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Rude RAW novel - Chapter 16
15
어제 오후, SNC 그룹 석상천 회장이 자택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됐습니다. 범인은 그룹 사내 이사이자 생전 석 회장의 수족이었던 이 모 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씨 역시 과다 출혈로 현장에서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는데요, 경찰은 평소 갈등이 있었던 두 사람이 술을 마시다 감정이 격해져 싸움이 일었고 급기야 심각한 칼부림으로 번진 것으로 보고 구체적인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경찰은 과거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석상천 회장의 행적과 관련해서도 철저히 수사 중이며, 이번 사건을 단순 사고사가 아닌 일종의 폭력 조직 내 서열 다툼으로 인해 불거진 사건으로 확대해 수사를 진행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SNC 그룹은 경찰의 이런 발표와 관련해 고인의 명예 훼손과….
***
장맛비가 그쳤다. 그리고 비가 그치자 기다렸다는 듯 뒤늦은 더위가 시작됐다.
유난히도 길었던 장마의 끝. 뜨겁고 습한 공기를 불평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버티고 서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폭염 속에서.
백강우가 죽었다.
아니, 죽었다고 했다. 아주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그사이 세상은 다시 잿빛이 됐다. 그가, 나를 잡고 있던 그 손이, 완전히 사라진 거였다. 아직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지도, 손을 흔들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그날의 난간 위.
나는 불시에, 준비 없이, 별안간, 홀로 남겨져 버렸다.
“흐으….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요? 어흐, 으… 윽, 어떡해? 이제 나 오빠 없음 어떻게, 하…!”
연우의 오열과 숨죽여 흐느끼는 소리 그리고 매미 우는 소리들 따위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프도록 뜨거운 뙤약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타들어 갈 것 같은 온도와 습습한 공기. 한껏 달궈진 지열에 눈앞에 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
그렇게,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선 채, 그보다 더 뜨거운 불길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었을 남자를 떠올려 봤다.
아무래도 쉽게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백강우가 죽었단 것도, 내가 백강우의 아이를 가졌단 것도,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남아 버티고 있단 것도. 어느 것 하나 거짓말 같지 않은 게 없었다.
꿈이길 바랐다. 그냥 아주 길고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뿐이길.
끼이익.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고, 앞서 화장 절차를 안내를 해 줬던 직원이 걸어 나왔다. 그의 두 손엔 매끈한 유골함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보고는 급기야 실신하듯 오열하는 연우를 박인남이 겨우 잡아 부축했다. 덕분에 내가 직접 백강우의 유골함을 받아 들어야 했다.
백강우.
그 위에 적힌 이름 석 자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믿기지 않았다. 이 작은 함 안에 담긴 게 백강우의 전부라니. 도무지 말이 안 되질 않는가. 그 남자가 얼마나 태산 같았는데. 얼마나 강하고 큰 사람이었는데. 고작 이 함에 한 줌으로 담긴 채 이렇게 끝이 났다니.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박인남과 이원재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어 올 때까지도.
유골함을 안고 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인곡이었다. 늘 농을 치듯, 죽으면 분골을 바다에 뿌려 달라 했다던 그의 말에 따라 나는 내가 늘 그리워했던 바다 위에 그리운 남자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시퍼렇게 보이기 시작한 바다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찌는 듯한 태양이 저물고 시뻘건 노을이 수평선 위에 내려앉을 때쯤, 파랗던 물빛이 새빨간 핏빛으로 변해 갈 때쯤, 나는 천천히 차의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하얗고 부드러운 가루를 손에 쥐었다. 손바닥 가득 감기는 따뜻한 온기에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람이 언제, 누구한테 제일 약해지는지 압니까.”
“궁지에 몰렸을 때 만난 사람.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날 도와준 사람.”
“내 손 잡아 준 사람.”
파도 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쓴웃음이 샜다.
나를 이렇게 약하게 만들어 놓고, 혼자만 내빼듯 사라져 버린 이 괘씸한 남자를 어쩌면 좋은가. 이젠 나를 잡고 어디든 가 달라, 따라가겠다 떼를 쓸 수도 없는데.
손끝에서 새하얀 가루가 바람을 타고 흩날려 갔다. 하얀 포말 위로, 발갛게 일렁이는 물결 위로 내려앉았다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꼭,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게 다 신기루 같았다. 백강우를 만났던 나도, 그를 손끝에서 놓는 지금의 내 모습도.
그래서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리석고 미련스럽게도.
더운 바람이 길게 불었다. 젖은 시야가 가물거리고, 버티듯 서 있던 다리에 훅 힘이 풀린다. 보랏빛 어둠이 내려앉는 마지막 광경을 끝으로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세상은 그대로 암전이었다.
***
백강우의 발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신을 잃어 꼬박 이틀을 누워 있었다. 눈을 떴을 땐 병실이었고, 곁에는 연우가 앉아 있었다. 미안했다. 연우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충격을 받았을 텐데, 나까지 폐가 된 것 같아 죄스러웠다.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곧장 퇴원 수속을 밟았다. 뒤늦게 달려온 정희는 사실 죽은 남자의 아이를 가졌단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손에 자신의 신용 카드를 쥐여 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걱정 가득한 모두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백강우의 집으로 향했다. 미처 하지 못했던 짐 정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연우는 어차피 비어 있는 집이니 나에게 계속 그 집에 머무르라 했으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하고, 안고, 몸을 섞던 그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자신이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부재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건지도 몰랐다.
나는 인곡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모든 걸 정리하고 인곡에 작은 집을 구해 아이를 낳고, 키울 계획이었다. 내가 그랬듯, 해 뜨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내가 느꼈던 기쁨과 환희를 그대로 느끼며 자라나길 바랐다. 아이는 백강우가 내게 남긴 또 다른 세계였으므로.
그러므로 이제는 어떻게든 살아 볼 생각이었다. 퍼붓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하는 삶이라도, 온통 예측 불가능한 일들 속에 던져진 고단한 삶이라 해도. 그저 버티고 견디는 것에 불과한, 하찮고 같잖아 진절머리가 나는 운명이라 해도 나는 이제 악착같이 살아남아 내게 남겨진 몫을 지켜 낼 작정이었다.
아이. 백강우와 나의 아이, 말이었다.
“신하경!”
백강우의 집으로 들어서는 출입구 앞.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통수에 날아와 꽂혔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엄마였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내린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듯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백강우와 내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렇게나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얼굴로 여기까지 쫓아온 이유.
“연락드리려고 했….”
짝!
불식간 눈앞에 불꽃이 일었다. 따귀가 얼얼하게 돌아가고, 채 말을 끝맺지 못한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미친년!”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짝!
“멍청한 년!”
그러나 맞은 뺨 위에 다시금 거친 폭력이 가해졌다. 돌아간 뺨이 부어오르고 크게 울리는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짝!
“정신 빠진 년!”
짝!
쉴 새 없이 뺨을 올려붙이는 매운 손길에 얼이 빠져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꾹 깨물고 있던 안쪽 여린 살갗에서 비릿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하, 임신?”
정말로 다 알고 온 모양이었다. 하기야, 오매불망 나만 기다렸을 엄마가 여태껏 내 임신 사실을 모르리라곤 생각 안 하긴 했다. 병원 기록 몇 개 들춰 보는 것 따윈 일도 아닐 테니.
“돌았어, 너! 완전히 돌았어, 신하경!”
엄마는 금세라도 나를 죽일 듯 노려보며 미친 사람처럼 악을 써 댔다. 크게 격노한 그녀는 여기가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다니는 곳이란 것도 잊은 듯했다. 아니, 그런 건 상관도 없을 만큼 이성을 잃었다는 뜻인 건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고. 이젠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더는 그렇게 바보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백강우에게 했던 다짐을 꼭 지켜 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가. 너 지금 당장 병원 가서 애부터 지워!”
안다. 지금 엄마가 어떤 심정일지. 평생을 쌓아 올렸던 모든 게 한순간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겠지. 그걸 무너뜨린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것도 그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충격일 터였고.
“왜 대답이 없어? 하경이, 너…!”
“싫어요.”
“…하. 뭐?”
얼굴에 열이 오른 탓인지 눈자위가 크게 시큰거렸으나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힘을 주어 손가락을 꾹 움켜쥐고 엄마를 마주 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일그러진 얼굴엔 분노와 당황스러움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불안이 서려 있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싫어?”
“네, 싫어요.”
“신하경!”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내가 왜 아이를 지워야 해요?”
“얘가 하, 미쳤구나, 너?”
“저 안 미쳤어요, 엄마.”
“하…. 뭐?”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너무 멀쩡해요. 혼자 아이 낳고 키우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그녀는 내 답이 기가 막힌 듯 실소하며 눈을 부릅떴다. 일순 더 사납게 구겨지는 얼굴엔 살기마저 느껴졌다.
“고결한 내 딸 몸에 그 더러운 깡패 새끼 씨 받은 것도 화가 나 미치겠는데. 뭐? 그 앨 낳아? 키워? 아비도 없는 애새끼를 낳아서 뭘 어쩌겠다고?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죽은 깡패 새끼 애를 낳아? 너 제정신이야?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니? 안 미쳤다고? 아니! 너 미쳤어. 미쳤어, 신하경.”
엄마는 숨도 쉬지 않고 내게 독설을 퍼부어 댔다. 그러다 곧 표정을 바꾸어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맞잡았다.
“아니야. 가자. 그래. 일단 집에 돌아가서 얘기하자, 우리.”
그러곤 기가 막히단 듯 내게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손을 쳐내고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도리어 차분해진 기분으로 그녀를 응시하면서.
“안 돌아가요.”
“뭐?”
“난 다시는 안 돌아가요, 예전으로는.”
“하경아!”
결국 엄마는 다시금 소리를 꽥 질렀다.
“미안한데요, 엄마.”
“…….”
“나 이제 예전의 엄마 딸 아니에요.”
“…뭐?”
“엄마 말이면 뭐든 고개 끄덕이고, 당장 죽어 버리겠다고 협박하면 벌벌 떨던 바보, 등신, 천치 같던 멍청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다 하던 꼭두각시 계집애.”
“…너…!”
“그거 안 한다고요, 이제는.”
“신하경!”
“그러니까 가세요, 그만. 이혜영 씨 딸 신하경, 신민철 회장 혼외자 신하경, 이제 어디에도 없으니까.”
“미쳤, 미쳤어, 정말! 너 정말…!”
“그리고 이제부턴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엄마 힘으로 가져 볼 생각을 하세요. 힘이 없으면 포기하고 인정하는 연습도 좀 하시고요. 저도 너무 늦게 안 거지만,”
“…하.”
“그것도 용기더라고요.”
절규하듯 고함을 내지르는 엄마를 세워 둔 채 그대로 돌아서 걸었다. 등 뒤에서 쓰러지는 듯한 엄마를 부축해 세우는 소리도 들었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끝. 정말로 내 손으로 이 지긋지긋한 세계를 끊어 냈단 생각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긋지긋한 운명에서 벗어나는 데 자그마치 28년이 걸렸다. 이제야 나는 비로소 백강우가 내게 보여 줬던, 내 손을 잡고 이끌었던 새로운 운명을 직면할 용기가 생긴 거였다.
담담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열이 올라 홧홧하게 붉어진 뺨에 손을 가져가 감싸 쥐었다. 아릿한 감각에 참았던 숨이 길게 터져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백강우가 봤다면, 이렇게나 무모하고 무례한 나를 목격했더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괜찮다고, 잘했다고 나지막이 속삭이며 날 칭찬하고 쓰다듬어 줬을까.
부질없는 상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사실상 달리 짐 정리랄 것도 없었다. 애초에 본가에서 나올 때부터 가지고 온 거라곤 달랑 오래된 바이올린 하나뿐이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팔아 없앴으므로 딱히 챙겨 갈 것도 없기는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가지러 온 건 내 물건이 아니었다. 언제고 죽을 사람처럼 주변을 비워 두기를 습관처럼 하며 살았던 그가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물건. 그걸 가지러 온 거였다.
“가져요. 마음에 들면.”
어느 새벽, 잠이 오지 않아 도둑고양이처럼 창고를 서성이다 꺼내 든 성경책이었다. 아주 오래되어 낡아 해진 성경책. 수녀원에서 자라며 수백, 수천 번도 넘게 읽고 또 읽었다던 그 성경책 말이었다.
지극히 무신론자라던 백강우가 지금껏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는 아무 미련도 없는 것처럼 내게 그걸 떠넘기기까지 했었다.
“가지기 싫음 버리든지.”
낮게 읊조리던 새카만 동공을 바라보며 나는 백강우의 진심을 읽었다. 스스로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물건. 지울 수 없는 과거를 누군가 대신 가져가 주길, 그는 바랐던 거였다. 그러니 나는 그의 마지막 선물을 잊지 않고 챙겨야만 했다.
책장 한편, 가장 구석진 위치에 꽂혀 있는 성경책을 꺼내어 들었다. 낡아 군데군데 찢어진 책장을 손끝으로 후르륵, 펼쳐 넘기자 불현듯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 들었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사진 속, 백강우를 닮아 있는 젊은 여자는 한 손에는 어린 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에는 갓난아이를 안고 있었다. 꼭 영정 사진 같았다. 흐릿한 화질에도 파리한 여자의 얼굴에 죽음의 색이 만연해 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초연하면서도 슬픔이 어린 눈빛과 아이의 손을 꼭 붙들어 쥔 손가락. 아마도 백강우의 기억 속, 마지막 어머니의 모습일 터였다. 그가 진짜 버리지 못한 건 성경책만이 아닐지도 몰랐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사진을 보고 서 있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성경책이 빠져나온 책장의 빈자리로 흘긋 시선을 옮기는데, 이전에 보지 못한 낯선 상자 하나가 깊숙이 들어차 있었다. 이는 호기심에 그 상자를 쓱 빼내어 들었다.
상자 속엔 여자 사이즈의 반지 하나와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반듯하게 꽂혀 있었다.
갑자기 살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그것도 좋은 사람으로. 당신이랑.
간결한 세 줄의 메시지였으나 내게 남긴 게 분명한 메모였다. 나는 홀린 듯 반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에 밀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꼭 맞았다.
혼란스러웠다. 반지의 의미를 쉬이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무슨 의미로, 어떤 의도로 내게 이걸 주려 했던 건가. 것도 이렇게나 깊숙이 숨겨 놓기까지 하고는.
반지를 낀 채, 천천히 빈 거실로 다시 걸어 나왔다. 멍하니 턴테이블을 바라보다 손끝으로 바늘을 톡 들었다 내렸다. 변화무쌍하고 우아한 론도의 멜로디와 화려하게 이어지는 바이올린 독주. 그 숨 막히게 아름다운 페라스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백강우가 내게 남긴 것들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차고 있었다던 검은색과 투명한 색의 비즈 팔찌 두 개와 낡은 성경책. 너무 끔찍해 지우고만 싶다던 과거 어린 시절 사진, 이 낯선 반지 그리고 내 배 속의 아이까지….
일순, 모든 상념과 감정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혼융되기 시작했다. 불식간 아릿하고 뜨거워진 눈시울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나는 오래 억눌렸던 울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알 것 같아서였다. 백강우의 마음을. 줄곧 내게로 향해 있던 그 진심을. 그도 결코 나와 다르지 않았다는 걸. 백강우, 당신도 나를 사랑했음을.
그러나 지금, 세상 어디에도 백강우는 없었다.
끔찍한 상실감이 몰려들었다. 이제야 백강우가 죽었다는 게, 더는 내 곁에 없다는 게 실감이 나는 거였다.
눈앞이 어찔거렸다. 반지가 끼워진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그대로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져 목 놓아 울었다.
잿빛의 도시 속. 어김없이 주홍빛으로 넘실대는, 은하수처럼 찬란한 광경 앞에서 그렇게 밤새도록 온몸 깊이 스며든 슬픔을 모조리 토해 내듯 울고, 또 울었다.
그 밤, 나는 백강우와 아주 긴 이별을 했다.
4장. 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