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Purity RAW novel - Chapter 19
18. 뜻밖의 방문자
“605호 환자, 두 시간 후에 플로이드(수액-링거액) 교체해 주시고요.”
“네, 선생님.”
지원은 병동 스테이션 너머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리고 돌아섰다.
“어, 한 선생.”
그녀는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수술복 차림의 성민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경훈이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지원. 너 오늘 아침에 아뻬(충수돌기염-맹장염) 수술 집도했다며?”
성민의 질문에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구는 한 번도 하기 힘든 걸 넌 벌써 몇 번째냐? 역시 난 놈은 난 놈이야. 너, 이러다 나보다 수술 더 많이 하는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요. 전공의 1년 차이가 얼마나 넓고 깊은데요.”
“그지? 그렇지? 맞아. 아무리 그래도 넌 내 후배지. 암, 그렇고말고. 그나저나, 두 사람은 언제 결혼하는 겁니까?”
성민이 경훈을 보며 물었다.
“조만간.”
“맨날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날을 잡으세요, 날을.”
지원과 경훈의 눈길이 동시에 성민을 향했다. 경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그러는 넌?”
“제가 뭘요?”
“넌 왜 날은 안 잡고 애부터 가진 건데?”
그러자 성민이 배시시 웃었다.
“헤헤, 그러게 말입니다. 아, 저도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말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지원과 경훈은 서로를 보며 어이없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성민이 드디어 김해인 관리 하에 있는 어장을 접수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어장 접수와 동시에 김해인을 임신시켜 버린 것이 문제였다. 며칠 전,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하고 온 해인이 울며불며 성민을 때리면서 ‘5주래! 어쩔 거야!’ 하며 원망하는 소리를 의국에 남아 있던 전공의들이 다 들었다. 그날 이후로 성민은 김해인의 어장을 한입에 접수해 버린 것이다.
“아, 그래도 제가 선배님보다는 낫죠. 순서가 좀 바뀌어서 그렇지. 하하. 이게 다 영규 선배 탓입니다. 영규 선배가 잘못된 선례를 남기니까 저같이 순진한 후배도 따라가는 거죠. 안 그렇습니까?”
“안 그렇다, 자식아.”
경훈이 성민의 머리통을 갈기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스탑!”
어디선가,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세 사람의 눈길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눈을 가늘게 좁힌 해인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해인이 성민의 앞을 턱하니 가로막더니 짐짓 경훈을 당돌하게 올려다보았다.
“선배님, 이 사람 이제 곧 아빠 됩니다.”
경훈이 피식 웃었다.
“아, 미안. 그랬지? 내가 적응이 안 돼서 깜박했다.”
지원이 보기엔 해인은 전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병원 내에 소문을 퍼트리는 것도 그녀 자신이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스스로 임신했다는 걸 숨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해인은 당당하게 성민을 돌아보며 웃었다.
“선배님, 수술 끝나셨어요?”
“어? 어.”
“그럼 나랑 같이 산부인과 가요.”
“어? 왜? 어디가 안 좋아?”
성민이 놀라서 묻자 해인이 애교 있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배가 살짝 뭉치는 것 같아서 초음파 한 번 보려고. 사실은 오늘쯤 가면 아기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거래서.”
“진짜?”
해인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성민이 해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럼 빨리 가보자. 선배님, 저 잠깐 산부인과에 다녀오겠습니다.”
경훈이 대답도 하기 전에 성민은 해인을 데리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지원과 경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저 두 사람, 진짜 외계인 같아요. 어쩜 저렇게 뻔뻔할까?”
지원의 말에 경훈이 인상을 썼다.
“난 저 둘이 부럽다.”
“네?”
그녀가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빨리 아빠 되고 싶다.”
“기가 막혀. 그럼 결혼하기 전에 애부터 갖자고?”
“그래도 좋고.”
“선배.”
지원이 기가 막히는 듯 눈을 크게 뜨자 그가 갑자기 성질을 냈다.
“그러니까 빨리 우리 어머니 보러 가자고.”
“내가 안 가고 싶어 안 가나? 시간이 안 되는 걸 어쩌라고? 이틀 전까지만 해도 중환자실 근무 서느라 집에도 잘 못 들어간 거, 알잖아요.”
“알아. 내가 그 인고의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데 그걸 잊겠냐. 그런데 이젠 병동 근무로 돌아왔으니까 시간 되지? 날 잡는다?”
지원은 일부러 무게 잡는 그를 보며 웃었다. 지난 두 달 중, 처음 한 달은 그가 바빴다. 간이식 파트로 다시 돌아온 그는 벌써부터 미라클 팀이 수술하는 수술 방에는 전부 들어가느라 이사 갈 집도 그녀가 대신 알아보러 다녔다. 그 후 한 달간은 그녀가 바빴다. 중환자실 근무를 서는 한 달 동안 지원은 그가 이사를 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인고의 세월은 서로가 시간을 맞추지 못해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들었던 두 달간을 말하는 것이다.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도 속으로는 해인이 부럽던 참이었다. 먼저 임신을 한 것조차 흠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경훈이 서두르는 것만큼 지원도 빨리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가능한 시간 잡아요.”
“오케이.”
“선생님.”
스테이션 쪽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지원과 경훈의 눈길이 동시에 스테이션 방향으로 향했다. 이 간호사가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한 선생님, 여기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이 간호사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지원은 스테이션 앞에 서 있는 여학생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어느 학교인지는 모르지만 교복 차림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올린 얼굴이 제법 예뻤다.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도 뚜렷했다. 열여덟? 열아홉?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그 여학생은 지원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학생이야?”
경훈이 묻는다.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보는 아이예요.”
경훈은 휴게실의 한구석 테이블에 마주 앉은 지원과 여고생을 잠시 바라보았다. 어쩐지 닮았다. 생김새는 그렇게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은데 차분하게 앉아 있는 태도며 차가운 얼굴 표정이 마치 한지원의 여고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궁금했다.
그녀가 말한 형제관계는 그게 다였다. 여동생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경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는 것이 있었다.
[아버지와 재혼한 새어머니가 저한테 아파트를 마련해 줬어요. 학비도 대주고 생활비도 보내 줬어요. 그쪽 가족이 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아버지 쪽…… 그래,
그쪽도 재혼을 했으니 아이가 있을 것이다.
경훈은 지원과 마주 앉은 여고생이 그쪽 식구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원의 아버지 쪽 이복동생인 것이다.
“많이 망설였어요.”
지원은 앞에 앉아서 차분하게 말하는 아이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다시 말했다.
“얼마 전에 알았어요, 나한테 이복 언니가 있다는 거.”
이 아이가 내 이복동생이란다. 그러고 보니, 새어머니를 많이 닮았다. 새어머니도 얼굴이 저렇게 하R었다. 도도하게 느껴지는 얼굴 생김새까지.
몰랐었다.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몇 번 만났던 새어머니에게 내 동생이 있냐고 묻지도 않았었다.묻고 싶지 않았었다. 날 가족으로 받아 주고 싶지 않다는 새어머니에게 그런 궁금증도 생기지 않았었다.
[난 지금 우리 가정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다. 아이들은 몰라, 네 아버지가 재혼이라는 거. 난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알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알리고 싶지 않아. 그 애들은 너무 어려. 혼란스러울 거야.]새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얼마나 부러웠던가. 새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들이, 그녀의 이복동생들이 받고 있는 사랑이 얼마나 부러웠었던가.
지원은 그날, 새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었다. 그래서 당신이 주는 학비와 생활비를 받는 조건으로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당신이 지키고 싶어 하는 가정의 평화, 아이들, 모두 지켜 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새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아이들 중 하나가 그녀를 찾아왔다.
“어머닌, 아시니?”
지원은 궁금했다, 새어머니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당신이 지키고 싶어 했던 평화에 금이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언니, 찾아온 거요? 아뇨, 몰라요.”
언니…… 어린아이라서 그런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지는 그 호칭이 낯설었다.
“어떻게 알았어?”
“언니 존재요? 사실은 안 지 좀 됐어요. 1년쯤.”
잠시 말을 멈추더니 아이는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1년 전 봄에 여기 왔었어요.”
지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냥 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멀리서 보고 돌아갔어요. 말 걸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나, 싫어할 것 같기도 하고…….”
1년 전…… 레지던트가 되고 얼마 안 되어 많이 바쁘고 정신이 없을 때, 이 아이가 왔었다. 멀리서 내 얼굴만 보고 갔었다고 한다.
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머니 쪽 남동생인 찬호에게도 이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었다. 이상하게 뭉클하고 가슴이 저린다.
“우연히 아빠 지갑을 보고 언니를 알았어요.”
지원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여자 아이는 눈치 채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지갑 안쪽에 예닐곱 살쯤 되는 여자 아이 사진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 사진은 아니었어요. 낡고 오래된 사진이었어요. 궁금하더라고요. 아빠한테 물어봤는데 그때 표정이 무지 이상했어요. 느낌상 뭔가 있다고 생각했고요. 주민등록 초본 떼보고 알았어요. 아빠와 엄마가 재혼이라는 거, 아빠한테 나 말고 다른 딸이 있다는 거. 그 후로 궁금해서 미치겠더라고요. 언니가 어디서 뭘 하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죽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엄마 휴대폰을 뒤졌는데 언니 이름이 있었어요. 거기에 병원 전화번호도 있고. 그래서 찾아왔었어요.”
여고생의 호기심다웠다. 지원은 아이의 말을 전부 들은 후 조용하게 말했다.
“어머니, 싫어하실 거야. 다신 찾아오지마.”
“내가 찾아와서 싫어요?”
지원은 맞은편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이가 다시 말한다.
“내 이름 알아요? 모르죠? 우리 엄마가 그것도 안 가르쳐 줬죠? 나, 지수예요. 한지수.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인 남동생도 있어요. 걔 이름은 지환이에요. 한지환.”
이상하다. 어머니 쪽 남동생의 이름은 찬호다. 그런데 아버지 쪽 동생들의 이름은 모두 ‘지’로 통일되어 있다. 마치 지원의 동생임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 엄마가 나빴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지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말이야?”
“우리 엄마가 언니, 그렇게 외면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왜 그런 말을 해? 그건 어른들 문제야.”
“언닌 그 어른들 이기심에 희생된 거고요.”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아이를 보며 지원은 할 말을 잃었다. 지수, 이 아이는 자신과 닮았다. 고집스럽고 당당한 것이. 할 말 참지 못하고 다 하는 것까지.
“돌아가. 가서 공부나 해.”
지원은 일어섰다. 죄짓는 기분이었다. 약속을 어기는 기분이었다. 새어머니께 당신 가정의 평화 지켜 주겠다고 하고 그동안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하는 엿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빤 몰랐대요.”
자리에서 일어서던 지원의 몸이 순간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천천히 지수를 향해 움직인 눈길은 황망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수가 지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다 꾸민 거래요. 언니가 언니네 엄마랑 못 살고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간 것도 아빤 몰랐대요. 엄마랑 우리 할머니가 짜고 거짓말한 거래요. 아빠는 언니가 계속 언니네 엄마랑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대요.”
“말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말 돼요. 언니네 외할머니가 우리 할머니한테 연락했을 때 아빠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언니 못 받아 준다고 그랬대요. 그거 전해 들은 우리 엄마가 언니를 따로 만난 거고요. 그동안 언니 학비 대주고 생활비 대주고 하면서 자기 양심은 면제받고 있었던 거예요. 아빠를 내내 속이면서 언니를 외롭게 내버려 뒀던 거, 다 우리 엄마가 한 짓이라고요!”
병동 건물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계단은 전공의들이 자주 이용하는 장소였다. 각 층마다 난간이 만들어져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나마 잠시 틈을 내어 바람을 쏘일 수 있는 공간이라 전공의들이 자주 애용했다.
그 조용하고 한적한 계단에 지원이 앉아 있었다.
새벽 1시. 이곳을 자주 이용하는 전공의들도 모두 퇴근하거나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원은 계단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있을 수 있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지원은 난간에 기대서 있는 경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워서 아무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녀의 심정을 눈치 챈 그는 그저 옆에 있어 주기만 하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릴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문득 그가 뒤를 돌아본다. 지원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 추워?”
침묵이 어둠만큼이나 짙게 깔린 공간에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원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버지…… 만나 보고 싶어?”
지원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복동생의 등장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던져 주었다. 전처의 딸이 재혼한 가정에서 잘 자라고 있는 줄 알고 혼란만 더해 줄까 봐 연락도 하지 못했다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새어머니는 오랜 시간 속여 왔다. 그리고 지원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부모, 두 사람 모두에게 외면 받는다는 상처는 겪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두려움이 사람을 얼마나 움츠러들게 하고 공격적으로 변하게 하는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지원은 외로웠었다. 두려웠었다. 사방에 벽을 쌓아 올리고 그 벽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물고 할퀼 정도로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었다.
최경훈을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를 만나고 혼자 좋아하고, 멀리서 보기만 하면서 서서히 무너져 가는 벽을 지키려 했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행복했다. 자신을 버린, 또는 몰랐다는 이유로 외면한 부모가 다시 자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난다.
“그냥…… 이대로 지내고 싶어요.”
지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다. 지원은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었다.
“당분간은 그냥 지낼래요.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내가 더 용감해진 후에 그때라면 몰라도…….”
그래, 당장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모르고 살아온 세월도 죄라며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엄마하고 아빠하고 많이 다퉜어요. 아빤 엄마를 용서할 수가 없대요. 그런데 또 엄마가 불쌍하대요. 아빠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었는데 좋은 조건 전부 마다하고 아빠를 선택해서 나쁜 역할 하게 됐다고 안쓰럽대요. 그런데 난 엄마가 용서가 안 돼요. 아빠 과거 모르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아빠랑 결혼하면서 왜 언니는 못 받아들인 건지…… 우리 엄만 너무 이기적이었어요.]지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원이 아빠를 만나 주고 자기 엄마를 용서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돌이켜 보면 새어머니는 지원에게 최선을 다했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 주지만 않았을 뿐이지, 당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충분히 지원을 보살펴 주었다.
돈만 해결해 준 것도 아니었다. 한때, 공부고 뭐고 다 포기하려는 지원이 다시 공부할 마음이 생기도록 자극을 준 것도 새어머니였었다.
[너, 못 되고 못 살아도 누구 한 명 가슴 아파할 사람도 없잖아. 그런데 누구 가슴에 비수를 꽂겠다고 이렇게 살아? 스스로에게 떳떳해져야 다른 사람 원망도 할 수 있는 거야. 너, 내가 원망스럽지? 밉지? 그럼 오래 괴롭혀. 네가 공부하는 동안 난 계속 널 뒷바라지할 거고 그럼 난 계속 널 봐줘야 하니까. 네가 당당해지면 너 가슴 아프게 한 사람들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거야.]따뜻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의 도리는 했었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으면서 바라기만 했던 친어머니보다 나았었다. 어쩌면 그래, 어쩌면 나는 그분을 의지했었는지도 모른다. 묵묵히 나를 뒷바라지했던 새어머니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의지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경훈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움켜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지원은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잠시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던 그가 갑자기 말했다.
“아까 산부인과에 갔던 성민이가 거기서 문희를 만났단다.”
지원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문희 선배가요? 산부인과에?”
“그래, 남편하고 같이.”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다. 남편하고 같이 산부인과를 방문했다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 가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임신.
“문희 선배가……?”
지원이 말끝을 줄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임신한 모양이야. 성민이 보기에 꽤 편안해 보이더란다. 문희는 완전히 행복해 보이기보다는 얼떨떨하고 당황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남편이 아주 기뻐하더란다. 문희는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지만 남편이라는 사람은 문희를 아주 아끼는 것 같더란다.”
그의 목소리는 개운한 듯 맑았다. 그랬을 것이다. 끝이라고 매정하게 끊어냈지만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던 여자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래야 두 발 뻗고 완전히 잊을 수 있을 테니까.
지원도 뭔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꺼지라고 막말을 해놓고도 늘 마음 한 켠 찜찜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 찜찜함도 완전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이네요.”
“그래, 잘됐어.”
지원은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짓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이 사람만으로도 충분했다. 지나간 과거를 들춰내서 원망과 미움을 또다시 끄집어내기 싫다. 아픈 과거는 그냥 이대로 흘려보내고 싶다.
지원은 밤하늘에 환하게 걸린 달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걱정 말라고, 이젠 행복하라고 웃는 듯한 달빛이 그녀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청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지원은 점심으로 비빔국수를 준비하며 거실을 청소하고 있는 경훈을 훔쳐보았다.
그러니까 누가 오랬냐고 반문해도 그는 구시렁거리며 툴툴거렸다. 경훈은 바로 옆 동에 집을 얻어 놓고 거의 살지도 않는다. 거의 모든 일과를 병원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지원의 집에서 살았다. 그가 이사한 집은 일주일에 한 번 가서 청소나 할까, 말까 한 이상한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지원은 오지 말라는데도 굳이 오프 날만 되면 잽싸게 달려오는 경훈을 생각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어젯밤에도 여기서 잤다. 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
“다음 주 수요일에 우리 엄마 오신다.”
어느새 청소기를 다 돌리고 주방으로 온 그가 그녀를 뒤에서 안으며 말했다. 지원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진짜?”
“어.”
“서울로 오신다고요? 우리가 찾아뵙기로 했잖아.”
“그랬지.”
그가 손을 쑥 뻗어 그녀가 썰어 놓은 오이를 하나 집어서 입에 쏙 넣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으며 하던 말을 계속했다.
“서울에 볼일 있으시대.”
“무슨 볼일?”
“모르지. 어쨌든 오신다기에 말씀드렸어. 소개시킬 사람 있으니까 시간 좀 내시라고.”
그가 그녀의 목에 코를 박으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바스 바꿨어? 냄새가 다르네?”
지원은 간지러워서 목을 움츠렸다.
“바꾸긴 뭘 바꿔요. 똑같은 거 썼구만.”
“아냐. 바뀐 것 같아. 향이 다르다니까.”
그러면서 괜히 코를 문질러댄다. 그러더니 또 혀를 쏙 내밀어 그녀의 목을 쓰윽 핥았다.
“윽.”
지원은 간지럽다며 그의 머리를 손으로 밀었다. 하지만 그는 킥킥, 웃으며 그녀를 더 꽉 안았다.
“정말 간지러워.”
자꾸만 파고드는 남자의 얼굴을 밀어내면서도 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더듬더듬 가슴을 움켜잡는 그의 손길이 싫지만은 않은 듯 쿡쿡,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딩동.
그 순간, 두 사람의 놀란 눈길이 동시에 인터폰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누구지?”
경훈이 먼저 말했다. 지원은 고개를 저었다.
“올 사람 없는데.”
“내가 나가 볼게.”
그가 주방을 나갔다. 지원은 입고 있던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그를 뒤따라 나갔다. 경훈이 인터폰의 작은 화면에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인상을 썼다. 그러다가 전화기를 들고 물었다.
“누구십니까?”
지원은 이상한 느낌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무심코 눈길을 돌려 화면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이 커졌다.
“누구세요?”
상대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경훈이 다시 묻는다.
“됐어요, 선배. 아는 사람이야.”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누군데?”
순간 수화기에서 차분하고 고상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한지원 씨 집 아닌가요?
경훈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가 그녀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맞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수화기를 인터폰에 걸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원은 조용히 말했다.
“새어머니예요.”
남자 목소리였다.
영혜는 집 안에 젊은 남자가 있다는 의외의 사실에 놀라서 서 있었다. 병원에 전화했더니 오프라서 출근하지 않았다는 말만 듣고 물어보지도 않고 찾아온 것이 잘못한 것 같아 한숨이 나왔다.
현관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이어서 지원이 나타났다. 영혜는 자신에게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는 지원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잘 있었니?”
영혜는 지원의 어깨너머로 집 안을 살폈다.
“손님 계신가 보구나.”
지원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현관에서 살짝 비켜섰다.
“들어오세요.”
“그래도 되겠니?”
“네, 괜찮아요.”
새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지원은 등 뒤로 현관문을 닫았다.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거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훈이 예의바르게 인사를 건네자 새어머니가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지원은 새어머니 앞에 슬리퍼를 내어 놓고 경훈의 옆에 섰다.
“들어오세요.”
“그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새어머니가 겨우 대답을 하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가 경훈을 다시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지원이 남자친군가 보네요.”
“예. 최경훈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가워요. 난…….”
“결혼할 사람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지원이 툭 끼어들었다. 영혜의 놀란 눈빛이 지원을 향했다.
“결혼?”
“네. 앉으세요.”
“어? 그, 그래.”
영혜가 놀라움을 겨우 진정시키고 소파에 앉자 경훈이 물었다.
“시원한 수정과가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아, 네. 좋아요. 고마워요.”
그가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 주방으로 멀어졌다. 경훈이 사라지자 새어머니의 눈길은 곧장 지원을 향했다.
“결혼하니?”
“네.”
“언제?”
“조만간요.”
“부모님께 인사는 드렸고?”
“다음 주에 드릴 거예요.”
지원의 막힘없는 대답에 영혜의 표정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그래, 그렇구나. 혹시 그쪽에서 네 사정을…….”
“괜찮아요. 저희 둘이 알아서 할 거예요.”
아예 다가설 틈조차 주지 않는 지원을 보며 영혜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거리를 두게 만든 건 자신이니까. 지원이 틈도 보이지 않게 벽을 쌓은 건 바로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거니까.
경훈이 수정과 두 잔을 내어 왔다.
“고마워요.”
영혜는 잔을 들어 맛을 보았다. 진하고 소담스러운 것이 아무 곳에서나 파는 것이 아니었다.
“집에서 담근 맛이네요.”
“예. 시골 어머니께서 손수 담그신 겁니다.”
영혜의 눈길이 밝고 잘생긴 경훈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어두운 그늘 같은 건 없어 보였다. 평범한 집안에서 밝게 잘 자란 청년 같았다. 예의도 있어 보이고 허우대도 멀쩡하고 말투에 자신감도 배어 있는 것이 가족들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집 아들 같았다.
반면에…….
영혜의 눈길이 경훈의 옆에 앉아 있는 지원에게로 향했다.
“좋아 보이는구나.”
영혜는 진심으로 말했다.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던 지원의 얼굴이 많이 밝아 보였다. 어릴 때의 상처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진 듯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을 대하는 거부감 어린 태도는 여전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지원이 어서 본론을 말하라는 듯 재촉하자 영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원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안다는 듯 묻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이 사람도 다 알아요. 그러니까 말씀하세요.”
지원이 그렇게 말했지만 경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지원은 다시 말했다.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그럼, 주방에 가서 육수 끓는 거나 봐요.”
멀리 가지 말고.
지원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새어머니는 자신에게 과거의 상처다. 그래서 지원은 경훈이 멀리 떨어지는 것이 싫었다. 늘 당당하고 용감했었지만 이제는 경훈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곁에 없으면 겁이 난다. 또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그 마음을 짐작했는지 경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갔다.
지원은 그가 주방에 있는 걸 확인하고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그런 지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혜는 무심코 말했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구나.”
“네. 많이 좋아해요. 행복하고요. 지난 일 다 잊고 살고 싶어요.”
며칠 전 자신을 찾아온 지수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새어머니가 지수가 자신을 찾아왔던 걸 알고 왔는지, 모르고 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누가 찾아와도 이젠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 잊고 살고 싶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지수…….”
아니나 다를까, 새어머니의 입에서 ‘지수’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 애가 널 찾아갔다더구나.”
“네, 만났어요.”
잠시 입을 닫고 침묵하던 영혜는 조용히 말했다.
“그럼 들었겠구나. 내가 네 아버질 속이고…….”
“그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에요?”
영혜는 죄스러운 마음에 지원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각오하고 찾아왔으니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 했다.
“상관없어도 들어 줬으면 좋겠다. 네 아버진 지금 몹시 괴로워하셔. 그동안 네가 혼란스러울까 봐 연락 한번 못 해본 게 후회스러운 모양이야. 모르게 한번 소식이라도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 말만 믿고 안일하게 살았다고 자책하신다. 내가 그랬어. 너, 친어머니하고 잘 살고 있고 그 집 식구들하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가만히 잘 사는 애한테 혼란 주지 말고 없다고 치고 살자고.”
없다고 치고…… 그건 영혜가 생각한 대로였다. 영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어린 지원을 희생시켰다.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한 아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부성을 가로챘다.
“난 부모님이 몹시 반대하는 결혼을 했어. 그래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다. 부모님이 반대한 이유도 네 아버지가 두 번째 결혼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있다는 거였어. 그것만 아니면 그렇게까지 반대하시진 않았을 거야. 그런데 내가 큰소리를 쳤다. 아이는 어머니 쪽에서 키우니까 내가 키울 염려 없다고. 그래도 어른들은 알았었나 봐, 그런 상황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걸. 하지만 난 걱정 안 했어. 아니, 애써 그런 생각은 안 했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까지 받아들일 만큼 난 성숙하지 못했어. 그런데도 난 네 아버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땐, 그 사람이 전부였으니까.”
영혜는 묵묵히 듣고 있는 지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만 아니었다면…… 넌 네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었을 거야. 자식 버릴 사람 아니니까. 내가 너, 아주 잘 살고 있다고 거짓말만 안 했어도 네 아버진 널 키웠을 거야.”
지원은 동요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혼란스러웠다. 지수가 찾아온 그날부터 시작된 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었다. 새어머니의 잘못이라고 탓하고 싶지만은 않았다.
“그분은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지원의 말에 영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원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분도 새어머니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몰라요. 다시 꾸린 가정의 평화를 나로 인해 깨게 될지도 모르니까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지 몰라요.”
“아니야. 네 아버진 그런 사람 아니야. 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서요?”
지원은 영혜를 사납게 쳐다보았다.
“이제 와서 저더러 어쩌라고요? 왜 이러세요? 이제 와서 이러시는 이유가 뭐예요? 지금껏 잘 살아오셨으니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잖아요. 저도 이젠 다 잊고 살겠다잖아요. 그런데 왜 이러세요? 왜 절 흔드세요? 그분이 시키던가요? 저한테 와서 잘못을 빌라고 시키셨어요? 그럼 제가 용서했다고 전하세요. 전 뭐가 어떻게 됐든 상관없으니까 우리 전부 살던 대로 살자고 하세요!”
울컥,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울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은 이를 악물었다.
“저, 저기 저 사람이랑 결혼하면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 꾸리고 싶어요. 제가 낳은 제 자식들에게 엄마가 어떤 어두운 과거가 있었는지 알려 주고 싶지 않아요. 좋은 거, 예쁜 거, 밝은 것만 보여 주고 들려주고 싶어요.”
“아버지가 널 만나 보고 싶어 해.”
새어머니의 말에 지원은 결국 발끈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차갑게 말했다.
“싫어요.”
“지원아.”
“싫다고요. 그만 돌아가세요. 지수한테도 말씀하세요.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아버지가 아프셔!”
지원의 눈이 커졌다. 새어머니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네 아버지가 몹시 아프시다.”
영혜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영혜는 갑자기 움직이더니 지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이러세요?”
“잘못한 사람은 나야. 그러니까 네 아버질 한 번만 만나 줘. 부탁이야.”
지원은 흔들렸다. 온갖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리를 스쳤다.
“무슨 병인데……?”
새어머니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이것뿐이다. 아버지가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얼마 살지 못할지도 모르는…
“간암이야. 간암 말기래. 흑.”
뭔가가 지원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간암 말기.
지원의 눈이 주방에서 충격을 받고 서 있는 경훈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이 걱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지원은 다시 눈길을 돌려 새어머니를 보았다. 그리고 일어섰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의자에 앉으세요.”
차분하고 곧은 목소리가 말했다. 영혜는 흐느끼는 몸을 세워 다시 소파에 앉았다.
“선배.”
지원이 이번에는 경훈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리 와서 내 손 좀 잡아 달라고. 이리 와서 날 좀 잡아 달라고.
경훈이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 앉은 그는 영혜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병원에 계십니까?”
“동희병원.”
가깝다. 얼마 전에 지원이 뇌사자의 간 적출을 하려고 갔다가 허탕치고 돌아온 그 병원이었다.
“담당 의사는요?”
“임경호 교수라고.”
영혜의 대답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뵌 적 있습니다. 실력 있으신 분입니다. 상태가 어느 정도라고 하시던가요?”
“4기라고…….”
“전이는요?”
“조금씩 전이가 되긴 했는데 가망 없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그럼 간이 문제군요.”
멍하게 앉아 있는 지원과 달리 경훈은 의사의 면모를 갖추고 침착하게 영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혜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지원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임 박사님은 지금 상태로는 이식밖에 없다고…….”
지원은 영혜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오셨어요?”
영혜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너무나 미안하고 죄스럽지만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듯 눈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미안하다.”
“저더러 아버지께 간이식을 해주란 말씀이세요?”
“미안하다. 미안하다, 지원아.”
그런 거였다. 필요하니까, 지금껏 모르는 척 살다가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 용서를 비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돌아가세요! 제가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제가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시키던가요? 가서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제 간을 얻어 오라고 시켰어요?”
“아니, 아니. 해주지 않을 거라는 거 알면서도 왔어. 네 아버진 내가 여길 온 것도 몰라. 조용히 죽고 싶어 하셔! 다만, 네 얼굴 한 번만 보고 싶은데 너한테 부담 줄까 봐 그것도 못하겠다고 하시면서…… 흐흐흑. 미안하다. 이렇게 뻔뻔스러워서 정말 미안하다. 나도 방법이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방법이 없어. 네 아버질 살릴 방법이…….”
지원은 차갑게 비웃었다.
“지수 있잖아요.”
냉소적으로 말했다. 왜 당신 딸 놔두고 나한테 이러냐고 따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영혜는 눈물을 훔치며 속삭였다.
“걔 간 크기가 작대. 임 박사 말로는 2대 1 간이식이 필요하다고 하더라. 두 사람의 간을 떼어서 아버지한테 이식해야 한다고…….”
“지수 동생도 있다면서요?”
말하면서도 지원은 그건 너무 모진 일임을 자각했다. 이제 겨우 열두 살 어린아이의 몸에서 간을 떼어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모질었다.
새어머니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걘 너무 어려…… 아버지도 용납하지 않고 나도…….”
결국에는 남편보다 아들이 더 중한 것이다. 지원은 얼굴 한 번 못 본 이복동생이 부러웠다. 남편을 살리지 못하더라도 어린 목숨을 건강하게 지켜 주고 싶은 모정을 그 아이는 알까?
“저도 할 수 없어요.”
지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영혜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널 탓할 수 없지. 이해한다. 그럼, 그럼 한 번만 네 아버지를 만나 줄 수는 없겠니? 그건 안 될까?”
“…….”
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혜가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지원아. 얼마 살지 못할 사람, 마음이라도 편하게 가게 해주면 안 되겠니? 내가 평생 속죄하고 사마. 네가 원하면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살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싫어요.”
지원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싫어요. 싫어요!”
새어머니가 돌아간 후부터 지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경훈 또한 심각한 얼굴로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점심을 거르고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는 지원을 억지로 소파에 앉혀 놓고 경훈이 뒷정리를 끝내고 그녀의 옆에 와서 앉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창은 칠흑 같은 어둠만 비추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 투영된 두 사람의 얼굴만이 그들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알아볼게.”
침묵을 가르고 경훈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원은 천천히 눈길을 돌려 그를 보았다.
“뭘?”
“상태가 어느 정도신지…….”
“됐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편하지만은 않다는 걸 경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편하겠는가. 아버지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다는 소식에도 흔들렸는데 이제 그 아버지가 간이식을 받지 못하면 돌아가실 거라는데 오죽 심란할까, 싶었다.
경훈은 다시 눈길을 돌려 어둠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말했다.
“난 내가 제법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의사라고 생각했는데…….”
지원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경훈은 피식, 스스로를 비웃었다.
“내 여자에 대해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무슨 말이에요?”
그녀가 물었다. 경훈은 눈길을 돌려 지원을 바라보았다.
“난 싫다. 네 간, 이식해 주는 거.”
지원이 대꾸하지 않자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식이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게 너니까 그런 말 못하겠다. 내가 간이식 분야의 전문의가 될 건데도 난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상황이 될까 봐 겁난다. 미라클 팀, 강 교수님을 신(神)처럼 믿는데 네가 수술대 위에 오르는 건 싫다. 나도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놈인 줄 몰랐어. 아픈 부모에게 간이식 안 해주려고 도망가는 놈, 약혼녀가 이식해 주면 결혼 안 하겠다고 한다고 망설이는 자식 놈도 전부 욕했는데 나한테 막상 닥치고 보니까 이렇게 된다. 하.”
“선배…….”
“언젠가 네가 그랬었지? 미라클 팀이 리버 티피엘(간이식) 성공률이 98퍼센트인 건 나머지 2퍼센트가 실패라는 걸 뜻한다고. 사람들이 왜 그 2퍼센트의 실패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건지 이제야 알겠다. 이제야 완벽히 알겠어.”
그는 의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지원은 그가 의사로서의 자신이 실망스럽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수술대 위에 올리고 싶지 않은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를 볼 수 있었다.
지원은 그의 머리를 안아서 자신의 가슴에 안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가슴으로 파고든다.
“나, 안 할 거야. 내가 안 한다는데 선배가 왜 그래?”
“…….”
“걱정 말아요. 스스로 자책도 하지 말아요. 나, 진짜 안 할 거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눈은 지원의 말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잡고 키스했다. 달래듯 부드럽게,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깊게 키스했다.
서로의 혀가 얽히고 격정적으로 움직일수록 두 사람의 마음은 흔들렸다. 서로의 입술을 파고들며 더 열정적으로 갈구하면서도 두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은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