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 Player RAW novel - Chapter 32
#닥터 플레이어 32화
하지만 별다른 감정의 흔적은 읽을 수 없었다.
오든은 그저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탁한 술을 마셨다.
“휴스톤 왕가에 그런 분이 계시다니 말이야. 난 깜짝 놀랐어.”
“그런데 그분은 사생아라 왕자님이 아니라며?”
“사생아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전에 와서 난장만 부리고 갔던 다른 진짜 왕자님들보다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한데.”
“맞아! 진짜 왕자고 나발이고, 그분만큼 왕자님에 어울리는 분도 없으셔.”
사람들은 혹시나 다른 이가 들으면 경을 칠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뱉었다.
“어쨌든 요즘 그분 덕분에 사는 맛이 나.”
“맞아. 레이몬드 경은 우리의 희망이야.”
“관리관으로 지금 있는 멧돼지 같은 놈 말고 레이몬드 경 같은 분이 우리 베이 구역을 이끌어주면 참 좋을 텐데.”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던 사람들은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레이몬드 경의 이름으로 모두 건배!”
“건배!”
사람들은 흥겹게 레이몬드의 이름을 외치며 잔을 들었다.
“어이, 형씨들. 형씨들은 모하슈? 같이 건배 안 하고?”
“레, 레이몬드 만세.”
“레이몬드? 감히?”
“레, 레이몬드 님 만세.”
얼떨결에 같이 건배하게 된 갈먼 공작이었다.
“……그만 나가보지.”
“네, 전하.”
어느 테이블이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더 들을 이야기가 없었다.
‘이래서 베이 구역의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던 것이구나.’
갈먼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왜 베이 구역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랐던 것인지.
레이몬드 때문이었다.
그의 존재가 이곳 베이 구역 빈민들에게 따뜻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버티기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잘하고 있었다니.’
아니, 고작 잘한다는 표현으로 레이몬드가 한 일을 표현할 수 있을까?
감탄을 금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했다.
“레이몬드의 명성이 높군요.”
갈먼은 조심스럽게 오든의 반응을 떠봤다.
“…….”
오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래 봤자 고작 치료사의 일일 뿐이다.”
갈먼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지나치게 냉랭한 답변이라고 느낀 것이다.
‘레이몬드가 해내고 있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분이 아닌데?’
물론 치료사의 일일 뿐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껏 베이 구역에서 그 정도라도 해낸 인물이 있던가?
‘누구도 없지.’
뭐랄까? 상대가 레이몬드라서 일부러 더 박한 평을 내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왠지 삐뚤어진 마음이 되어 갈먼은 답했다.
“전하의 말씀처럼 고작 치료사가 누구보다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어서 그렇지.”
“…….”
“위대한 전하로서 훌륭한 일을 해내고 있는 신하를 치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하. 레이몬드를 말하는 거다.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으니 레이몬드는 이제 국왕 오든의 신하라고 할 수 있었다.
레이몬드의 치료원에 들르자는 뜻이었지만, 오든은 답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정말 레이몬드를 자신의 핏줄로도 여기지 않는 건가?’
갈먼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반응이 없으니 헷갈렸다.
‘하지만 레이몬드를 처음 데려온 날의 모습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당시 오든은 죽어가는 레이몬드의 모습을 보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벌써 15년이 넘은 일이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며 오든의 가슴속에 레이몬드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지.”
“……네, 전하.”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골목 안에서 다급한 비명이 들렸다.
“사, 살려…… 흡!
“……!”
그 비명을 듣고 오든은 인상을 찌푸렸다.
“강도인가 보군. 아니면 더 흉악한 놈들이든지.”
강도든, 그보다 더 흉악한 놈이든. 이곳 베이 구역에서는 언제든지 출몰할 수 있는 놈들이었다.
“나설 겁니까? 위험합니다.”
“누가?”
“…….”
갈먼은 입을 다물었다.
저 골목 안의 나쁜 놈이 소드 마스터 흉악범이라도 되지 않는 한 오든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로열 나이츠를 대동하는 건데.’
결국, 갈먼은 오든을 말리지 못했다.
애초에 경호를 신경 쓸 걸면 이렇게 둘만 나와서는 안 됐다.
“자네는 위험하니 이곳에 있도록. 금방 처리하고 오지.”
“……저는 약골인지라. 실례하고 있겠습니다.”
오든이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목불인견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15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녀를 남자 세 명이서 겁탈하려고 있었다!
“어이, 형씨. 괜히 끼어들지 말고 저리 가쇼.”
“아니면 형씨도 같이 재미 좀 보려고?”
킬킬대며 떠드는 것을 본 오든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살려둘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의 손이 번뜩였다.
파앗!
피가 튀어 올랐고, 막 바지를 벗으려던 놈의 목이 튀어 올랐다.
“허억!”
“기사?!”
놈들의 안색이 하얘졌다.
“자, 잠깐! 움직이면 이년의 목숨은!”
그들은 다급히 소녀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놈의 목에 구멍이 뚫렸다.
“꺄악! 살려주세요!”
난무하는 피에 소녀는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며 오든에게 뛰어왔다.
“뒤로 가 있도록.”
기사들의 왕답게 오든은 소녀를 지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한 명 남은 불한당이 소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검격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파앗!
오든의 곁으로 도망쳐 들어온 소녀가 갑작스레 단도를 내찌른 것이다.
‘암살자?’
예상치 못한 공격에 오든은 흠칫했다.
방금 벌벌 떨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듯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거리도 바로 옆이었고, 방향도 오든이 반응하기 어려운 각도였다.
심지어 단도에는 짙은 마나까지 맺혀 있었다.
최상급의 암살자가 분명했다.
‘처음부터 날 노린 함정이었군.’
오든은 짧은 순간, 상황을 판단했다.
불한당도 한패였는지, 어수룩한 모습을 집어 던지고 강렬한 기세로 오든에게 쇄도했다.
암살자가 아니라 기사 출신인지 달려드는 기세가 보통 강맹한 게 아니었다.
더구나 암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척을 죽이고 대기하고 있었던 건지, 골목 옆 건물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최상급 암살자의 암습부터, 기사의 돌격, 암기까지.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닐 수 없었지만, 오든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날 우습게 봤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오든의 검이 다시금 번뜩였다.
“아아악!”
오든의 쾌검에 단도를 내찌르던 소녀의 손목이 잘려나갔다!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오든의 몸이 절묘하게 비틀렸고 암기는 헛되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정면에서 쇄도하는 불한당을 위에서 아래로 베어버렸다.
“괴, 괴물…….”
제대로 반응도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한 불한당은 외마디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이익!”
소녀는 한쪽 남은 팔로 다시 암습을 시도했으나, 그 발악은 가볍게 무산되었다.
퍼억!
오든은 소녀의 배를 밀어 차 버렸다. 북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소녀는 왈칵 피를 토하고는 바닥에 축 늘어졌다.
이제 마지막 남은 암살자마저 가볍게 처리하려는 순간이었다.
피시시!
갑자기 안개가 피어올라 눈 깜짝할 사이에 골목 전체를 뒤덮었다.
연막 마법이었다!
‘의미 없는 수작을 벌이는군.’
오든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상대의 의도야 뻔했다. 연막으로 시야를 어지럽힌 다음 어떻게든 암습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의미 없는 수작이었다.
파앗!
소녀와 암살자가 뛰어들었다.
오든은 가만히 기척을 느껴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끝이다.’
배후를 캐기 위해 죽여서는 안 되니, 정확히 상대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곳에 검을 찔러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쿨럭.”
갑작스레 기침이 터져 나온 것이다!
숨을 참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들어온 입자에 기도가 자극된 탓이다. 단순한 연막이 아니라, 기도를 자극하는 성분이 섞여 있었다.
‘내가 기침병을 앓고 있는 걸 알아내고 일부러 이런 연막을?’
그럴 수도 있었다.
오든은 급히 기침을 참으며 검을 내질렀다.
푸욱!
검이 크게 휘둘러지며 암살자의 목을 베고 소녀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예상치 못한 기침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크게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던 지라 생포할 여유가 없었다.
적을 척살했지만, 오든은 안색을 굳혔다.
‘이런.’
팔목에 상처가 나 있었다.
기침 때문에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을 때 당한 것이다.
찰과상에 가까운 작은 상처였지만, 문제는 상처의 정도가 아니었다.
“독이군.”
상처 주변이 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독이 분명했다. 그것도 치명적인 독.
“전하! 괜찮으십니까?!”
마침 골목 밖에서 갈먼이 뛰어들어왔다. 그는 난장판이 된 주변을 보고 안색이 하얘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암살자들이었다. 어떤 놈이 보낸 건지는 더 확인해 봐야 알 것 같군.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하, 설마?”
창백한 오든의 안색을 본 갈먼은 눈을 크게 떴다.
오든이 독에 당하다니!
어마어마한 대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괜찮으십니까?”
“헬리엔 백작의 힐을 받으면 괜찮을 것 같긴 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든이 소드 마스터란 점이다.
평범한 이들에 비해 훨씬 강대한 체력을 지녔으니, 트리플 A급 치료사 헬리엔 백작의 힐을 받으면 극독이라도 이겨낼 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군.’
오든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처 입은 팔이 파랗게 변해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이 팔은 잘라야 할지도.’
고작 이런 독 따위에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괴사가 시작된 팔이 문제였다.
지금 당장 처치를 받지 않으면 팔 조직에 큰 손상을 입을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잘라내야 할 가능성도 있었다.
‘최대한 빨리 왕성으로 가야겠군. 문제는 시간이군. 왕성까지 거리가 있으니.’
그런데 그때, 갈먼이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팔의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우선 근처에서 응급 처치를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치료를 받으면 좋겠지만, 이곳 베이 구역에는 치료를 받을 만한 곳이 없지 않은가?”
“아니, 한 군데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오든의 머릿속에 치료원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곳 베이 구역에도 치료원이 하나 있었다.
“페닌 치료원. 레이몬드의 치료원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 * *
똑. 똑.
“네, 나갑니다.”
레이몬드는 문을 열고 나타난 인물을 보며 놀란 얼굴을 하였다.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의 상태가 딱 봐도 안 좋아 보였던 것이다.
마법 때문에 레이몬드는 둘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소처럼 최대한 환자를 위하는 얼굴로 친절하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