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s Rebirth RAW novel - Chapter 293
제 293화
‘소각주 짓도 귀찮군…….’
과거 너무 공손히 관리를 대했다가 스승님께 살짝 혼이 난 적이 있었다.
-희야, 이런 것은 적당한 완급이 필요하단다. 여러 사람의 체면을 책임지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계산은 특히나 필요하지.
스승님 같은 처세술은 무리이나, 그래도 이제는 서류상 권력과 실제 권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볼 수준은 되었다.
현대인, 그것도 일개 의사가 여기까지 해내느라 참 시행착오도 많았었지.
아니나 다를까, 말이 중간에 끊겨서 ‘이익!’ 하고 화를 내려던 말을 탄 관리는 ‘헉!’ 하는 얼굴로 곧 변했다.
백린의각이라는 이름을 들은 탓이다.
“흠흠. 백린의각의 소각주시구려. 본관은 포도부장(捕盜部長)의 직위를 가진 진승배라고 하오. 도적의 습격을 받았다는 전서를 받고 이리 달려왔…….”
“네 이놈!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을 것이지 감히 항명한단 말인가! 여봐라! 이놈들을 당장 포박하여라!”
진승배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포도부장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사이.
그 뒤로 말을 탄 이가 다가와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건 또 뭔가? 하고 진천희가 바라보니 얼마나 거대한지 뒷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야…… 상당한 초고도비만…이시네…… 콜레스테롤 수치가 엄청나겠는걸. 혹시 당뇨도 있는 거 아냐? 나이가 있어 보이시니 심장에 무리가 상당할 텐데…….’
본능적으로 진천희는 견적을 내 본다.
그러자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아까 전까지 가슴속을 끓이던 울화가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이 정상으로 돌아오려는 것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거야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니 어쩔 수 없다고 진천희는 생각했다.
“현령님, 진정하시지요. 이쪽은…….”
“진 부장! 지금 내 말에 항명하는 게야? 어서 전부 포박하여라!”
현령을 말리는 진승배 포도부장. 그리고 그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소리부터 지르고 있는 돼지 현령.
‘흐음…… 이거 참. 감이 싸한데?’
진천희는 순도 100% 한국의 아재로서, 자신의 감각을 제법 신뢰하는 편이었다.
감이 싸한 느낌이 들면 여지없이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는 했다.
‘근데. 지금 감이 싸하면 안 되잖아…… 만약 감 안 좋은 이게…… 저 현령이랑 연관이 있다면…….’
진천희의 눈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차가워지고 서늘해졌다.
‘도적들과 결탁한 부패 관리……일 수도 있다는 건데…….’
일단 한번 던져 볼까?
“현령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본인은 백린의각의 소각주인 진천희라고 합니다. 저희 스승님께서는 황도의 높으신 분들을 다수 치료하신 백린의선 제갈린이시지요. 그리고 이쪽은 저의 의형제인 무당파의 천우 도장입니다만…… 그래서, 저희를 포박하신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이런 사람인데, 현령 정도 되는 니가 나를 가두겠다고? 그거 감당할 수 있겠어?
그런 의미가 담긴 말에 현령의 입이 다물어졌다.
잠시 고요해진다.
백린의각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지만, 무당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관대작들과의 연결점도 문제지만 무당파 도사들의 경우 마교나 세림교에 비할 바는 아니나…… 이 또한 종교다 보니 약간의 광신도 적인 면이 있다.
과거 무당파가 협의라는 이름 아래 복면 하나 쓰고 밤에 찾아와서 칼질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물론 난세에 일어난 일로 요즘은 그런 일은 없다.
“크흐으으음! 도적에 의해서 사람이 상했다고 들었다! 본관이 너희가 도적인지 아닌지 어찌 안단 말이야! 백린의각과 무당파라고 하지만 믿기 어렵…….”
“현령님께서는 그 말에 책임을 지실 수 있으신지요? 저와 백린의각은 그렇다 쳐도, 무당파의 도복과 무당파의 검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황상께서 인정하신 도관인 무당파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지.”
무당파의 이름을 내세우는 진천희의 모습은 확실히 박력 있었다.
현령은 그 말에 약간의 식은땀을 흘리며 눈알을 굴려댔다.
그리고 진승배 포도부장은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진천희는 생각했다.
‘진승배 포도부장은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나 보네. 그렇다면… 이 현령이 수상쩍은데… 감찰 패는…… 지금 보이지 말자. 조금 더 두고 봐서. 확실한 뭔가를 발견하면 꺼내는 거야.’
이런 건 자주 꺼낼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결정적인 순간에 쓰는 게 타격이 가장 크다.
“어젯밤 이 마을은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가 넘쳐날 지경입니다. 저는 의원으로서 이를 보다 못해 이렇게 사람을 구하고 있는 중이지요. 어느 도적이 이렇게 사람을 치료하겠습니까?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진천희는 평소의 유순하고 예의 바른 모습이 아닌. 강인하고 냉철한 면모를 보이며 현령에게 대꾸했다.
말에 탄 현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딱 봐도 불쾌감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지만 소리를 지르지 않고 씩씩 숨을 삼키기만 했다.
‘역시. 관인은 권위에 약하지.’
백린의각. 무당파.
그 배경은 무겁다.
현령이 제법 높은 직위의 관리이며 권한이 크다 하지만, 이 두 세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진천희와 천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백린의각의 분타 의원들과 그 의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대도 같이 있다.
비록 숫자는 포도군사들에 비하면 적지만, 사실 말하자면 포도군사 수백 정도는 단번에 살해할 수 있는 고수들이다.
‘아무리 무인들이 관의 권위에 어느 정도 순응한다고 해도…… 결국 야만은 야만이지.’
정파이기에 조금 더 관에 협조적일 수는 있을 터나, 사파나 마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황법을 어기고 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다.
‘검의 본질은 결국 야만. 눈앞에 검이 있는 한은 결국 내 말을 무시할 수 없겠지.’
진천희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크흠. 그렇다면 알겠다. 그러나 이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닌즉, 조사를 해야만 할 것이다. 우선은 도적들이 무엇을 노린 것인지부터 알아봐야 하니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말도록.”
“공명정대한 조사를 부탁드립니다.”
“한낱 의원 나부랭이가 걱정할 것은 아니다! 여봐라. 우선은 표물부터 확보하여라. 도적들이 노린 물건이라고 하였으니, 수상하니 일단 압류해 놓도록!”
현령은 말머리를 돌려 포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진천희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옆을 슬쩍 보니 천우의 얼굴에는 ‘갑자기 웬 표물?’이라는 기색이 떠올라 있다. 하지만 진천희는 알 것 같았다.
도적 떼가 사라지고 난 이후. 바람처럼 나타난 현령이 무엇을 원하는지 감이 온 것이다.
‘아까 감이 싸하더니…… 표물이 있다는 건 어찌 알고 왔대? 나도 치료하다 스치듯 들은 게 전부인데.’
어젯밤부터 흑도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치료하던 진천희다.
그중에는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마을에 머물고 있던 표사들도 있음을 진천희는 밤사이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오기도 전인 현령이 표물을 알고 있다?
진천희의 얼굴은 빙긋 웃고 이었지만, 눈동자는 스산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 목을 비틀…… 아니. 아직 모를 일이지. 일단 조사가 우선이다. 그리고 만약 이 일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진천희의 눈동자가 너무나도 시리도록 차가웠다.
“이곳에 머물고 있던 보행 표국의 표물을 말씀하시는가 봅니다만. 표국의 표사분들을 저희 쪽에서 현재 치료 중입니다. 저희 백린의각은 최선을 다하여 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바, 표물을 그대로 가져가시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듯하군요. 그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표물을 압류했다는 수결이라도 남겨 주시지 않으면 저희도 협조하기가 조금 어려울 듯합니다.”
“뭣이라!? 네가 감히 본관의 적법한 행사에 왈가왈부하겠다는 것이냐!”
현령이 턱살을 흔들며 다시금 화를 냈다.
“네 이놈! 아무리 네가 뒷배를 믿고 있다지만 감히 이 몸에게…….”
“허면. 이 일을 성주께 미리 아뢰어 두겠습니다. 차후에 문제의 소지가 있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성주에게 아뢰겠다!
그 말에 현령은 다시금 불쾌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휙 돌린다.
“에이잇. 우선 도적들을 모아서 심문하도록! 나는 너무 달려와서 힘드니 조금 쉬겠다. 진 부장, 자네가 처리하게.”
현령이 저 멀리로 가 버린다. 그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 * *
일단 당장 눈앞의 일 하나, 아니 둘은 해결한 걸까.
먼 곳에서 우레 소리가 울리더니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둥 소리가 울리자 뇌진은 재빨리 구름 속으로 날아갔다.
아직도 천뢰응이 어떻게 번개를 먹는다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으나, 영물이고 이런 세계니까 싶어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빗방울 하나, 둘.
이윽고 선이 되어 비가 내렸다.
이미 의각원들이 환자들을 안으로 옮긴 후고, 밖에서는 유가족들이 아직 남겨진 시신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 동네 방식으로 하면 매장이겠지.’
날이 밝고 보니 마을 무덤은 상당히 작아서, 이런 일을 자주 겪은 곳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백이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했으니 새로 만든 봉분들이 더 늘어나겠지.
진천희는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한참이나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불러 줬으면 좋으련만.
할 일을 다 해버린 탓일까. 아무도 소각주님을 부르지 않는다.
‘손이 좀 바쁘면 좋겠는데…….’
그러면 다른 생각도 할 필요 없으니 명치의 통증도 조금은 잊을 수 있겠지.
그때 목소리가 울렸다.
“형?”
“아, 응.”
천우의 손에는 대나무 주먹밥이 들려 있었다.
의각에서 식사를 대용할 때 쓰는 것으로, 고칼로리 고영양분.
그야말로 전투 식량처럼 만들어 놨다.
‘이걸 고안한 게 나지.’
휴대하기 좋게 대나무 안에 주먹밥 형태로 보관해 두었는데, 이 상태로 솥에 넣고 찌기만 하면 주먹밥 완성이다.
현대의 군용 식량만큼 오래 보관하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이 시대 기준으로 꽤나 버틴다.
‘그대로 내용물만 빼서 물에 타서 끓이면 죽이 되고.’
만약 환자가 영양실조로 위험한 상태면 그대로 죽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반대로 의원이 과로로 음식 소화가 힘들면 그렇게라도 먹으라고 만든 거고.
‘맛은 솔직히 좀 아쉽지.’
천우가 말했다.
“아, 그리고 달걀 좀 삶아 왔어요. 마을분들이 씨암탉이라도 삶아 가라고 하셨는데, 형이 안 좋아할 것 같아서.”
“부자 동네도 아니고, 씨암탉은 무슨. 나 원래 닭보다 달걀이 더 좋아.”
진천희는 그리 말하며 천우 앞에 앉았다.
천우는 진천희가 먹을 것을 하나하나 내려놓고는 마지막으로 수저까지 형 앞에 내려놓았다.
“알아봤는데,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와호채래요. 거기서 공격한 것 같다고 하네요.”
진천희는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대나무 주먹밥뿐만 아니라 제법 먹을 만한 것들도 들어 있었다.
여기서 요리한 것 같지는 않으니 이쪽 분타에서 의원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준비한 식량이겠지.
우적-
향은 맛있으나 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심리적 문제 같으나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
일단 영양을 섭취하는 데 의의를 두고 씹어 삼킬 수밖에.
“와호채라, 그걸 알아 온 거야?”
“저는 의원이 아니니 그쪽으로는 형을 도울 수 없으니까요. 다른 거라도 도와야죠.”
“고마워.”
진천희의 미소에 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와호채에서 여기를 약탈하러 온 건 아니라더라고요.”
“그래?”
“예, 마을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해 봤는데 정황상 약탈은 그냥 시늉만 한 거고, 사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게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