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28
운명의 신께서는 어찌 이리도 잔인하실 수가 있으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도다.]
한국의 설화로 치면,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렇게 비극적 결말이 뻔히 예상되는 두 남녀의 사랑에서는 안타까운 감정이 파생될 수밖에 없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여전히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입가에 수줍은 미소를 띨 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 답답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러한 심정을 대변하는 한숨들이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합창이 끝난 뒤,
“…….”
먼발치에서 ‘아르고호’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리라를 연주하던 오르페우스가 돌연 손짓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 뚝.
음악이 멈추었고, 서서히 극장은 암전으로 물들었다.
이내 무대가 다시 환해졌다.
사랑의 기운이 깊게 드리웠던 밤이 지나가고, 다시 날이 밝았음을 의미했다.
“나 이아손은 지금부터 아이에테스 왕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겠다 천명하오!”
이아손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반주가 흘렀다.
무대 한 편에 리라 현을 튕기고 있는 오르페우스가 자리 잡고 있음은 당연지사였다.
[♪] [아이에테스 왕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도다.이올코스의 영웅 이아손은 이제부터 나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가 키우는 두 마리의 황소에 멍에를 메울 것이다!
멍에를 씌운 황소를 이용해 눈앞에 보이는 밭을 전부 매우면, 그다음으로는 용의 이빨을 뿌리시오!
거기에서 솟아나는 콜키스의 전사들을 칼로 전부 베어 없앤다면, 비로소 그대의 손에 콜키스의 황금 양털이 주어지리라!
그대에게 허락된 시간은 하루.
단 하루요!]
‘코러스’의 노래 가사가 관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준다.
그 사이.
복층식으로 구성된 무대 중앙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인간은 절대 완수할 수 없는 임무다. 이아손이 죽지 않고 버틸 방도는 없다!’
아이에테스 왕이 이아손을 내려다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옆에 서 있는 메데이아의 표정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소의 의미가 달랐다.
딸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지난밤.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할 수 없다는 열망과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는 양심의 가책이 메데이아의 내면에서 격렬히 맞섰다.
결국은 전자를 택했고, 그렇게 선택의 기로를 벗어난 이후부터 더 이상 메데이아에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녀는 이아손에게 약물이 든 호리병을 건네주며, 무사히 과업을 완수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답안지를 들고 시험을 치르는 셈과 같으니, 메데이아의 얼굴에 드리운 여유 못지않은 여유가 이아손을 감쌌다.
“시작하시오!”
과업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밭에 들어서기 전에, 이 안에 담긴 약물을 온몸에 바르도록 하세요. 하루 동안 황소의 청동 발굽은 물론, 그것이 입에서 내뿜는 불길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는 약이랍니다. 또한, 용의 이빨을 뿌리고 나면 땅에서 콜키스의 전사들이 솟아 나올 거예요. 절대 일일이 대적하지 마세요. 전부가 솟아 나왔다고 판단이 들면, 그들 무리 중앙에 커다란 돌을 던지세요. 그리하면, 그들이 서로 알아서 싸우다가 전멸할 것입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가 지난밤에 알려준 묘수대로 행동했다.
예상과 달리 그가 모든 과업을 완벽하게 완수해내자, 아이에테스 왕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황당하기가 짝이 없었다.
이아손을 죽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두 마리 황소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온순해져 밭을 갈고 있질 않나.
만에 하나라도 이아손이 황소들을 제압할지언정, 절대 혼자서 수십·수백에 이르는 전사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 장담했었거늘.
정신을 차려보니, 널브러진 전사들의 시신 틈에 이아손이 당당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이제 약속대로 황금 양털을 내어주시오!’
라며 무언의 압박을 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분을 참지 못한 왕은,
“메데이아, 네가 어찌….”
“…….”
서슬 퍼런 눈으로 딸을 노려보며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단번에 메데이아가 개입했음을 눈치챘다.
황소를 제어하는 약초의 존재를 콜키스 왕국에서 아는 사람은 본인을 제외하고 오직 한 사람….
마법·주술의 여신인 ‘헤카테’를 모시는 신전의 사제이기도 한 자신의 딸, 메데이아뿐이었으니까.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왕은 치를 떨었지만, 모두의 이목이 쏠린 자리에서 어찌 됐든 과업을 훌륭하게 완수한 이아손에게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약속대로 ‘아르고호’ 원정대가 콜키스를 떠날 채비를 마치는 날, 황금 양털을 주겠소.”
말을 마친 아이에테스 왕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 와아아아!
이아손에게 쏟아지는 환호성.
메데이아와 ‘코러스’가 환호를 보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몇 곱절은 더 큰 환호성이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진짜 뭔가… 소름 돋는다.”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인터미션도 아닌데 이렇게 환호를 지르는 건 처음 봐요. 콘서트 온 것 같은 이 문화 충격은 도대체 뭐지….”
입장하기 전부터 샀던 맥주가 아직 반 이상 남아있을 정도로 공연에 몰입하고 있었던 준안이 혀를 내둘렀고, 혜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이는 이미 1막 때부터 망부석처럼 말없이 무대만 보고 있었으니, 논외.
환호성이 끊이질 않는 2층과 3층 객석을 잠시 올려다본 준안이 혜정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혜정아.”
“네?”
“1층과 달리 위에 층들은 원형이잖아.”
“그렇죠.”
“뭔가 로마 시대 때 콜로세움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 들지 않냐?”
“와, 진짜 그렇네. 배경도 고대 그리스라서 그런지, 싸움 구경하는 느낌이 제대로 나네요!”
그랬다.
아무리 치트키(?)가 있는 상태로 임했다 한들, 이아손이 사선(死線)에서 고군분투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죽거나, 죽이거나.’
벗어날 곳 없는 원형 경기장에서 목숨 걸고 전투에 임했던 검투사(Gladiator)가 승리를 거머쥐었을 때, 그 과정을 지켜본 관객들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으리라.
쏟아지는 환호 속.
원정대의 모험은 점점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아이에테스 왕은 순순히 황금 양털을 뺏길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이아손을 포함해 ‘아르고호’ 전원을 몰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아차린 메데이아가 이아손을 급히 찾아가 황금 양털을 탈취해 도망가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사랑을 선택한 공주는 황금 양털이 보관되어있는 아레스의 숲으로 이아손을 데려갔다.
그리고, 주문을 외우며 마법의 향수를 뿌려 잠들지 않는 용을 깊은 잠에 빠져들게 했다.
비로소 황금 양털을 손에 넣은 이아손은 그 길로 메데이아와 원정대원들을 데리고 재차 ‘아르고호’에 올랐다.
뒤늦게 이아손이 메데이아와 함께 황금 양털을 가지고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에테스 왕이 그들을 추격했으나,
“아버지, 죄송해요.”
“메, 메데이아!”
“콜키스 왕국에는 무한한 축복을, 조국과 천륜을 배신한 나 스스로에게는 무한한 저주를….”
“안, 안 돼!!!”
메데이아는 함께 승선했었던 남동생 압시르토스를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바다에 빠뜨렸다. (실제로는 동생을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아버지의 배가 가까워질 때마다 하나씩 바다에 뿌리는 방식으로 추격을 따돌렸다고 한다.)
[♪]2막의 클라이맥스 씬,
드넓은 바다를 향해 동생의 등을 가차 없이 밀어버린 메데이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의 틈이 흘렀다.
기껏해야 3초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관객들에게는 1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 풍덩!
가엾은 압시르토스가 바닷속으로 침잠해버렸다.
효과음이 울리면서, 모두의 말문이 막혀버린 찰나.
[♪]어김없이 반주가 흘러나왔다.
포문을 연 이는 역시, 관객들에게 리라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 오르페우스였다.
[아아, 가엾은 압시르토스여!죄 없는 어린 소년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품으로 향하는구나!
아이에테스가 이끄는 추격 선박들의 발이 묶였으니, ‘아르고호’는 추진력을 얻은 것과 같노라.]
“메데이아….”
“…….”
[아아, 메데이아!사랑에 눈이 멀어, 끝내 조국을 배신하고 남동생을 바다에 빠뜨려 죽게 했구나.
과연, 이 비극은 누구의 잘못에서 초래된 것이란 말인가.
그녀의 잘못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마음과 한 나라의 국보를 동시에 훔친 이아손의 잘못일까?
혹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그녀의 사리 분별을 멀게 한 여신 헤라의 잘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귀책사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 그 누구도 명쾌하게 답을 내릴 수가 없도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만이 남은, 비극적 사랑 이야기로다!]
메데이아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잔잔해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아손이 말없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았다.
하이라이트 조명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메데이아의 두 눈에서,
– 툭.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2막(부제 ‘험난한 여정’)의 엔딩이었다.
* * *
공연 준비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우진과 릴리가 함께 미친 듯이 연습에 몰입했었던 이유.
2막에서 전부 드러났다.
2막에 오르페우스가 ‘코러스’ 중에 단 일부로서 처음 등장한 직후부터,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반주는 기본적으로 그의 연주로 시작한다는 설정으로 귀결됨을 관객들은 깨달았다.
이는 원정대에 합류한 오르페우스가 음악의 신 아폴론의 아들이라는 점과 당대 최고의 음악가라는 사실이 캐릭터성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비록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합창이라는 ‘코러스’ 단의 본분에 충실한 배역이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우진이 ‘앙상블 배우’ 범주에 들어가지만.
오르페우스의 역할 자체가, 음악이 주된 요소인 뮤지컬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인물이므로, 우진은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라를 튕기는 모습만큼은 무조건 자연스러워야 한다.’
리라 연주가 가능한 선생님을 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우진은 하는 수 없이 인터넷에서 ‘리라’와 ‘하프’ 연주 동영상을 찾아보며 끊임없이 연습했다.
혹자들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
‘그걸 누가 본다고?’
그러나, 상관없다.
연출이나 감독이 세세한 디테일까지 일일이 신경 써줄 수 없다.
디테일은 배우가 만드는 거니까.
누가 본들, 안 본들.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그건 중요치 않다.
그냥…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
릴리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한 나라의 공주 메데이아는 이방인 이아손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부와 명예를 버렸고, 조국을 떠났으며, 남동생을 죽였다.
천륜의 끈을 어겨가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 곁에 남고자 했다.
자신과 아버지의 눈앞에서 동생을 죽게 한 그녀는….
아버지가 탄 추격 선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느 이름 모를 망망대해 역시 동생이 침잠한 바다의 일부분이다.
그 위에 서 있는 그녀의 감정선은 과연 어땠을까.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는 감정의 크기를 즉각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해서, 릴리는 우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노래는 본인이 훨씬 뛰어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 연기에 있어서는 우진의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우진이 직접 번역해준 그의 전작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시청한 덕이었다.
「만약 이렇게 슬픈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하면 차라리 낫겠는데, 말이나 움직임 없이 그냥 바다를 바라만 보고 있어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노래나 몸짓이 있으면, 그만큼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 많아지는 거니까요. 지금은 온전히 표정으로, 그것도 절제된 표현으로 감정을 폭발시켜야 하는 장면이네요.」
「맞아요. 우진한테만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저는 지금 이 장면이 제일 부담돼요,」
「걱정 말아요, 릴리. 연습해서 안 되는 건 없거든. 같이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일단….」
우진은 릴리에게 감정 연기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반대로,
「우진,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서 노래해봐요. 아직 좀 웅얼거리는 면이 있어요. 특히 ‘오-’ 발음할 때 주의하고.」
「네, 다시 해볼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감이에요. 우진의 노래 실력 좋아요! 연기를 보여줄 때처럼, 자신 있게 해봐요.」
릴리는 세세한 피드백으로 우진의 노래를 교정해주었다.
최고의 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도, 취약한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