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Priesthood RAW novel - Chapter 17
제 6 장 방장의 결정
환한 빛이 실내로 들어와 방 안을 밝게 비치고 있었다.
장건은 언제 깨어났는지 눈을 뜨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 전에 깬 것인지, 아니면 지금 깬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머리는 몽롱하고 몸은 나른했다. 여기저기가 쑤신 것은 덤이었다.
‘내가 왜 이런 데에 있지?’
장건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들썩들썩.
일어나려고 애는 쓰는데 이불만 흔들릴 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장건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장건의 머리에 주마등처럼 지난 일들이 스쳐갔다.
발경의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몸 안에서 공력이 폭주하던 일,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때렸던 일.
한데 왜 이렇게 안 아프지?
발경을 한 번 하기만 해도 죽을 것처럼 아픈데, 그 힘으로 자기 자신을 때렸음에도 그리 아프지 않다니.
혹시?
너무 많이 다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걸까?
장건은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이제 평생 이렇게 누워서 살아야 되는 거야?’
장건이 크게 소리쳤다.
“싫어! 그건 싫어!”
들썩들썩.
침상이 흔들거렸다.
그때, 굵고 푸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가만히 좀 있어.”
장건은 샘솟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
이런 게 아니었는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불쑥, 하고 장건의 눈앞으로 노안의 의원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의원은 장건의 눈동자를 까뒤집어 보기도 하고 입을 벌려 혀를 보기도 하더니 씩 웃었다.
“많이 좋아졌구먼. 그럼 이제 풀어도 되겠어.”
“뭘 풀어요?”
장건은 아직 울먹이는 채다.
“가만있어 보자. 일단 침 좀 뽑고.”
의원의 손이 분주히 오가면서 장건의 몸에 박힌 침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라 한 뼘은 족히 넘어 보이는 장침(長針)을 수십 개나 뽑는다. 장건이 다 질릴 지경이었다. 만약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저런 장침을 맞았다면 눈이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의원이 말했다.
“이제 움직여도 된다. 좀 아프긴 하겠지만 무리하지만 않으면 돼.”
정말로 침을 뽑고 나니 갑자기 뼈를 찌르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어?”
“뭐가 ‘어’ 냐?”
“저 못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요?”
“그럼 불구라도 된 줄 알았냐? 하긴, 하마터면 그리될 뻔은 했지. 내 뛰어난 의술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에헴.”
장건은 팔다리를 움직이려 해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울상이 지어진다.
“안 움직이잖아요.”
심지어는 고개도 돌아가지 않는다.
“아, 당연하지. 듣자 하니까 네 녀석은 점혈이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줄로 묶어 놨다. 침놓고 있는데 깨서 난리를 치면 안 되니까. 지금 보니 묶어 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일어나자마자 발광을 했으니.”
의원이 장건의 팔다리에 묶은 줄을 풀기 시작했다. 팔다리 뿐 아니라 허리와 가슴, 이마까지 친친 묶어 놓았다.
“에에?”
곧 팔다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장건은 팔을 들었다. 아프긴 하지만 멀쩡히 움직인다.
장건은 눈물을 글썽인 채 웃었다.
“헤헤.”
상체를 일으키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뒤집어 보고 흔들기도 했다.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이리도 반가운 일이었다니. 고맙다, 내 손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의원이 혀를 찼다.
“쯧쯧. 하여간 무인이란 것들은 다쳐봐야 제 몸 소중한 줄 안다니까.”
☆ ☆ ☆
의원이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던 굉목이 다짜고짜 물었다.
“어떻습니까?”
기본적으로 무인은 인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어지간한 내상이나 외상에 대해 손볼 수 있는 실력도 있다.
하나 심각한 내상이나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의원이 필요한 때가 있다. 그래서 소림에도 내외상을 전문적으로 돌보는 의원을 가까이에서 초청한다.
의원이 말했다.
“온몸의 근맥이 상했고 장기의 손상도 적지 않습니다만, 그 정도야 몇 달 요양하면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한데…….”
의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굉목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의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전을 다친 것도 아닌데 몸에 내공이 남아 있질 않더군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공이 사라지다니?”
“중요 혈맥이 손상당했는지, 단전이 훼손되었는지……, 아니, 그러니까 단전은 멀쩡한 것 같은데…….”
의원이 횡설수설하자 굉목은 답답해졌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질 않습니까!”
“저도 의원 생활 50년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인지라…….”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차근 말해 보십시오.”
의원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간혹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나 단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몸이 다 낫는다 해도 앞으로 무인의 길을 걷기는 힘들지 않을까……, 계속 무공을 해도 상승의 길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상승의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아예 내공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주천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한 지가 엊그제인데, 이제 다시는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다니.
굉목의 가슴이 아련하다.
굉목은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건지고, 살아가는 데에도 문제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의원의 쭈글쭈글한 주름살이 놀란 듯 움찔거렸다.
“무인에게 있어 내공은 목숨보다 중한 줄 알고 있습니다만, 소림에서 대사님 같은 분은 처음이군요.”
“살날이 창창한 아이에게 목숨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굉목의 표정은 딱딱한데 그 안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비가 보였다.
의원은 자기도 모르게 합장을 했다.
“나무아미타불.”
굉목도 조용히 반장을 했다.
의원은 굉목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사님께서 저 아이를 유달리 아끼시는 마음을 알겠습니다. 무공을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다면, 제가 굳이 이런 말씀을 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좋은 길이 있다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동네 돌팔이가 하는 얘기라 생각하고 들어 주십시오.”
의원이 방법을 얘기하자, 굉목의 얼굴에 점점 주름살이 깊어갔다.
의원은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 방법을 얘기하고 있었다.
“음.”
“저는 단지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말씀드렸을 뿐입니다만, 아마 수뇌부에서는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혹 모르니 저 말고 다른 의원을 불러 진맥하게 해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의원이 다시 합장을 하며 떠났다.
굉목은 그 자리에 서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홍오는 장건의 상태를 본 직후 방장 굉운을 만나기 위해 나갔다.
‘사부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일까?’
그랬다면, 적어도 이번만큼은 홍오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 ☆ ☆
속가제전의 마지막 비무에 참관했던 원주들이 방장실에 모두 모였다.
비무에서 다치는 경우는 흔하나 이번 일은 그보다도 중한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백의전주 굉충이 원우에게 물었다.
“어찌된 것인가? 왜 사질이 대번에 아이를 제압하지 못했지?”
계율원주 원호가 대신 대답했다.
“원우 사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네에게 물은 것이 아닐세. 왜 원우 사질의 달마지에 점혈을 당한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때렸는가, 그것이 궁금하단 말일세.”
원우가 불호를 읊조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분명 점혈을 하였는데 아이의 몸에 일어난 공력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추보당주 굉선이 낮게 호통을 치듯 말했다.
“원우 사질은 한 점의 꾸밈없이 소상히 말할지어다.”
원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다. 첫 수의 달마지를 아이가 피하길래 다시 한 번 손을 썼습니다. 하지만 실수는 없었습니다.”
곤(棍)을 든 긴나라전주 원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우 사제는 정확히 혈도를 점하였는데 점혈이 실패했다……. 그런 경우는 아이의 공력이 사제의 공력을 넘어섰거나 스스로 해혈을 했다는 뜻인데.”
장경각주 굉봉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쉰 듯한 낮은 목소리로 첨언했다.
“자가해혈(自家解穴)을 하려면 일각의 시간이 필요하네. 더구나 달마지의 점혈수법을 모르는 아이가 자가해혈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이상공력(異常攻力)이 점혈을 방해했다고 보는 것이 옳네.”
속가제자가 된 지 넉 달도 채 안 된 아이가 소림 이대제자의 점혈을 파훼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방장 굉운이 굉봉에게 물었다.
“굉봉 사제의 고견은 어떠한가? 어떤 이상공력이라 볼 수 있겠나?”
굉봉은 장경각주인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홍오가 많은 무공을 알고 있다 하나, 무학으로 따지자면 소림에서 굉봉이 으뜸이다. 자그마치 살아 있는 장경각이라 불리는 굉봉이다.
“아이의 내공 수준은 20년 정도라 합니다. 그런 아이가 원우 사질의 점혈을 순수한 공력으로 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듣자하니 아이가 발경을 한다지요?”
“그렇다네.”
굉봉이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침투경(浸透勁)의 공력이 활성화되던 중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설명이 됩니다.”
“침투경?”
“갓 무공을 배운 아이가 발경을 한 것도 놀라운데 침투경이란 말씀이십니까?”
원주들의 놀란 목소리가 방장실을 어지러이 울렸다. 일부 원주는 굉봉의 말을 듣고 수긍하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침투경은 경력을 상대의 체내 깊숙이 파고들게 해 내부 장기와 근육에 손상을 입히는 일종의 내가중수법이다.
근육을 이용해 몸 안의 힘을 나선형으로 끌어내는 외가발경에 내공의 회전력을 더하는 고급 수법이라 어지간한 성취로는 흉내도 못내는 것이 이 침투경인 것이다.
침투경은 내공이 혈도를 따라 급속히 회전하며 공력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순간에는 점혈이 잘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거세게 흐르는 물줄기를 막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다.
굉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굉목이 장건을 속가제전에 내보내면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침투경이라면 설명이 되는군.”
굉봉이 염주알을 굴리며 계산했다.
“20년 내공에 외가발경의 파괴력을 더하고 거기에 내공의 회전력을 더하면, 적어도 그 순간 아이는 일갑자의 내공을 가진 무인이 팔성의 공력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수준의 공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원우 사질은 사성 이하의 공력으로 달마지를 발출하였을 테지요.”
원우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굉봉 사숙의 말씀대로입니다.”
원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이것 참.”
“일갑자 내공을 가진 무인의 팔성 공력이라니. 십 년간 진산절기를 익힌 무자배의 실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 아닌가.”
원호가 ‘끙’ 소리를 냈다.
“홍오 사백조께서 너무 욕심을 내셨군요.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시다니요.”
긴나라전주 원상이 동조했다.
“맞습니다. 아무리 홍오 사백조라 하여도 이번 일을 그냥 넘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어찌 힘을 쓸 줄도 모르는 아이에게 파괴적인 수법을 가르치셨단 말입니까.”
백의전주 굉충이 뺨을 긁적거렸다.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없어서 스스로를 친 아이의 착한 심성은 나 말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건가?”
원호가 차갑게 말했다.
“아이의 심성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홍오 사백조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원자배와 굉자배의 의견은 반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원자배의 원주들은 홍오를 질책하는 반면, 굉자배는 장건의 자질에 대해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굉운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세대교체의 시기가 되면 늘상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번엔 원자배도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굉운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는 동안 원자배는 홍오의 잘못에 대하여 성토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홍오가 뛰어들었다.
“뭐가 어째? 누구 마음대로 날 천하의 나쁜 놈으로 만들어!”
원호가 계도 끝으로 바닥을 찧었다.
쿵!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백조께서 솔선수범하여 경내의 규율을 무시하시렵니까!”
“흥!”
홍오는 코웃음을 쳤다. 천방지축 홍오지만 계율원은 껄끄럽다.
“귀가 간지러워서 못 참겠는 걸 어쩌냐.”
굉운이 어두운 얼굴로 반장을 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나도 때맞추어 잘 온 것 같네. 더 있었다가는 귀를 후벼파내야 했을 거야.”
굉운은 홍오의 말에 장단을 맞추지 않고 물었다.
“대체 장건이란 아이에게 뭘 가르치신 건지 설명해 주십시오.”
“알잖아. 몰라?”
“사숙께서는 제자를 받을 수 없으나 무량무해의 심득을 전한다는 전제하에 하루 두 시진 아이를 가르치셨습니다.”
“맞다.”
“아이가 제전에서 보인 그것이 무량무해였습니까?”
홍오의 심득인 무량무해가 어떤 것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계율원의 원호도 그것이 무언지 모르고 있다.
“아니.”
홍오가 귀를 후비며 말했다.
“배웠다면 배웠다 할 수도 있는데, 무량무해를 익히기엔 맞지가 않더군. 해서 그건 더 이상 건이에게 가르치지 않을 생각이야. 건이도 무량무해를 거의 익히지 못했어.”
“그럼 넉 달 동안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돌멩이 피하기. 대충 보법이라 해두지.”
“그럼 아이가 스스로의 몸을 파괴한 수법은 무엇입니까?”
홍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금강권.”
“예?”
홍오는 다른 이들이 놀라건 말건 투덜거렸다.
“에이, 바보 같은 녀석.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해. 내가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쓰라 했는데. 왜 지 몸을 지가 때려?”
굉운이 말했다.
“사숙님. 아무래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금강권입니까. 우리가 모르는 금강권의 비전이 있었습니까?”
“비전 같은 게 어디 있나.”
“그런데 어떻게 아이가 금강권으로 침투경을 사용했단 말씀이십니까.”
“죄다 썩은 동태눈인 줄만 알았더니 그래도 그건 알아보았구만?”
홍오가 수염을 만지면서 말했다.
“좋네. 그럼 내 설명해 주지. 대신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어야겠네.”
원호가 홍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규율에 어긋나는 것은 방장 사백께서 허락해도 계율원에서는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규율이고 계율이고 간에 전혀 어긋나지 않을 게야.”
굉운이 조용히 말했다.
“들어보지도 않고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엥?”
늘 웃던 굉운의 표정이 심히 어둡다.
그제야 홍오도 굉운의 변화를 눈치챘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언가 이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흠…….”
굉운이 다시 말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사숙께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해명을 해주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로구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끄응.”
장건을 위해 방장에게 부탁이나 해볼까, 하고 왔던 홍오로서는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방장 사질이 그렇게 말하니 할 수 없지. 어험.”
홍오가 말했다.
“공격(攻擊)의 기본이 무엇인지 아나?”
홍오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섞느니 그냥 듣고 있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에잉, 무공을 수십 년이나 익혔다는 것들이 그걸 몰라. 아, 쉽잖아. 그냥 때리는 거야. 공방(攻防)은 자기는 안 맞고 때리는 거고, 공격은 잘 때리는 거야.”
굉운은 조금도 웃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활불이라 불리는 굉운이 웃지 않고 있으니 홍오는 어쩐지 불안하다.
“잘 때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한 번을 때려도 제대로 때려야 하고, 무조건 때릴 때마다 상대에게 타격을 입혀야 되는 게야.”
“아!”
그제서야 원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래서 아이에게 금강권을 가르쳤더니 발경을 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발경이라면, 그 중에서도 침투경이라면 절대로 막을 수가 없지. 피한다면 모를까, 어디로 막아도 경기가 침투하게 되니 막는 건 불가능해. 설사 나라고 해도 말이지.”
“으음.”
원호가 물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무재라 해도 금강권에서 권공(拳攻)의 오의(奧義)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답답하긴, 누가 그게 오의라고 했어? 기본이라니까. 건이는 말야, 금강권을 통해 권공의 기본을 보고 거기에서 극대의 효율을 뽑아낸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렇게 말을 하는 홍오도 그동안 장건의 기이한 행태를 보아왔으니 안 것이다.
기본이다.
어떤 무공에서든지 장건은 그 기본을 본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보법이 익힐수록 비슷비슷해졌다.
최근 그것을 안 이후, 홍오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홍오에게 있어 무공은 수싸움이었다. 상대보다 하나를 더 알고, 예측하지 못한 수를 두어 쉽게 제압하는 것.
그래서 젊었을 때 수많은 문파의 무공을 연구했고, 무량무해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혹은 모든 무인이 추구하는 궁극의 경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절정고수를 넘어 극한의 경지에 오르면 기본의 대결이 된다. 단순한 기본공으로 내로라하는 절세의 무공을 모두 제압할 수 있다. 평범한 태산압정으로 삼백 가지의 보법과 백 가지의 진식을 파훼할 수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극한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몸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기본이며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경지인 것이다.
“기본이란 그런 거야. 심생종기가 기본인 걸 알지만 그걸 할 수 있는 놈이 얼마나 돼? 해탈의 기본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게지만 그걸 할 줄 아는 중놈이 얼마나 되겠어?”
말투는 경박하지만 뜻은 심오하다.
장경각주 굉봉이 탄성을 내며 말한다.
“모든 법을 얻을 수 있으나 사로잡히지 아니하여 다시 처음의 자세를 견지하니, 출도보리 일체지(出到菩提 一切智)!”
출도보리는 불가의 깨달음이다. 많은 깨달음을 얻어도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림사의 무공이 불가에 기반을 둔 만큼 그러한 깨달음은 곧 무공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굉봉이 반장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감탄을 한다.
“아미타불. 소림에서 용이 나왔군요.”
“흐흐흐.”
장건의 칭찬을 하니 홍오가 웃는다.
“내 말을 이제 알겠지? 그놈 아주 크게 될 놈이야. 용을 하나 건진 거란 말이지.”
원호가 물었다.
“그래서, 사백조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홍오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별로 어려운 거 아냐. 대환단 좀 내놔봐. 이번에 하나 꺼내 놓았다며.”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의 얼굴이 노랗게 떴다.
대환단이 누구 집 개 이름이던가!
그러나 굉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합니다.”
쉽게는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너무 빨리 대답을 하니, 홍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의원의 말을 듣자하니 내공이 다 없어져서 이상한 몸이 되었다더만. 그냥 놔두면 평생 무공하고는 길이 멀어질 텐데? 일상이야 지장이 없다 해도 그러면 무인으로는 끝이지.”
“내공이 없어졌다구요?”
굉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기신(精氣神)이 합일(合一)을 이루어 일체(一體)하더라도 내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우는 드문데……. 단전이 훼손당한 것이 아니라면 , 어딘가 절맥(絶脈)이라도 된 건가?”
가만히 내버려두면 한참을 주절거리는 굉봉인지라 원호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홍오에게 말했다.
“그냥 두는 편이 아이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뭐라?”
홍오가 노한 눈으로 원호를 보았다.
“말해 보시게. 왜 내가 애써 찾아낸 인재를 부정하려는지?”
“먼저 묻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장건의 무공을 보게 되면 뭐라고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뭐?”
홍오의 긴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백조께서는 아니라 하시지만,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장건의 보법이 제마보와 닮았다 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거기서 천종미리보를 보았습니다. 소왕무란 아이의 공격을 피할 때에는 개방의 취팔선보가 아닌가 싶기도 하더군요.”
“그래서? 언제부터 소림이 다른 문파의 눈치를 보게 되었지? 내가 그렇게 가르쳤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
홍오가 노성을 냈다.
긴나라전주 원상이 말했다.
“얼마 전에 전서구를 받았습니다.”
“무슨 전서구인데?”
“우내십존이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엥?”
우내십존이라 하면 당금 강호의 최강자 십인(十人)이요, 동시에 과거 홍오와 강호행을 하던 동료들이다.
“그놈들이 왜? 마교가 들이닥치기라도 했대?”
“우내십존의 목적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알…….”
홍오가 눈을 치켜떴다.
“설마 여기로 오는 겐가?”
“그렇습니다.”
“아니, 여긴 왜? 죽을 때도 다 되어 본산에 처박혀 있어야 할 놈들이 왜 강호로 기어 나와? 나더러 시체에 염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뭐야?”
굉운이 홍오를 바라본다.
“그건 사숙님께서 잘 아실 겁니다.”
“험, 난 정말 몰라. 정말 모르네.”
“잘 생각해 보아주십시오.”
“글쎄…….”
홍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놈들이 왜 그러는지 기억이 안 나는걸?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안 나네.”
원호가 말했다.
“그 중에서 몇 분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 제가 따로 알아보니 화산의 검성께서 그 근원인 듯싶습니다. 검성께서 소림을 나가신 이후, 우내십존의 다른 분들께 연락이 간 것 같습니다만.”
“언강이 그놈이?”
홍오가 한참을 생각해 보다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는데? 언강이 놈하고야 젊었을 때 곡차를 마시면서 한 가지 약속을 한 적이 있긴 하네만.”
“그 약속과 우내십존의 다른 분들은 아무 연관이 없습니까?”
“정말 모른대도? 지금이야 우내십존이니 뭐니 하지만, 내가 어울릴 때에만 해도 그 녀석들, 내 발치에도 못 오던 놈들이야. 언강이 놈만 좀 나았지. 그런 놈들을 내가 왜 신경 쓰겠어?”
굉운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라도 기억이 나면 알려 주십시오. 중요한 일이 될 지도 모릅니다.”
홍오가 돌연 화를 냈다.
“그런데 그 망할 놈들하고 우리 건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원호가 날카로운 어조로 따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백조께 자파의 무공을 빼앗기고 한(恨)을 품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장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야……. 하지만 난 정말로 건이에게 타문파의 무공을 가르치지는 않았네. 그냥 보여준 것뿐이지.”
“그분들은 이제 제자가 아니라 한 문파의 존장이십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파의 무공이 소림에서 이어지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번외 비무 자리를 만든 겐가? 내가 타 문파의 절기를 가르쳤을까봐?”
원호가 긍정했다.
“사백조의 생각이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가르치실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넉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만큼이나 할 줄도 몰랐지만요.”
“에잉! 그러니까 내 얘기가! 언제부터 소림이 남의 눈치를 보게 되었느냔 말일세.”
“지금의 소림은 과거의 소림이 아닙니다. 사백조께서는 정세에 어두우시니 잘 모르실 테지만, 타 문파에서 소림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합니다. 본산제자들이 대놓고 핍박을 받는다 하니 속가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홍오도 얼마 전 본산제자인 무진이 강호행에서 돌아온 것을 기억해냈다. 몰골이 초췌하더니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더 화가 났다.
“전에도 끽소리 못하던 놈들이 왜 이제 와서 난리야?”
굉운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지난 몇 년간 소림이 내내 어려웠지 않습니까. 그 틈에 타 문파의 세력이 크게 흥했다 합니다. 그런 중에 강호에서 소림의 입지가 많이 줄었습니다.”
홍오는 자신의 사부 문각을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 노친네가 나를 소림에 가두어두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게다. 내로라할 녀석 하나가 나와 주어야 다른 놈들이 찍소리도 못하지. 그게 강호의 법칙이니까.”
홍오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우내십존은 한 명 한 명이 강호를 움직일 수 있는 실력자이며 거물이다. 소림의 입지가 좁아진 이때에 그들이 소림에 와 꼬투리라도 잡는다면 방장으로서는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터다.
하지만 정말로 윤언강을 제외한 다른 우내십존이 왜 소림을 찾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솔직히 다른 이들은 홍오의 눈에 차지 않아 관심도 두지 않았다.
‘내가 치매에 걸렸나?’
워낙 위치가 위치인 만큼 한 번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우내십존이다. 그들이 소림으로 오고 있다 하면 결코 작은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홍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건이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네.”
원상이 말했다.
“반대합니다. 차라리 아이에게는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하지 않습니까.”
“다른 놈들의 눈치를 보느라 대성할 아이를 그냥 버려? 그게 지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홍오가 방장 굉운을 보았다.
“방장 사질! 사질도 같은 생각인가?”
원주들이 모두 굉운을 바라본다. 그의 한마디에 앞으로 소림의 행보가 결정될 것이다. 또한, 굉운이 무슨 생각으로 홍오에게 장건이란 아이를 맡겼는지에 대한 해답도 알게 된다.
중요한 순간이다.
굉운이 잠시 눈을 감았다.
홍오가 계속해서 따졌다.
“방장 사질이 내게 건이를 맡긴 것도 그 녀석이 대성할 걸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나 몰라라 버리겠다고?”
한참이나 말이 없던 굉운이 눈을 떴다.
“홍오 사숙께서 아이를 한 명 가르치고 있다고 해서 우내십존이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옳겠지요.”
천불전주 원당이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 아이가 어디 보통 아이더랍니까? 넉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너댓 가지의 보법을 익히고 발경에 침투경을 한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계속해서 홍오 사백조께 맡겨둔다면 구파일방의 무공을 다 익히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누군가 소림의 무공을 무단으로 배우고 있다 하면 저희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홍오가 도끼눈을 했다.
“가르친 게 아니래도! 그냥 한 번 보여줬더니 제가 알아서 따라 한 거야! 게다가 나도 정작 그놈들의 비전 절기는 모른다고!”
“세상에 홍오 사백조 같은 분이 둘이나 있단 말씀이십니까? 우내십존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그놈들이 건이가 자기네 무공을 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
“검성께서 보고 가셨다면서요. 그러니 더욱 주목하는 것이겠지요. 장건이란 아이가 자파의 무공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순간, 큰일이 벌어질 겝니다.”
“이런 답답한! 그놈들이 두려워서 용이 될 아이를 시궁창에 처박겠다고?”
얘기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 양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소림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기에 더 그러했다.
생각을 정리한 굉운이 결정을 내렸다.
“다른 의원을 불러 아이를 진맥케 하겠습니다. 다른 소견이 나온다고 하면 그때 다시 회의를 하도록 하지요.”
홍오가 물었다.
“그럼 대환단은? 우내십존 놈들이 자파의 무공 때문에 소림에 껄떡대는 게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진 후에 상의를 하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그때까지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도 중단해 주십시오.”
“어차피 내공도 없는 아이를 무슨 수로 가르쳐?”
“소림에서 용이 나온다면 그 역시 좋은 일이나, 타 문파의 무공을 익힌 아이가 소림을 대표하는 용이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홍오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 일색이다.
굉운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 소임은 소림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이 하나 때문에 소림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본산의 제자뿐 아니라, 몇만에 달하는 속가제자들이 강호에서 타 문파의 견철(牽?) 속에 고생을 하게 됩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부족한 문제입니다.”
“끄으으응!”
홍오는 유난히 긴 신음소리를 냈다.
“그만 가겠네!”
“우내십존과의 일, 생각나시면 꼭 말씀해 주십시오.”
“알았네!”
어쩐지 쓸쓸한 얼굴로 홍오가 자리를 벗어났다.
굉운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는가…….’
홍오라면 무언가 다른 방법으로 아이를 가르칠 거라 생각했다. 타 문파 무공이 가진 약점을 찾아내거나 하는 비열한 방법이 아니라, 그만의 심득을 전수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아직까지 홍오는 40여 년 전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굉운의 성취가 홍오를 넘어서서 홍오의 수준을 볼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진전이 없는 것이다.
‘유난히 속세에 연이 많은 분. 쉽게 버릴 수도 끊을 수도 없을 테지. 길은 바로 눈앞에 있는데.’
굉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가 강해져야 한다. 소림을 짊어질 수 있도록, 적어도 다시는 건이 같은 아이가 빛을 보지도 못하고 스러지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아미타불…….
굉운의 불호소리가 조그맣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