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Fantasy Became a Dead Horse RAW novel - Chapter 497
497화
“뭐, 자업자득이지.”
낮게 코웃음 친 이안이 덧붙였다.
“아쉽긴 하네. 네가 카르하의 신성을 견딜 수 있는지 확인할 기회였는데.”
요그가 다시 한번 혀를 날름댔다.
-호오, 이 기분 나쁜 잔열이 바로…. …그래. 나도 궁금한걸. 얼마나 화끈했을지 말이야.
죽지는 않았으리라 내심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순순히 타죽을 녀석도 아니긴 했다.
“다음 번엔 반드시 경험하게 해주지. 그러니까 당장은….”
세렌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네 그 어둠의 지식 꾸러미부터 열어 봐. 앞으로 신들을 조심해야 하는 건, 너뿐만이 아니니까.”
시선을 돌린 요그가 나지막이 웃음 지었다.
-다행히 이번 건 쉬운 부탁이군. 신들의 시선을 속이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의태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세렌이 곧바로 이해한 듯 말했다.
-그래. 너희는 신들이 모든 걸 굽어살핀다 여기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아. 눈 뜬 장님 같은 것들이 태반이지.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요그가 느긋하게 혀를 날름댔다.
-그러니까 흉내만 내더라도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거야. …신들의 눈과 귀를 대신하는 자들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신의 사도, 혹은 신들을 가까이 섬기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세렌이 머쓱하게 턱을 긁적였다.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필요성도 느껴 본 적이 없고요.”
요그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기대도 안 했어. 걱정 마. 내가 알고 있으니까. 네게 주문을 새겨 줄 수도 있어. …친구, 네가 허락만 해준다면 말이야.
요그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대답 대신 세렌을 돌아보았다. 디아나가 입에 문 궐련으로 손을 뻗는 채였다.
세렌이 슬쩍 고개를 숙이고, 디아나가 연기를 훅 뿜으면서도 선선히 입을 벌려 궐련을 양보했다.
궐련을 입으로 가져가며,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게 해.”
요그가 미끄러지듯 그의 팔목 보호대 사이로 파고들었다. 따끔한 감각이 번지고, 뒤이어 한 줌의 연기로 화한 녀석이 세렌에게 날아갔다.
-손바닥에 새길 거야. 앞으로는 손목이 잘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세렌이 냉큼 왼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다시 형태를 갖춘 요그가, 장갑 사이로 기어들어 갔다.
-성흔과 감응하도록 해. 네 혼돈과 주문을 이어 붙여야 하니까.
고개를 끄덕인 세렌이 눈을 감았다. 내내 침묵하던 이안의 정수가 옅은 울림을 토해내고, 그녀의 전신에 흐릿한 보랏빛이 번졌다.
신경도 쓰지 않고 연기를 한 모금 들이켠 이안이, 디아나에게 다시 궐련을 내밀었다.
“남부는 초행이야. 길 안내는 계속 내가 해야 할 거야.”
“물론이지. 염려 마. 물론 사막의 지리는 나도 잘 알지 못하긴 하지만….”
대답하며 궐련을 입에 문 디아나가 턱을 옆으로 까딱였다.
“그냥 서쪽으로 계속 걷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을 거야.”
남부 전선을 지나 제국의 영토로 들어서는 과정은 전혀 걱정되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이안과 루시아가 함께한다면 그 모든 과정이 순탄하리라 여기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게 그들에게 동행을 청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몰랐다.
이안이 모른 척 말을 이었다.
“전선을 지나면, 근처의 도시도 들를 거야. 찬란한 여신의 사원이나 교회가 있는 곳으로. 알아서 잘 안내하도록 해.”
“어렵진 않겠지만… 굳이?”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읊조렸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굳이.”
“…알았어. 그렇게 하지.”
디아나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아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져서인지도 몰랐다.
솨아아-
보랏빛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세렌을 감싸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그리고 변화가 이어졌다.
꾸득- 꾸드드득….
두개골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듯, 그녀의 얼굴 곳곳이 울룩불룩하게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뾰족하게 휘어져 있던 뿔이 머리 안으로 파고들듯 작아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세렌의 전신이 보랏빛 안개에 완전히 삼켜졌다.
꾸드득… 뿌득….
넘실대는 안개 너머에서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디아나의 얼굴이 질색하듯 일그러지고, 루시아는 묘한 긴장감마저 느껴지는 눈으로 안개를 응시했다.
사아아아….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진 건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너머에서, 의태를 끝낸 세렌의 모습이 드러났다.
“호오….”
디아나가 나지막이 감탄했다.
반마족 대신, 검푸른 머리칼에 매끄러운 흰 피부를 가진 여기사가 서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때. 감쪽같지?
요그가 거드름을 피우는 가운데, 세렌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안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느낌이 어떠시오?”
“조금… 갑갑한 느낌이군요. 몸도 무겁고요.”
세렌이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대답했다. 체구도 조금 작아져서, 갑옷 곳곳에서 절그럭대는 소리가 번졌다.
“하지만… 다시 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말을 맺는 그녀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맺혔다. 험악하거나 불길하긴커녕, 해맑고 부드럽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원래는 엄청 순하게 생기셨었군.
이안이 내심 읊조리는 사이.
-너는 정말 약해진 거야. 본질을 감추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 그러니까 그 모습일 땐, 알아서 조심하라고.
무책임하게 덧붙이며 연기가 된 요그가 쏜살같이 되돌아왔다.
견갑 위에서 다시 형태를 갖춘 녀석이, 이안을 올려다보며 혀를 날름댔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럽겠지, 친구?
궐련을 입에 문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모로가 남았잖아.”
-모로? 저 녀석은 네가 명령만 하면 돼. 이미 방법을 안다고.
“…이미 안다고?”
요그가 비웃듯 키득댔다.
-그래. 이 반편이보다 유능하다고 할 수 있지.
이안이 저만치의 모로를 돌아보았다. 콧김을 뿜은 녀석이 조금 비틀대며 일어섰다. 뒤이어 혼돈의 정수가 낮게 공명했다. 이안의 허락을 구하려는 것 같았다.
솨아아….
손을 내민 이안이 혼돈의 파장을 뿜어냈다.
모로의 안광이 삽시에 짙어지고, 넘실대는 갈기에서 보라색의 안개가 스멀스멀 번져 나왔다.
뿌득- 뿌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듯, 모로의 몸 곳곳이 기괴하게 꺾이고 꿈틀댔다.
그럴수록 조금씩 작아지고 있긴 했지만, 어쨌건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어쩌면 녀석을 삼키는 보라색 안개의 진짜 역할은, 저 흉한 과정을 감춰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솨아아….
몇 분 지나지 않아, 안개가 말끔하게 흩어졌다. 루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그게 네 본모습이었던 거야?”
모습을 드러낸 모로는 과거, 이안의 꿈에서 형상화되었던 미끈한 흑마의 모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신에 검은 마갑을 걸치고 있다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이안의 입꼬리도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나도 변신 말이 생겼네.”
푸르르 투레질한 모로가 다시 땅에 주저앉았다. 꽤 피곤한 듯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세렌이 자신의 흉갑에 주먹을 얹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성자 대행.”
-이 친구가 아니라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것 같은데. 반편아.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루시아가 벌떡 일어섰다.
그대로 몸을 돌려 몇 걸음을 옮긴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일행들이 돌아보는 가운데.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루시아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망토 자락 사이로 드러난 손에는,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던 구운 전갈의 꼬리가 들려 있었다.
일행들을 돌아본 그녀가 손에 든 전갈을 흔들었다.
“하려던 식사는, 하고 가자고요.”
***
일행은 식사에 이어 잠까지 청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사실,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으니까.
물론 세렌을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나면, 그녀는 한동안 마음 편히 잠들 수 없을 테니까.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물론 이안이었다.
‘…벽이 무너지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생각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 같아서이기도 했다.
모로의 몸에 기대앉은 그는, 새로 꺼낸 궐련을 입에 문 채 차근히 생각을 전개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상황이 얼마나 난장판인지를 곱씹기에도 충분했다.
“세상에….”
세렌의 나지막한 탄식이 번진 건, 느긋하게 피우던 궐련이 반 이상 타들어 갔을 때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시선은 하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해가… 뜨는군요.”
날이 밝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해가 보이지는 않았다. 자욱한 먹구름 탓에, 일대는 여전히 칙칙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밤이 계속되던 세상에서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낸 이에겐, 이마저도 감동적인 변화일 터였다.
“아침이 오는 걸 기뻐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타락자는 아니시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이안이 읊조리는 사이.
“혹시 꿈이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아닌가 보네.”
디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녀 역시 어느새 칙칙하게 밝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면을 벗고 코로 깊이 숨을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그래 봐야 짠 내밖에 느껴지지 않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게요. 꿈이 아니네요.”
루시아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늘어질 듯 기지개를 켜는 채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일행을 돌아본 이안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감상할 시간은 앞으로도 충분하니까, 일단은 준비부터 하자.”
일행들은 곧바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떠날 준비가 모두 끝난 건, 이안의 남은 궐련이 전부 타들어 가기도 전이었다. 가면을 목에 건 디아나가 얼마 남지 않은 궐련을 소중하게 입에 무는 사이.
“다시 만나게 될 날까지, 부디 보중하십시오. 성자 대행.”
인간의 모습을 한 세렌이, 흉갑에 왼 주먹을 얹으며 말했다.
한쪽 옆구리에는 루시아에게 받은 철퇴를 반대쪽에는 디아나의 소검을 고정한 채였다.
어깨에는 이안이 건네준 가죽 수통의 끈까지 걸고 있었다. 수통에는 혼자 며칠은 너끈히 마실 수 있을 만큼의 물이 들어 있었다.
그전에는 충분히 사막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경이야말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이안이, 세렌의 푸른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경은 나와 전하 사이의 전령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목숨을 아끼라는 뜻이오. 이해하셨소?”
“…예. 제 존재는,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성자 대행의 권속으로 남을 테니까요.”
“조심하시오. 원할 때마다 힘을 받으실 수는 없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적으로 뵐 일만 없길 바랄 뿐입니다.”
“그건 내게 달린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이안의 대답에 씁쓸하게 미소 지은 세렌이, 옆에 선 루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또 뵙길 바라겠습니다. 사제님. 함께하는 동안, 감사한 일이 참 많았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경. 덕분에 많은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또 만나요.”
루시아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 오래 함께하지도 않았건만, 이미 정이 든 듯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였다.
그 모습이 기쁜 듯 설핏 미소 지은 세렌이, 뒤이어 디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둘의 인사는 그다지 길지 않았다.
“고향에서도 평안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경.”
“무운을 빌어요.”
고개를 까딱인 이안이 그대로 몸을 돌려 안장 위에 훌쩍 올라탔다.
모로는 이미 머리를 서쪽으로 향하게 선 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아가 뒤에 올라타고, 디아나가 능숙하게 앞으로 나서며 고삐를 잡았다.
“요그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뒤에서 세렌이 덧붙였다. 요그는 잠든 상태였다. 아공간에 갇히고 주문을 새긴 후유증인지, 해가 떠서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또 봅시다. 이왕이면 좋은 일로.”
덧붙인 이안이 모로의 목덜미를 두드렸다. 콧김을 뿜은 모로가 기다렸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은 해안 사구를 따라 쭉 나아갈 예정이었다.
“꼭 다시 만나요, 경.”
궐련을 입에 문 디아나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며 팔을 흔들었다.
“…….”
멀어지는 일행을 향해 한 번 더 무릎을 구부리며 인사한 세렌이, 일행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 채였다.
“아쉽네요. 종종 언니가 떠올라서 마음이 많이 갔는데 말이에요.”
이윽고 루시아가 읊조렸다. 이안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위태롭고, 충직하고… 그런 부분들이요.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안 님 말씀대로, 좋은 일로.”
이안은 시선을 돌리며 어깨만 으쓱였다. 세렌과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좋은 일로 보게 될지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이제 흑태자는 흩어져 있던 자신들의 세력을 집결시킬 것이며, 그 과정이 끝나면 제국으로 향하게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타락자들을 끌고 어떻게 검은 땅을 벗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이 본 히케드라면, 분명 뭔가 방법을 강구해 두었을 터였다. 이미 준비가 끝나 있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엔 아마도, 전쟁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둘로 나뉜 제국의 내전이자 형제간의 전쟁. 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격돌이며, 빛과 어둠의 대결.
역사에 어떤 이름으로 기록될지, 어느 쪽이 승리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전쟁이 되리라.
‘…그 전에, 마물들이 먼저 대륙을 뒤집어 놓을지도.’
이안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았다. 대마족 아키하타라와 다르마라자도 그중 하나였다.
부키키아가 그랬듯, 놈들 역시 마경 밖으로 진출하려 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저 밖도 이미….’
내심 덧붙이던 이안이, 이내 상념을 떨치듯 시선을 돌렸다.
사구 너머, 파도가 넘실대는 검푸른 바다가 그의 시야를 채웠다.
그나마 파도가 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죽은 바다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그건 겉모습뿐일 터였다. 저 수면 아래에는 여전히, 온갖 변이된 생물들이 우글대고 있으리라.
그건 곧 앞으로도 이 인근은 계속해서 저주받은 바다로 남게 되리라는 뜻이었다.
제아무리 교단의 정화대라 할지라도 바닷속까지 정화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암울하네. 내 미래처럼.’
내심 읊조리며, 이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빛에 흐릿한 파장이 일렁였다.
디아나의 입에 물려 있던 짤막한 궐련이, 허공으로 휙 떠올라 그의 손가락 사이로 빨려 들어왔다.
“……?!”
눈을 치켜뜬 디아나가 그를 돌아보았다.
다소 망연자실한 눈빛이었지만, 이안은 눈길도 주지 않고 궐련을 입에 물었다. 어차피 이제 몇 모금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미지근해지는 바람을 느끼며 연기를 들이마시는 사이.
“이렇게 밖으로 나가게 된 건 정말 너무 기쁘지만요.”
루시아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잠시 머뭇거린 녀석이 덧붙였다.
“…백금룡께선, 괜찮으신 걸까요?”
눈매를 순간 꿈틀댄 이안이, 표정과 달리 담담하게 읊조렸다.
“글쎄. 만나 보면 확실해지겠지.”
“백금룡을… 만날 거라고…?”
홱 뒤를 돌아본 디아나가 물었다.
이안이 연기를 뿜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 너도 소개해 줄 테니까.”
“뭐…? 아니… 아니야. 나는 괜찮아. 소개해 달라고 물은 게 아니야… 그냥 놀란 거라고….”
입을 쩍 벌렸던 디아나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듬댔다.
빈말로 거절하는 건 아닐 터였다.
…남들은 못 만나서 안달이던데.
덕분에 옅은 헛웃음을 흘린 이안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벽이 우리 예상보다도 빨리 무너진 건 사실인 것 같다. 루시.”
“…이안 님도, 뭔가 환영을 보신 거군요.”
루시아가 놀란 기색 없이 대답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덧붙였다.
“저는 사원을 봤어요. 화로에 다시 성화가 타오르더군요.”
“그럼 사제들도 네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됐겠네.”
“아마도요. 아니, 분명히요.”
루시아가 그다지 조바심을 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이안이 연기를 들이마시며 미소 지었다.
“잘됐네. 남부에서 가장 먼 곳에서, 제일 먼저 우리 생존을 알게 됐으니까. 난, 호프 시를 봤거든.”
“정말요…? 다행이네요. 곧 북부 전역에 소식이 전해질 테고, 다들 문제 일으키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겠어요.”
“그렇겠지. …우리 소재를 파악하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않는다면.”
이안의 대답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루시아가, 문득 멈칫했다.
“…내해. 내해를 건너기 어렵지 않을까요?”
부키키아와 바다 괴물들을 떠올린 것이리라. 남부에서 본토로 건너가려면 배를 타야 하지 않던가.
“글쎄. 아무리 그래도 놈이 내해 전체를 점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바다를 건널 방법이 아예 없어지진 않을 거야.”
담담하게 내뱉은 이안이, 루시아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상황을 두고 보자고. 어쩌면, 위대한 분을 만나기만 해도 해결될지도 모르니까.”
백금룡이 공간을 도약하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이미 몇 번이나 보지 않았던가.
이미 검은 벽까지 무너뜨린 판국이니, 그들을 본토로 이동시키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 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뭔가 문제를 안고 계실 거 같지만 말이야. 예상보다 빠르다는 건, 그만큼 준비가 부족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그게 뭐든….”
“…우리가 도와드려야겠죠. 백금룡께서 서두르신 건, 이안 님을 위해서였을 테니까요.”
루시아가 말을 받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이안이, 문득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매가 슬며시 가늘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 마. 그분을 만난 뒤엔, 먼저 널 고향에 데려다줄 거니까.”
이안이 턱을 까딱이며 말했다.
비단 그녀가 준 퀘스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친구들을 만날 거거든.”
“한 번 더 말하지만….”
입맛을 다시며 운을 뗀 디아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남은 인생을 조용히 살기 위해서 돌아가는 거야. 이안 호프. 은퇴하러 가는 거라고.”
“누가 뭐래? 걱정 마. 너희 원로에게도 제대로 전해 줄 테니까.”
“부디 부탁할게. 물론 그 전에… 사막과 전선을 통과하는 것도, 잘 부탁하고.”
“전선은 걱정 말아요.”
대답한 건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민 루시아였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덧붙였다.
“관문이 활짝 열리고 지휘관이 달려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될 거예요. 북부의 초인이 돌아오셨으니까.”
심지만 남은 궐련을 옆으로 뱉은 이안이, 심드렁하게 남은 연기를 뿜어내며 읊조렸다.
“…남쪽에도 내 이름이 통할지는, 가 봐야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