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truction of the Fortress RAW novel - Chapter 218
218
第四十四章 사령(邪靈) (3)
누구에게 몸을 의지하느냐?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무림에서 조직에 몸을 담은 사람에게는 목숨을 건 판단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
이 말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가 누구냐, 향후 무림은 누가 주도할 것인가 하는 판단이기도 하다.
당금 무림의 최강자를 누미라고 판단한 사람들이 있다.
“유지자문은 멸절했습니다. 더 이상 남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정중한 보고가 이어졌다.
“그 싸움에서 촌장은 심맥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유지자문 고수들과 싸우느라 탈진한 상태인데, 검왕이 마지막 끈을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합니다. 모두 합니다네? 정확한 보고가 아니라는 말이잖아?”
“그것은 고수들 천지였습니다. 저희는 감히 엿볼 수 없는. 그래서 나중에 결과를 보고 추론하는 것이 최선인지라 그리 말씀드리는 것이니 이해를.”
“그렇기는 하겠네.”
“심맥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촌장은 당대 최고수. 수선화가 공격을 했지만…….”
누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를 들었다.
하오문주의 보고는 매우 정확할 것이다. 중원 곳곳에 눈 없는 곳이 없다는 하오문이지 않은가. 하오문은 거르고 걸러서 매우 정확한 사실만 보고한다.
허나 하오문주가 말하는 것들…… 누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감응(感應)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감응은 단지 막연한 느낌에 불과하지만, 혈오를 통해 저주를 벗은 사람들에게는 불안, 통증 등등으로 매우 강력한 전달 수단이 되어준다.
녹천처럼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통제할 수 있다.
증평도 녹천처럼 가까운 거리로 다가서기만 하면 통제가 가능해진다.
혈오를 통한 저주 풀림은 또 다른 저주의 잉태다.
촌장의 심맥이 끊기는 순간, 누미는 숨이 멎을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우락부락한 주먹으로 심장을 꽉 쥐어짜는 듯…… 숨이 너무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증평주가 수선화에게 암살당하는 순간, 누미는 팔이 잘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또 다른 증험도 있다.
혈오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촌장이 상할 때도, 증평주가 목숨을 잃을 때도.
당시만 해도 누미는 왜 자신에게 통증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혈루마옥 무인들 중 누군가에게 매우 심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정도만 직감했다.
혈오가 자지러지게 울고 자신이 통증을 느낄 정도라면 매우 중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설마 촌장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미는 반대로 생각했다. 수선화가 위험에 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촌장이 무슨 일을 당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최강자이니까.
허나 그런 강자도 누미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누미를 어떻게 한다는 것은 혈오를 징치한다는 말과 같다. 혈루마옥 무인들의 저주를 다시 덧씌우는 것과 같은 행위다. 무림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누미가 하는 일을 방관해야 하는 입장이다.
누미는 이런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껏 움직였던 것이다.
촌장이 죽어간다. 기쁜 일인가, 나쁜 일인가.
절대 무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걸림돌이 제거되었다는 말이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불안감이 치솟는다. 촌장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큰 불안감이 밀려온다.
누미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검왕은?”
“…….”
하오문주가 말을 못했다.
“그 사내…… 정말 약은 자야.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십마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수족처럼 부리고……. 촌장을 죽일 수 있는데도 심맥만 끊어놓은 것은…… 나를 죽이라는 거겠지. 호호호! 참 약은 사내야.”
누미는 눈에 불길을 일으켰다.
다른 사내는 눈에 차지 않는데, 검왕만은 눈에 밟힌다. 검왕을 위하던 유화아도 꼴 보기 싫고, 검왕의 연인이라는 제이령도 밟아 죽이고 싶다.
그럴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제이령이 촌장을 부축해서 길을 나섰다고 한다. 허면 그녀가 어디로 가겠는가. 자신에게 오고 있는 중이지 않겠나.
두 여인 중에 하나는 먼저 보낸다.
육신을 유린하고, 아이를 잉태하게 만든 사람은 화천이다. 화천의 숨결을 가장 많이 접했다. 육신이 기억하는 유일한 사내가 화천이기도 하다.
헌데 화천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 된 영문인지 화천은 전혀 떠오르지 않고 검왕만 생각난다. 자신을 아무 미련없이 다른 사내 품에 던져버린 독종을 떠올리면서 분노한다.
“촌장이 내게 오고 있을 거야. 그 뒤를 검왕이 따를 거고. 그 사람들, 찾으면 말해줘.”
“알겠습니다.”
하오문주가 공손하게 읍했다.
하오문이 거둬들인 정보를 모두 모아보면 당금 무림의 최강자로 오직 한 여인을 가리킨다. 누미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종국에는 무림을 지배할 것이다.
하오문은 원래 적벽검문과 연을 맺었다. 그래서 검왕도 도와주었다. 무조건적으로. 하지만 적벽검문이 멸문해 버린 지금 남은 사람은 오직 두 명, 누산과 검왕뿐이다.
그들을 믿을 것인가?
그러기에는 누미가 너무 강하다. 누미는 녹천에 이어서 증평까지 흡수할 여자다.
하오문주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잠시 허리를 숙이고 굽신거린다. 허면 천 년 무림사에서 한 번도 중추에 서보지 못한 하오문이 우뚝 설 수 있다. 검성이나 혈천성처럼 무림 반쪽을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일인지하(一人之下)라는 단서는 붙는다. 하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지 않은가. 현재 하오문의 세력은 개방에 못지않지만 무림에서 받는 대우는 아주 형편없다. 좋게 봐줘야 정보나 사고파는 집단 정도로 본다.
이런 시각을 확 바꿔줄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새로운 세력, 신진세력과 손잡을 필요가 있다. 그 세력이 차후 무림을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다.
하오문주는 적벽검문을 버리고 누미에게 돌아섰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현재 검왕이 잔수를 부리고 있지만 결국 무림은 누미에게 돌아갈 것이다.
석화선생이 누강을 쳐다봤다.
“팔진검법에 사보를 수련한 자라…… 묘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만, 적벽검문의 심계가 여기까지 뻗쳐있는 줄은 몰랐군. 휴우! 적벽검문, 참 무서운 문파야.”
“뭐가 말입니까?”
누강이 물었다.
석화선생이 감탄해서 말하는 팔진검법…… 사실, 그 무공은 그리 강한 무공이 아니다. 팔진검법을 수련하기 위해서 뛰어난 무골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팔진검법이 적벽검문에서 사장된 이유는 위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물론 형편없다는 말은 적벽검문 무인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검왕이 여기로 올 게다.”
누강은 그 말을 듣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검왕은 누미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일전에 한 번 싸워봤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유화아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 않았다면 벌써 명을 달리했을 게다.
적벽검문의 염원은 알지만 검왕…… 무모하다.
누강은 검왕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촌장과 싸운 사실도 몰랐다. 하물며 심맥 끊긴 촌장이 부축을 받으면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까닭이 없다.
석화선생은 안다. 그는 하오문주와 누미의 대화를 들었다.
석화선생이 말했다.
“너 여기 남거라.”
“어디 가십니까?”
“이미 꺼져가는 등불이지만 그래도 불꽃이 꺼질 때까지는 옆에 있어야겠지. 후후!”
석화선생이 일어섰다.
누강은 석화선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검왕이 이곳으로 온다니 그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 누미와 또 싸우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석화선생은 혈루마옥 제일의 신의다. 하지만 그런 그도 심맥이 끊긴 사람은 어쩌지 못한다. 천하제일의 의술을 지녔다고 해도 곁에서 지켜보는 일밖에 해줄 것이 없다.
촌장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가 빠져나갈 것이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 오직 그 일을 해주기 위해 길을 떠난다.
허나 그는 겨우 백 장도 걷지 못했다.
“촌장에게 가려고요?”
“보내주시게.”
“그렇게는 못해요. 석화선생의 의술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아니까.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의술이 아니던가요?”
“촌장은 이미 죽은 사람이네.”
“그러니 여기서 지켜보세요.”
“후후후! 보내주지 않을 셈이군.”
“지금이 딱 좋아요. 여기서 티끌만 한 변수도 발생하는 건 원치 않아요.”
“내가 간다고 해도 변수는 없네.”
“그러니 가지 마세요.”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냉전류를 선보였나? 하찮은 무공인데…… 다시금 써야겠군.”
“쓰지 마세요. 그때는 놀랐지만, 지금은 안쓰러워요.”
“허허허!”
스릉!
석화선생은 검을 뽑았다.
“자네에게 충고 한 마디 해도 되겠나?”
“하세요. 혈루마옥에서 제가 가장 의지했던 분이 하시는 말인데 귀담아들어야죠.”
“이건 자네를 위한 충고네. 누강을 보내게.”
“검왕이 오면요.”
“촌장이 올 때까지도 안 되네.”
“무슨 말이죠?”
누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요미검체다. 사람의 감정을 누구보다도 빨리 읽는다. 석화선생이 마음속으로 하는 말, 불길한 말을 벌써 알아들었다. 누강을 내버려두면 좋지 않다는 말을.
“이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자네나 촌장이나 모두 적벽검문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은?”
“또 적벽검문인가요? 그놈의 적벽검문.”
“촌장이 오면 자네는 죽네. 이게 내 마지막 충고일세.”
“저도 마지막 충고 하나 하죠. 그 검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가만히 계세요.”
“가야겠네. 그분은 그래도 주군이 아니시던가.”
“잘 가세요.”
“잘 있게.”
석화선생은 진기를 끌어올렸다. 단 한 번의 검에 현생의 모든 것을 담았다. 두 번은 펼칠 수 없는 검이기에 혼신을 다해서 벼락을 준비했다. 차디찬 벼락, 냉전류를.
쒸이익!
석화선생이 허공에 떴다. 그리고 벼락 한 줄기가 허공에서 일어나 지상으로 내리꽂힌다.
누미는 벼락을 고스란히 맞는다. 저항하지 않고 벼락에 온몸을 내맡긴다. 마치 벼락을 흡수하려는 듯이, 벼락을 반기는 듯한 몸짓으로 달려든다.
꽈꽝!
냉전류가 그녀를 관통했다.
누미는 저항하지 않았고, 석화선생은 최선을 다해서 냉전류를 떨쳐냈다. 헌데,
“큭!”
석화선생이 짧은 신음을 흘리며 털썩 무너졌다.
석화선생은 두 번 다시 꿈틀거리지 않았다. 짧은 신음을 흘린 것이 전부다.
누미는 석화선생을 쳐다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죽은 석화선생을 애도하는 것은 아니다. 애도라는 감정은 사라지고 없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석화선생의 마지막 말이다.
촌장이 오면 죽는다.
석화선생은 빈말을 하지 않는다. 석화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충고는 오로지 그녀를 위한 것이다. 옛정을 생각해서 진정으로 해준 말이다.
누강을 곁에 두면 안 된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촌장이 오면 누강이 움직인다. 그리고 자신을 죽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누미는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다 끝났는데. 중원이란 거대한 물건이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인데.
그녀는 아주 쉽게 결정했다.
“누강을 죽여.”
“보내는 것이 아닙니까?”
검성 제일령주가 답해왔다.
제일령주 역시 누미를 당금 무림의 지배자로 생각하고 있다.
검왕의 벗이자 가장 믿을 수 있었던 동료에서 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제일령주라는 직책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 속에서 져야 하는 본성을 가진다. 막강한 무공을 지녔음에도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져야 한다.
무림은 검왕을 안다. 하지만 제일령주는 모른다. 제일령주라는 신분은 알아도 제일령주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제일령주는 대대로 이어지는 신분이니까.
검성은 무너졌다.
제일령주라는 신분도 무너졌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누미 곁에 선 것이다.
누미가 말했다.
“내 곁에 있으면 살아요. 내 곁을 떠나면 죽어요. 곁에 있으면 살고, 떠나면 죽는다. 간단한 이치에요. 앞으로는 그런 말 묻지 말고 이치대로 움직여줘요.”
“알았습니다.”
제일령주가 공손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