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150
#닥터 플레이어 150화
‘세이틸 왕자가 왕위 후보로 여겨졌던 건 전적으로 라이프 공작 때문이었는데. 이제 끈이 떨어졌으니 보잘것없는 신세가 된 거지.’
심지어 세이틸은 일전 레이몬드를 해치려 고약한 음모를 꾸미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해 팔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때, 고집을 부려 레이몬드의 치료를 받지 않아 큰 후유증이 남은 상태였고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철저히 몰락한 것이다.
이제 세이틸은 누구도 따르지 않는 힘없는 망나니 왕자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페닌 남작의 위상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물론 라이프 공작은 레이몬드를 왕위 후보로 지지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레이몬드는 왕위 계승권 자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라이프 공작이 레이몬드를 어떤 식으로든 강력히 지지함은 분명했다.
또한, 레이몬드는 전쟁 영웅으로 병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도 받고 있다.
즉, 군부를 뒷배로 두게 된 것이다.
‘……더는 사생아라 무시할 게 아니야. 이 정도면 과거 세이틸 전하를 따르던 세력에 필적하지 않는가?’
물론 그렇다고 레이몬드를 지지하는 세력이 2왕자 카이른이나 3왕자 리머튼을 능가하는 건 아니었다.
유력 왕위 후보인 그들은 훨씬 더 많은 이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까.
하지만 두 왕자로서도 더는 레이몬드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레이몬드의 존재는 두 왕자에게도 분명한 ‘위협’이 되었다.
‘만약 페닌 남작이 정식 왕족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일부 귀족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어마어마한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다.
특히 그런 위협은 3왕자 리머튼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는 원래도 2왕자에 상대적으로 밀리는 이인자였던 데다, 이번 전쟁 때 거나하게 실책을 저질러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이번 실책으로 자질에 커다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는 거다.
‘빌어먹을.’
리머튼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형님, 레이몬드 놈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미리 화근을 제거해야 합니다.”
궁지에 몰리면서 그는 더욱 초조해졌다.
이대로 레이몬드를 놔두면 목덜미가 잡힐 것만 같았다.
반면, 2왕자 카이른은 여전히 여유 있었다.
오히려 리머튼을 도발했다.
“글쎄, 커다란 공을 세운 훌륭한 동생을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느냐?”
“형님.”
“어쨌든 내가 신경 써야 할 우선순위가 바뀌었군. 이제 너보다는 우리 강아지를 더 신경 써야겠어.”
“……뭐라고요?”
리머튼의 얼굴이 굳었다.
카이른은 빙글 웃음을 지었다.
“리머튼, 네놈보다는 우리 똥강아지가 훨씬 뛰어난 것 같으니 말이야. 천재라는 별명도 헛똑똑이인 너보다는 우리 강아지한테 훨씬 어울리는 것 같지 않으냐?”
“형님!”
리머튼은 얼굴이 빨개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둘의 대화를 지켜본 카이른의 수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리머튼 전하께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카이른은 답했다.
“우리 강아지가 워낙 훌륭하게 자라서 말이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싸늘한 미소였다.
“이제 슬슬 짓밟을 때가 되었어.”
* * *
이후 양국은 공식적인 정전협정을 맺었다.
세부적인 협약 사항은 실무자들이 만나 협의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골자는 이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정전협정에 으레 들어가는 문구였지만 이번에는 다소 달랐다.
마카엘 3세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말씀처럼 양국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해. 그게 쓸데없는 국력 낭비를 줄이고 양국이 번영할 길이야.’
스승님.
레이몬드를 뜻하는 말이다.
얼떨결(?)에 마카펠 3세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 된 레이몬드였다.
그렇게 정전협정은 큰 소요 없이 마무리되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베라드 대공의 사망이었다.
레이몬드는 소고기 먹는 상상을 하다가 놀라 물었다.
“감옥에서 죽었다고?”
“네, 형님. 밤중에 급성 쓰러짐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급성 쓰러짐. 심장마비를 뜻하는 말이다.
라오가 답했다.
“천벌을 받은 듯합니다.”
하지만 레이몬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갑자기?’
“혹시 타살의 흔적은?”
“전혀 없다고 합니다. 경비들이 잠깐 졸음에 빠졌을 때 급성 쓰러짐이 와 심장을 움켜쥔 채 사망했다고 합니다.”
레이몬드는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었다.
‘독을 쓴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베라드 대공이 사용한 술수들 때문이었다.
베라드 대공은 여러 질병, 독을 이용한 수작을 부렸다.
그 수작들과 이번 베라드 대공의 죽음이 연관 있는 건 아닐까?
‘부검해 보면 조금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텐데. 확인해 볼 수가 없으니.’
베라드 대공이 그렇게 사망한 후 시체를 수도로 운송했는데, 성난 백성이 달려들어 시체를 산산조각 내 불에 태웠다고 한다. 죽어서도 벌을 받은 거다.
따라서 더는 확인해 볼 방법이 없었다.
‘심문을 통해 어떻게 그런 술수들을 알아낸 건지 확인하려 했는데.’
사실 처음 포로로 잡았을 때 물어봤는데, 베라드 대공이 워낙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심문을 통해 확인하려 했는데, 답을 들을 길이 없어진 거다.
단 하나 남겨진 단서는 이것.
‘마지막 순간, 베라드 대공은 ‘그들’이란 단어를 썼어.’
최후의 전투 이후, 포로로 잡혔을 때 베라드 대공은 반쯤 실성한 것처럼 횡설수설했다.
그때, 베라드 대공의 입에서 ‘그들’이란 단어가 나왔었다.
‘누가 베라드 대공을 도와준 거지?’
레이몬드는 고개를 저었다.
‘뒤락 후작께 말해두었으니 알아서 알아내 주겠지. 으으, 난 더 얽히지 말고 이만 빠지자.’
베라드 대공의 활동 영역은 드로튼 왕국이었다. 그러니, 혹시나 있을지 모를 그의 뒷배를 캐는 건 드로튼 왕국 사람들의 몫이었다.
워낙 뛰어난 뒤락이니 훌륭히 뒤를 파헤쳐 주리라.
무엇보다 소심한 레이몬드는 이런 흉흉한 일에 깊게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그 악독한 베라드 대공에게 뒷배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이런 일은 높은 분들이 알아서 하고, 나는 힐러로서의 본분에 충실해야지.’
원래 사람은 각자마다 맡은 영역이 있었다.
그는 일개 치료사.
음모 같은 걸 알아내는 건 그의 영역이 아니었다.
대륙 최고의 힐러가 되어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매진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소고기 먼저 먹자!’
* * *
이후 레이몬드는 수도로 귀환했다.
수도 백성의 열렬한 환호를 다시 한번 받은 후 꿈에 그리던 저택에 도착했다.
‘드디어 집이다! 당장 소고기 파티야!’
레이몬드는 감격 어린 얼굴을 하였다.
“한슨, 소고기 사오렴. 부위는 등심 위주로. 안심, 특수 부위도 충분히 사고. 아, 야채는 사오지 마.”
“네, 알겠습니다!”
“야채는 왜 빼요?”
“야채 좋아요!”
크리스틴과 린든이 발끈 반박하였으나, 한슨이 근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뭘 모르시는군요. 마스터께서는 전쟁으로 약해진 우리의 면역력을 높여주시려고 일부러 소고기 파티를 여는 것입니다. 물론 야채가 없으면 다소 목이 메긴 하겠지만, 우리의 면역력을 위하는 마스터의 진심을 생각해 참는 것이 좋겠습니다.”
“…….”
크리스틴은 입을 다물었다.
‘저거 진짜야?’
그녀는 레이몬드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만, 소고기 건에서만큼은 가끔 의구심이 들었다.
‘한슨 선배 미워, 히잉.’
린든도 마찬가지 마음이었지만, ‘지옥 교관’ 한슨이 무서워 뭐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는 한슨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다.
그때, 엘무드가 물었다.
“한슨 경, 소고기가 기사의 용기에도 도움이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스터께서 말씀하시길 소고기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고 하였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면 저도 야채 없이 소고기만 먹겠습니다!”
엘무드는 앞으로 매일매일 소고기를 먹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그 소고기 파티는 뜻밖의 이유로 무산되었는데, 레이몬드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온 동네의 환자가 몰려온 것이다.
“기다렸습니다, 힐러님!”
“제 아들을 치료해 주세요, 왕자님!”
“힐을 받았는데 효과가 없어서……! 목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전쟁 중 페닌 치료원은 휴업 상태였다.
그래서 수도 사람들은 레이몬드만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소고기 파티해야 하는데? 오늘만 기다렸는데?’
레이몬드는 울상을 지었다.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소고기 먹는 날만 기다렸는데, 환자들이 몰려오다니.
하지만 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워낙 오래 자리를 비웠던 탓에 심각한 상태의 환자가 여럿 보였다.
‘크흑, 어쩔 수 없지. 소고기 파티는 급한 환자 먼저 치료하고 할 수밖에.’
그렇게 시작한 치료는 몇 날 며칠 동안 이어졌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데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생겼다.
‘의무병’들이 찾아온 것이다.
전쟁 당시 레이몬드는 하급 힐러들에게 기초 의술을 가르쳐 의무병으로 활용했다.
이후 전쟁이 끝나며, 치료 병단은 해산되었는데, 뿔뿔이 흩어진 의무병 중 상당한 인원이 레이몬드를 찾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날 따르고 싶다고요?”
“네, 레이몬드 님을 저희의 마스터로 섬기고 싶습니다!”
힐러들은 마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레이몬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숫자가 무려 30명이나 되었다!
의무병으로 있었던 이들 대부분이 찾아온 것이다.
“환자를 위하는 왕자님의 마음에 감동했습니다! 저희도 왕자님처럼 환자들을 위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레이몬드는 미처 예상치 못한 사태에 고민에 빠졌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너무 많은데.’
기존 제자들까지 합하면 40명에 육박한다.
‘물론 앞으로는 더욱 많은 인원이 필요하겠지만, 저 많은 힐러를 어떻게 먹여 살려?’
레이몬드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힐러는 귀한 인력.
하급 힐러도 몸값이 비싸다.
40명이나 되는 힐러를 먹여 살릴 돈이 없었다.
‘무엇보다 믿을 만한 자들인지도 모르겠고.’
환자를 위해 살겠다고 왔지만, 글쎄.
욕심만 가득해 보이는 이도 많았다.
대충 의술을 배워 한탕 하자는 욕심 말이다!
‘물론 돈을 바라는 게 손가락질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나도 돈 좋아하고.’
그래도 환자보다 돈이 우선이 되면 문제가 된다.
그런 이는 필연적으로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힐러가 된다.
이전 메이플 치료원의 칸톤 남작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레이몬드는 자신의 손으로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힐러를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의술은 부작용이 있는 치료술. 올바르지 못하게 사용하면 환자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치게 돼. 제자를 받는 건 신중해야 해.’
그때, 한슨이 나섰다.
“마스터, 이 문제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응?”
“모두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습니까? 페닌 치료원의 첫 번째 수제자 한슨입니다.”
“하, 한슨 님?”
착각일까?
한슨이 앞으로 나서자, 하급 힐러들의 얼굴에 긴장이 서리는 듯했다.
오히려 레이몬드를 대할 때보다 훨씬 더!
한슨은 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환자를 위한 삶을 살고자 왔다고 하였습니까?”
“…….”
“대답해 보십시오. 정말 환자를 위한 삶을 살고자 마스터를 찾아온 겁니까?”
“그, 그렇습니다.”
하급 힐러들의 대답에 한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를 위하는 길은 인고의 길입니다. 괴롭기 짝이 없고, 때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 험난함은 기사들이 걷는 혈로(血路)에 비해 결단코 못 하지 않은 터! 여러분은 마스터와 함께 그 가시밭길을 함께하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