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54
154화 멸망의 날
플레이그는 대체로 크기와 전력에 따라 여러 병종으로 구분된다.
비스트-워리어-나이트-골리앗-크라켄-베헤모스-레비아탄으로 이어지는 라인은 정규 병종이고 거기에 타이탄이나 기타 특수한 개체가 곁들여지는 식이다.
그중에서 나이트급은 레비아탄급에서 사출되는 병력을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골리앗이나 크라켄급이 별동대 역할을 주로 맡고 나이트급은 최전선에 선다.
덕분에 녀석들은 상위급에 맞먹는 장갑을 지녔다.
격한 전투가 일어나는 전선에서 포격을 버티고 지시를 내리려면 튼튼해야 하기 때문.
‘KNIGHT’라는 코드가 붙은 것도 그래서다.
다만 인류연합의 입장에선 크게 거슬리는 적은 아니었다.
중장갑을 둘렀다는 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의미이고, 지휘관을 맡았다는 건 녀석만 박살 내면 지휘계통이 무너진다는 소리이기 때문.
물론, 플레이그의 물량이 장난이 아닌 만큼 한 전선이 무너져도 다른 나이트급이 곧 충원된다.
인류연합은 그걸 지연시키고 또 뚫어내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다.
어설트 아머를 이용한 기동전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하여튼 이 나이트급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비스트나 지시만 충실히 이행하는 워리어급과는 달리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 봐야 레비아탄급이 발하는 사념파를 받아서 수행하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적의 전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능력 정도는 갖고 있었다.
유지하가 염려하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저 녀석 일부러 안 나오고 있군.”
“맞습니다. 사이필드의 농도를 보면 코쿤을 열 때가 지났어요.”
그럼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건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것이다.
낯선 행성에 떨어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어떻게 행동해야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수 있을지 고민 중이라는 뜻.
이는 사이필드로 주변의 환경을 탐지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플레이그 특유의 능력보다 진화된 것이다.
인류도 중력자 레이더로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지만 완벽하게 따라하는 건 불가능했다.
유지하만 제외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는 바지선에 인양되어 육지로 끌려가는 코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거 어디까지 끌고 갈 작정이지?”
“감청 결과 르아브르 항구 근처까지 옮길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이곳이죠.”
그녀가 짚은 화면에 넓은 바다가 표시되었다.
“경치 죽이는군. 저런 곳에서 사람들을 모아 괴물 처형식을 벌일 계획인가?”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지키기에 제격이죠.”
하프늄2 탄두가 제대로 먹힌다는 전제하에선 그렇겠지.
유감이지만 나이트급은 튼튼해서 프랑스군의 어떤 무기체계로도 죽일 수 없다.
그걸 경고하기 위해 여러 채널을 동원했지만 엘리제궁에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관료들이 전부 멍청이는 아닐 테고 마리 르펜이 무시하고 있다는 추측이 타당하겠지.
프랑스는 인류연합만큼은 아니어도 대통령의 권한이 상당히 큰 국가다.
유지하는 혀를 찼다.
“르아브르의 시민이 몽땅 죽어나가야 정신을 차릴 건가…….”
“개입할까요? 대신 세틀러호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만…….”
코쿤을 빼돌리기 위해선 에테르 역장으론 안 되고 그걸 응용한 중력 크레인이 필요하다.
“아직은 안 돼.”
온갖 희한한 것을 선보인 유지하지만 세틀러호를 드러내는 건 시기상조였다.
우주에서 전투를 할 역량을 갖췄다와 우주전함을 갖고 있다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세틀러호는 전함이 아니지만 전장 700미터짜리 우주선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프랑스군의 방해를 물리치고 코쿤을 확보할 수는 있겠지만 그 경우 불필요한 전쟁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열받은 프랑스가 선전포고할 확률이 높았기 때문.
그게 두렵지는 않지만 쓸데없는 전쟁을 할 필요는 없었다.
“비서실에 연락해서 기자회견 준비해. 대통령은 무시하겠지만 관료나 군인들은 좀 다르겠지.”
그리고 유지하에 대한 증오로 미치지 않은 프랑스인도 많이 있을 테니까.
얼마 후 코쿤이 육지에 상륙했을 때 전 세계는 유지하의 기자회견을 보게 되었다.
“프랑스가 확보한 그 코쿤은 아주 위험합니다. 예전의 괴물보다 더 강력한 녀석이 잠자고 있죠. 하프늄2 탄두로도 녀석을 죽이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 누구도 코쿤 옆에 가서는 안 됩니다. 녀석은 지금 주변 상황을 살피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미국에 요청해 바다에서 핵무기를 쓰는 겁니다.”
강압적으로 경고하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호소하는 방법을 썼지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코쿤이 육지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 수가 수십만에 달했고 작은 항구도시 르아브르가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프랑스 내부에서도 염려의 목소리가 나왔으나 코쿤을 견인하는 프랑스 함대에 보내는 열광적인 환호에 묻혀 버렸다.
―우주에서 온 괴물은 우리 손에 죽는다!
―위대한 프랑스 만세!
노르망디 해변을 수십만 개의 프랑스 국기가 장식했다.
유지하는 그걸 보고 모든 희망을 버렸다.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이 높은 거야 유명하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번 기회에 크게 데이고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군.”
“그렇다고 프랑스의 태도가 바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정부는 그럴지 몰라도 국민은 안 그럴 거야, 아마.”
어쩌면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더 큰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그래야만 한다.
* * *
현 시점에서 프랑스의 수뇌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엘리제궁에 모인 사람들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안 그래도 경제가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간 무리수를 썼던 게 들통 나는 바람에 세계적인 망신을 샀다.
특히 마리 르펜 대통령이 거짓말을 한 게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자국의 사이커들이 행복하고 진실된 삶을 누리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감금과 폭언, 폭행 등의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직접적인 폭언을 했다는 증언이 나오는 등 프랑스 내부에서 그녀의 입지는 최악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이커들이 대거 망명해 버렸기에 당장 블랙메탈과 에테르 산업이 폭삭 주저앉게 생겼다.
이를 해결하려면 대통령의 사퇴로도 어렵고 극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했다.
그게 우주에서 온 괴물의 처형식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녀석이 영국 근처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들은 마리 르펜 대통령은 환호작약했다.
“이건 기회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걸 우리 항구로 가져오세요!”
보좌관들이나 군 내부에서 위험하다는 조언이 잇따랐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하프늄2 탄두로 한 방에 박살 난 놈 아닌가?
미국과 영국이 끼어들긴 했지만 프랑스 단독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저 괴물의 죽음으로 돌파구를 연다는 게 그녀의 복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류연합의 유지하 대통령이 위험하다고 경고를 하고 나선 것이다.
“저 알, 코쿤 안의 괴물은 예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비록 덩치는 비슷하지만 아주 튼튼하므로 하프늄2 탄두에도 큰 타격이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미군에게 맡기십시오.”
자존심을 긁지 않기 위해 인류연합이 아니라 미군에 맡기라고 조언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그녀에겐 들리지 않았다.
보좌관들이 거듭 이래선 안 된다고 경고하고 나섰으나 그녀는 배터리가 소모된 장난감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하나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괴물을 프랑스에 가져오세요. 반드시 우리 손으로 처단해야 합니다.”
코쿤을 인양하기 위해 영국에 많은 양보를 했지만 괴물만 죽일 수 있으면 어찌되든 상관없는 문제였다.
원래 마리 르펜 대통령은 육지로 가져오길 원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무리라는 현장의 판단이 나왔다.
“거의 2만 톤에 육박해서 어지간한 바지선으로도 어렵습니다.”
“괴물 주제에 뭐가 그리 무거운지… 어떻게든 르아브르까지 가져오세요.”
그렇게 시작된 인양은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바지선을 항모전단이 호위했으며 E-2C 조기경보기와 핵잠수함까지 동원되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은 무슨 쇼냐고 비판했지만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멋있는 장면임은 분명했다.
프랑스 유수의 언론들이 이 장면을 1면으로 내보내는 바람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위대한 프랑스, 괴물의 알을 확보하다.
―우주에서 온 괴물은 프랑스에 의해 제압되었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됩니다.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프랑스에 가지는 인식이 약간 개선된 것은 확실해 보였다.
프랑스 해군에서도 이번 작전을 위해 상당한 연구를 했다.
미국과 같이 파편을 분석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아직 코쿤이 깨질 때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만약 인양 도중 녀석이 깨어나면 바로 하프늄2 탄두를 퍼부을 수 있게 바지선도 무인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마리 르펜 대통령이 좋은 구도가 안 나온다며 군함 간의 거리를 좁힐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아무튼 프랑스 해군에서는 근처에서 얼쩡대는 미 해군 함대를 무시한 채 르아브르 항구로 코쿤을 인양하는 데 성공했다.
해변에 나와 있는 프랑스인들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열렬히 환호했다.
―떨어라, 독재자들과 너희 배신자들, 모든 진영의 수치들아!
하필 4절을 부르는 것은 머나먼 동아시아의 누구에게 들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코쿤 인양 작업은 무사히 종료되었고 이제 하프늄2 탄두를 이용한 폭격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라팔 전투기 편대가 르아브르 항구의 상공을 가로질렀고 시민들은 깃발을 흔들며 아낌없는 환호를 보냈다.
그런 축제 분위기 속에서 코쿤에 균열이 일어났다.
사이필드에 변동이 생기자 유지하가 제일 먼저 알아챘고 세틀러호가 두 번째였다.
「코쿤에 균열, 현 시간부로 베타 원으로 판별합니다. 플레이그 나이트급입니다.」
“미군은 작업 끝냈나?”
「네. 현재 항모전단에서 B61 탄두가 준비되었습니다. 위력은 최대 350킬로톤입니다.」
“분명히 메가톤급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텐데.”
「B-2 전폭기가 탑재한 채로 노퍽 해군기지에서 날아오는 중입니다. 중간에 F-18 전투기의 호위를 받을 예정입니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베타 원은 지금 주변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사이코키네시스 필드로 느낀 것을 구체화하는 과정이겠지.
지휘관 개체인 만큼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적이 별거 아니라고 판단하면 흉포하게 돌변한다.
근접전을 담당하는 만큼 도시에 달라붙을 텐데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쿤이 일제히 쪼개졌다.
그 충격파에 바지선이 침몰했고 주변 군함들이 휘청거렸다.
베타 원은 순식간에 트랜스폼을 끝내고 바다에 잠수했다.
경악한 프랑스 해군 측에서 어뢰를 쏟아 부었지만 녀석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은 채 부두에 불쑥 출현했다.
녀석이 휘두르는 앞발에 커다란 요트가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에테르 블레이드 확인.」
에테르 입자를 칼날처럼 쓰는 것인데 인류연합에서도 재현에 성공했으나 그렇게 유용하진 않았다.
애초에 플레이그와의 전투에서 근접전을 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다.
플레이그는 그 흔한 포효조차 내지르지 않고 곧장 부두의 시설을 파괴하기 바빴다.
거대한 땅강아지 같은 외형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유지하는 착잡한 얼굴로 파괴의 현장을 바라봤다.
“최소 도시 한두 개는 박살 나겠군.”
함포사격이 시작되었으나 녀석에게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뒤늦게 날아온 라팔 전투기가 하프늄2 탄두를 투하했다.
쿠쿵!
거대한 폭발과 함께 강 하구가 뒤집혔다.
그러나 녀석은 폭심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뭐죠? 저게 왜 살아 있는 거죠?”
“모, 모르겠습니다!”
“움직입니다! 하구를 따라 센 강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마리 르펜 대통령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센 강을 따라 올라가면 루앙이고 더 나아가면 파리였다.
파리 광역권의 인구는 천만이 넘는다.
“막으세요! 절대 루앙까지 올라오게 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막으란 말인가?
함포사격은 택도 없었고 하프늄2 탄두조차 먹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인근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미 해군이 가진 핵무기뿐.
보좌관들이 그걸 제안했으나 마리 르펜 대통령이 몸을 떨면서 화를 냈다.
“프랑스 땅에 미국의 핵무기를 쓴다고요? 절대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대통령님!”
보좌관이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베타 원은 센 강을 뒤집으면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오트노르망디 레지옹 전역에 대피령이 내려졌다.
피난길에 오른 차량으로 도로가 북적였고 특히 괴물의 목표가 된 루앙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었다.
프랑스군은 센 강을 따라 움직이는 베타 원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모든 수단이 무용지물이었고 결국 하프늄2 탄두 3발이 추가로 투하되었다.
프랑스의 자랑이던 옥토가 크레이터로 바뀌었음에도 녀석의 전진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레이저가 상공을 가로질렀고 라팔 전투기 몇 대가 날파리 떨어지듯 추락했다.
이쯤 되자 마리 르펜 대통령은 혼절할 지경이 되었다.
애초에 저 괴물을 프랑스로 데리고 온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프랑스가 입을 피해보다는 대통령 자리가 위태롭다는 사실만 자각했다.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나든 이 자리를 보전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자연스레 원망이 인류연합의 누군가에게 향했다.
‘왜 더 강하게 경고를 해주지 않고!’
분명 유지하는 몇 차례나 경고했다.
직접적인 채널이 없어서 미국에 연락했고 나중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위험성을 알리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경고를 무시한 건 그녀였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그녀의 생각이 대참사를 막아야 한다는 데에 미쳤다.
하프늄2 탄두로는 저 괴물을 막을 순 없었다.
남은 건 자국의 핵탄두와 미군이 가진 메가톤급 핵탄두.
하지만 전자는 위력이 미심쩍었고 후자는 대통령 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암살 위협에 노출될 판이었다.
마리 르펜 대통령이 망설이는 동안에도 베타 원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르아브르에 준비된 부대를 돌파하고 나자 나머지는 프랑스 북부의 평원이었다.
녀석은 밭을 짓밟았고 곡물저장소를 몸으로 밀어 파괴했다.
육지라서 그런지 바다만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어지간한 차량을 추월할 정도는 되었다.
수십 대의 차량이 치여 짓뭉개졌고 녀석은 센 강과 육지를 자유롭게 오가며 빠르게 달렸다.
도중에 프랑스 공군에서 저지를 시도했지만 별로 아프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피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녀석의 진격을 잠시나마 멈춰 세운 건 하프늄2 탄두의 폭격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루앙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약간 벌어준 것에 불과했다.
덕분에 북부 평원의 여기저기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폭발에 휩쓸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보좌관들이 강경하게 나섰다.
“이제 20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님.”
“지금이 아니면 루앙에 핵 공격을 가해야 합니다.”
“대통령 자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시민들을 다 죽일 셈입니까?”
꽤나 강한 어조로 말했음에도 마리 르펜 대통령은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대로 시간만 보내다간 피해가 더 커진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우고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모든 게 그놈 때문이야.’
그녀는 유지하가 없었다면 괴물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2025년 이전까지 세계는 평화로웠다.
블랙메탈을 쓰는 사람도 없었고 에테르란 게 뭔지도 몰랐을 때였다.
평화를 깬 것은 유지하였다.
그가 프랑스를 이 꼴로 만든 것이다.
“그놈만 없었어도…….”
“예?”
“대통령님 무슨 말씀을…….”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보좌관들이 황당해했다.
그놈이라는 건 인류연합의 유지하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 같았지만 왜 이 시점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그는 애초에 다른 나라의 수장이고 경고도 여러 번 해주었다.
이번 참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수석보좌관이 마음을 굳게 먹고 의회에 연락했다.
“총리님, 아무래도 미국에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건 대통령의 판단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오.”
“10분만 지나면 루앙이 폭심지에 포함될 겁니다, 총리님.”
루앙의 시민들은 대부분 대피했지만 수천 명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미국이 준비한 핵이 떨어지면 그들은 전부 죽는다.
수석보좌관이 절절히 설명하자 총리는 잠깐 침묵한 후 말했다.
“…잠깐 마리를 바꿔 주시오.”
별실에서 짧은 대화가 이어졌다.
어떤 내용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총리가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국방부장관이 확인했다.
마리 르펜은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 갔고 총리가 백악관에 연락했다.
볼드윈 대통령은 몇 번이나 물었다.
“프랑스가 소유한 탄두를 써도 되지 않겠습니까?”
“서글프지만 위력 부족으로 판단했습니다. 한 번에 끝내 주십시오.”
유지하가 한 말을 뒤늦게나마 따르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마리 대통령이 너무 망설이는 바람에 베타 원이 루앙에 거의 접근한 상태였다.
프랑스 육군이 동원되어 포화를 쏟아붓고 있었지만 녀석의 레이저 공격 한 방에 증발했다.
나이트급은 근접전을 주특기로 삼지만 원거리 공격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베타 원이 루앙의 서쪽 구역에 진입했을 때, 공중급유를 받으면서 날아온 B-2 전폭기와 F-18 편대가 녀석을 포착했다.
공격받지 않기 위해 고도를 높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시커먼 형체만큼은 아주 잘 보였다.
“크군…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지?”
“펜타곤에서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탄두 투하 준비.”
임무지휘관이 무장랙을 열기 위해 계기판을 조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지상에서 두꺼운 빛줄기가 솟아올랐다.
두 장교에겐 아주 익숙한 에테르 레이저였다.
“괴물이 레이저를 쐈습니다!”
“우리를 목표로 한 게 아닐 거다. 기수 틀어!”
현재 B-2 전폭기는 F-18 편대의 호위를 받으며 비행하고 있었다.
전투기에 비해 고도가 높은 만큼 괴물 입장에서 크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고, 그만큼 위협을 줄일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런데 괴물의 에테르 레이저는 집요하게 B-2만을 노렸다.
설마, 이쪽이 중요한 걸 아는 건가?
임무지휘관의 뇌리에 유지하의 발언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괴물에겐 지능이 있습니다. 주변의 위협 요소를 분별하므로 섣부르게 달려들었다간 몰살당합니다.”
하지만 유인사격까지 할 정도로 똑똑할 줄은 몰랐지 뭔가.
회피기동을 실시한 B-2의 날개를 다른 레이저가 정확히 꿰뚫었다.
위력이 약한 공격으로 피하도록 유도하고 진짜 공격을 가한 것이다.
블랙메탈도 녹여 버리는 레이저포에 B-2의 약한 하부장갑이 그대로 증발했다.
날개가 떨어져 나가자 B-2가 공중에서 회전을 시작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
“미주리 다운! 레이저에 맞았다!”
조종사들이 급하게 보고하는 가운데 베타 원이 루앙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녀석의 앞에는 수십 대의 르클레르 전차가 지키고 있었다.
건물에 숨어 대치를 지켜보던 루앙의 시민들이 신음했다.
“멸망의 날이군…….”
대폭발이 일어나며 전차의 포탑이 허공으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