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44
144화 성난 불곰들
한국의 열병식에서 최초로 등장한 초공동열차를 본 각국 정부 관계자들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유지하가 놀라운 기술을 선보인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발표와 시연회를 동시에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게 대부분의 수송 플랫폼을 사장시키는 힘을 가진 초공동열차라서 더 당혹스러운 면이 있었다.
―소음도 없고, 유지 비용도 상당히 낮은 편이고, 최대속도는 마하 10이라고? 어디에서 외계인을 잡아온 거냐? 우리 외계인은 영 시원찮은데.
―이온 추진기니까 속도는 이해가 간다. 마하 10에도 버티는 동체는 블랙메탈이니까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에테르 코어 없이 중력을 통제하는 건 대체 어떻게 한 거냐?
―중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가능성만 확인한 시점인데 그걸 실용화한다니… 솔직히 말해라. 미리 개발해 놓고 꺼내는 거 아니냐?
언제나 그렇듯 유지하와 한국은 이런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엄청나게 효율적이라서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 뿐.
각국 수뇌부는 항공업계 관계자들을 호출해 이야기를 들었으나 신통한 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건 효율인데 초공동열차를 넘어선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발표된 대로라면 거의… 아니, 모든 면에서 기존의 수송 플랫폼을 압도적으로 능가합니다. 플랫폼이 한국에 종속된다는 단점 외에는요.”
“도킹 스테이션은 입체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공항을 철거한다고 하면 상당한 공간이 남을 것 같습니다.”
“성능은 일단 제쳐둔다고 하면 관건은 운임인데, 열차보다는 다소 높지만 여객기에 비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면 최소 항공업계는 끝장이라는 거군요.”
“예…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나마 단점은 동력차 가격이 8억 달러 선으로 매우 비싸다는 것이다.
이는 항공사에서 많이 운용하는 여객기의 두 배 가격으로, 통상 20량 가까이 붙는 객차를 생각한다면 훨씬 늘어날 거라는 게 통설이었다.
하지만 여객기와 달리 열차는 객차를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으므로 유연성이 높다.
게다가 객차 1량당 70명을 태울 수 있어서 수송량에서도 여객기를 훨씬 능가한다.
아무리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도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플랫폼이었다.
유지하 대통령은 기자들에 둘러싸여서 이런 발언까지 했다.
“초공동열차는 우리 사회의 근간이 될 수 있는 플랫폼이므로 도입할 수 있는 국가를 따로 제한하진 않겠습니다. 한 국가만 제외한다면 같은 조건으로 도입할 수 있습니다.”
그건 아마 프랑스일 것이다.
독일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EU의 수장 자리를 내놓은 지금 실질적으로 EU를 이끌어가는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국력도 대단하지만 그 자존심은 대기권을 돌파해 우주로 뻗어나갈 정도여서 계속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절대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이번 초공동열차 소식이 전해지자 프랑스 방송가에선 예정되어 있던 중력 쇼를 취소하는 한편 사이커들과의 인터뷰도 날려 버렸다.
마리 르펜 대통령은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 동문서답만 해댔고 정부 차원에서는 묵묵부답을 지켰다.
옆 나라 독일에선 이를 비꼬기에 바빴다.
―자랑이나 안 했으면 본전은 찾았을 텐데 참으로 우습게 되었다.
―생각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마리 르펜이 에테르 국제연구소 관계자들을 불러서 사표를 받겠다고 한다.
―유지하 대통령 상대로 자존심을 내세워 봐야 손해만 볼 텐데… 하긴 프랑스인에서 자존심을 빼면 옷만 남으니까.
초강대국인 미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개발을 해낸 전적이 있으니 자존심이 높은 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몇 년째 계속된 금수조치에 경제가 하락세를 걷고 있는데도 자존심만 내세우는 건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어쨌든 프랑스만 제외하면 모든 국가의 도입 조건은 같았다.
심지어 한국과 전쟁을 벌였던 중국과 일본조차 돈만 내면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었다.
중국은 전후복구와 동북 3성의 시위 진압에 여념이 없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군함이 다수 격침되고 군사시설이 파괴된 것을 빼면 경제에는 별 타격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초공동열차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자 열도 전체가 흥분에 휩싸였다.
―자기부상열차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하늘을 날아간다고? 보통은 그걸 비행기라고 부르지 않나?
―디자인이 열차와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 같다. 에테르 역장으로 공동을 만들어서 질주하는 듯.
―고도는 기본적으로 500미터 정도고 노선에 따라 조정할 수 있다고 한다. 해수면을 스치듯이 질주할 수도 있다고 하니 정말 놀랍다.
―겨우 몇 발짝 걸은 다음 고개를 드니 저 멀리 가 있구나… 이젠 경쟁 상대조차 아니야.
―8천 킬로미터를 40분 안에 주파하는 걸 보니 츄오 신칸센이 갑자기 우스워지기 시작했다.
―5월 안에 서울과 테라섬 노선을 만든다고 하는데 제대로 테스트도 안 해보고 무모한 거 아니야?
―그래서 지금껏 유지하가 실패한 적이 있었어? 눈치 없는 우익들은 입 좀 다물라고. 어떻게든 저거 도입해야 하니까.
―동력차 1대에 8억 달러… 대단한 놈이란 건 알겠는데 너무 비싸.
―레일과 인프라 비용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비싼 건 아니야.
―그 인프라 비용은 사회 전반에 재투자되지. 초공동열차는 돈이 모두 한국으로 간다는 걸 잊지 마.
그게 일본 최대의 고민거리였다.
전쟁배상금으로 10년 동안 100조 엔을 토해내야 하는 상황에서 초공동열차의 비싼 가격은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규슈 아래의 섬을 모조리 뺏긴 상황에서 한국에 굽신거려야 한다는 것도 유신회의 최대 지지층인 우익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 전쟁 자체가 일본의 방심에서 일어난 실수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기습적인 선전포고에 정면승부를 피한 무제한 게릴라전. 이건 전쟁이라고 불러줄 수가 없어.
―컴뱃 워커도 그래. 만약 일본이 3년, 아니, 2년만 더 있었더라도 컴뱃 워커쯤은 박살 낼 만한 육군을 양성할 수 있었을 거야.
―멍청한 마츠다만 빨리 죽었어도 최소 지진 않았을 텐데…….
다만 이런 시각은 우익 층에서나 지지를 얻을 뿐 일본 전체의 주장은 아니었다.
패전 후 폭주하던 군부가 몸을 바짝 낮추고 유신회 또한 머리를 숙이자 재계가 나서서 제발 좀 평화롭게 지내자고 크게 소리치고 있었다.
―거 봐라. 쓰시마 내준 걸로 만족했으면 됐을 것을 괜히 자극하다가 오키나와까지 잃지 않았나.
―한국에 증오심을 가져 봐야 또 영토를 내줄 뿐이다. 일본 열도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초공동열차에 대해서는, 정부는 배상금 지급하느라 돈이 없을 테니 게이단렌에서 주축이 되어서 교섭에 나섰으면 한다.
―우선적으로 도카이도 신칸센에 투입하고 싶다. 수요는 충분할 테고, 초공동열차의 홍보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 개발한 초공동열차를 일본 신칸센의 상징인 도카이도 선에 투입하는 게 맞는 거냐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 선로엔 그 유명한 후지산을 배경으로 달리는 신칸센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상징한 그 사진에 한국제 초공동열차를 쓴다는 건 패배를 자인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최대속도가 마하 10인 열차를 신칸센에 투입하기엔 효율이 나지 않는다는 점도 관계자들을 머뭇거리게 했다.
―정차역이 너무 많아서 최대속도를 낼 때쯤이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이래서야 효율이 나지 않는다.
―한국조차 국내선은 나중으로 미루고 있는데 이걸 도입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초공동열차를 반드시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워낙 강했다.
하늘을 나는 열차라는 것 자체가 호기심을 이끌어 냈던 것이다.
열병식 당시에 초공동열차가 촬영한 영상이 있지만 보안상 그걸 찍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들 상상만 펼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단 시범적으로 1량을 도입해 바다를 달려보자. 확신이 들면 도킹 스테이션까지 도입하는 게 낫겠다.
―그런데 한국이 수출한다는 건 확실한가?
―분명 모든 국가의 조건이 같다고 했으니 아마…….
게이단렌 관계자들이 나서서 한국 정부에 문의를 넣었고 긍정적인 답변이 날아왔다.
―초공동열차의 공급엔 그 어떤 제한도 두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상부란 유지하 대통령을 말하는 것이리라.
용기를 얻은 게이단렌에선 그의 방문을 추진하자고 나섰다.
―유지하 대통령이 방일해 일본의 진심을 알게 된다면 비로소 평화가 정착될 것이다.
―이참에 재수교를 추진하는 건 어떤가? 그는 절대 반일 성향이 아니다.
―새로 도입할 초공동열차를 일한우호의 상징으로서 해저터널 대신 추진하자. 터널은 현실상 어렵지만 초공동열차라면 가능할 것이다.
뜬금없이 양국을 연결하자고 나오는 건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한국과 연결될 게 분명한데 거기에 일본도 끼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한국과 재수교하고 본격적으로 FTA까지 체결하고야 말겠다는 일본 재계의 열망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이 제대로 추진될 가능성은 낮았다.
러시아가 한국에 영토 재협상을 요구했고, 한국은 그 대응으로 러시아와의 관계를 재고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서로 외교적 수사 없이 직설적으로 쏴대는 바람에 러시아인들까지 내막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젠장! 너희들 눈에는 썩어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안 보이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열차를 타고 있다!”
“땅? 땅은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한국과의 우호가 더 중요하다! 러한 관계를 해치려 하는 이 빌어먹을 종자들은 대체 누구냐?”
“보르첸코? 푸틴의 하수인에 불과했던 깡패 아닌가? 그런 놈이 대통령이라도 되는 양 설치는 건 참을 수 없다!”
“보르첸코를 죽이자!”
흉포한 러시아 불곰들이 들고 일어났다.
* * *
러시아에서 유지하의 인기는 매우 좋다.
자주 러시아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최첨단 기술을 가진 한국의 잘생긴 지도자라는 게 인기의 이유였다.
거기에 대해 러시아를 자주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며 호감을 표시하니 인기가 낮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지금 깨질 위기에 처했다.
푸틴의 후계자를 자처한 보르첸코 상원의원이 영토 재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푸틴이 내준 땅의 실체가 알려지자 러시아인들은 잠깐 혼란에 빠졌다.
―생각보다 너무 넓지 않나? 저걸 다 내준다고?
―다른 곳은 몰라도 부동항까지 내준다는 건 심하지 않나? 태평양을 포기할 셈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평생 갈 일도 없는 동시베리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유지하에게서 나오는 온갖 초기술이었다.
비록 그 초기술이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쳐 제대로 혜택을 받진 못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한국, 유지하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당장 유지하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러시아의 GDP는 10위권으로 추락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올 정도니 말 다했지.
그런 상황에서 유지하의 기자회견은 많은 러시아인의 심금을 울리는 면이 있었다.
“나는 형제의 심정으로 러시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것들을 열거하진 않겠습니다. 형제와 나누는 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나를 형제로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그의 발언이 방송을 타고 러시아 전역에 알려졌다.
처음엔 한국어로 기자회견을 하다 후반부에 들어선 러시아어로 말했기에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이 알아들었다.
그는 명백히 슬퍼하고 있었다.
“나와 러시아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분별없는 몇몇 정치인이겠죠. 하지만 이해합니다. 그 또한 러시아의 뜻이니까요. 러시아인들이 선택한 것에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형제가 아닌 영원한 이방인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말에 모스크바 푸쉬킨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몇몇 사람은 그를 초대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다.
“이방인이라니? 모스크마 시민증도 받아놓고서! 오고 싶으면 언제든 모스크바에 와도 돼!”
“분명 그가 모스크바에 오는 것을 싫어하는 족속들이 있는 거겠지!”
“보르첸코!”
가증스러운 정치인의 이름이 광장에 울려 퍼졌고 러시아인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보르첸코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흡혈귀처럼 피나 쭉쭉 빨았지!”
“러시아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선 그놈을 비롯한 기득권부터 족쳐야 된다고!”
오늘날 러시아인들이 힘들게 사는 이유가 바로 중간에서 돈을 빨아먹는 보르첸코 같은 흡혈귀 때문이었다.
이들은 푸틴 통치기에도 악명을 떨쳤고 그가 죽은 뒤에는 대놓고 빨대를 꽂아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푸틴 대통령의 지배 체제가 워낙 확고해서 감히 불만을 터트릴 수 없었다.
그는 개개인이 불만을 터트리는 것 정도는 봐주었지만 세력화는 철저하게 탄압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푸틴이 사망하고 정국이 혼란한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렇게 푸쉬킨 광장에서 최초로 시작된 반 보르첸코 시위가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방송을 봤고 자신이 힘들게 사는 게 보르첸코 같은 기득권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과 거의 같은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그런데 GDP가 4배나 차이 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러시아엔 이미 핵융합 플랜트가 2곳이나 건설되어 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전기요금을 살펴보면 한국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는 명백한 폭리이며 횡포다.
―모든 것은 보르첸코와 같은 올리가르히 때문이다. 놈들이 중간에서 러시아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다.
―놈들은 그것도 모자라서 러시아와 한국을 갈라놓으려 한다. 두고 봐라. 초공동열차 도입 무산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니까.
―결국 보르첸코가 문제다.
―보르첸코를 죽이자!
성격 급한 러시아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러시아 전역 70개 도시에서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나 크게 번졌다.
워낙 가담자들이 많아 국가경찰로 이들을 진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황한 연방의회에서 국가근위대의 투입을 요구했지만 미하일로프 부총리가 이를 거절했다.
“규모가 너무 큽니다. 섣불리 이를 진압하려 했다간 반발심만 불러오게 됩니다.”
“젠장! 부총리부터 갈아치웠어야 했는데!”
증오의 대상이 된 보르첸코는 국가안보부, MGB의 수장을 호출하려 했으나 통신이 끊기면서 지시가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시위대는 모스크바를 행진해 마침내 의회를 둘러싸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땅이 아니라 초공동열차가 필요하다!”
“유지하를 초대해라! 러시아의 피를 빨아먹는 보르첸코를 죽여라!”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고 인원수가 많아 국가경찰은 방관자 역할만 충실히 수행했다.
여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시위대가 의회 안까지 들어오진 못했으니까.
보르첸코는 측근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러시아군은 건재했다.
미하일로프 부총리를 움직이는 건 틀렸으니 드리트리를 설득한다면 병력을 동원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통신이 되지 않았다.
보르첸코는 비서가 가져다준 위성통신기를 패대기쳤다.
“대체 위성통신이 불통이 된다는 게 말이 돼? 어느 놈의 농간이야?”
“모, 모르겠습니다! 항공우주 사령부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
혹시 유지하의 농간이 아닐까?
보르첸코는 푸틴의 측근이었던 만큼 세계 정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이 개입되었을 때마다 통신 이상이 생겼다는 국가안보부의 보고서를 기억해 냈다.
물론 그걸 전적으로 믿진 않았지만 의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그가 의회에 갇혀 허둥대고 있는 동안 시위대의 행동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각종 기물은 물론이고 돌까지 던져대는 통에 의회 유리창이 남아나질 않았다.
이대로 가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보르첸코는 이를 악물고 통신이 재개될 때까지 기다렸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서 서부 군관구를 통솔하고 있는 드미트리와 연결되었다.
“꽤 곤란한 지경에 처한 모양이지요?”
“날 좀 도와주시오, 장관.”
“하하… 도와주면 난 뭘 얻을 수 있습니까?”
“…대통령의 자리를 원합니까?”
“여기서 잠깐 전 대통령의 사례를 살펴볼까요. 내가 먼저 대통령에 취임하겠소. 의원은 총리로서 책임을 다하십시오.”
“그다음엔?”
“직책을 바꾸는 거지. 우리가 손을 잡으면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습니다.”
둘 다 푸틴의 뒤를 잇기엔 역부족이라는 평을 받았으나 손을 잡는다면 권력을 쥐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보르첸코 의원은 드미트리 장관이 먼저 대통령에 취임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다.
권력을 쥔 그가 어떻게 나올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폭동을 진압하려면 어쩔 수가 없다…….’
시위대의 분노한 외침이 의회 건물을 울리고 있어서 진지하게 목숨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뉴스에 의하면 심지어 국가경찰의 일부도 시위대에 가담했다고 한다.
그들 역시 러시아인이니까.
보르첸코는 창 밑을 내려다봤다가 돌이 바로 아래층까지 날아오는 걸 보곤 기겁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장관이 먼저 대통령에 취임하십시오. 나는 총리에 취임할 테니.”
“훌륭한 선택입니다. 그럼 근위전차군 일부를 투입해서…….”
그때 갑자기 수화기 너머에서 폭음이 울렸다.
보르첸코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 찰나 통신이 완전히 끊겼다.
“갑자기 왜 이래? 또 통신방해인가?”
하지만 비서관들이 연락할 수 있는 걸 봐서 아니었다.
한 비서관이 다가와서 말했다.
“의원님,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 무슨 전쟁?”
“서부 군관구 소속 포병여단에서 에스토니아 국경선을 향해 포를 쏜 모양입니다.”
“말도 안 돼!”
분명히 전쟁 분위기만 조성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드미트리의 입장에선 에스토니아 합병이라는 성과를 이끌어 내야 대통령에 취임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도와준다고 했는데 갑자기 군을 동원할 이유가 없잖은가?
둘은 러시아에서 뽑아낼 이득에만 침을 흘렸지 진지하게 옛 소련의 영광을 재건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보르첸코 의원은 비서관이 가져온 에스토니아 병력 배치 현황을 보고 현기증에 몸을 비틀거렸다.
미군을 위시한 나토군이 국경선에 엄청나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 연락해서 멈추라고 해! 지금 나토와 부딪치면 안 된단 말이다!”
“틀렸습니다! 나토군 포병대가 대응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포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쯤 되면 미국에 오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보르첸코 의원은 복도를 서성이다가 유사한 사례가 동아시아에서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분명 2차 한국전쟁도 이렇게 시작됐었는데…….”
원인을 모르는 북한 포병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이은 개전.
당시엔 북한군 일부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전후 UN의 조사 결과 그게 아님이 드러났다.
진실이야 저 멀리에 있겠지만 각국의 정보기관은 유지하가 당시부터 청와대 벙커에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가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에도 혹시……?
보르첸코의 뇌리에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