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or Lee Saengmang Kim blooms at Moorim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계획해 온 거니까, 깜짝 이벤트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줬으면 좋겠어.”
조금 전 용하가 한 말은 적잖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용하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인공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숙의 눈물이 값어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용하를 만난 이후 그와 덩달아 암울해진 미숙의 삶. 용하의 깜짝 이벤트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미숙의 인생에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인공은 물끄러미 미숙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이 연회장의 하녀라…….’
본 적이 없으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용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확신에는 변함이 없었다.
용하의 품에 안긴 미숙.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남주리.
이 모든 광경을 관조하는 인공의 시야에 남주리가 얼핏 걸렸다.
‘아니, 저 할망구가!’
부러운 눈으로 용하와 미숙을 바라보는 남주리.
청승이 문제가 아니었다. 혹여, 미숙을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인공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용하와 미숙 그리고 남주리의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누가 봐도 어정쩡한 구도였다.
“사범님!”
남주리의 목소리는 다소 격앙돼 있었다.
“어허, 쉿! 젊은 사람들 은밀한 시간 좀 갖게 우리는 우리끼리.”
인공은 낮은 소리로 얼렁뚱땅 둘러댔다.
하지만 남주리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더 높여 말했다.
“이 늙은이가 뭐라고 수작질이야. 우리끼리 뭐? 다 늙어서 주책도 유분수지.”
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민망한 순간에도, 혹시나 남주리가 미숙을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오금이 다 저렸다.
‘할망구야 뭐, 환골탈태했으니 아무도 알아볼 리 없고. 하지만…….’
생각은 행동을 부른다고 했던가. 자연스럽게 인공의 시선이 미숙에게로 흘렀다.
‘하다못해 헤어스타일이라도 좀 바꿀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그건 인공의 오산이었다. 미숙이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은 이미지를 고수하는 이유는,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금의 단아한 이미지를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얘기다.
인공은 슬금슬금 용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말했다.
“이보게, 김 관장. 김미숙 선생 아니, 김미숙 원장 말이야.”
최대한 낮은 목소리에 용하 또한 더 낮은 소리로 응했다.
“미숙이가 왜요?”
“아무래도 이미지를 좀 바꿔야 할 것 같아.”
“이미지를요? 왜요?”
인공은 보일 듯 말 듯 남주리 쪽으로 턱짓을 해 보였다. 거의 동시에 용하의 시선이 남주리 쪽으로 흘렀다.
남주리에게 시선이 멎은 용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남주리 총무와 미숙이 무슨 상관이라고.’
하지만 곧 무엇인가 깨달은 용하. 그의 시선이 전광석화처럼 미숙에게로 옮겨졌다.
그 광경을 본 인공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의 의중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용하는 부지런히 남주리와 미숙의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인공 또한 남주리와 미숙의 눈길이 교차하지 않도록 두 사람의 동선은 물론, 맞닿을 것이라 예상되는 두 사람의 시선마저도 최대한 훼방을 놓았다.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총무님하고 대화할 틈을 안 주네! 앞으로 장학재단과 소통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말이야.’
영문을 모르는 미숙은 불평만 쌓여갔다. 하지만 그런 심기를 들키거나 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뭐, 오늘만 날인가? 차차 하면 되지, 뭐. 지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내가 과연 원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용하와 인공의 전략은 뭐 하나 순탄치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날의 작은 연회는 무사히 넘어갔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끝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의 회식에서 한 가지 전리품이 있다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미숙을 원장 자리에 앉혔다는 사실이다.
브라보!
이걸 승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승리의 기쁨도 잠시.
“김 관장!”
숨넘어갈 듯한 인공의 목소리가 검도 체육관 안에 메아리쳤다.
“형님! 아니, 사범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큰일 났소!”
“큰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리 소란을 피우시는 겁니까?”
“우리 건물을 지은 건축사가 세를 들겠다고 하니, 이를 대체 어쩐단 말이오?”
“건축사가 왜요?”
“우수 조형 건축물을 지은 건축사들을 대상으로, 페스티벌이 있었던 것 같소. 그 대회에서 수상한 건축사들을 주축으로 협회가 발족 될 예정인데, 우리 건물 4층을 협회사무실로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하더이다.”
“4층? 4층은 이미 입시학원으로 낙점되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막으십시오!”
단연코 결연했다.
“나야 물론 극구 반대했지만, 우리가 일임한 은행 컨설팅팀에서는 전혀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니, 이를 어쩐단 말이오.”
김미숙 원장, 남주리 총무. 그리고 건축사!
이 세 사람은 절대 한 공간에 있으면 안 되는 인물들이다.
이유는…….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세 사람 중에 누구 하나라도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인류는 혼란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가 컨설팅 팀장을 만나겠습니다. 만약! 만에 하나, 제 말을 수용하지 않겠다면, 주거래 은행을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반드시 막을 것입니다.”
용하의 날 선 대치는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정치싸움을 방불케 했다.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이 사람 인공은 김 관장만 믿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사범님.”
용하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은행으로 달려갔다.
“팀장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용하의 목소리에 컨설팅 팀장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관장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용건 있으시면 저희가 들어갔을 텐데 말입니다.”
“네가 잘못 들은 것이오?”
“무엇을 말입니까?”
“우리 쑥쑥 유치원 건물에 건축사 사무실이 들어온다는 거 말이오.”
“아, 그거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제가 비록 모든 걸 일임하긴 했지만, 우리 건물을 지었고, 잠깐이지만 소유자였던 건축주에게 임대를 놓을 순 없습니다.”
“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은행뿐 아니라 쑥쑥 유치원이나 어린이 장학재단에도 잘된 일 아닙니까?”
“잘되다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건축가로서 명성을 크게 얻고 있는 분들이 쑥쑥 유치원 건물로 수십 명이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과연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쑥쑥 유치원 건물로 몰려들겠죠?”
“…….”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다들 재산가에 인플루언서들 아니겠습니까?”
컨설팅 팀장의 말을 듣는 용하는 한숨만 나왔다. 21세기 맞춤형 인간의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어서였다.
“그런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건물! 당연히 매스컴에 오르내리겠죠?”
더 듣지 않아도 팀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연막을 피우는지 알고도 남을 만했다.
“그러면 그 자리를 주선한 팀장님! 그리고 팀장님이 근무하는 이 은행! 결국 은행은 유명한 건축사들이 시행하는 모든 건물에서 생겨날 수 있는 대출을 독점하겠다. 이거 아닙니까?”
“아, 역시! 네, 맞습니다. 관장님은 쑥쑥 유치원 홍보와 비싼 임대료를 챙길 수 있고, 저희 은행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도 같은 여신을 확보하는 거죠.”
점점 야비해지는 컨설팅 팀장의 목소리.
―쿵! 쿵! 쿵! 쿵!
수세에 몰린 용하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인가.’
검도 체육관으로 돌아온 용하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이번 사태를 정리해 보았다.
일단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출입문이 다르니 직접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장학재단 남주리 총무다. 재단 관리업무를 보고 있으니, 입주자들이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우선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니 말이다.
“사범님!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오늘 하루만 사적인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적인 대화?”
“네, 형님.”
“아, 그 말이었군. 그럼 오늘 하루는 허심탄회하게 대화의 장을 한번 펼쳐볼까?”
“네, 형님.”
“그래, 문제가 무엇이냐?”
“종합 건축사 사무실이 들어오는 걸 막을 길이 없습니다.”
“세 들겠다는 건축사 사무실은 어찌 된 것이냐?”
“그 건축사가 대빵인 종합 건축사 사무실입니다. 이를테면, 법률로 따지면 로펌 같은 거죠.”
“로펌 같은 거라면, 국내 내로라하는 건축사들이 다 모일 거라는 말인 게냐?”
“네. 바로 그 점 때문에 컨설팅 팀장이 좀처럼 물러서려 들지 않습니다.”
“음, 앞으로 그 은행에 고금리 여신이 차고 넘쳐나겠구먼. 그렇지?”
“네, 바로 그걸 노리고…….”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딴지를 좀 걸어 보자꾸나.”
“어떻게 말입니까?”
“우선 임대료를 최대한 올리고, 장학재단 사무실을 유치원으로 옮기도록 하자꾸나.”
“장학재단 사무실을요?”
“왜, 그것도 문제가 있는 것이냐?”
“김미숙 원장과 남주리 총무를 같은 공간에 두자고요?”
“아뿔싸!”
인공은 제 이마를 딱!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리쳤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습니까?”
“미안하네.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던 모양일세.”
“미안하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이다, 아니다! 그 문제는 나중에 판단하기로 하고, 일단 아무거나 좋으니 지금처럼 안을 던져 주십시오.”
“아, 그래? 그럼 이건 어떤가? 남주리 총무를 아예 장학재단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할 수 있도록, 이참에 아예 오피스텔로 개조하는 건.”
“그것도 한 방법이겠군요. 그리고요?”
“음… 음… 8층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건 어때?”
“8층 전용 엘리베이터요?”
무엇보다 용하는 그 말에 끌렸다. 지금까지 나온 안 중에는 가장 타당성 있어 보여서였다.
“그래! 수련생들에게는 내가 얘기하면 되니까 따로 공지할 필요 없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갈지 모르는데, 남주리 총무도 전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면 마다할 리 없고.”
“그럼 형님! 일단 내일 오전에 전용 엘리베이터 견적 좀 뽑아보고 다시 거론하기로 하죠?”
“비용이 좀 들더라도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으니, 염두에 두고 있거라.”
“네, 형님.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지 않는다면, 저도 그 방법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용하의 말에 인공은 느닷없이 손을 척 내밀었다. 용하는 어리둥절 인공의 손을 보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뭡니까?”
“진짜 몰라서 물어? 악수하자고.”
“악수요?”
“잘해보자고!”
“아아, 잘해보자고요?”
용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인공의 손을 어정쩡하게 잡았다. 바로 그 순간 짓궂게 미소를 지어 보인 인공이 어금니를 깨물며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악! 으아악!”
용하는 단말마를 토하듯 두어 차례 비명을 질렀다.
“많이 아픈 것이냐?”
“형님! 장난이 지나치십니다.”
쥐어짜는 듯한 용하의 목소리는 듣기조차 민망했다.
“지나쳐? 뭐가 지나쳐? 이렇게 나약해서야 원. 내 말 잘 듣게. 그리 약한 모습으로는 절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걸세.”
용하는 아직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인공의 물음에 달리 반박할 만한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형편이 좀 나아져서였을까, 그동안 망각하고 있었다. 나약했기 때문에 망할 수밖에 없었던 나, 김용하의 후기 인생!’
비로소 깨달아서였을까, 용하는 곧 인공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나약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했거늘!”
“내일 견적 볼 것도 없이 무조건 전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습니다. 남주리 총무의 의견도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공 형님의 아우, 이 김용하가 그리 결정했으니 그렇게 할 것입니다.”
더없이 결연한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