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80
80화
쑥쑥유치원.
이제 막 건물 앞에 ‘쑥쑥유치원’이라는 커다란 간판 하나가 세워졌다. 어지간한 중소기업 사옥 앞에 세워진 간판을 방불케 했다.
―크르르르릉~
거대한 크레인이 수차례나 위치를 바로 잡으며 신중을 기해 세운 입간판이었다.
건물 이름도 ‘쑥쑥 유치원 BLDG’였다.
‘쑥쑥 유치원’이라는 굵은 글씨의 제목 아래, 좀 작은 글씨로 ‘쑥쑥 어린이 장학재단’이라는 문구도 보였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용하와 인공의 표정에 감회가 새롭다.
“형님, 이게 꿈입니까, 생시입니까?”
“음, 그보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 21세기가 현실일까, 14세기 무림이 현실일까?”
“네?”
그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하지만 반드시 짚어 봐야 했을 명백한 사실.
과연 용하에게 어떤 게 현실이고, 어떤 게 꿈이란 말인가? 뜬금없다고 여겼던 인공의 말이, 들떴던 심경을 복잡하게 했다.
“형님, 저는 말입니다. 14세기 무림이든 21세기 문명사회든, 예전의 제 삶을 생각해 보면, 지금이 훨씬 좋은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용하는 하던 말을 멈추고 기억을 더듬는 기색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아 버리는 것이냐?”
“음, 저는 말입니다. 추레하고 힘겨웠던 제 과거, 그리고 믿기지 않는 경험을 안겨 준 무림과 유치원 간판이 걸리는 광경을 지켜보는 지금. 둘 중 어떤 게 현실인지, 그게 더 궁금합니다.”
“언젠가 뚜렷하게 보이는 날이 있겠지.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야.”
“그 말씀은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인가요?”
인공을 바라보는 용하의 눈빛이 사뭇 강렬했다. 반면 인공은 무심하게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굳이 대답할 필요 없다는 메시지였다.
“형님!”
흘깃 용하를 바라보는 인공. 그는 웬일인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형님, 뭐라고 대답을 좀 해 주셔야죠.”
“대답? 무슨 대답. 난 오히려 묻고 싶구나.”
“네, 말씀하세요. 뭐든지…….”
“유치원 이름이 왜 쑥쑥인 게냐?”
“네?”
“난 그게 아까부터 궁금해서 다른 말이 귀에 안 들어오더구나.”
“그럼, 형님. 그거 말해 주면 조금 전 제가 물어본 것도 대답해 주시는 겁니까?”
“일단 들어보고 생각해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설마 별것도 아닌 일로 비열하게 굴지는 않겠죠?”
“용하야, 나 주금산으로 돌아간다.”
용하에게 이 말은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아닙니다. 말씀드릴게요. 유치원 제목으로 쑥쑥이란 말을 넣은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미래에 재목이 될 우리 새싹들, 쑥쑥 잘 자라라고 붙여봤고요, 다른 하나는 예전에 제가 우리 미숙이를 부를 때 숙아, 숙아, 했거든요. 그래서…….”
“아, 그래서 쑥쑥이었구먼!”
그제야 인공은 무릎을 탁! 치며 유치원 이름에 무척이나 흥미를 느끼는 기색이었다.
“음, 그럼 이제, 자네 약혼녀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는 거네!”
“그런데 형님, 명분이 없는데 어떡하죠?”
“명분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리냐?”
“작은 선물을 하나 줘도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이를테면 뭐, 생일이라든지…….”
“아, 이유! 난 또 뭐라고. 너는 꼭,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뭐나 있는 것처럼, 명분을 찾고 그러냐?”
“그게 말입니다, 형님. 말이 선물이지 이건 좀…….”
“그렇지? 선물이라고 하기엔 좀 지나치지? 아니, 좀이 아니고, 좀 많이 지나쳐.”
인공조차 혀가 꼬여 말이 엉켰다.
“그럼 일단, 자네 약혼녀 병세부터 좀 확인하고, 좀 나아졌다 싶으면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체하며, 당분간 그냥 신도시 좀 괜찮은 유치원에 취직한 것처럼 알고 있게 했다가, 유치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자네 약혼녀도 현실에 적응이 됐다고 판단되면, 그때 이 사실을 공개하면 별 탈 없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역시 세상 이치를 잘 아는 형님의 발상은 늘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거야?”
“네. 형님도 연기 잘하셔야 합니다.”
“나야 뭐, 늘 메소드지.”
“좋아요, 그럼 이번 주말에는 열 일 제쳐두고 미숙이 병문안 가는 겁니다.”
“그러지 뭐. 병문안 가면서 이렇게 기분 좋아해 보긴 처음이야.”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멀게만 느껴졌던 주말이, 어느새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형님, 그냥 근교로 나들이 간다 생각하세요.”
“그러잖아도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야.”
인공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용하가 운전하는 셰어링카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한가로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 전 용하의 머리맡을 지나간 이정표 맨 위에 개성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용하가 운전하는 셰어링카는 같은 속도로 수 킬로미터를 달렸다. 그리고 정면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이정표에 우측으로 빠지라는 화살표와 ‘성동IC’라는 글씨가 보였다.
용하는 속도를 늦추며 서서히 차선을 바꿨다. 성동나들목을 빠져나오는 용하의 얼굴색이 웬일인지 상기돼 보였다. 아마도 미숙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이 가까워져서였을 것이다.
“자네, 얼굴색이 왜 그래?”
“제 얼굴색이 뭐가, 어때서요?”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게 좀 이상해.”
“아, 그거요? 운전을 하도 오랜만에 해서 그런가 보죠.”
“아, 말 나온 김에 차 한 대 뽑는 건 어떨까?”
“차를요?”
“생각해 보니까, 앞으로 차를 쓸 일이 많을 것 같아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용하가 말했다.
“형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할 일이 많아졌으니, 기동력도 갖춰야 하는 게 맞습니다.”
“기동력? 그렇지. 기동력이 좋아지려면 좀 비싸더라도 속도를 잘 내는 차가 좋겠지?”
“속도?! 얼마나 빠른 차가 필요한데요?”
“뭐, 제대로 밟으면 순식간에 한 300km 정도까지 올라가는 차?!”
막상 말을 뱉어놓고 보니, 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 세게 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하를 흘깃 보는 인공의 시야에, 미소를 머금은 용하의 옆모습이 보였다.
‘녀석, 좋으면서 아닌 척하기는…….’
자유로를 벗어난 셰어링카는 일반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그동안 얼마나 자주 왔던지, 이제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길눈이 밝아졌다.
“그동안 자주 왔던 게냐?”
“죄송합니다. 형님 모르게 몇 번 왔습니다.”
“죄송하기는.”
“형님도 인공사에 계시는 보살님이 보고 싶으시잖아요.”
“당치않은 소리! 그 할망구 어디가 예쁘다고 보고 싶어? 보고 싶기를.”
“형님, 아닌 척해도 다 보여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래, 약혼녀는 좀 괜찮아진 거야?”
“저도 오늘 가 봐야 알아요. 사실 그동안 병원 앞까지 왔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어요.”
“왜, 왜 그런 바보짓을?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용기가 나질 않았다고? 아, 용기라…….”
인공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 너무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 맞아. 두려웠을 거야.”
그리고 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가 싶더니, 곧 물었다.
“오늘은 자신 있어?”
“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것이냐?”
“오늘은 형님하고 함께 왔잖아요.”
“나하고 같이 와서 자신감이 생긴 거야?”
인공은 짐짓 우쭐한 기색을 해 보였다.
“네. 그리고 실은 어제 병원장님이 전화하셨더라고요.”
“병원장이? 뭐라고 전화했길래?”
“미숙이가 가벼운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만큼 안정을 되찾았다고요.”
“아, 그랬었구나. 그럼 혼자 와도 될 일이 아니었느냐.”
“아뇨, 형님이 함께 올 수 없다고 했으면, 전 아마 올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용하는 지나치게 인공을 의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인공은 용하를 꾸짖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인공은 오히려 용하가 자기에게 기대는 것을 뿌듯하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그동안 누가 나를 믿어줬던가. 하물며 불자들마저도 나를 땡추라 손가락질하기 바빴지, 믿어 준 사람은 없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런데 지금 이 녀석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나를 믿어주고 있다.’
인공은 언제부터인지 용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병원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였다.
“이보게, 용하!”
“네, 형님.”
“우리 돈을 좀 더 벌어볼까? 차도 사야 하고, 자네 약혼녀가 퇴원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당분간 우리가 곁에서 좀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시려고요?”
“수련생을 늘리려고.”
“하루 두 타임 이상은 어렵다고 했잖아요. 그 이상은 제가 감당이 안 됩니다. 아시다시피 검도 수련이 아니고 기 수련이잖아요.”
“그래서, 타임을 늘리자는 게 아니고, 수련생만 늘리자는 거야.”
“수련생만 늘린다고요? 어떻게? 지금도 체육관이 좀 비좁아서 포화상태인데.”
“그게 문제야?”
“그럼요. 잘 아시면서 남의 집 얘기하듯 하셔.”
“그것만 해결되면 문제없는 거지?”
“그거 말고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수련생 더 받으면 저야 좋죠.”
“좋아. 지금 수련생들 수료하고 나면, 다음 시즌엔 지금의 세 배쯤 수련생을 늘려 볼 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아 글쎄, 장소부터 해결해야 한다니까요.”
“쳇, 문제 축에도 못 끼는 걸 가지고 목청을 높이는구나!”
“목청을 올리는 게 아니고 현실이 그렇잖아요. 현실이…….”
“이참에 우리도 칙칙한 변두리에서 벗어나 신도시로 진출해 볼까?”
“네?”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생각이 닫혀 있는 게냐? 그래도 명색이 무림에서는 창의부흥원 원장이 아니었더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21세기하고 뭔가 좀 안 맞나 봅니다. 여기선 되는 게 없어요.”
“되는 게 없기는. 지금 우리가 일궈 놓은 성과를 좀 보거라. 이걸 두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냐?”
“그건 다 형님 덕분이죠. 제가 스스로 한 게 어디 하나라도 있습니까?”
“겸손이 지나치구나. 지나친 겸손은 꼴값 떠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인정할 건 적당히 인정하고, 웬만하면 자신감 좀 갖자꾸나.”
용하는 바로 대답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표정은 조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네만 괜찮다면, 우리가 자네 약혼녀 건물에 세를 들까 하는데.”
“그 건물은 임대료가 한두 푼이 아닐 텐데요.”
“우리에겐 수련생들이 있지 않으냐. 각 지역에서 탑 찍는 관장들 말이다.”
인공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다. 단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두려울 따름이었다.
“그럼 형님! 저도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안! 무슨 제안?”
“형님도 신도시로 진출하세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자네가 신도시로 나오면, 나 혼자 변두리에 남아서 뭘 하겠느냐? 쳇, 당연한 얘기 하면서 목에 힘주기는.”
“인공사 말입니다.”
“인공사?”
아직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인공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정적이 깨진 건, 인공이 머리칼을 쭈뼛하게 세우며 소스라치게 놀랐을 때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뭐, 뭐라고? 인, 인공사를 신도시로 옮기자고?”
“안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신도시로 옮기고, 요즘 세상에 맞게 현대화한다면, 신도들도 더 많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리고 참, 인공사에 계시는 보살님이 해주셔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그 할망구가 해 줘야 할 역할?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할망구는 뭘 시켜도 제대로 하지 못할걸.”
“아무리 우리 주거래 은행 컨설팅 팀장이 다 알아서 관리한다고는 하나, 소통의 창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그제야 인공은 용하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네 녀석이, 내가 달아날까 봐 미리 수를 쓰는 것이냐?”
“아무튼, 눈치는 아무도 못 당한다니까. 그걸 벌써 알아차렸어요?”
누가 들어도 역설임이 틀림없는 말이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인공은 용하가 수를 썼다는 사실을 알고도, 기분이 언짢다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용하의 사려 깊은 배려에 뭉클했다.
조금 전 용하가 운전해 온 셰어링카가 병원 정문을 지났다. 용하와 인공은 무슨 약속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줄곧 나눠 왔던 대화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엿보이는 기대감과 긴장감은 여느 때보다 깊고 뚜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