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tator From Outer Space RAW novel - Chapter 187
187화 폭풍전야
2046년 현재 인류연합의 메가시티 12개와 다수의 우주사령부, 자원플랜트 등은 매우 안정적인 상태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안정은 루시아라는 강인공지능의 통제하에 있었다.
만약 그녀가 빠진다면 기존의 체제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유진이 가진 딜레마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선지자의 고향으로 가야 하고 루시아도 동행하길 원한다.
인류연합의 전체 네트워크를 지탱하던 버팀목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걸 원만하게 해결할 방법은 현재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루시아는 하나만 존재하며 대체 인공지능은 개발되지 않았다.
블랙박스를 분석하기 어려우니 복제할 수도 없고 연산유닛을 나누는 것도 불가능했다.
녹스의 워프게이트가 닫히면 네트워크도 끊어지므로 동행하든지 태양계에 남아 있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그리고 루시아는 최종적으로 유진과 동행하는 선택지를 골랐다.
마스터니까 당연히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맙기는 하지만 유진의 입장에선 대단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그가 전쟁 준비를 너무 서두른 것에 있었다.
2025년에 도착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고 2046년에 상당한 승산을 기대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다.
현 상태에서 플레이그와의 전면전에 돌입해도 승산은 절반 이상이고 그것은 해가 갈수록 상승한다.
20년 만에 이런 성과를 올린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인류의 인공지능 기술은 그만큼 무르익지 못했다.
루시아는 세틀러호에 보관된 청사진에서 다양한 설계도를 뽑아 물건을 만들 수 있지만 인공지능만큼은 그게 어려웠다.
이는 코덱스로 확인된 사항이었다.
“인공지능 코덱스 5항에 의거, 저와 동등한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코덱스를 수정하려면 블랙박스를 까서 분석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빠지면 인류연합 통제에 커다란 난관이 생겨난다.
“최대한 비슷한 알고리즘을 개발해 배치한다 하더라도 공백이 많을 겁니다.”
“그걸 인간이 맡아야 하는 거군.”
결국, 이전의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유진도 자신의 체제를 이어가도록 강제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독재란 생각보다 비효율적이고, 강인공지능이 없으면 그나마 있던 장점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그와 루시아가 있을 때 체제를 개선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 이상 인류가 독재에 기대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다.
“플레이그와의 전쟁에서 이긴다면 말이지만. 그래도 준비는 미리 해둬야 돼.”
그 승산에 대해서 말하자면, 루시아는 당장 플레이그와의 전면전에 돌입한다면 60% 정도라고 분석했다.
“물론 이건 플레이그가 이전과 같은 규모이고 이전과 같이 출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계산입니다.”
상황이 달라졌으니 플레이그도 이전 같은 규모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류연합은 더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전체 자원의 75%가량을 통합우주군에 투입하고 있는 실정에서 뭘 더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진이 일부 의원들의 불순한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는 것도 그들의 행동에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외부 세력과 미리 결탁하면 뭐 하나?
플레이그와의 전쟁이 시작되면 메가시티 이외에는 황무지로 돌아갈 텐데.
통합우주군 내에서 수많은 모의전투가 이뤄지고 의회에까지 그 보고서가 올라갔음에도 관심을 안 가진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그들의 시선은 전쟁 후에 존재 자체가 의문스러운 과일에 쏠려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떠나기 전에 다 정리해 버릴 놈들이니 지금은 설치게 놔두도록 하지. 꿈꾸는 게 죄는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경보 시스템 설치는 끝났나?”
“네. 태양계 200개소에 중력자 레이더를 설치한 위성을 띄웠습니다. 플레이그 군단이 나타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전투함은 이제 열심히 찍어내기만 하면 되고 파일럿 육성이 문제로군.”
최대한 서둘렀지만 더 이상 앞당길 수는 없었다.
사이커를 겸한 파일럿이란 전함처럼 찍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파일럿 후보생들을 선별해 에테르 회로와 시드를 이식하고 열심히 훈련시키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루시아는 바이오백을 이용한 파일럿 생산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계획은 잡혀 있었지만 유전공학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유진은 루시아가 보내 준 화면을 바라봤다.
바이오백 캡슐 안에 나체의 인간들이 잠자고 있었다.
“배양액 농도를 현 상태로 유지할 경우 3개월마다 25명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유진의 진짜 자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유전자를 이식받은 파일럿들과 달리 저들은 전적으로 유진의 유전자를 이용해 생산되었다.
전원 남자이며 전투에 필요한 스펙은 현재의 파일럿보다는 낫지만 감응력 등 사이커로서의 능력은 조금 떨어진다.
이제 저들은 깨어나면 최소한의 지식만 학습한 후 바로 전장에 투입된다.
인격이나 감정은 희미한 편이고 상부의 지시에 무작정 따를 것이다.
인간에 가깝지만 자유의지가 없으니 진짜 인간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인간 생산은 유진이 가장 혐오하던 방법이지만 파일럿 양성이 다소 쳐지는 상황에서 앞뒤 가릴 수는 없었다.
“저들은 대통령 직속 군단타격함대에 넣기로 하지.”
“알겠습니다.”
군단타격함대는 통합우주군의 명령을 받는 다른 함대와 달리 전적으로 루시아의 통제를 받는다.
가장 거대한 규모이며 통합우주군의 핵심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인원이나 편제 등 대부분이 안개에 가려져 있어서 최고평의회 의원들이 가장 열을 올리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 함대의 목적은 단 하나.
태양계에 플레이그 퀸과 둥지가 출현하면 즉시 출동하여 끝장을 보는 것이다.
다만 아직은 편성 중이라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이렇듯 인류연합은 플레이그의 전쟁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진은 그 최일선에 서 있었다.
그의 군복에 소위 계급장이 달렸다.
* * *
“여어, 숙적.”
함대에 귀환한 로저스 대위가 유진을 보고서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소냐는 둘을 차례로 보고 물었다.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정확히는 소위의 아버지와 썸씽이 있었지. 태평양 전투 때 스트라이크 패키지에 동원되었거든.”
로저스 대위는 전직 미 공군 파일럿이었고 그 계급을 인정받아 통합우주군에서 중위로 복무를 시작했다.
유진은 그걸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숙적이라는 표현은 좀 과하지 않을까요? 그건 전투가 성립되었을 때나 가능한 얘기니까요.”
도발적인 말투에 로저스 대위는 이마를 툭 쳤다.
“내가 한 방 먹었군. 그래. 당시 우리 파일럿들도 이건 미친 짓이라고 했었지. 인공지능이 컨트롤하는 악마의 기계군단에게 뭘 어쩌겠어?”
“아직까지 앙금이 남으셨습니까?”
유진이 묻자 그는 피식 웃었다.
“앙금은 무슨. 아들한테 앙금 품을 정도로 막 되어먹은 놈은 아냐. 그리고 메가시티에 들어오면서 다 잊어버렸다고. 적국의 참전군인을 우대해 준 사람은 자네 아버지가 유일할 거야, 아마.”
별로 나쁜 감정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유진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걸치려다 실패하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어깨가 너무 높아서 숏다리로는 안 되는군. 하여튼 알파 편대에 온 것을 환영한다. 환영식으로 안드로이드 바에 가서 한 잔 할까? 자네 안드로이드 데려 왔다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서 떼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크으, 역시 태생부터가 블랙메탈수저라니까. 요즘 우리 황제 폐하께서 궁전을 건축하고 계시던데 자네도 거기 가봤나?”
“사이가 좀 별로라서…….”
“아, 그런 문제가 있었군. 뭐 창업군주와 후대가 사이가 안 좋은 건 소설에도 많이 나오지. 그것보다 화성 기지에 좋은 안드로이드 바가 있는데 말이야…….”
“대체 안드로이드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예요?”
소냐의 날선 질문이 두 남자를 덮쳤다.
로저스 대위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찡긋했다.
“다 알면서.”
“모르겠는데요. 인간도 아닌 걸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뭘 모르네. 인간이 아니라서 좋은 거야. 안 그런가?”
“적어도 No라는 단어는 잘 안 쓰죠.”
“바로 그거지. 우리는 꽤 좋은 편대가 될 것 같구만, 친구.”
두 남자가 죽이 맞아 주먹을 맞부딪치자 소냐가 인상을 쓰며 반박했다.
“진짜 여자도 아닌 그런 안드로이드 따위에 맛 들리니까 결혼도 못 했죠.”
“요즘 세상에 누가 결혼한다고. 싫으면 자넨 빠져.”
“누가 간다고 했어요?”
“봤지? 유진 소위? 우리 편대엔 잔소리꾼이 하나 있으니까 자네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얼마 전에 겪어 봐서 압니다.”
“그런가? 요즘 여자들은 참 과감하다니까.”
소냐의 눈썹이 다시 올라가려 할 때 한 남자가 걸어왔다.
“편대장님, 시간 됐습니다.”
큰 키에 안경을 낀 꽤나 진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로저스 대위가 그를 소개했다.
“아, 실기 받으러 가기로 했었지. 참고로 이쪽은 이븐 나세드. 원래 이름은 긴데 그냥 나세드라고 부르면 돼.”
유진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파티마의 유전자 시드를 이식받은 사이커 중 한 명이다.
파일럿보다는 사이커로서의 능력이 출중하며 편대에 특수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반갑습니다, 소위님.”
“소위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이제부터 우린 같은 편대니까 잘해 보자고.”
진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히 여유로운 성격인 듯했다.
로저스 대위가 박수를 짝 쳤다.
“그럼, 알파 편대가 다 모였군. 이제부터 예쁜 아가씨를 구경하러 가보실까?”
“아가씨가 아니고 기체입니다만.”
소냐가 딴지를 걸었지만 그는 유진과 나세르를 옆에 끼고 무시했다.
“예전부터 배나 비행기는 여성형으로 부르는 게 원칙이었어.”
“배나 비행기가 아니고 어설트 아머인데요.”
“하여간에 우리가 올라타잖아? 그럼 여성형이지.”
“…….”
순식간에 할 말이 없어지는 저질 농담이었다.
나세르는 뒤를 흘긋 쳐다봤고 유진은 그러려니 했다.
이런 분위기도 나쁘진 않지만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것 같았다.
* * *
2기동함대에 어설트 아머가 정식으로 배치되었다.
지휘부의 통제하에 파일럿들이 처음으로 실기를 조종했고 그럭저럭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허니버드 윙팩을 장착하지 않았지만 어설트 아머를 움직이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메인 브릿지에선 격납고에서 사출되는 어설트 아머의 움직임을 보고하고 기록하기 바빴다.
「락 볼트 해제. 사출 준비 완료.」
「사출합니다.」
알파 편대도 테스트에 합류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화성궤도에 정지해 있는 로스엔젤레스함 주변을 도는 간단한 기동 테스트였다.
편대장 로저스 대위가 먼저 뛰쳐나가 편대원들을 인도했다.
“알파 원에서 각기에. 새끼 오리처럼 내 뒤만 졸졸 따라오면 된다, 알겠나?”
“수신 완료.”
브릿지의 장교들은 알파 포, 유진 소위를 지켜봤다.
파일럿에게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그의 동기화율은 기존의 최고 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한 오퍼레이터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동기화율 93%…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요.”
“여태까지 최고가 1함대의 80%였나? 그걸 가볍게 돌파해 버렸군.”
“어설트 아머의 움직임이 유영하는 것처럼 부드럽습니다. 90%를 돌파하면 저렇게 될 수도 있군요.”
브릿지의 인원들은 다들 알파 편대의 움직임을 관측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알파 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이필드에 다른 기체까지 영향을 받고 있었다.
지금쯤 다른 편대원들은 자신의 뜻대로 기체가 움직이지 않아 매우 당황스러울 것이다.
편대장 로저스 대위는 잠깐 당황한 듯했지만 곧 농담을 하기에 바빴다.
“이건 누구 에테르인지 알겠구만. 마치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즐겼던 파도타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알파 투에서 원에게. 잡담은 금물입니다.”
“잠깐 내 생각 하고 있어도 돼. 알파 포가 알아서 조종해 준다니까.”
소냐는 울컥했지만 기체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주를 유영하는 걸 느끼고 같이 당황하게 되었다.
‘왜 이러지?’
그것은 스쿠버 다이빙에서 해류에 휩쓸릴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몸에 힘을 주어 저항해 보지만 그럴수록 강한 압박을 받아 오히려 더 큰 힘이 든다.
차라리 해류가 이끄는 대로 가는 것이 편했다.
그것이 위험한 해저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안전하게 우주비행을 하고 있었다.
천천히 비행을 하는 것 같은데도 오히려 다른 편대보다 훨씬 더 빨랐다.
‘이게… 그의 실력인가?’
다른 기체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사이필드라니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남자일까?
그는 지치지도 않는지 훈련 내내 편대 전체를 이끌었다.
마침내 격납고로 돌아왔을 땐 편대원 모두 말을 잊은 상태였다.
로저스 대위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넨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것 같구만.”
“말씀대로 태생이 블랙메탈수저라 그런가 봅니다.”
“뭐 그게 맞을 수도 있겠지. 하여튼 기분이 나쁘면서도 유쾌한 경험이었어.”
자신의 기체가 남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게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전시에 실력자 옆에 있다는 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군엔 괜히 모진 놈 곁에 있다간 빨리 죽는다는 속담이 있긴 하지만 여기는 통합우주군이니까.
나세르도 마찬가지였는지 새삼 달라진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소냐는 뚱한 얼굴로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어진 훈련강평에서 유진의 동기화율과 사이필드는 유지하 대통령에 이어 2번째로 강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게 알려지면서 2기동함대에서 유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22살 블랙메탈수저 낙하산이 아니라 다른 파일럿을 능가하는 실력자로.
전투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이커로서의 역량은 다른 파일럿과 비교가 안 되는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어설트 아머를 이용한 훈련이 계속되었고 유진이 있는 알파 편대의 실력은 계속해서 상승했다.
모의탄을 이용한 전투 훈련에서 다른 편대를 압도하는 성과를 낸 것이다.
편대장 로저스 대위는 강평에서 유진의 오더를 따른 결과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차라리 저 녀석이 편대장을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돕니다. 훈련 시에 포지션 선정이나 회피기동 등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그가 자존심을 버리고 그렇게 말할 정도면 실력 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플레이그의 공격을 가장한 다수의 편대를 막아 내는 전투 훈련에서도 유일하게 성공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른 편대원들이 어설트 아머 20대의 파상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격추된 사이 홀로 차원이 다른 회피를 선보이며 다 쓸어 버렸던 것이다.
오죽하면 플레이그 역할을 한 다른 편대원들이 무슨 저런 괴물이 있냐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등 뒤에 눈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 말도 안 된다고요.”
“공격하기 전에 알아차리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착각인지도 모르겠지만.”
기동함대 수뇌부에선 더 이상 그를 소위 계급에 머무르게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상부에 중위 진급을 상신했다.
소위가 된지 세 달도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보통의 군대에선 이게 불가능하지만 실력을 우선시하는 통합우주군에선 충분히 가능했다.
이쯤 되면 거만하게 변할 만도 할 텐데 그는 여전히 로저스 대위를 편대장으로 대우하고 나세르와도 친하게 지냈다.
또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유하기도 했다.
“중요한 건 기체의 포지션입니다. 여기에 적과 아군 함대가 있다 치면,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여서 최적의 포지션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주 임무는 반응탄 배달이죠? 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서 무작정 돌격해선 안 됩니다. 플레이그의 전열을 벗겨내기 위해선 기체의 화력만으로는 불가능하죠. 아군 함대와의 연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항상 전투사관들이 보내오는 데이터를 잘 확인해야 합니다. 중력자 레이더보다 그들의 위치 파악이 0.05초 더 빠릅니다.”
듣고 있던 로저스 대위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0.05초면 거의 차이가 없는 거 아니냐?”
“실제 전투에 들어가면 어마어마한 차이로 느껴질 겁니다.”
“꼭 실전을 치러본 것처럼 말하는데?”
“교범에 다 있는 겁니다.”
왠지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지만 그의 조언이 효과가 있는 건 확실했다.
소냐도 그의 조언에 따르자 전투훈련 성적이 수직상승하는 것을 느끼고는 당황했다.
‘신참 맞아? 어디서 훈련이라도 한 게 아니고?’
유지하 대통령의 아들이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뛰어난 유전자를 이어받았고 개인 기체도 있었을 테니 어릴 때부터 훈련을 하면 충분히 이 정도의 실력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대통령의 개인 기체가 통합우주군의 유물해석기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말았다.
“통합우주군이 개편될 때부터 아크에 들어가 있었다고요?”
“그게 벌써 10년 전이야. 나도 많이 뜯어봤지. 이해가 안 되는 부품이 태반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황선영 수석연구원이었다.
그녀는 유물해석기관 아크의 창설멤버로 에테르 관련 연구에서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권위자였다.
현대의 어설트 아머 개량은 그녀가 이뤄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은근히 물었다.
“그래서 어땠어? 걔는?”
“…모르겠어요. 아직은.”
“같이 지낸지 몇 달 되지 않았어? 젊은 혈기에 만리장성을 쌓았을 법도 한데?”
“만리장성이 뭔데요?”
“이게 세대차이란 거구나. 언니는 너무 슬퍼.”
아무래도 메가시티 세대와 이전 세대는 지식의 넓이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소냐는 엄마뻘인 주제에 언니를 내세우는 황선영이 가증스러웠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같이 서 있으면 정말 그렇게 보이니까.
아무튼 유지하의 개인 기체가 10년 전부터 아크에 있었고 다른 기체가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럼 어디서 조종술을 배운 거야?”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었다.
이제 그녀는 유진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을 갖기보단 은근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실력이 너무 차이가 나서 일방적으로 적대감을 가져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주제에 일부러 거리를 두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다만 아직은 그런 태도를 버리진 못해서 전술회의를 할 때면 몸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머리가 그의 쪽으로 기우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로저스 대위는 그걸 보곤 낄낄거렸다.
“겉으로는 싫다고 해도 몸은 솔직하구만?”
무슨 헛소리인지 모를 일이다.
한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지만 그리 길진 않았다.
2047년이 되자 인류연합이 태양계 전역에 설치해 놓은 경보 시스템이 울렸다.
「에테르 폭풍 감지, 플레이그 공습경보.」
통합우주군의 중력자 레이더에 무수한 광점이 나타났다.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였다.
유진은 경보를 들으며 비로소 그 날이 왔음을 깨달았다.
‘슬픔의 밤을 일으킨 주역들이 왔군.’
2103년의 인류는 녀석들의 공격에 5억 명을 잃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