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141
141화
“하하. 아무리 스톤빌에 돈 냄새가 난다지만….”
곧 뾰족한 미소를 지은 요정이 연기를 자욱하게 토해내며 일어섰다. 이안의 테이블로 느긋하게 다가오면서, 그가 덧붙였다.
“하다하다, 이젠 역겨운 예비 마족까지 기어들어 올 줄이야.”
외모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
제발로 와주니 고맙긴 하다만….
태연하게 빵을 씹으면서, 이안은 샬롯을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인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선에 이안이 작게 고개를 젓는 사이, 요정이 테이블 옆에 멈춰 섰다.
궐련을 바닥에 툭 떨군 그가, 불씨를 눌러 밟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너 같은 역겨운 족속이 낄 자리는 없다. 수인. 그러니 조용히 처먹고 썩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칼데일 자작의 저택 바닥에, 가죽 장식으로 깔리고 싶지 않다면.”
자작 밑에서 일하는 놈이었군.
이안은 소시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칼데일 자작은 스톤빌의 영주였다. 언덕 위 장원의 주인이기도 했다.
어쨌건 요정은 이안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오히려 샬롯이 맥주를 마시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안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그녀가, 비로소 잔을 내려놓고는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 녀석 덕분에, 너희가 얼마나 비열한 족속들인지 잠시 잊고 살았군.”
“원하면 언제라도 칼을 뽑아라. 짐승답게 사냥당하는 기분을 맛보게 해줄 테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미소 지은 샬롯이 천천히 일어섰다. 허리를 꼿꼿이 편 그녀는 요정보다 머리 반 개 정도는 더 컸다. 그의 눈을 빤히 내려다보며, 샬롯이 말했다.
“너야말로 혼자선 자신이 없나 보군.”
“뭐라고…?”
“그렇게 역겨우면 깔끔하게 네가 덤벼서 쫓아내면 될 텐데. 뒷배로 협박이나 하고 말이야.”
“하… 당장 죽고 싶은 모양이군.”
“너만 괜찮다면 얼마든지, 귀쟁아.”
샬롯이 속삭이듯 말했다. 요정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가죽이 상하지 않게 죽여 주-”
내뱉던 요정의 목소리가 순간 늘어졌다. 예고 없이 손을 뻗은 샬롯이, 그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테이블에 내리찍은 것이다. 동시에 요정의 한쪽 팔을 등 뒤로 꺾어 팔꿈치로 짓눌렀다. 술잔이 엎어지면서 맥주가 요정의 얼굴과 머리칼에 튀었다.
놈의 패거리들이 반사적으로 일어서는 가운데, 샬롯이 덧붙였다.
“죽이기 전에 귀부터 잘라 주마. 좀 따끔할 거야.”
이미 예상하고 소시지가 담긴 접시를 한 손에 들고 있던 이안이, 단검을 뽑으려는 샬롯을 향해 내뱉었다.
“날붙이는 안 돼. 주먹만 써라.”
그는 요정이 정당한 결투를 하리라 믿지 않았다. 수틀리면 도망쳐 지원군을 우르르 끌고 올 게 분명했다. 날붙이를 든 상태라면 상황이 심각해지리라. 더해서,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와 따뜻한 잠자리도 날아가 버릴 터였다.
물론 이건 부가적인 이유였다.
그는 이 요정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샬롯이 칼을 들면 놈을 살려둘 리 없었다. 이안의 명령이 있다 해도, 기어코 죽여버릴 공산이 컸다.
샬롯이 단검을 다시 넣으며 대답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
그때 꺾여있던 요정의 팔이 위로 휙 올라갔다. 인간이라면 불가능했을 유연한 움직임. 동시에 튕기듯 몸을 돌린 요정의 주먹이 샬롯의 턱으로 솟구쳤다.
샬롯은 팔을 놔버리며 뒤로 몸을 젖혔다. 벌떡 일어선 요정이 다가오는 패거리들을 짜증스럽게 돌아보았다.
“오지 마! 문이나 막아!”
멈칫한 그들이 순순히 물러났다. 무장 상태만 봐도 오합지졸들은 아니었다. 저마다 술잔을 집어 든 그들이 문가에 모여 섰다.
그사이 요정은 다시 샬롯에게 달려들었다. 샬롯과 마찬가지로 맨주먹이었다. 물론 강철 장갑을 끼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인 무기가 되긴 했지만.
“호오.”
뜻밖이라는 듯 탄성을 흘린 샬롯이 몸을 틀어 피하고는 반격했다. 요정도 이번에는 그녀의 주먹을 팔로 쳐내면서 품으로 파고들었다. 치고받는 난타전이 시작됐다.
빠악! 퍽! 와장창-
장내가 삽시에 난장판이 됐다. 테이블이 엎어지고 냄비가 날아다녔다. 식사를 이어가는 이안은 물론, 요정의 패거리들도 흥미진진하게 술을 홀짝이며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어지간한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힘이 센 두 종족의 난투극은 꽤 그럴듯한 볼거리였다.
빠각-
하지만 누가 우세인지는 금방 명확해졌다. 아무리 요정이라도 수인보다 강하지는 못했다. 그는 샬롯만큼이나 빨랐지만, 힘과 기술이 조금 부족했다.
물론 샬롯도 요정의 공격을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점점 더 놈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샬롯의 주먹에 맞은 요정의 고개가 이안 쪽으로 설핏 돌아왔다. 아까의 오만함과 여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 그 와중에도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였다.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이안의 육감이 작은 경고를 보낸 건 바로 그 직후였다.
‘…누가 요정 아니랄까 봐.’
이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저놈의 속내를 알 것 같아서였다.
그때 샬롯이 다시 한번 주먹을 내뻗었다. 요정은 몸을 비틀어 어깨로 주먹을 받아넘기면서,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늘어뜨린 오른손에, 어느새 뾰족한 비수가 들려 있었다. 날이 더 섬뜩하게 번쩍이는 건 마력이 실려서였다.
주먹으로 덤빈 건 애초부터 공정하게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순간을 확실하게 만들어 내려는 의도였을 뿐.
요정이 그대로 샬롯의 옆구리를 향해 팔을 내뻗었다.
턱.
하지만 비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
어느새 다가온 이안이 요정의 팔뚝을 콱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무시하고 팔을 뻗으려던 요정은, 손길을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닫자 비로소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꽤 단정하고 곱상하던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지금 결투에 끼어드는 거냐?”
이안이 씹던 소시지를 삼키고는 내뱉었다.
“날붙이는 안 된다니까.”
“……?!”
“그건 너도 포함이야.”
요정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가운데, 놈의 패거리들이 술잔을 집어 던지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딱 귀쟁이 다운 짓거리군.”
정작 이안이 끼어든 시점부턴 멈춰 서 있던 샬롯이 피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중얼댔다. 그리고는 요정에게서 등을 돌리고 패거리들을 노려보았다.
비로소 요정의 피가 터진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이 짐승의 노리개인 줄 알았더니, 힘깨나 쓰는 놈이었군. 겉보기와 달리.”
“힘만 쓸 줄 아는 건 아니지.”
내뱉는 이안의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갔다. 요정의 미간이 꿈틀댔다. 그는 여전히 몸을 일으키려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였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건 자신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 때문이리라. 요정이 단검 자루에 얹어져 있는 그의 왼손을 슬쩍 곁눈질하는 가운데, 이안이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우린 이 도시에 일거리를 찾으러 온 게 아니야. 네놈 밥그릇 따위엔 관심도 없단 얘기지. 물론 그 어쩌고 자작을 겁낼 이유도 없고.”
“……!”
“그러니 이쯤하고 대화로 풀던가, 아니면 칼을 뽑은 김에 제대로 해보던가. 어쩔래?”
“멍청한…. 소란이 커지면, 네놈들이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나?”
“그거야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내가 너라면, 네 목숨부터 걱정할 거야. 게다가 난 네 마력이 별로 무섭지 않아.”
이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너희 요정들의 마력이 별 볼 일 없단 건, 이미 알고 있거든.”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 테냐…?”
요정의 눈에 아른거리는 마력이 더 반짝였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이안의 손아귀에서 흐릿한 파장이 번진 건 그때였다.
“!”
요정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동자에 아른거리던 마력이 삽시에 흩어졌다.
비전 스킬, 마력 역류. 본래는 타이밍을 잘 맞춰 써야 하는 스킬이었지만, 지금 이 요정처럼 마력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는 상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숨을 헐떡인 요정이 내뱉었다.
“네놈, 유물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냐…?”
“글쎄. 어떨 것 같냐?”
되물은 이안이 요정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요정은 그의 눈을 뚫을 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마력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하지만 이안의 눈은 그저 검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요정의 눈매가 가늘게 떨릴 찰나.
벌컥-
주점의 문이 열리더니, 안면 가리개를 눌러 쓴 기사와 사슬 갑옷을 걸친 종자가 장내로 들어섰다.
샬롯과 거리를 두고 대치 중이던 패거리들이 화들짝 놀라 그들 쪽을 돌아보았다.
“……?”
난장판인 장내를 보고 잠깐 굳었던 둘의 시선이, 이윽고 그들 너머의 샬롯과 이안 쪽으로 향했다.
메브가 숨을 내쉬며 검 자루에 손을 얹는 가운데, 미간을 찌푸린 필립이 내뱉었다.
“피를 보기 직전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만. 꼭 그래야 하는 상황입니까?”
“글쎄. …그건 여기 이 친구의 대답에 따라-”
이안이 대답할 찰나, 불현듯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떨쳐낸 요정이 바닥을 굴렀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그가 펄쩍 뛰어올라 구석의 테이블 위에 섰다.
“덕분에 오해가 풀렸다. 인간.”
언제 꼴사납게 움직였냐는 듯 태연하게 내뱉은 그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이안과 샬롯, 필립을 거쳐 메브를 바라보았다.
당당해 보이는 자세였지만, 이안에겐 여차하면 바로 등 뒤의 창문으로 몸을 날려 도망치려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리고 그건 생존이란 측면에서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 밖으로 도망치는 것까진 그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요정 기사들은 게임이랑 다른 게 전혀 없군.
이안이 헛웃음을 짓는 가운데, 메브를 잠시 응시한 요정이 내뱉었다.
“나는 칼데일 자작에게 고용된 기사, 핀드렐 아이나스요.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갈등이었으나, 저 흑발 남자와의 대화로 해결되었소.”
“…….”
“이 이상 문제가 커지기를 원하지는 않으니, 길을 터 주시오.”
당당한 말투였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안과 샬롯 둘만으로도 팽팽하던 긴장감은, 메브와 필립의 등장으로 균형이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메브와 샬롯 사이에 낀 핀드렐의 부하들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메브 때문일 터였다.
메브는 대답 대신 이안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쩌고 싶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흠….”
잠시 생각한 이안이, 이내 비켜 주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샬롯이 미간을 좁혔지만 메브와 필립은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그제야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린 핀드렐이 걸음을 옮기며 내뱉었다.
“현명한 결정을 하셨군. 경, 이렇게 만나게 된 김에 통성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떻겠소?”
메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들으려 물은 게 아닌 듯 태연하게 장내를 가로지른 핀드렐이, 패거리들에게 턱짓하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
태연한 말투와 달리 다급한 손길로 문을 연 그가 주점을 나섰다. 패거리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이 닫히자,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그 잠깐 사이를 못 참으시고 또 싸우셨습니까…?”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몸을 돌렸다. 필립이 난장판인 장내를 가로지르며 중얼댔다.
“보아하니 요정 기사 같던데. 어쩌다-”
“저쪽이 시비를 걸었다. 뻔뻔한 귀쟁이 새끼 같으니. 그냥 귀를 도려낼 걸 그랬군.”
대답한 건 샬롯이었다. 그녀가 분통을 터뜨리는 사이, 이안은 주방 옆에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던 여급에게로 다가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여급이 숨을 들이켰다.
“사, 살려주세요, 나리…!”
누가 죽인대? 피식댄 이안이 그녀의 얼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받아라. 추가 음식이랑 방은 필요 없을 것 같으니까, 거기에 이 돈까지 더하면 부서진 기물값은 충분히 나올 거다.”
“네, 네에…?”
엉겁결에 동전을 받은 여급이 눈을 깜빡였다.
더 덧붙이는 말 없이 몸을 돌린 이안이, 입맛을 다시며 메브에게로 다가갔다.
“오시자마자 이렇게 돼서 미안하게 됐소만. 당장 떠나는 게 좋겠소. 방금 나간 그놈이, 병사건 뭐건 잔뜩 끌고 돌아올 거요.”
“그래서, 이렇게 그냥 도망치잔 말이냐?”
샬롯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그놈 하나 죽이겠다고 다른 병사들까지 싹 다 죽일까? 그러다 보면 결국엔 자작까지 죽여야 할 텐데?”
그제야 머쓱한 얼굴이 된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대로겠군. 흥분해서 생각이 짧았다.”
이안은 어깨만 까딱였다. 어차피 핀드렐이 제 발로 굴러들어오리란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게임의 요정들은 그 자존심만큼이나 비열하고, 집요했다. 심지어 저놈은 기사였다. 체면을 제대로 구긴 채로 떠났으니, 어떤 식으로든 갚아주려 들 게 분명했다. 아마 곧바로 장원으로 돌아가 뜻을 함께할 자들을 모을 터였다.
그에게 유물이 있다 여길 테니 더더욱 포기하지 않을 터.
그리고 그게 이안이 바라는 바였다. 여기선 도시 한복판이니 참았지만, 그때는 방금 같은 친절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굳이 물으려던 말을 꺼내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지금은 어차피 뭘 묻든, 시간만 끌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않을 게 뻔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원활한 대화를 도와줄 단검이 곁들여진다면, 그 귀쟁이 놈의 입에서 대답을 국수 가락처럼 뽑아낼 수 있으리라.
‘목욕과 잠자리가 날아간 건 빡치지만… 시발….’
“거참, 운명이란 재미있군요.”
필립이 중얼댄 건 그때였다.
질색할 줄 알았건만. 그는 묘한 표정으로 테이블 옆에 놓인 짐가방을 냉큼 짊어졌다.
그리고 그건 메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참으로 공교롭군….”
안면 가리개를 올리며 내뱉은 메브가, 이안을 마주 보았다.
“나도 너희들에게 바로 도시를 떠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안. …너와 비슷한 이유로.”
“그쪽에서도 뭔가 일이 있으셨군….”
어차피 오늘은 목욕할 팔자가 아니었던 건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문을 턱짓했다.
“무슨 사정인지는, 가면서 들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