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52
제 5 장 대도무문(大道無門)
하루가 지났다.
원호는 밤새 고민을 한 후 아침이 되자 무진을 불렀다.
“알겠지?”
“……뭐라 드릴 말씀이…….”
“말귀가 어둡구나. 대도무문이란 말이 있다.”
“예.”
“부처의 깨달음에는 정해진 형식과 틀이 없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방법으로든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듣고 있던 무진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방장 사백님의 말씀은 제가…… 그 길을 가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냥 길이 아니라 대도(大道)다. 큰 도리[大道]를 위해 큰길[大道]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방장 사백님께서는 지금 제게 샛길을 가라 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허, 내 말을 뭐라 들었느냐. 큰 뜻에는 정해진 길이 없대도. 샛길조차도 대도를 위한 길이라면 큰길이 될 수 있느니라.”
“제게는 너무 과분한 일이옵니다. 그런 일이라면 좀 더 유능한 이를 보내시는 편이…….”
“네가 건이를 부추겨서 내게 오게 만든 걸 보면 네 솜씨가 전혀 부족하지 않은 것 같더구나.”
원호의 조용한 질책에 무진은 땀을 뻘뻘 흘렸다.
“혹시나 사백조께서 잘못되실 경우 건이가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고 저번처럼 마음의 병을 얻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미리 상황 정도는 알려줘야겠기에…….”
“그래.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면 충분하단 말이다.”
원호는 무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라면 능히 내 뜻을 전달하고 좋은 성과를 얻어올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진아. 잊지 말거라. 대도무문이다, 대도무문!”
무진의 어깨는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네……. 대도무문…….”
큰길에는 문이 없다.
올바른 길, 대도를 위한 길에는 막힘이 없다.
대도무문!
하지만 무진의 귀에는 어쩐지 그 말이 ‘수단 방법 가리지 말아라.’라고 들리는 것이었다.
설사 그것이 협잡이든 잔꾀든, 아니면 협박이나 사기일지라도.
그렇지 않고서야 원호가 과거 자신의 강호행 얘기까지 들려주며 노름꾼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 ☆ ☆
등봉현의 관청.
현령 누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막 찾아온 무진을 쳐다보았다.
“장건이란 아이는? 오늘까지 보내라고 하지 않았소? 이것이 소림사가 내린 결정이오?”
무진은 찌푸린 누보의 얼굴을 보고는 한탄의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일단은?”
“저희 방장 사백께서 도독부에서 정말로 원하신다면야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누보가 짜증을 냈다.
“같은 말을 몇 번 하게 만드는 거요! 당연히 원하니까 내가 거기까지 가서 윗분들의 말을 전한 것 아니오!”
“뭐, 그러시다면.”
무진은 짐짓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돌아가기 전에 한마디만 여쭙고 가겠습니다.”
“말해 보시오.”
“중군도독께서 원하신 게 맞지요? 본사의 속가제자인 장건이를 원한 분이 중군도독이신 거죠?”
“맞다니까!”
“아, 그러니까 제 말씀은…… 중군도독께서 지목한 이유가 사사로운 것인지 공적인 부분인지 알려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소림사에서는 중군도독이 혹시나 여식의 혼사를 위해서 장건을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그래서 은근히 속뜻을 감추고 물어본 것이다.
다행히도 누보는 의심치 않고 바로 대답했다.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현령에 불과한 내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소? 하나 도독부에서 무공을 가르치기 위하여 초빙한 것으로 알고 있소. 사사로울 일이 있소이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할 말이 있기 때문에 그리 말씀드린 겁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괜한 일로 지체하여 죄송합니다.”
누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쯤 되면 아무리 바보라도 무진이 따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잠깐.”
돌아가던 무진이 되돌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대체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이요?”
“뭐…… 딱히 별말 아닙니다.”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거요?”
“현령께서 아실 필요는 없는 얘기지만…….”
“거 참!”
“좋습니다. 말해드리지요.”
무진은 조금 더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사실 저희 소림은 장건이를 중군도독부로 보내는 순간 속가제자에서 파문할 생각입니다. 더 이상 본사의 제자가 아니게 되는 거지요.”
전혀 뜻밖의 얘기였기에 누보는 잠시 당황했다.
“뭐, 뭣?”
단순히 심부름꾼이며 보통의 관원에 불과한 누보는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장건이 소림의 속가제자가 아니고 파문 제자가 된다면 뭔가 윗분들의 생각과 다르게 될 테고, 그러면 결국은 그것이 중간에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될 터였다.
무진은 말을 마치고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태도로 반장을 했다.
“말씀을 드렸으니 전 이만.”
누보는 정신이 없는데 무진은 자꾸 자신이 할 말만 하고 가려 한다.
“자, 자, 자…… 잠깐!”
누보는 뛰어 나와서 무진을 붙들었다.
“이보시오. 말을 했으면 설명을 해야지! 왜 멀쩡한 제자를 파문한다는 것이오?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항의라도 하려는 거요?”
갑자기 무진이 누보를 째려보았다.
“뭐라고요? 항의요?”
누보가 흠칫 놀라 잡은 옷깃을 놓았는데 그 순간 무진이 언성을 높였다.
제정신이냐는 듯, 무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아니 그럼, 지금 현령께선 다 같이 죽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현령님도 죽고 우리도 죽고?”
“헉! 죽어……요? 누가 죽자고 했소? 그게 무슨…….”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말도 못하고 입만 반쯤 벌린 누보다.
누보는 한참을 더 그러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는 허둥지둥하며 무진을 붙들었다.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잠깐 가지 말고 기다려 보시오. 자자, 안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하면서.”
관원들에게 무진을 안으로 데려가라며 누보가 등을 보이자, 무진은 그제야 겨우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 ☆ ☆
무진이 와서 이상한 말을 했다는 얘기는 관청 별채에 있던 야용비와 냉고사에게도 전해졌다.
“뭐라고요?”
황당해하는 야용비에게 냉고사가 들은 대로 말했다.
“같이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눈을 까뒤집고 난리를 피웠다 합니다.”
“하? 그래서 따르지 못하겠다?”
“따르긴 하겠는데 그 즉시 전승자를 파문시키겠다고 했답니다.”
“들은 대로 황당한 자들이로군요. 어떤 식으로든 이쪽의 의도를 따르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빙정석을 내놓은 시점에서 본궁의 존재를 눈치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다고 해도 소림사는 가진 정보가 적어요. 무슨 의도인지까지는 알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손발이 묶인 상황에선 설사 눈치를 챘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죠.”
야용비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같이 죽고 싶으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거죠? 나는 전혀 상상이 되질 않아요! 그게 화가 난다구요!”
☆ ☆ ☆
자신의 선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 누보는 무진을 종암에게 데려갔다.
가능한 개입을 꺼려야 했던 종암으로서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무진도 마찬가지였다. 원호로부터 특명을 받고 왔으나 아직까지 종암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상대가 나쁘다. 아무래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종암을 상대로 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무진은 잠깐 동안 종암을 보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종암 역시 가만히 무진을 보기만 했다.
한 명은 소림을 핍박한 본인이고 한 명은 핍박당한 문파의 대제자다. 불편한 분위기가 집무실을 잔뜩 메웠다.
옆에 있던 누보가 오히려 더 안달이 나서 염통이 쪼그라들 지경이었다.
거의 차 한 잔을 마시고 날 정도의 어색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무진이 반장하며 머리를 숙였다.
“또 뵙습니다.”
종암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응대했다.
“어서 오게.”
“황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
그 순간 종암이 탁자를 가볍게 쳤다.
탁!
탁자 위에 잔뜩 쌓인 죽간과 서류들이 흔들거렸다.
“보다시피 공무로 바쁜 사람이네. 용건만 말하도록 하지. 그래, 소림사에서 약속한 바를 지키지 못하겠다고?”
무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종암을 쳐다보기만 했다. 지켜보는 누보만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금의위의 수장이 묻는 말에 어디 감히 대답을 않고 빳빳이 쳐다본단 말인가!
“어, 어서 대답하지 못할까? 뉘 안전이라고!”
누보가 속이 타서 채근했다.
그러나 무진이라고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아무런 살기가 느껴지지 않음에도 무진은 종암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압박의 강도가 서서히 더해진다. 무진을 굴복시키려는 종암의 마음이 무형의 공력으로 발현되어 무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공기가 무거워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몇 번의 호흡을 할 시간이 지나는 동안 벌써 무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제야 누보도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어마어마하다.
‘이것이 우내십존!’
예전의 무진이라면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른다. 하나 무진은 장건을 만나고 좀 더 불가의 가르침을 가까이하면서 전과는 많이 바뀌었다. 외적인 수련에 집중할 때보다 오히려 무공도 늘었다. 한데 그보다도 더 큰 성과는 바로 부동심이 강해졌다는 점이다.
무진은 흔들리지 않고 불호를 외며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깨달았다.
종암의 압박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겨우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게 되었다.
종암의 눈빛이 살짝 이채를 띠었다. 무진도 종암의 눈빛이 달라진 걸 알아챘다.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종암 같은 고수라면 이미 무진이 방 안에 들어설 때부터 호흡까지 세고 있었을 테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호흡을 고른 무진은 당당히 대답했다.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종암은 기세를 거두지 않고 되물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목한 자를 데려오지 않았는가?”
“최종적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본사로서도 제자를 파문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어찌 무작정 따르라고만 하십니까?”
“도독부에서 무공 교두로 초청했다는 건 나랏일에 관련된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따르지 않고 어찌하여 제자를 파문하겠다는 비뚤어진 결론을 내렸는가?”
“그야.”
무진은 종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영광된 일을 하자고 본사가 망할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고난이야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종암의 이마에 주름살이 그려졌다. 무진의 당당한 태도가 불쾌하면서도 의문스러운 것이다.
“보내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배고픈 것이야 참을 수 있지만 아주 망해서 없어지는 것에 비할 순 없지요.”
문득 종암은 이를 갈았다. 무진이 자꾸만 망한다고 하면서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유를 묻는 순간 상대의 의도에 걸려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소림이 준비한 최후의 비책일 터다.
하지만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잠시 고민하던 종암은 어쩔 수 없이 짜증스러운 티를 팍팍 드러내며 물었다.
“이유는?”
무진은 이제 완전히 여유를 찾았다.
“본사의 제자인 장건이 어떤 이유로 중군도독부의 자제들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는지 잊으셨습니까? 도독부는 황궁의 심처에 있지요. 만약 그곳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무진은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머금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 ☆
야용비가 어이없어하며 종암을 보고 소리쳤다.
종암이 무진을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보냈다고요?”
“일단은 그럴 수밖에 없었소. 소림사는 자신들이 위험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전승자를 파문하겠다고 미리 우리에게 경고하였소. 그러니 억지로 일을 성사시킨다면 그 이후의 책임은 오롯이 내가, 혹은 중군도독부에서 지게 되는 것이오.”
“하아…….”
“사실 중군도독부는 단순히 이름을 빌려주는 역할에 불과하였으니 괜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원하지 않을 게 뻔하오.”
“도대체 그 위험이란 게 뭐길래 그러는 거죠?”
“전승자가 사고를 칠 위험이오.”
“네?”
야용비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요?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사고를 칠 가능성 때문이라고요?”
“제대로 들었소.”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말도 안 되는 이유가 아니오. 전승자가 술에 취해 중군도독부를 공격한 사건이 있었잖소. 소림의 대제자가 한 말에 따르면 전승자는 개방의 무공을 잘못 익혀 술을 조금만 마셔도 대취(大醉)한다고 하오. 지난번처럼 인사불성이 되면 누굴 공격할지,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알 수 없다 하오.”
“그런 무공이 있다고요?”
종암은 잠깐 말을 잇지 않았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공이 실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전승자가 실제 행동으로 증명한 적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요. 제정신으로 중군도독부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기가 막히는군요. 그건 우리 쪽에서 구실로 삼았던 얘기인데, 그걸 소림사에서 반대로 이용할 줄이야.”
종암은 불만스러운 표정의 야용비를 보면서 인상을 썼다.
“중군도독부는 조정의 청사들이 밀집된 곳에 있소. 더구나 황궁이 바로 지척이오. 작은 사건이라도 황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소. 그곳에서 난동을 피우는 것은 나라의 기강과 황궁의 위엄, 황상의 안위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역적죄에 준하여 다스리게 되오.”
“그렇겠죠.”
“더구나 그 난동을 부리는 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북해의 고수를 일격으로 날려버린 자이며, 또한 금의위와 관병 수백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날려버린 괴물이란 말이지. 결국엔 제압이 되겠으나 그때까지 얼마나 큰 난리가 벌어질지 상상하기도 어렵소. 황상은 결코 이를 묵과하지 않을 것이오.”
야용비는 여전히 불만스러웠으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가뜩이나 황상은 불안해하고 있소. 때문에 다른 곳도 아닌 황궁에서 그 같은 일이 벌어지면 황상의 진노는 극에 달할 것이오. 그 진노는 위험을 알면서도 무시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떨어질 테고, 이번 계획은 고스란히 묻히는 방향으로 진행될 거요.”
“어째서죠? 화가 나서 강호 무림을 쓸어버리겠다는 게 아니라요?”
“나야 그리되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그랬다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라의 반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거외다. 때문에 황상조차 강호 무림의 멸절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 애초에 강호 무림을 분열시켜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계획이 세워진 것이기도 하오.”
“한낱 술 때문에 그런 일까지 벌어진다니……. 믿기 어렵지만, 그렇다면 어쨌거나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면 되지 않겠어요?”
“우리가 실패하기를 원하는 작자들은 도처에 존재하오. 이를테면 억지로 이번 계획에 동참하긴 했으나 실제로는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동창이라거나…….”
금의위와 동창은 음지 권력의 양대 핵심이다. 하나 최근에 금의위가 황제로부터 강호 무림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사실상 세가 밀렸다는 평이다. 당연히 불만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여타의 고관대작들 또한 본 위를 좋게 보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오.”
야용비는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결국은 이번 계획의 가장 결정적인 위험 요소는 전승자가 아니었군요? 그보다 본질적인 위험 요소가 바로 정치적 알력이라니! 그것참, 대단하네요.”
“어쩔 수 없소.”
상식적으로 장건이 사고를 치면 소림사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그러나 소림사는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해서 ‘너네라고 멀쩡할 줄 알아? 다 같이 죽든가 아니면 너희만 죽어!’ 하고 달려든 것이다!
그야말로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대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소. 다만, 이번엔 소림사가 대단했다고 할 수밖에.”
종암은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긴 야용비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당분간 북해는 중소 문파의 세력을 규합하는 데에 집중하는 게 좋겠소. 그 또한 시간을 끌 일이 아니오.”
“아뇨.”
야용비가 쳇 하고 말을 내뱉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요. 전승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거되어야 해요. 암살을 해서라도. 그렇지 않으면 추가로 도착하게 될 본궁의 일천 정예와 본궁의 고수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돼요.”
종암이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소. 전승자에 대한 암살은 강호 무림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죠? 그러니까 당장 상황이 안 된다면 이목이 줄어들 때를 기다려야 해요. 그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승자는 우리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 안에 두어야 해요.”
야용비는 잠깐 생각하더니 곧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무엇을 말이오?”
“황궁이란 장소가 부담된다면 장소를 바꿔버리지요.”
“장소를?”
“도독부의 군사 중에서 몇을 뽑아서 도독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가르치도록 하자는 거예요. 소림사는 황궁이 부담되어 보내지 않겠다고 한 거지, 전승자를 보내지 않겠다고 한 건 아니니까요.”
“흐음.”
“소림사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명분은 이쪽에 있어요. 이를테면 ‘소림사의 우려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한다. 이에 소림사의 이의를 받아들여 장소를 변경한다.’는 식으로요.”
종암은 일리가 있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그럼 장소는 어디가 좋겠소?”
“우선 너무 먼 곳은 안 되겠죠. 어차피 중군도독부의 관할 지역 내여야 할 테고요. 그러나 소림에서 너무 멀어도 좋지 않아요.”
“그럴 바에야 타 문파의 영역으로 보내는 건 어떻소? 타 문파의 영역에서 소림사의 제자가 사고를 친다면 상당한 갈등이 야기될 거요”
“아뇨. 이 계획의 목적은 우리가 강호 무림에 완벽한 판을 구축하는 동안 전승자의 발목을 묶어 두기 위한 거예요. 그러자면 전승자는 가능한 드러나서는 안 돼요. 타 문파와 갈등을 조장하면 소림사를 더 억누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전승자의 이름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될 거예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죠. 어차피 소림사야 늙은 사자. 더 뽑을 이빨도 없구요.”
야용비가 부연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승자는 최소 일 년 동안은 존재조차 잊힐 정도로 부각되어서는 안 돼요. 그러면서도 혹시 전승자가 사고를 쳤을 시에 소림이 압박을 느낄 수 있는, 그러니까 소림사의 힘이 미치는 영역 안이 제일 좋겠어요. 반면에 우리는 전승자가 사고를 일으켜도 조용히 묻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주변 환경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곳이 좋죠. 그래야 후에 아무도 모르게 시체로 만들기에도 용이하고요.”
“그렇다면.”
종암과 야용비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이곳 등봉현이 전승자의 무덤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곳이죠.”
결국 장소는 등봉현의 북쪽, 인적이 드문 산중의 커다란 장원으로 정해졌다.
☆ ☆ ☆
소림으로서는 다소 의아하긴 했다. 그렇게까지 관부에서 장건을 데려다가 무공을 배우겠다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하나 황궁이 아니라 가까운 등봉현으로의 파견이라면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장건이 사고를 쳐도 소림사가 어떻게든 영향력을 발휘해서 무마할 수도 있는 범위 내였다.
그러나 문제는 장건이었다.
소림을 벗어나 관부에서 일 년간 무공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소림을 벗어나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장건에게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미신에 가까운 얘기라 해도 그 얘기를 믿고 구 년을 소림에서 살았다. 이제 와서 ‘괜찮겠지.’ 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림도 마냥 강요하기가 어려웠다.
굉운의 생명을 구하는 길과 가족이 해를 입는 길, 둘을 놓고 장건에게 결정하라 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원호는 또다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고민을 했다…….
☆ ☆ ☆
소림으로부터 원호의 친서가 도착했다.
종암과 야용비는 서신을 받고 약간의 공황 상태 비슷한 것에 빠져 있었다.
“이거…… 분명히 우리 제의에 적극 따르겠다고 하는 편지가 맞는 거죠?”
“그런 것 같소…….”
“그럼 이건 무슨 의미죠?”
야용비가 서신을 펼쳐서 한 부분을 가리켰다.
원호의 자필로 쓰인 부분이었다.
―폐사(弊寺)의 속가제자 장건을 기일에 맞추어 지정한 장원으로 매일 출근토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딱 한 마디가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
“출근…….”
그 한 마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렇게나 거치적거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언제 출근하라 했죠?”
“그런 적 없소.”
“그런데 왜 이러죠? 매일 출근을 하면 매일 퇴근도 하겠다는 얘기 아닌가요?”
“출퇴근이 안 된다고 한 적도 없소.”
“…….”
“소림사에서 우리가 지정한 장원까지 가려면 태실산의 홍석애(紅石崖)를 넘어가거나 평탄한 관도로 돌아가거나 해야 하오. 하지만 홍석애는 깎아지른 듯한 암석 절벽으로 높이가 삼천오백 척(尺)이나 되어 어지간한 고수도 넘기 어렵소.”
“관도를 통하면 돌아가더라도 백 리 남짓. 전승자라면 경공에도 조예가 있을 테니 반 시진이면 충분히 주파하겠죠.”
야용비는 계속해서 의문을 떠올렸다.
“아니, 그런데 왜 굳이 출퇴근을 하겠다는 거죠? 왕복 한 시진을 쓸데없이 길에서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요?”
“해코지를 당할까 주의하는…….”
종암이 말을 하다가 멈추고 곧바로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사실 전승자의 무공이라면 어디서든 딱히 위험할 일이 없겠구려. 그리고 암살을 경계한다면 오히려 오가는 길이 더 위험할 수 있지.”
“그러니까요. 도대체 왜?”
종암과 야용비는 한참을 고민했으나 충분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로 ‘관부의 말에 무조건 따르지는 못하겠다는 소림사 승려들의 못된 심통’이 아닐까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장건이 출퇴근을 한다고 해도 변하는 게 없다는 점이었달까…….
혼자서 강호 무림의 판도를 완벽하게 재구성할 계획을 구상해내고 있는 야용비조차 소림사의 이번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야용비는 이후로도 꽤 오랜 시간을 고민에 빠져야 했다.
누군가에겐 절실한 이유라도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일 수 있었다…….
☆ ☆ ☆
소림사는 장건이 중군도독부의 무공 교두로 가게 되었다는 사실을 장건의 본가에도 알렸다.
장건의 본가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하지만 걱정으로 사달이 난 게 아니라 기쁨과 환호로 난리가 났다.
“우리 건이가 무려 중군도독부의 무공 교두로 초청을 받아 간다네!”
장건의 부친은 장도윤은 친분이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를 모두 초빙하여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그중에는 관리도 여럿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장도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장 방주, 정말 축하드립니다.”
“으하하, 고맙소. 고맙소.”
장도윤은 연신 싱글벙글 입에서 웃음을 떼지 못했다.
관리인 듯한 점잖은 중년인 한 명이 술잔을 올리며 말했다.
“사실 자제분께서 중군도독부와 약간의 문제가 생기고 소림사에 불운이 겹칠 때 저희는 장 대인을 크게 걱정하였습니다. 한데 오히려 중군도독께서 자제분의 능력을 높이 사 중군도독부의 무공 교두로 삼으셨으니, 이 어찌 가문의 홍복(洪福)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옳소’를 연호했다.
또 다른 손님이 일어나 잔을 권했다.
“듣자 하니 무공 교두는 종팔품의 관원 대우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한시적이지만 나라의 녹을 먹는 관원으로서 관부에서의 인맥 또한 크게 넓어질 터. 자제분이 장 방주의 뒤를 이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손님들이 다시 축하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외쳐댔다. 강호 무림에서야 관과 협력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늘 관, 무림과 마주쳐야 하는 상인들에게 그만한 인맥은 없어서 못 만들 지경인 것이다.
진상의 본단에서 나온 상인도 한마디를 했다.
“장 방주의 아드님은 관과 무림을 모두 아울러 크나큰 친분을 쌓아가고 있으니, 그야말로 앞으로 운성방의 행보는 더욱더 거칠 것이 없어지겠지요. 운성방은 이제 당대 최고의 상방이 되었음을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며 장도윤을 축하했고 장도윤은 계속 답례를 하느라 허리를 펼 시간도 없었다.
“이것이 모두 여러분들이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오늘은 마음껏 드시고 아무 걱정 없이 노십시다!”
장도윤은 호기롭게 외치며 잔을 들었다.
“장 방주, 만세!”
“운성방의 발전을 위하여!”
수십 명이 넘는 손님들이 호화로운 요리를 먹고 마시며 밤새도록 연회는 계속되었다.
이번 일 때문에 소림사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과 불안의 밤을 보냈는지, 북해의 소주가 얼마나 많은 궁리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심지어 장도윤은 장건을 왜 소림사에 보냈는지조차 잠시 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