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119
기수는 이런 곳에서 생매장 당해 죽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갇힌 곳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그려봤다. 그리고 탈출구는 결국 들어온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통로를 꽉 틀어막고 있는 석벽으로 가서 두드려보았다.
“두께가 얼마나 될까?”
약선문 제자들이 관솔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기수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다들 뒤로 조금 물러서.”
기수는 석벽 앞에 간격을 맞춰 선 후 주먹을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때릴 자리를 겨냥했다.
약선문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
고원달이 기수에게 물었다.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설마……”
설마가 아니었다. 기수는 주먹으로 그 석벽을 깨려는 것이었다.
자세는 태권도의 정권찌르기. 목표는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 석벽.
기수는 자기가 이런 격파에 도전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생사가 달린 상황이다 보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약선문 사람들은 모두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기수를 주시했다.
“타핫…!”
우렁찬 기합과 함께 기수의 정권이 석벽에 꽂혔다.
순간, 쩍! 하는 굉음과 함께 석벽이 갈라졌다.
그러나 문제는 석벽이 아니었다.
동굴 전체가 요란하게 진동하면서 천장의 종유석들이 떨어지고 돌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 모두 머리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러댔다.
기수도 당황하여 탁지연부터 찾아 그녀를 안고 머리를 감싸주었다.
‘아! 씨발. 이럴 의도가 전혀 아니었는데….’
그러나 다행히 천장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고무학이 외쳤다.
“다들 괜찮은가?”
떨어지는 제자 몇 명이 다쳤지만 다행히 사망자나 중상자는 없었다.
기수도 꼭 안고 있던 탁지연을 풀어주었다.
탁지연도 기수의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을 풀었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봤다.
죽음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힘껏 포옹했다.
그것은 각별한 느낌이었다.
지금 비록 서로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나는 얘를 좋아하는 걸까?’
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 본다면 상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탁지연은 뭔가 좀 달랐다.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이 봐요. 형님.”
기수는 남자끼리 얼싸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그녀를 놔주었다.
약선문 제자들은 석벽 앞으로 모여들어 불을 비추고 상황을 살펴보았다.
석벽엔 비스듬하게 굵은 금이 그어져 있었다.
고무학은 틈 사이로 불을 비춰보았다.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두께가 한두 뼘 정도가 아닌 듯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기수를 봤다.
기수가 고수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 두려움과 경계의 표정이 번졌다.
기수도 갈라진 틈을 살펴보았다. 한 번만 더 때리면 깨질 것 같았다.
그러나 천장이 무너질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고무학이 검을 뽑더니 그것을 갈라진 틈 사이에 대고 휘저었다.
그러자 돌가루들이 떨어졌다.
“좋아! 각자의 무기로 틈을 긁어서 빠져나갈 구멍을 판다.”
일견 무모한 계획이었다.
어느 천 년에 바위에 구멍을 뚫는단 말인가.
그러나 현재 상황에선 유일한 탈출방법이기도 했다.
기수가 바위를 반으로 갈라놓았기에 희망도 생긴 거라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은 조를 짜서 교대로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나 그 교대조에 기수는 열외였다.
빼달라고 한 게 아닌데 자기네들이 알아서 탁지연까지 작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만큼 석벽을 부순 기수의 정권찌르기는 사람들을 겁먹게 한 것이다.
고원달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기수에게 물었다.
“이봐, 양일. 혹시 너도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거나 한 건 아니겠지?”
팽무진에게 하도 데어서 혹시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무슨 정체를 숨길 게 있겠습니까? 안심하십시오.”
기수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지금 나를 걱정할 때가 아냐. 너희들 철산문 멸문시켜 놓고 고작 가짜 지도를 얻은 것 때문에 속상하지? 하지만 지도는 가짜라도 원한은 진짜다. 탁지연이 너희들을 노리고 있어. 이제 너희들 4명 다 좆 된 거야. 새끼들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살짝 불쌍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강호의 원한은 피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법.
기수는 어찌되었건 탁지연 편을 들기로 했으니까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석실 안에는 바각, 바각 하는 돌 긁는 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기수는 작업 과정을 지켜보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이긴 하지만 분명히 진척이 있었다.
교대로 24시간 계속 작업하니까 언젠가는 구멍이 뚫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탁지연은 비관적이었다.
“저게 언제 뚫릴까요?”
“글쎄. 잘하면 오륙일 이내로 되지 않을까?”
“석벽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오륙일이 아니라 오륙십일이 걸릴 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탁지연이 다기 말했다.
“식량을 한데 모아서 배급제로 바꾸었어요.”
“그렇게 해야지. 물은 스며 들어와서 충분하지만 먹을 건 그게 전부니까.”
“구멍 뚫기보다 식량이 먼저 떨어질 가능성도 있어요.”
기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식인종 시츄에이션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탁지연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굶어죽기 전에 원수들을 전부 죽일 계획을 짜야겠어요.”
“그건 좀 무모한데. 상대가 50명이 넘어.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하지만 힘이 남아 있을 때 하지 않으면 나중엔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요.”
기수는 그녀를 이해했다.
지금 그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복수가 가장 중요한 일일 것이었다.
“좋아. 네가 남은 식량을 계속 주시해. 그러다가 닷새치 정도가 남아도 구멍이 뚫리지 않으면 그때 결행하자. 나도 도와줄게.”
“고마워요.”
예전엔 기수 도움 없이 자기 손으로 다 하겠다던 탁지연이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혼자서 약선문 제자들까지 전부 상대할 자신은 없기에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탁지연은 그때부터 식량 자루를 주시했다.
동굴 안이다 보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고무학은 자기를 기준으로 배가 고파지면 식량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동굴 안에서 벽곡단 먹으며 수도하는데 습관이 된 사람이다 보니 끼니때는 한참만에야 돌아왔다.
다들 배가 고팠지만 말없이 참았다.
그 식량이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고무학 마음대로인 배식으로 인해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탁지연을 진정시키던 기수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밀폐된 공간에 갇혀 지내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놈들이라면 지금 결행해서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는 게 현명한 판단 아닐까?’
지금 약선문을 몰살시키면 두 사람만 몫으론 충분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 고기를 먹어야 하는 일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곧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죽이면 이 좁은 곳에서 썩는 시체들과 함께 지내야 하잖아.’
역시 죽이지 않는 쪽이 좋았다.
문제는 구멍이 언제 뚫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작업으로 인해 거의 60센티 가까운 깊이로 파고 들어갔는데 아직도 반대편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작업과정을 지켜보던 기수는 갑자기 뭔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작업중지!”
기수의 외침에 벽을 긁어내던 약선문 제자들이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모두 조용히!”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기수를 바라보았다.
기수가 한 손으로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다른 손으로 석벽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고, 건너편에서 누군가 벽을 긁는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 사람이 있다!”
“누구지?”
고무학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팽무진과 암살자 말고는 있을 사람이 없는데…. 그런데 그들이라면 왜 벽을 긁고 있는 거지? 이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면 기관을 작동시키면 될 텐데…”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반대쪽의 소리가 멈추었다.
기수는 칼로 석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저쪽에서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밖에 사람이 있는데 팽무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쪽이 궁금해서 벽을 파는 모양이니 도움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무학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만약에 적이라면?”
기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여기서 굶어죽는 것보다,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약선문 제자들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석벽을 긁기 시작했다.
반대편에서도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천장이 무너질까봐 걱정인 이쪽과는 달리, 그쪽에서는 뭔가 무거운 쇳덩이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여섯 시간쯤 지난 뒤, 마침내 직경 10센티 정도의 구멍이 뚫렸다.
약선문 제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더,
영원할 것 같던 굴파기가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반대편도 동굴이지만 다들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어 했다.
“안쪽에 누구요?”
남자 목소리가 구멍을 통해 들려왔다.
고무학이 나서서 질문으로 맞섰다.
“당신들은 누구요?”
“우리는 무림맹 사람들이오.”
약선문 제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무림맹이래.”
“우린 살았다!”
어렵게 구멍을 뚫었는데 적과 만나 목숨 걸고 싸워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다들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무림맹이라면 최소한 적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고무학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무림맹이 어떻게 알고 이곳에 왔소?”
“약선문이 무공비급을 차지한다는 소문을 확인하러 온 것이오.”
“무공비급?”
고무학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약선문 문주 고무학이오. 무공비급 따위는 이곳에 없소.”
그러자 밖에서 외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약선문이 이 안에 있다!”
잠시 후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고 작았던 구멍이 금세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아미타불! 고문주님이라고 하셨소?”
밖에 서있는 사람들은 노란색 가사를 걸친 소림승이었다.
그 뒤로 각 문파 사람들이 보였다.
“그렇고 내가 고무학이오.”
“지금 계신 그곳에 보물과 무공비급이 있습니까?”
“허어!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이곳에 아무 것도 없소. 못 믿겠다면 들어와서 직접 찾아보시오.”
“아미타불….! 그리 해도 되겠습니까?”
고무학은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먼저 우리부터 나가게 해주시오. 그 다음엔 마음대로 하시오.”
소림승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약선문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오자 소림, 무당을 비롯한 무림맹 사람들이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은 채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기수는 혀를 찼다. 다들 보물과 무공비급에 눈이 먼 모습이었다.
30분 쯤 지나 그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련을 버릴 수 없는지 약선문 일행을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어디 숨기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고무학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들 짐을 바닥에 내려놓아라. 마음대로 뒤지도록.”
무림맹 사람들은 정말로 뒤졌다. 그리고 건량과 갈아입을 옷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욕심을 접는 모양이었다.
소림승이 고무학에게 합장한 후 말했다.
“소승은 현명이라고 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고무학은 좌우를 둘러본 후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야말로 자초지종을 묻고 싶소. 무림맹이 도대체 이곳엔 어떻게 온 것이오?”
“지금 온 천하에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약선문이 홍안산에서 절세비급을 찾아 환우구종 중에서 으뜸이 되려 한다고요.”
“누가 그런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고무학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원래대로라면 그것이 고무학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동굴에 갇혀서 죽을 뻔 한 게 다였다.
소림승 현명이 말했다.
“일단 본진으로 가서 자세한 얘기를 나누시지요.”
“본진? 여기 이 사람들 말고 또 있단 말이오?”
함정 앞엔 무림맹 사람들 30명 가량이 모여 있었다.
현명이 대답했다.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마교도들도 들어와 있고, 정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무림인들까지 합하면 수백 명이 넘을 겁니다.”
기수는 허탈함에 입맛을 다셨다. 한 때는 자기만 아는 보물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휴일날 놀이공원처럼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