 다음부터는 쉬웠다. 아니 방식만 약간 다를 뿐, 평소에 걷는 동작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이는 장건이 몸 안 미세한 근육들까지 무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윽 스윽.
장건은 속력을 냈다. 넘어지거나 물을 흘릴까봐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걷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걷는다.
멀리서 이를 바라보던 홍오는 할 말이 없어졌다.
홍오가 보고자 한 건 장건이 얼마나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였다.
그런데 이건 황당할 만큼 완벽하지 않은가!
“허허!”
장건의 발끝이 지면을 스치듯 하는데 물 위를 걷듯이 자연스러웠다.
홍오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는 녀석이 경공을 3년은 수련해야 익힐 수 있는 행보여수(行步如水)에 낙각사채니(落脚似採泥)의 묘리를 알고 있단 말이냐!”
물처럼 끊임없는 움직임을 행보여수라 하고 흔들림 없이 부드럽게 걷는 것을 낙각사채니라 한다. 보법에서는 상승의 묘리로 일컫는 것이다.
더구나 둘 다 몇 년 이상은 집중적으로 수련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 물지게를 진 아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홍오는 입맛을 다셨다. 좋은 한 편, 어딘가 찜찜하다.
“쩝.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마냥 좋아하기엔 너무 잘해서 불안한 느낌까지 든다.
젖도 안 뗀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에 신기해서 데려다놓고 다시 걸음마를 시켰더니 뛰고 있는 격이다.
기대이하가 아니라 기대이상, 또 그 이상을 해버리니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홍오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응?”
장건은 열심히 산비탈을 내려오고 있다.
“허어…….”
홍오는 장건을 유심히 본다.
자꾸만 어딘가 마음에 걸린다. 말로 꼬집어 할 수 없는 무언가가 홍오를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
“잘 하고는 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웬 나무토막 하나가 물지게를 지고 허공을 날아오는 것 같다고나 할까?
사람이 움직이고 있는데 사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딱딱한 돌덩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돌덩이는 거의 미동도 없이 움직이는데 그 위에 얹힌 물지게만 상하로 흔들흔들거리고 있다고나 할까?
하여튼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 참……. 희한한 녀석이로고.”
장건을 처음 봤을 때도 어딘가 모르게 묘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이것이었나 보다.
‘그저 단순히 빈틈이 없어 보이는 게 아니었던가?’
홍오는 미간에 주름살을 한가득 모았다.
딱딱한 움직임이야 둘째 치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타고난 무골을 7년 동안 죽어라 가르친다 해도 지금 이만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홍오가 보기에도 장건은 타고난 무골이 아니다. 타고난 무골이 아닌데도 지금 나이에 소림의 일대, 이대 제자만큼이나 몸 상태가 잡혀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공?”
홍오의 머리를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내공의 운용이 뛰어나서가 아닐까?”
장건은 나이에 비해 내공이 많이 쌓여 있다.
만약 내공의 운용이 자신의 생각보다 뛰어나다면 마보를 반 시진 동안 하는 것도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서 가볍게 움직이는 것도 모두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끌끌. 신체의 근력을 키우기 위해 마보를 하는 것인데, 누가 내공을 썼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무공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은 아이니 내공을 쓰며 마보를 했다고 하면, 전혀 이상하지가 않구만.’
다만, 혈도니 기경팔맥이니 하는 것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내공을 잘 운용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확인해 볼 방법이 있지.”
홍오는 장건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