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215
전방 30미터를 공터로 만든 기수는 자세를 풀고 심호흡을 해보았다.
단전의 진기 소모가 예상보다 적었고, 보충도 예전보다 빨리 되는 것 같았다.
허기지고 숨차던 느낌도 덜했다.
‘오케이! 내공 업그레이드 확인.’
기수는 자기가 만든 공터 위로 걸어 올라가 다시 한 번 파천강기를 날렸다.
두 번째 폐허가 만들어졌다.
석초와 사매들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따랐다.
기수는 다시 심호흡으로 내공을 추스렸다.
‘2번 연속은 좀 부담 되네…’
그래도 5분 정도 운기를 하고 나니까 버틸 만 했다.
‘내 몸이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그렇게 다섯 번을 연속으로 한 후엔 기수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가 알고 있는 무공 중 가장 무식하고 진기 소모도 심한 파천강기를 풀 파워로 적어도 연속 2번, 좀 쉬면서는 5번까지 써도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어느 때보다 충만했다.
기수는 산 위쪽을 향해 외쳤다.
“박피왕! 나와라! 언제까지 쥐새끼처럼 숨어 있을 생각이냐!”
뒤에서 석초가 말했다.
“하하! 이걸 봤다면 더 깊이 숨을 것 같은데요.”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일월신교의 구마왕이나 되는 자가 싸워보지도 않고 꽁무니를 뺄 것 같지는 않았다.
휴식 후 다시 길을 열려던 기수는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석초와 사매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적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이다.
모두 전투대형을 갖추고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방향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U 자형으로 일행을 에워싼 적은 얼핏 보아도 수백 명.
기수는 긴장감을 느꼈다. 자기는 적이 많아도 상관없지만 사매들 중 누군가 다치는 사람이 나올까봐서였다.
상대는 일월신교 교도들로, 산적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투력을 보유한 것으로 감지되었다. 더구나 포위진형의 구성에 법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훈련량이 상당히 많은 게 분명했다.
“모두들 긴장해.”
기수가 말하지 않더라도 석초와 사매들 모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포위진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발한 머리카락을 부채처럼 펼치고 등엔 큰 낫 2개를 엇갈려 멘 박피왕이었다.
“지난 번에 죽을 뻔 했으면서 다시 찾아오다니… 배짱 하나는 인정해줘야겠구나.”
기수는 씩 웃었다.
“오늘은 네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지난번에도 우리가 졌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흥! 사내자식이 되어가지고 계집들 치마폭으로 숨은 주제에 그게 할 소리냐?”
사매들 치마 속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멍청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자기에게 꼭 이뤄야 할 사명만 없다면 치마 속에서 한두 달 푹 쉬고 싶은 게 지금 기수의 심정이기도 했다.
합류하기 직전 탁지연과 5일 연속으로 뒹군 이후로는 주변에 미녀가 6명이나 있는데도 손 한 번 잡지 못해서 약간은 고픈 마음도 있었다.
“지금이라도 호중만을 내놓는다면 널 살려줄 수 있다.”
그러자 박피왕은 껄껄 웃었다.
“어이가 없구나. 하하하!… 너야말로 이번 일을 의뢰한 사람이 누군지 말하면 목숨을 살려주마. 어떠냐? 말하겠느냐?”
기수는 좌우를 가리켰다.
“네 몸이 이걸 견딜 정도로 튼튼하냐? 잘 생각해 봐.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박피왕은 공터로 변한 능선을 둘러보았다.
기문진이 깨졌다는 부하들의 호들갑스런 보고에 달려오긴 했지만 숲이 평지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해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냄새는 남아 있지 않지만 화약을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길게 얘기해봤자 입만 아프지. 이번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양손을 들어 검지로 기수 일행을 가리켰다.
“와아아!….”
“죽여라!….”
일월신교 교도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기수는 난전을 바란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위험에 빠트리지 않고 혼자서 깔끔하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어지러워져 버렸다.
강적과 맞선 상태라 이제까지 계속 쓴 파천강기를 다시 발사할 수는 없고, 통상적인 싸움으로 적의 머리인 박피왕을 제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해결방안이었다.
기수는 장검을 뽑아들고 박피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일월신교 교도들이 떼거지로 앞을 가로막았다.
기수는 한꺼번에 여럿을 상대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진기 소모는 적은 잔백지로 훼방꾼들을 쓰러트리며 박피왕과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박피왕은 굳은 표정으로 낫을 뽑아들더니 곧자 기수를 위아래로 베어 왔다.
노련하고 경험 많은 노마두답게 기수의 움직임에서 무언가 전과는 다른 움직임을 발견한 것이다.
쨍! 가가각….
격한 타격음에 이어 날과 날이 긁히는 거북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기수는 자신의 내공 증진을 믿고 상대를 얕보았다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강한 압력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선 단지 어느 쪽의 내공이 좀 더 높고 낮으냐보다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와 그에 걸맞는 필살기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기수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검초에 집중하자 조금씩 내공 차이가 드러났다.
박피왕은 자신의 낫이 밀리는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짧은 기간 동안 상대가 너무나 달라져서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가 아까 기회를 줬지. 이젠 너무 늦었어. 난 네 목이 필요해.”
그래야 지금 뒤에서 싸우고 있는 일월신교 교도들을 쫓아버릴 수 있었다.
“흥! 내가 너 따위에 당할 것 같으냐!”
박피왕은 기합과 함께 내공을 급격히 끌어올렸고, 두 자루의 낫 중 하나를 자루에서 분리시켜 근거리와 원거리 공격을 병행했다.
기수 입장에선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싸움을 끝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다.
기수와 박피왕의 싸움이 치열해지는 동안, 뒤쪽의 싸움도 험악한 기세를 이어갔다.
사매들은 적이 많아도 별 문제가 없었다.
매화오궁진의 완성도가 올라가서 적이 한 명이건, 백 명이건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 비해 석초와 탁지연은 고전했다.
일월신교 교도들의 합격진이 그만큼 위협적이고 집요했기 때문이다.
춘매는 매화오궁진으로 그 두 사람, 특히 탁지연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화진은 혼자 움직여서는 소용이 없었다.
나머지 4명이 따라줘야 하는데 아무도 탁지연을 구할 마음이 없었다.
춘매로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더 소중한 사람은 탁지연보다는 다른 사매들이었다.
위태위태하던 탁지연은 결국 석초와 서로를 등지는 것으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서면 뒤쪽의 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마음의 안정을 찾고 나니까 비로소 탁지연의 월영검법도 진짜 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악다구니 쓰며 달려드는 다수의 일월신교 무리와 싸우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진짜 능력이 드러나자 뒤쪽의 석초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혈매궁의 다섯 여인은 물론, 마지막에 가입한 여인까지 자기보다 고수라는 사실에 사나이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동시에 혈매궁에 대해 두려움과 경외감도 품게 되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사매들과 탁지연의 기합을 통해 상황을 대충 파악한 기수는 박피왕과의 싸움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들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자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다.
박피왕의 낫은 변칙적인 무기로서의 장점이 있었다.
기수는 그 반대급부로 약점도 있을 거라 판단하고 조금씩 압박의 수위를 높여갔다.
무조건 힘으로 누르는 게 아니라 무공 초식을 파해하여 우위를 점해 나가자 천하의 박피왕이라 하더라도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지난번 싸움과는 완전히 역전된 상황이었다.
박피왕은 자루에서 갑자기 발출되는 독침 암기까지 써먹었지만 기수에겐 그것도 통하지 않았다. 도무지 빈틈이 없었다.
결국 기나긴 싸움은 기수의 승리로 끝났다.
“크윽!…..”
기수는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을 뽑은 후 곧장 휘둘러 목을 베었다.
그리고 허공에 뜬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에 손으로 받아 높이 치켜들고 일월신교 교도들을 향해 외쳤다.
“봐라! 너희들의 우두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광경을 본 일월신교 무리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안 그래도 여자들에게 계속 당하기만 하던 중이었는데 믿고 있던 박피왕마저 머리가 잘려 버렸으니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후퇴하라!”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살아남은 자들이 일제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수는 박피왕의 머리를 얼굴 앞에 들어 마주 봤다.
잘린 사람 머리를 들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스스로에게 약간 놀라기도 했지만, 중원무림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 되다 보니까 솔직히 심드렁했다.
‘나. 진짜 귀향하기 전에 적응 훈련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씩 하고 웃음이 나왔다.
당장은 끔찍하다는 생각보다 강적을 이긴 기쁨이 더 컸다.
그것도 내공과 초식 모두에서 압도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기수는 박피왕의 머리를 바닥에 던진 후 달아나는 일월신교 교도들을 따라갔다.
“안 그래도 길 안내가 필요하던 참이다.”
그와 일행은 오래지 않아 단양관에 도착하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큰 규모의 도관이었는데, 도사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우왕좌왕 하는 일월신교 교도들 뿐이었다.
기수는 조무라기들에겐 관심 없었다.
호중만과 강시를 찾기 위해 가장 큰 건물로 뛰어들었다.
넓은 마루 곳곳에 병원 테이블 비슷한 탁자들이 수십 개씩 놓여 있고 익숙한 약냄새가 가득했지만 정작 중요한 강시는 보이지 않았다. 호중만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도망친 건가?”
기수는 다른 건물로 가보았다.
그곳에도 역시 빈 탁자만 잔뜩 놓여 있을 뿐 강시도, 호중만도 보이지 않았다.
기수는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일월신교 교도 한 명을 선풍비로 따라가 붙잡았다.
“네게 물을 말이 있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는 떨고 있었다. 평소 사신(死神)처럼 생각해 오던 박피왕을 죽인 자의 손에 잡혔으니 겁이 나는 게 당연했다.
“이곳에 있던 호중만과 강시들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
“저, 저도 모릅니다.”
“모를 리가 있나? 강시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젯밤 야음을 틈타 모두 떠났습니다. 오늘 아침에 보니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떠났다고? 어디로?”
“그, 그건 저도 모릅니다.”
기수는 염정구심술로 진위여부를 확인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부터 비밀유지에 신경 쓰던 호중만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 딱 하루 늦었네…. 4일만 할 걸…’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기수는 일월신교 교도의 멱살을 바짝 당겨 잡고 물었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 갔느냐?”
“아마도 동쪽 능선을 넘어갔을 겁니다. 길이 두 개뿐이거든요.”
“그쪽에도 기문진이 있느냐?”
“무, 물론입니다. 기문진 나가는 법은 저쪽 우리가 숙소 건물 벽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저는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기수는 그의 혈을 누른 후 숙소로 들어가 보았다.
정말로 교도들 이해하기 쉽게 기문진 통과하는 방법이 도면과 함께 적혀 있었다.
기수는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뜯어낸 후 도관의 동쪽 문으로 나갔다.
“형님! 발자국입니다.”
석초가 풀숲 사이의 흔적을 발견하고 앞장섰다.
강시들의 족적으로 보이는 거칠고 투박한 맨발 흔적들이 여기저기 나 있어서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고 해도 부지런히 쫓아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기수가 앞장섰고, 경공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일행 모두 그를 따라붙느라 애를 먹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기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일종의 경공능력 테스트의 장이 되어버렸는데, 기수는 중간에 한 번 뒤돌아보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왜 저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거지?’
따라오는 순위는 춘매, 동매, 추매, 풍매, 탁지연, 설매, 석초의 순서였다.
그런데 추매와 풍매 사이가 꽤 멀었고 탁지연과 설매 사이의 간격도 상당히 멀었다. 설매는 최근에 내상을 입었었기 때문에 약간 처진다고 해도, 추매와 풍매 사이의 간격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공평하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는 다섯 명 중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음양대법을 시전했다.
그런데도 내공 차이가 큰 이유가 궁금했다.
‘아! 그렇구나.’
기수는 오래지 않아 원인을 알아차렸다.
음양대법은 상호간의 심리적 동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즉, 사랑이 깊을수록 받아들이는 진기의 양도 다른 것이다.
이제까지를 돌이켜보면 조민 자매, 혈천제와의 음양대법이 가장 효과가 좋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절세미녀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감정적 교류도 강하게 이루어졌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이라면 이 순위는 오래지 않아…..’
탁지연이 1등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할 수 있었다.
당장 풍매와 막상막하로 달리면서도 전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석초가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받아들이는 건 각자의 몫이다. 난 앞으로도 공정을 유지할 수밖에 없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말로 공명정대가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모두가 모이자 기수는 다시 경공을 펼쳤다.
이번엔 석초의 속도에 맞춰주었다.
강시들이 흔적을 깊이 남겨 놓았기 때문에 추적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