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6
기수는 강시들의 발자국을 보면서 단지 호중만을 죽이는 데서 끝낼 게 아니라 마물들도 전부 없애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자기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사람으로서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게 느껴졌다.
길을 걷다가 골목 안에서 담배 피는 중학생들이 있으면 그냥 씩! 웃어준 후 지나가면 그만이다. 금연구역 아닌 데서 담배 피는 건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에게 금연을 권하는 건 말이 되지만 제재를 가하는 것엔 반대라는 게 기수의 생각이었다.
누가 무슨 권리로 남에게 담배를 피라 마라 하나.
상대가 어리다고 속여먹는 폭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중학생들이 다른 중학생을 때리고 삥을 뜯고 있다면 모른 척 넘어가선 안 되는 일 아닌가. 남한테 피해를 주니까.
피해 학생과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힘이 있다면 가서 말려야 한다.
강시 발자국을 보는 심정이 딱 그랬다.
산 사람에게도 위협이지만, 죽은 후에 몸을 이용당하는 입장도 편치는 않을 것이었다.
‘반드시 죽여주마. 호중만…. 소서시를 위해서, 그리고 인류를 위해서.’
어쩌면 이런 식으로 자기도 슈퍼 히어로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발자국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석초가 놀란 어조로 말했다.
“형님. 이놈들 마을로 내려간 것 같은데요?”
기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다행히 발자국은 인적 없는 곳으로만 이어졌다.
그리고 강변에 이르러 끊기고 말았다.
춘매가 화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배를 탄 모양이야.”
강변 갈대들이 누운 것은 배를 댄 흔적이 분명했다.
석초는 발을 굴렀다.
“젠장! 배를 탔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잖아.”
추적할 흔적이 끊어진데다가 그들의 목적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단 뱃길에 들어선 이상 장강을 타고 동서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강남이나 북경 혹은 황하로도 갈 수 있었다.
“형님. 어떻게 하죠?”
석초의 물음에 기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탁지연과 석초, 사매들 모두 기수를 봤다. 기수가 입을 열었다.
“배를 탔다면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한테 오게 한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일월신교를 친다.”
“예?”
석초는 입을 쩍 벌렸다. 어처구니 없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호중만과 박피왕 모두 일월신교 교주의 큰아들인 유지상 편이라고 했지? 그들과 같은 편인 다른 문파들을 알아 와. 하나씩 부수면 호중만과 강시도 나타나겠지.”
“하, 하지만….”
석초는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호중만과 강시들이 오기 전에 일월신교의 다른 세력들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기수가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대장군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혈매궁 단독으로 할 거니까.”
그것은 더 위험한 일이었다.
달랑 6명, 이제 7명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일월신교를 상대로 싸울 정도의 전력은 절대 아니었다. 기수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한 사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형님! 적은 일월신교입니다.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그러니까 철저한 준비가 필요해.”
“어떻게 말씀입니까?”
“우리는 인원이 적고 따로 근거지가 있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빠른 기동력으로 기습을 한 뒤 빠지는 식으로 하면 적은 우리를 잡을 수 없어. 대장군부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적의 근거지를 모두 조사하고, 그 각각에 정찰병을 파견해두면 어느 문파에 함정을 파놓는다고 해도 우리는 가장 약한 문파만 골라서 칠 수 있지.”
석초는 탄성을 토했다.
“아! 그러니까 뒤통수만 때리고 즉시 빠지겠단 말씀이시군요?”
“맞아. 전형적인 아웃복싱이지.”
석초는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목표지점들을 동시에 감시하는 게 어려운 부분인데, 그거라면 대장군부에서 얼마든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단지 정찰만 하는 거라면 관과 무림 불간섭이라는 불문율을 깨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혈매궁이 필요로 하는 중요한 지원은 해줄 수 있었다.
“좋습니다! 제가 즉시 시랑님께 연락을 취해 만나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 쉬면서 결전을 준비하면 되겠군.”
그렇게 말하면서 좌우를 둘러보자 사매들 표정이 발그레하게 변했다.
결전 준비가 무엇인지 딱! 감을 잡은 것이다.
석초가 말했다.
“격전을 치렀으니 여기서 잠시 쉬면서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근처의 관아로 가서 배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배를 타는 게 편하긴 가장 편했다.
어차피 배를 빌를 거라면 굳이 모두가 함께 이동할 이유는 없었다.
석초가 떠나고 7명만 남게 되자 탁지연이 기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기소협. 저 팔을 다쳤어요.”
“그래? 어디 보자.”
탁지연은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자 팔뚝에 뭔가 날카로운 무기에 찔린 상처가 보였다. 깊지는 않았지만 옷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기수가 유심히 살피자 풍매가 나서서 탁지연에게 말했다.
“야! 지금 장난 해? 지금 그걸 상처랍시고 봐달라는 거야? 그냥 침이나 바르면 낫겠네. 그리고… 너 왜 궁주를 자꾸 기소협이라고 불러? 너만 특별하단 거야?”
탁지연은 발끈해서 반박하려고 했다.
그런데 사매들 모두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기편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춘매까지도 적대적인 눈빛이었다.
탁지연은 순간 깨달았다.
자기는 늘 기수와 단둘이만 있었기 때문에 작은 문제가 생겨도 대화를 나누고 관심을 끌 수 있었지만, 이들 5명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기수와 일 대 일로 대하던 습관이 남아 있는 자신을 견제하는 것이다.
기수가 분위기를 무마해보려고 말했다.
“하핫! 왜들 이래? 상처에 금창약 좀 발라주는 일인데…”
그러자 살기 띤 눈빛들이 일제히 기수를 향했다.
기수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탁지연은 현명했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자기가 설 자리를 확실히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됐어요. 궁주. 내가 가지고 있는 금창약으로 해결할게요.”
하고는 손을 뺐다.
“왜 그래? 내가 약 발라줄게.”
그러나 탁지연은 냉정하게 그 호의를 거절하고 손을 뺐다.
그제서야 기수도 분위기를 대충 알아차리고 더 이상 탁지연의 팔을 잡지 않았다.
“그, 그럼 다들 좀 쉬어. 난 저 쪽에서 운기조식 좀 할게.”
파천강기를 연속 운용하고 강적과 싸우기까지 하니까 좀 지치는 기분이었다.
기수가 자리 잡고 앉아 조식을 시작하자 춘매가 아까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표정으로 탁지연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너 혹시….그러니까….”
“뭔데 그러세요? 사저. 다 물어보세요.”
“너도 궁주와 그 대법…. 그거 했니?”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나 싶었지만 숨길 일도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예. 그건 고맙게 생각해요, 정말 효과가 탁월했어요.”
춘매는 왜 자기한테 고맙다고 하는지 몰랐다.
“어쨌거나, 일월신교와 싸울 궁주의 계획 들었지?”
“예.”
“그걸 해내려면 너도 우리와 하나가 되어야 해.”
탁지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적을 앞에 두고 보니까 자기를 적대적으로 대하기보다는 중요한 전투력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커진 것 같았다.
“각오하고 있어요. 부끄럽지 않은 일원이 되도록 노력할게요.”
그러자 풍매가 투덜거렸다.
“흥! 각오만으로 될까?”
탁지연은 그녀를 한 번 노려본 후 말했다.
“사저들에게 제가 한 가지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모두가 주목하자 탁지연은 검을 뽑아 들고 초식을 펼쳐 보였다.
사매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검술과 상당히 비슷했다. 바로 하매를 위한 무공이었던 것이다.
한 차례 시범을 보인 탁지연은 검으로 바닥의 다섯 지점에 금을 그은 후 그 안에서 좌우로, 전후로 뛰면서 검을 휘둘렀다.
“아! 그것은….”
춘매뿐만 아니라 사매들 모두가 놀랐다.
탁지연이 보여준 것은 바로 매화오궁진이었다.
자기까지 끼어서 매화육궁진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그 안에서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제대로 펼쳐 보인 것이다.
다섯 사매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기수가 그녀에게 책자를 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그것들을 그런 경지까지 익혔단 말인가?
풍매도 거기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탁지연이 검을 거두고 물었다.
“제가 한 자리를 차지해도 될까요?”
춘매가 웃으며 말했다.
“글쎄. 그 정도면 한 번 연습해보는 것도 괜찮겠는데?”
사매들은 탁지연 주위로 몰려들었다.
풍매는 팔짱을 끼고 꼼짝도 안 했지만 추매가 끌어당기자 못 이기는 척 하면서 자기 자리를 찾아 섰다.
사부가 남긴 매화육궁진은 이제껏 기수가 변형시킨 오궁진 형태로밖에는 운용된 적이 없었다. 배신자 하매가 처음부터 빠졌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자리가 채워졌을 때 어떻게 될 것인지 다들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자! 시작해볼까?”
춘매의 수신호에 따라 사매들 모두 검을 뽑았고, 즉시 검진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중단되었다. 탁지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요. 사저들. 조금만 느리게 한 번만 더 부탁해요.”
그녀는 혼자만 연습한 상태.
이미 노련하게 손발이 척척 맞는 5명과 단번에 어울리기는 어려웠다.
춘매가 말했다.
“좋아. 속도를 조금만 늦춘다. 방어진부터 하는 거야.”
그녀의 수신호에 따라 다시 검진이 가동되었다.
탁지연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차츰 검진 내에서의 역할에 익숙해졌다.
책을 보고 이론적으로만 이해한 것을 실제 상황에서 몸으로 펼쳐내는 것은 탁지연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즐거운 일이었다.
춘매와 동매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탁지연이 매화육궁진의 여섯 번째 구성원으로서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판단한 것이다.
춘매는 다른 사매들의 표정도 살폈다.
모두들 동매와 같은 반응이었다. 풍매조차도 탁지연의 무공과 빠른 적응력에 대해서는 인정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춘매가 탁지연에게 말했다.
“환영한다! 우리 혈매궁의 일원이 된 것을…”
“고맙습니다! 사저.”
탁지연은 정말 기뻤다. 그동안 기수와 잘 지내오긴 했지만, 사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그녀는 외로운 처지였다.
약선문의 습격으로 가족을 모두 잃은 후 절치부심해서 복수를 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랬다고 해서 죽은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바꾸고 수적들과 지낼 때도 그랬지만, 혈매궁에 합류한 지금도 자기 혼자고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풍매를 비롯한 사매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이 아팠다.
그런데 지금 춘매 입에서 환영한다는 말이 나오니까 정말 기분이 좋았다. 기수가 혈매궁 식구로 넣어주었지만 춘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은 것은 의미가 달랐다.
다섯 명 중 춘매는 살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머지 4명도 적개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최소한 매화육궁진 구성원으로서의 존중은 받게 된 것이다.
춘매가 탁지연에게 말했다.
“좋아 이제 네가 우리와 하나 되는 데는 딱 한 가지 일만 남았다.”
“그게 뭔데요?”
춘매는 미소 지으며 기수 쪽을 턱으로 슬쩍 가리켰다.
“아!… 그렇죠. 역시 그 문제가…”
탁지연 입장에선 기수에게 돌아왔을 때 각오한 바이긴 했지만 막상 얘기가 나오니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랑하는 남자를 사매들과 공유한다는 게 도대체 어떤 일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분노와 질투의 감정이 가장 강하게 일어났다.
‘진정해. 차분해야 돼.’
탁지연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다 잃는 것보다 육분의 일이라도 차지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춘매가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너… 괜찮겠어?”
“뭐, 뭐가요?”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갈대는 우거졌고 해서…”
탁지연은 깜짝 놀랐다.
“서, 설마 지금 여기서 하, 하겠다는 건가요?”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너무 밝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기수와 5일간 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낸 탁지연과 달리 사매들은 기수와 동침한 지 너무 오래 되었고, 석초가 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설매가 내상을 입었으니까 제일 먼저 하게 하고 우리는 나중에 하는 걸로…”
“그, 글쎄요….”
“호호호!… 이제 보니 너 의외로 순진하구나. 볼 빨개진 거 봐.”
“아, 아니에요.”
“아니긴…. 너 혹시 이제까지 기소협하고 둘이만 했니?”
“그, 그야 당연하죠. 설마… 사저들은….”
“호호호!… 상상에 맡길게.”
탁지연은 크게 놀랐다. 춘매와 다른 사매들의 반응을 살펴볼 때, 기수가 사매들 5명과 어떤 식으로 동침했는지 감을 잡은 것이다.
그녀는 형언하기 어려운 수치심, 분노, 모멸감이 혼합된 감정에 휩싸여서 기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운기조식 중인 그의 뺨을 후려쳤다.
“이 나쁜 변태 색마!”
“윽!”
기수는 눈에서 별이 번쩍일 정도의 통증에 놀라 일어섰다.
탁지연의 행동은 북궁심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식 중이었다면 주화입마에 들 수도 있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었다.
“왜 이래? 갑자기….”
“갑자기? 야! 도대체 넌…. 으으….!”
탁지연은 기수가 사매들과 잤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동시에’ 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서, 그녀는 두 주먹을 쥐고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 후 곧바로 경공을 펼쳐 달리기 시작했다.
기수가 황급히 그녀를 따라갔다.
‘지연! 왜 그래? 어디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