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54
제 7 장 강호의 격변
강호는 수십 년간이나 정체되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이유로는 사파 토벌전에서 맺은 관과 백도 무림의 밀약(密約) 때문이라 했다. 이 밀약으로 말미암아 중소 문파는 거대 문파에 병장기 소지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하는 이른바 종속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때문에 중소 문파는 어떠한 행사에서도 거대 문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혹여나 눈 밖에 나면 거대 문파들의 끈끈한 연대에 따돌림을 당하면서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창검술을 배워도 병기를 소지할 수는 없다면 누가 그 중소 문파에 입문하기를 원하겠는가.
그래서 중소 문파와 거대 문파의 계급적 차이가 극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벌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하나 속사정을 깊게 파보자면 좀 다른 해석이 나온다. 정체의 이유가 역설적이게도 백도 무림의 중흥기가 찾아온 탓이라 보는 것이다.
기실 천하오절을 위시한 마교 원정전과 우내십존의 사파 토벌전이 연이어 대승을 거두면서 대립각을 세우던 악(惡)의 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만 터였다. 거의 초토화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십대 문파와 팔대 세가는 이미 우내십존이라는 걸출한 무인과 그에 준하는 고수들을 배출한 상태였고, 그것을 사파 토벌전에서 증명해냈다. 하여 여태까지 대립하던 악이 사라진 이후에도 세력을 단단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소 문파의 무인들은 좀 달랐다. 실제 인원수는 거대 문파의 열 배에 가까우면서도 거대 문파 이득의 삼분지 일도 안 되는 영역을 두고 서로 나눠야 했다.
수직적 구조가 완전히 굳어 버린 상황에서 중소 문파의 무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무명(武名)을 떨치는 길뿐이었다.
그런데 무명을 떨칠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서역의 마도 무리들은 멀찌감치 밀려났고 북해는 존재감도 없었다. 사파는 멸망했다.
예전처럼 수백 명을 살해한 악인을 처단했다거나 사파의 거두를 척살했다거나 하는 일은 꿈과 같은 일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자가 나타나도 거대 문파에 공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결국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비무행 뿐이었는데, 그것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거대 문파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중소 문파라 하더라도 어중이떠중이하고 매번 상대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비무를 해도 조금이라도 이름이 난 이와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안타깝게도 강호에는 별호조차 얻지 못한 무인들이 태반이었다. 비무를 신청해도 상대가 받아주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것이 결국 악순환으로 이어져 강호의 정체가 이어졌으니.
평화로운 세상이란 누구나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강호에서만큼은 최악의 암흑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강호가 급변하였다.
수십 년간 강호 무림 위에 군림했던 우내십존이 은퇴를 선언함과 동시에 검성이 피의 비무행을 시작했고, 거대 문파의 독점권은 중소 문파에 나눠지게 되었다. 심지어 환야 허량 같은 거대 문파의 상징적인 고수가 관에 압송되기까지 하면서 이제껏 관의 비호를 받던 거대 문파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중소 문파의 비상을 가로막고 있던 수직적 구조에 균열이 생겨난 것이다. 새로운 판이 짜이고 새로운 틀이 생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웅크리고 있던 무인들이 들고일어났다. 많은 날에는 수천 번의 비무가 벌어지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문파들이 생기고 사라지고 통합되었다.
그렇게 복잡한 와중에 유독 몇몇 문파와 잠룡(潛龍)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하남을 중심으로 북동의 산동 지역에서는 상주 육검문, 섬서와 산서의 북쪽에서는 종남파 속가가 세운 전통의 강호 태을문(太乙門)과 신흥 강호 은앙종(隱仰宗)등이 두각을 나타냈고, 현재까지는 신비 문파로 알려진 소수의 천룡검문이 남동쪽의 강서, 복건, 호남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수많은 문파들이 난립하며 주도권을 쥐기 위한 난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매일같이 영웅이 탄생하고 또 기존의 고수들이 물러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사천이었는데, 무려 당가를 필두로 사천 무인 연합의 결성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사천 무인 연합은 기존의 십대 문파와 팔대 세가가 가진 기득권의 완전한 배척을 선언함과 동시에 사천 무림의 독립을 천명(闡明)하기까지 했다.
신흥 세력의 부상(浮上)과 기존 세력의 이탈까지.
이로써 강호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었다.
☆ ☆ ☆
사천성 능운산(凌云山)의 서남봉에는 불상이 있다.
낙산대불(樂山大佛)이다. 보통의 미륵좌상이 아니라 산 하나가 통째로 불상이다. 사암석(沙巖石)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깎아 만들었는데 높이가 이백오십 척, 너비만도 백 척에 달한다. 발등 위에만 백 명이 올라설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세 줄기의 강이 그 앞에서 만나고 강 건너로는 멀리 아미산의 영봉(靈峰)마저 굽어보는 거대한 낙산대불의 앞에서 인간 한 명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가.
불상의 발톱에 올라 있어도 고작 파리에 불과할 정도의 존재감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특히나 오늘같이 어두운 밤이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당사등은 불상의 발 앞, 바로 강과 맞닿은 작은 공터에 서서 낙산대불을 올려다보았다.
낙산대불의 전신에 뒤덮인 이끼가 달빛에 초연하니 녹빛을 흘리고 있었다. 불상의 좌우 바위에 사람 키의 대여섯 배 높이로 새겨진 두 금강역사상이 노려보는 듯했으나 당사등은 개의치 않고 서 있었다.
“콜록콜록.”
당사등은 마른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하’ 하고 숨을 내쉬었다.
“왜? 처연한가?”
아무도 없는 적적한 낙산대불의 앞에서 혼잣말처럼 던진 한마디였다.
그런데 멀찍이서 대답이 들려온다.
“아니, 상태를 보아하니 그래도 한 일 년은 더 살겠군 싶은데 왜 투정을 부리는가?”
발자국 소리도 없이 인영 하나가 강가를 따라 옆쪽 절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검성 윤언강이다. 윤언강은 가슴에 검 한 자루를 품고 느긋하게 걸어 나온다.
당사등이 비쩍 마른 얼굴로 조소했다.
“하남에서 가까운 안휘로 가지 않고, 왜 이 먼 사천부터 행차하였는지 모르겠구만?”
“남궁 그 친구가 바쁘다고 거절하더군. 뜨거운 맛을 보고 싶으면 조금 기다려 달라고 해서 말일세.”
“흥. 어차피 다 까발려진 무공을 붙잡고 끙끙대 봤자지. 한데 소림에서 여기까지 고작 사천 리 길인데 너무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해와 오황을 동시에 쓰러뜨린 천하제일인이 유람이나 하면서 한가하게 왔을 리도 없고.”
“나라고 별수 있겠나. 한 대 맞았더니 내외상을 좀 입었네.”
당사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의외로군. 자네가 일 장을 허용했다고?”
“어쩔 수 없었어. 아이가 워낙에 뛰어나서 최선을 다해야 했거든. 이게 공명검이냐, 한번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면서 도전하는데 선배 된 도리로 어떻게 한 수 가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달마장이 위험한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집중하지 않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생겼는데, 방법이 없었지.”
당사등이 킬킬 웃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무슨 말인지 대충 감은 잡았다.
“그래도 근 보름이나 걸린 건 너무했지. 듣자 하니 화산파에서 나올 때 자소단이니 뭐니 온갖 영약들을 싸그리 짊어지고 나왔다던데 말야.”
“그건 따로 쓸 데가 있어서…….”
“뭐, 하여간 대단한 꼬마로군. 여전히 난 그 꼬마를 우리 세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쉽네.”
“내 장담하건대 장가 아이는 누구의 것도 되지 못할 것일세.”
“그럼 한 수 가르칠 생각 말고 그냥 없앴어야지? 가지지 못하면 부숴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게 자네 성질 아니었나?”
“그러고야 싶었지.”
윤언강도 웃었다.
“하지만 그건 내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았네.”
“화산오검? 걔들은 너무 늙었잖아.”
모른 척 말하고 있지만 당사등의 눈이 미묘하게 웃고 있다. 아무리 밤중이라도 윤언강이 보지 못했을 리 없다.
“내 볼 땐 자네가 늙어서 기억력이 감퇴한 것 같네. 내게는 장가 아이와 견줄 만한 좋은 제자가 있다네. 내가 준 검은 내 제자가 받아와야 수지가 맞지.”
“관부에 잡혀 있다던데?”
다른 강호인들이 들으면 놀랄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당사등이었다. 그야말로 어지간한 이는 알지도 못하는 고급 정보인 것이다.
하지만 윤언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난 내 제자를 그 정도로 약하게 키우지 않았네. 애초에 시련을 겪겠다고 떠난 아이였어. 그나마도 이겨내지 못한다면 도태된다 해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허어! 알고 있었군?”
“알고 있었지.”
“그럼 지금의 일들이 우연이 아닌 게로군. 마치 관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자청해서 하는 거였나?”
문사명의 자취를 찾아낼 정도로 당가는 어마어마한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정보력으로도 윤언강의 행보에 대한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사등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자, 윤언강이 어깨를 으쓱하며 아이 같은 몸짓을 해 보였다.
“좋은 핑계잖은가.”
“푸핫!”
당사등은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크크크크!”
한참을 웃을 동안에도 윤언강은 말리지 않았다.
“아아, 정말 아직까지도 꿈을 좇으며 살다니…… 쿨럭쿨럭! 여전히 변한 게 없어, 자네는.”
“아니, 변했네.”
“음?”
윤언강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 꿈 때문이 아닐세. 후배들을 위해, 강호를 위해 무엇을 남겨야 하나 고민하고 벌이는 일일세. 나이가 드니 별수 없네. 나도 모르게 후진을 생각하게 되네그려.”
당사등은 잠시 침묵했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그냥 죽어 없어지는 게 뒤쫓아 오는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아니었던가?”
“쉽게 방생한 물고기는 오래 살지 못한다네. 적절한 시련과 훈련, 잘 조성된 환경만이 생존을 보장하지.”
“그래서 무엇을 하자고? 보다시피, 나는 점점 퇴물이 되어가고 있네.”
“하지만 무공은 더욱 깊어진 것 같군.”
“크크크. 마지막 발악이랄까?”
윤언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따라오게. 자네가 필요하네.”
“후진을 위해서?”
“그렇다네.”
당사등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당사등은 형용하기 어려운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듣지 못했나?”
“들었네. 사천 무인 연합.”
당사등은 자조 섞인 말투에 울분을 섞어 내뱉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리 결정하였다더군.”
“원래 애들은 머리가 크면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법이지.”
“허무해.”
당사등은 달빛에 부서지는 강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강물은 빠르면서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복수를 위해, 가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지. 그러나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날려버렸어. 남은 것은 그저 내게 주어진 작은 방 한 칸과 시동 한 명뿐일세. 가문 내에서 나는 더 이상 웃어른이 아닐세. 나의 헌신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에 뒤처진 구닥다리일 뿐. 강호에서는 손가락질을, 가문에서는 쓸모없는 노인 취급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제껏 살아온 겐가?”
윤언강에게 묻고 있지만 자문자답에 가까웠다.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으나 더는 사공 노릇을 할 수 없게 된 게로군.”
“그래. 이미 버림받은 내가 어째서 다시 가문을 위해, 후배들을 위해 나서야 하지? 무엇을 위해 자네를 따라야 하지?”
조용하지만 격랑을 담은 물음이었다.
윤언강은 바로 대답했다.
“부모는 설사 아이가 부모를 칼로 찌른대도 자식을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세. 그것이 부모 된 자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당사등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당사등은 갑자기 빙긋 미소까지 지었다.
“내 비록 자식은 없으나 혈육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그래서 자네 말처럼 가문과 후진을 위해 남은 생을 모두 바치기로 했네.”
윤언강의 미간이 크게 좁아졌다.
“자네의 어조가 내가 원한 방향은 아닌 듯하군.”
“자네 말대로라니까. 내 가문을 위해, 그리고 후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겠는가?”
“흠.”
당사등의 기세가 슬쩍 변했다.
“그건 바로 사천 무인 연합을 후원하는 일이지. 사천 무인 연합은 강호의 정세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단체일세. 누구도 사천 무림을 건드릴 수 없고, 누구도 사천 무림 위에 군림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어야 하는 단체란 말일세.”
윤언강은 인상을 썼다.
“내 제안은 아직 유효하네.”
“거절하네! 화산파의 검성, 현 무림의 천하제일인. 그런 자네를 꺾는다면 앞으로는 강호의 어느 누구도 사천 무림을 얕볼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내게 사천 무림의 독립을 십 년 앞당길 수 있는 이런 호기를 놓치는 바보가 되란 겐가? 자네답지 않군!”
스르륵.
윤언강은 팔짱을 낀 채인데 검만 검집에서 뽑혀 나온다. 윤언강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거절해도 좋으나,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일세.”
“크크크!”
당사등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자네에게 말해줄 게 있네. 사실 이곳 낙산대불에서 최고의 야경으로 손꼽는 것은 석각미륵좌상을 찬연하게 비추는 반딧불이라네. 성충은 유월이나 되어야 볼 수 있지만 애벌레도 빛을 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른 봄에도 볼 수 있지. 매우 장관이라네. 꼭 한번 같이 보고 싶을 만큼.”
윤언강은 검을 꺼내 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아까부터 빛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없군.”
“없지.”
심지어 벌레의 울음소리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바로 지척에서 흐르는 폭 넓은 강의 물살 소리가 세차게 울릴 뿐이다.
당사등이 웃었다.
“무형, 무색, 무취. 준비는 자네가 오기 한참 전부터 끝나 있었다네.”
“불경을 저질렀구먼. 불상을 앞에 두고 살생을 저지르다니.”
“나야 그러고 싶었지.”
윤언강의 말투를 흉내 낸 당사등이었다.
“하나 대자대비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가 있어 미물들이라도 해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서, 특별한 것으로 준비했네.”
“대자대비한 가르침을 따르는 이?”
당사등이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동시에 낙산대불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절벽에서 그림자 둘이 훌쩍 뛰어 내려온다. 이 어둠에 그 높은 절벽 위에서부터 뛰어내리는데도 몸놀림이 가볍기 이를 데 없다.
겨우 숨 몇 번 고를 시간에 절벽을 내려온 두 그림자가 다가왔다.
“이렇게 또 보는구먼.”
비어 있는 한쪽 소매를 나풀거리며 풍진이 다가왔다. 그 옆쪽으로는 구부정하고 자그마한 체구의 여승, 연화사태가 함께 있었다.
“쯧쯧. 결국 일이 이리되는구랴.”
윤언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물끄러미 둘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풍진은 얼굴을 긁적였다. 허리춤에 매단 검이 달랑거렸다.
“너무 그리 마음 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 어쩔 수 없지 않아? 사천 무림은 떨어져 있어도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는 공동체야.”
연화사태도 질책하듯 한마디를 했다.
“이번만큼은 당신 욕심이 과했구려. 어찌 이런 일을 저지르고 다닌단 말이야.”
윤언강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연화사태를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미파까지라. 속세에 관여하고 싶은 겐가?”
연화사태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아는 놈팡이가 한 명 있는데, 아무래도 당신의 행보가 그 놈팡이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서야.”
“놈팡이?”
“그런 놈팡이가 있어. 내게 ‘난 이 지겹고 끔찍한 곳을 벗어나 내가 죽을 자리를 찾아갈 거야.’라고 했거든. 마음에 안 드는 놈팡이지만 제 죽을 자리는 마련해 줘야 할 거 같아서.”
윤언강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그래?”
우내십존 중의 넷이 모였다. 그중에서 셋이 윤언강을 압박해왔다. 품(品) 자 형으로 윤언강을 포위한 형국이다.
낙산대불 앞 공터는 좁다. 어지간한 문파의 연무장 반만도 못하다. 불상의 발과 발 사이의 공터는 고작해야 육칠 장 정도의 너비에 불과하고 바로 뒤엔 시퍼런 민강(岷江)이 콸콸대며 흘러가고 있다.
제아무리 윤언강이라도 이리 좁은 공터에서 세 명의 합격을 받으면 도저히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위기다.
잠시 침묵하던 윤언강이 말했다.
“재미있군. 하지만 굳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당사등이 검버섯이 잔뜩 핀 얼굴을 슬쩍 찡그리며 대답했다.
“여유 부릴 때라고 생각하는가?”
“삼면이 모두 막혀 있어 어디에 있어도 자네의 독공을 벗어날 수 없겠군, 하는 생각은 드네.”
“이처럼 협소한 공간에서라면 자네가 자랑하는 공명검은 그다지 유용하지 못할 거라는 의문은 들지 않는가?”
거리가 좁다. 청성의 풍진은 쾌검의 고수다. 이들의 간격은 실제로 네다섯 장의 거리밖에는 되지 않는다. 윤언강이 공명검을 사용하려고 움직이는 순간 풍진의 검은 벌써 뽑혀 나와 있을 것이다. 둘 중에 누가 빠를지 장담할 수 없는 거리다.
비록 홍오에게 패하긴 했으나 풍진 또한 윤언강처럼 여전히 강호의 최고수임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윤언강은 미간을 찌푸려 팔(八)자를 만들면서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이거 참, 내게 직접 당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엇을 근거로 이런 계획을 수립하였는가?”
“흥. 정말로 여유작작이군.”
당사등은 왼손 손바닥을 위로 하여 천천히 들어 올렸다.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당사등이 약간의 공력을 끌어올리자 검지 끝에 투명한 노란 액체가 방울처럼 맺혔다.
“아까 말했네. 특별한 것으로 준비했다고. 자네가 오기 전에 이미 여기 전체에 무형지독(無形之毒)을 도포해두었네. 현 상태로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지만, 이 독정을 기화(氣化)시키는 순간 반응이 시작되지.”
“무섭군.”
“딱히 심각한 건 아닐세. 어차피 자네야 만독불침일 테고, 독으로 죽이지 못할 바에야 당장은 그저 내공만 조금 흐트러뜨릴 뿐일세. 독기는 천천히 쌓이겠지.”
윤언강은 슬쩍 고개를 돌려 풍진과 연화사태를 보았다. 둘도 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중인지 슬슬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치밀한 함정이었다.
한정된 공간을 택해 공명검을 초장에 봉쇄하고, 독을 이중으로 살포하여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검객 둘과 검술로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싸움이 길어지거나 기력이 쇠하게 되면 당사등이 언제고 다시 독을 살포할 것이다.
윤언강은 연신 머리를 까딱거렸다.
그러더니 풍진과 연화사태에게 말했다.
“조금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드네만.”
연화사태가 혹시 모를 움직임에 경계하며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새로운 시대에 새 술을 새 포대에 담으려 하는 게 당신 생각이라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야. 서로 가야 할 길이 다른 이상, 새 시대에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게 누가 되느냐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어.”
“오해일세.”
윤언강은 딱 잘라 말했다.
“내가 불공평하다 한 것은 자네들을 앞에 둔 지금의 이 대치 상황이 아닐세. 이를테면, 자네들은 나를 죽이면 사천 무림을 드높일 수 있는데 나는 자네들을 죽여도 이득이 없어. 그에 대한 불공평함을 말하고 있는 것일세.”
뜻밖의 얘기였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초점이 잘못 맞추어진 괴상한 말이기도 했다.
풍진은 ‘허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네의 목적은 어차피 우릴 다 제거해 버리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왜 이득이 없어?”
윤언강의 입술 끝 수염이 살짝 비틀려서 웃는 듯했는데, 그건 마치 ‘내가 왜?’라고 묻는 느낌과 비슷했다.
윤언강을 제외한 세 우내십존 모두가 탐탁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괴이하군.”
“그러게. 내가 아는 언강이는 미치지 않고서야 궁지에 몰렸다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나 늘어놓을 사람은 아닐 텐데.”
그러나 윤언강은 매우 멀쩡해 보였다. 외려 미묘하게 주도권이 윤언강에게 넘어간 느낌이었다.
윤언강이 말했다.
“강호의 법칙대로 하세.”
당사등이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그렇지.”
연화사태가 혀를 내둘렀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원…….”
풍진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뭐, 상관없지 않은가? 죽기 전에 있는 힘껏 한칼 해볼 수 있다는 것도 매우 좋은 일이야. 내가 죽으면 목이라도 잘라가든가, 가져갈 수 있는 건 다 가져가라고. 물론 언강이 자네가 이겼을 때의 이야기지만.”
윤언강은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말했다.
“미물들조차 무형의 독기를 느껴 다 도망갔다지만 나는 스스로 걸어 들어왔네. 허면 나는 벌레보다 못한 것인가?”
당사등이 대답했다.
“이제야 자네 처지를 조금 이해했는가 보구만.”
“아니지.”
윤언강은 한 손에 송풍검을 잡아가며 세 사람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보란 듯 팔을 벌리는 몸짓을 했다.
“자네들, 잊고 있는 것 같네. 내가 누군가? 내가 자신이 없으면 사지(死地)로 들어갈 사람이던가? 이보게들, 나 윤언강일세?”
어이가 없을 정도의 자만심과 오만함이 느껴졌다. 지켜보던 당사등과 연화사태는 소름이 다 끼쳤다.
풍진만이 인상을 쓴 채 중얼거렸다.
“다들 노인네들이 되어 그런가……. 왜 이리 말이 많아?”
당사등이 수긍했다.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 끝내지.”
당사등은 공력을 집중하며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가락에 물방울들이 점점이 맺힌다. 이 물방울들은 천지원양공의 후끈한 기운에 달아오르며 곧 순식간에 기화될 것이다.
“오늘, 화산이 배출한 천하제일인은 사천 무림의 손에 패배하게 되는 걸세.”
당사등의 미간에 주름살이 깊이 패이며 힘이 들어갔다. 천지원양공을 끌어올리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윤언강이 당사등을 휙 하고 쳐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이상 계속하면 장담 못 하네.”
위잉―!
남들이 듣기엔 작은 목소리였는데 당사등의 귓가에서만 유독 소리가 크게 울렸다.
꽈르르릉!
바로 옆에서 천둥벼락이 친 것처럼 고막이 울리고, 머리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런!’
목소리에 암경을 실어 보내는 고도의 수법이었다. 당사등도 윤언강이 이런 수법을 사용할 거란 예상은 전혀 못 했기에 다소 당황했다.
윤언강의 기를 조절하는 능력은 최고다. 정확하게 당사등의 귀에만 암경이 집중되어 있어서 기의 울렁임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풍진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한 것 같으나 잠깐 주춤했다. 아무래도 삼 대 일의 수적 유불리가 있는 만큼 윤언강이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선공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그러나 이미 선공은 윤언강이 시작한 셈이었고, 당사등의 천지원양공은 윤언강의 암경에 영향을 받아 한순간 운기가 멈추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찰나에 불과했다.
끓는 물이 부글! 하고 물거품을 터뜨리는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다.
그 시간에 이미 윤언강은 공력을 폭발시키듯 끌어올려 송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윤언강이 움직이는 동시에 풍진도 급히 검을 날렸고 연화사태도 약간 뒤늦게 연검을 뽑아 날렸다.
윤언강은 겨우 두 걸음 정도를 빠르게 도약해서 거리를 좁혔을 뿐이다. 당사등과 윤언강은 검이 닿지 않는 다섯 걸음 정도의 거리다. 하나 거리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사등은 송풍검의 궤적을 본 순간 벌써 늦었다는 걸 알았다.
우내십존이 그저 허명뿐인 것은 아니다. 비록 평화의 시대라고는 하나 강호에서 수십 년을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의 운과 또 그 이상의 실력, 그리고 그보다 더 강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다는 바.
당사등은 과감하게 천지원양공을 포기했다. 천지원양공을 다시 돌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으나 독정을 기화시키는 데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윤언강은 그 시간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당사등은 온 힘을 오른손에 집중했다. 어깨 근골을 축소해 팔을 장포의 소매 안으로 넣었다가 다시 빼는 순간 그의 손에는 핵자정(核子釘) 단 한 알이 들려 있었다.
핵자정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이고 한쪽 끝이 뾰족하며 다른 면은 둥글게 생긴, 마치 물방울을 거꾸로 세운 듯한 생김새의 암기다. 보통 수십 개를 동시에 던지기도 한다. 하나 이 한 알의 울퉁불퉁한 핵자정은 좀 다르다. 당가에서 몇몇만이 쓸 수 있는 귀한 핵자정이다.
이내 왼팔의 감각이 멀어지고 송풍검이 완전한 반월을 그렸다. 당사등은 조금도 아깝다거나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인데 살아서 거름이 되면 어떠하리!
다만 느릿하게 흘러가는 의식 속에서도 윤언강의 검공을 감탄할 뿐이다.
극도로 절제된 공격. 반탄지력을 무시하고 팔 하나 자를 정도의 힘만 사용하다니.
감탄하는 와중에도 단전에서부터 피어올라 간 공력이 어깨를 강타하고 튕겨지듯 손가락까지 이어졌다.
당사등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핵자정을 가볍게 놓아 주었다. 나비의 날개를 집고 있다가 놓아주듯.
섬절.
당사등이 자랑하는 최고의 한 수.
허공에서 잠깐 멈추어 있던 핵자정이 응축했던 힘을 폭발시키며 쏘아져 나가려 했다. 이 거리에서는 절대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하지만 쏘아지지 못했다. 막 쏘아지려던 핵자정이 동력을 잃고 제자리에서 휘휘 돌았다.
당사등은 계속된 찰나의, 하지만 지독하게도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야 속에서 희한한 광경을 보았다.
겉보기에 보통의 뾰족한 돌멩이와 같은 적흑(赤黑)색의 투박한 핵자정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손바닥 위에서 돌고 있는 이 핵자정은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가는 운철(隕鐵)로 만들어진 것이다.
본래 운철 핵자정은 표면이 거칠어서 매끄럽지 못한 조각인데, 당가의 독문 공력을 담고 호신강기와 맞부딪치면 부식이 일어나며 표면이 타버린다. 표면이 타면서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가 몸에 박힌다.
그 과정에서 표면에 격자형으로 마구 긁은 듯한 무늬가 생기고, 최후에는 울퉁불퉁함이 완전히 사라진 채 옥석(玉石)처럼 매끄러운 물방울 모양이 되어 몸에 남게 된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이를 혈적옥(血滴玉)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때는 이 격자무늬의 물방울 옥석이 죽음의 상징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다. 호신강기가 강한 고수일수록 격자무늬가 뚜렷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당사등의 손바닥 위에서 돌고 있는 핵자정이…… 바로 그런 변화를 보이고 있는 중이다.
핵자정이 손바닥 위에 뜬 채 뱅글뱅글 돌면서 자잘한 불꽃을 일으키고 표면이 타오른다. 부스러기들이 껍질처럼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다. 점차 매끄러운 표면이 드러나고 표면엔 격자무늬가 생겨난다.
‘왜 그런가.’
스스로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물어본다.
호신강기는 공력의 순수한 발현이고, 어쨌거나 운철 핵자정은 어마어마한 공력에 의해 부식되는 것이니까 그만한 공력이 지금 핵자정에 작용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내 당사등의 손가락, 손바닥, 손목, 팔꿈치…… 오른팔 전체에 온통 거미줄처럼 가닥가닥 핏빛 금이 간다.
혈선(血線)인데 그 모양이 묘하게 나뭇가지를 닮았다.
매화검법이다.
그때의 느낌은.
‘허무하군.’
이란 것이었다.
그 외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사등의 눈에 자신의 잘린 왼팔이 공중을 부유하는 모습과 풍진의 손에서 벼락처럼 검이 뻗어 나가는 모습과 채찍처럼 수없이 갈라진 검영이 연화사태의 손에서 뻗어지는 광경들이 마구 뒤엉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오른쪽 몸통 전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당사등의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퍼퍼퍼펑!
공기의 폭음이 울렸다.
네 명의 고수가 찰나에 폭발시킨 공력이 공기 중에 파문을 일으켜 서로 부딪친 소리가 뒤늦게 울린 것이다.
우르르르.
낙산대불과 주변 절벽들이 진동하며 이끼와 사암석의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당사등이 피를 뿜으며 실 끊어진 연처럼 고꾸라져 바닥에 처박힌 것도 그때였다.
“이노옴! 언가아앙!”
풍진이 일갈했다.
풍진의 검은 확실히 빨랐다. 윤언강이 당사등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에 풍진은 벌어진 거리를 그만큼 뒤따라 잡아야 하는 틈이 있었다. 그 짧은 틈에 윤언강은 당사등의 양팔을 날려버렸고, 이어 풍진의 검도 윤언강을 베었다. 윤언강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속도의 검이었다.
그러나 윤언강의 한쪽 귀를 날려버린 것이 다였다.
윤언강만큼 정확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중간에 풍진의 검이 방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었지만 풍진은 도중에 한 차례 보이지 않는 검을 쳐냈고, 허리에 일검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윤언강을 쫓아 몸을 날린 와중에 갑자기 생긴 일이었다.
야수와도 같은 본능과 기감이 아니었다면 그냥 윤언강을 쫓아가다가 허리가 동강이 날 뻔했다.
무려 보이지 않는 검과 일합(一合)을 주고받은 후에도 몸을 반도 돌리지 못한 윤언강의 귀까지 날려버린 것은 대단한 일이었으나, 자신도 허리를 깊이 베여 손해를 본 것이다.
“도대체 이게…….”
한 손밖에 없는 풍진인지라 옆구리를 감싸지도 못하고 피가 꿀럭거리며 새어 나왔다. 흘러나온 피가 밝은 청색의 도포를 물들이고 있었다.
연화사태도 상황이 좋지 않음은 마찬가지였다.
달려가던 도중에 동물적인 감각이 그녀에게 위기를 일깨웠다. 허공에서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연검으로 검막(劍幕)을 쳤다. 마치 제자리에서 칼질하고 있는 상대에게 달려든 듯한 느낌이었다.
겨우 막아내긴 했으나 윤언강을 공격하기에는 늦었다. 윤언강은 당사등을 쓰러뜨리고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연화사태는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잘린 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윤언강은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며 송풍검을 고쳐 잡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셋 모두 숨을 고르고 있었다.
풍진과 연화사태는 실수를 인정했다.
실력이 백중지세인 고수들은 몇 날 며칠을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목숨을 건 싸움에서는 실력보다도 한 번의 실수나 빈틈이 승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풍진과 연화사태는 바로 그 한 번의 틈을 윤언강에게 내주고 말았다. 아니, 윤언강이 없는 틈을 만들어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일격을 허용하고 만 것이다.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풍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
‘어쩌다 이리되었지?’
애초에 이번 대결에서 핵심은 당사등이었다. 그러니 윤언강이 당사등을 노릴 것은 확실했다.
연이은 실책으로 말미암아 가문에서 설 자리를 잃은 당사등은 심한 심리적 압박에 시달리다 독기가 골수에 스며들어 좋지 않은 몸이었다. 그것은 독공을 익힌 자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때문에 스스로가 윤언강의 첫 표적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한창 전성기인 윤언강의 공격을 저물어가는 중인 자신이 버텨내기 어렵다는 것도 알았다.
하나 윤언강이 자신을 공격하면 반드시 등 뒤로 빈틈이 생긴다. 제아무리 윤언강이라도 풍진의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검을 등 뒤로 막아낼 수는 없다. 풍진이 실패해도 이어진 연화사태의 연검이 윤언강을 걸레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사등은 자신이 독을 살포하는 데 성공하거나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심정으로 핵자정을 명중시키거나, 그도 저도 안 되면 자신을 미끼로 삼거나. 어떤 식으로든 윤언강은 민강의 고기밥이 되어 버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다.
윤언강은 암암리에 음공으로 공격해 당사등의 최초의 공격을 늦춤과 동시에 우내십존의 반응 속도를 한 차례 빼앗았다. 우내십존 셋으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그 사이 송풍검의 쾌검 일식으로 전광석화처럼 당사등의 왼팔을 자르고 왼손 검결지로 매화검을 시전하여 반대편 팔까지 난자해 버렸다.
문제는 그 직후다.
무엇이 풍진과 연화사태를 한 차례 더 막아서서 윤언강을 위기에서 구해냈는가.
윤언강이 팔이 네 개가 아닌데 어떻게 앞뒤로 몇 번의 공격을 할 수 있는가.
풍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아차 싶었다.
“공명검이군…….”
풍진의 중얼거림에 윤언강이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말했지 않은가. 당해 보지도 않고 짠 계획이 얼마나 효용 가치가 있겠느냐고.”
연화사태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시(時)와 공(空)을 모두 무시하는구려. 실로 가공할 무공이외다. 아미타불…….”
풍진과 연화사태는 막 윤언강이 당사등을 공격하고 있을 때 공명검을 맞이했다.
아무리 윤언강이지만 동시에 몇 개의 무공을 공명검과 같이 사용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윤언강이 공명검을 시전할 수 있던 때는 단 한 차례밖에 없다.
당사등을 향해 움직이기 전.
공명검의 검기를 뿌려놓고 직후에 공력을 폭발시키며 당사등을 향해 달려들었다고 봐야 하는 셈이다.
그것이 얼마나 적절했느냐 하면, 풍진에게는 거의 치명적인 한 수였다.
풍진은 이미 일전에도 홍오와 일전을 겨루면서 격공장에 고스란히 약점을 노출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다. 일검에 혼신의 힘을 다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는 무방비나 마찬가지다. 공명검이 이미 그 자리에 뿌려져 있을 거라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풍진은 가만히 있는 칼에 대놓고 달려가 부딪친 꼴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워낙 긴박하게 흘러가 공력을 서로 폭발시킨 탓에 미세하게 느껴야 하는 기감마저 방해를 받았다.
그나마 허리가 동강 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 처지였다.
풍진과 연화사태는 새삼 윤언강의 철두철미함에 혀를 내둘렀다.
삼 대 일의 상황을 아주 미세한 차이로 순차적인 일대일의 싸움으로 만든 윤언강의 실력은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윤언강의 말대로, 윤언강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윤언강이 아닌 다른 자가 윤언강처럼 생각하고 움직였다 하더라도 윤언강이 아니었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그 전에 당사등의 혈자정에 이마를 꿰뚫리거나 풍진의 검에 목이 달아났거나 했을 터다.
“흠.”
윤언강은 그제야 자신의 귀가 잘린 것을 안 듯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장포 윗자락을 담담하게 내려다보았다.
“둘을 베고 귀 하나를 내주었으니 이득을 본 셈인가?”
“명백한 이득이지.”
풍진은 옆구리에서 피를 흘리는데도 클클대고 웃었다.
“하지만 덕분에 공명검을 직접 당해 보았으니 그리 아쉽진 않군.”
윤언강이 가볍게 눈썹에 힘을 주었다.
“그런가? 내 생각에 자네들은 멀쩡한 공명검을 본 건 아닌 듯하네. 그럼 이제 제대로 정산을 해 보도록 하지.”
윤언강은 바닥에 송풍검을 그대로 내리꽂았다.
콱!
그리고 검결지를 쥔 양손을 서로 교차하여 앞으로 들어 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스산한 살기가 낙산대불 앞을 휘감았다.
풍진은 기다리지 않았다. 앉아서 공명검에 당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도포가 터져나갈 듯 팽팽하게 공력을 끌어올리고는 제자리에서 모든 살기와 함께 검기를 쏟아냈다.
쫘악!
몇 줄기의 검기가 파문을 그리며 윤언강을 통과해 뒤쪽 강물에 기다란 선을 그었고,
퍼―엉!
강물은 몇 장이나 폭발해서 치솟아올랐다.
연화사태도 철장과 연검을 동시에 휘두르며 사방 천지에 무시무시한 빛의 편린(片鱗)을 뿌려댔다. 빛의 편린은 윤언강의 호신강기를 마구 두들겼다. 윤언강의 주위에는 크고 작은 검흔과 산란된 빛으로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찌익.
윤언강의 뺨에 혈선이 생기고, 옷자락들이 쪼개져 나갔다. 그래도 윤언강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무심하게 검결지를 그었다.
피와 검명과 조각난 검광들이 난무하는 가운데를 유유히 검결지가 뻗어 나갔다.
달무리를 뚫고 밝은 달이 완연하게 비추었다.
머잖아 곧.
수많은 동심원과 파문으로 요동치는 강물 위에 달빛으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갔다…….
☆ ☆ ☆
―아 참, 태상이 말한 그 두 무재는 누구요? 나보다 뛰어나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그땐 경황이 없어서 잊었던 거요.
―문주도 아마 짐작하고 있을 걸세.
―설마…… 소림사의 그 아이? 소림소마인지 뭔지 했던?
―그렇다네.
―음, 몹시 기분이 상하지만 인정하겠소.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그만한 성취를 이루었으니……. 그럼 두 번째는 누구요?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검성의 막내 제자일세.
―문사명인가 하는?
―그렇다네.
―그건 좀 이해하기 어렵소. 내 비록 강호 견문이 넓진 않다 하나 문사명이란 자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소. 딱히 뛰어난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고 말이오.
―그야, 검성의 품 안에서 자라고 있었으니까. 검성의 품 안에서 누가 언감생심 검성의 이름을 찢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태상은 어떻게 아오?
―내게 자랑삼아 데려온 적이 있었다네.
―으음.
―생각해 보게. 검성의 제자가 된 문사명은 배분상으로 화산의 장문인과 같은 항렬일세. 실로 애매하지. 엄청난 반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검성이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그것만 봐도 확실히 범재는 아니었겠소.
―범재 정도가 아니지. 한 문파의 서열을 모두 무시할 정도의 인재였으니. 그런 인재를 제자로 받아들인 검성이 또 눈독을 들인 게 바로 장건이고.
장건이란 이름을 말하면서 태상의 눈빛이 잠시 추억을 회상하듯 희미해졌다.
―태상이 보기에 셋 중에 누가 가장 뛰어나오?
―현재로는 모두 햇병아리일세. 하나 장건이가 가장 앞서 있다 할 수 있지.
―그 말은…… 내 나이가 많아 그렇소?
―천재들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네. 천재는 스스로 생겨나지만 부화의 시기는 제각기 다른 법일세. 문주는 나를 만나면서 이제 막 부화의 날갯짓을 폈고, 문사명은 잠력을 끌어올릴 계기를 찾지 못해 채 부화하지도 못하였네. 누가 가장 뛰어나느냐는, 머잖아 다가올 변혁의 시기를 얼마만큼 준비했느냐에 따라 그때에 결정될 것일세.
―정진하라는 말로 알아듣겠소. 그 날을 위해서.
―명확하네, 문주. 우리에겐…… 내겐 하루하루가 매우 소중하다네. 절대 오늘을 허투루 하지 말게.
고현은 태상의 말을 떠올리며 걸음을 걷고 있었다.
어두운 밤을 헤집듯 수많은 횃불들이 켜진 장원이 눈앞에 보였다.
“천룡검문이다!”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현은 열린 장원의 문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열고 고현을 지켜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중에는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었고, 경외의 느낌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고현은 그런 시선들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만 사람들이 자신을 봐주길 원했다. 가슴속 가득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험난한 수련을 끝내고 나와서 겪었던 허망함.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살았던 세월.
그런 세월을 지금이나마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는 날까지.
그리고 태상이 말한 ‘그 날’이 올 때까지 자신의 행보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쌍월! 천룡검문의 고현이오! 어서 모습을 드러내시오!”
고현은 보무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