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Survive as a Terminally-ill Dragon RAW novel - Chapter (315)
315화. 후일담-각자의 삶 (2)
#농부와 어부
창가에 비추는 햇빛.
짹- 짹-.
그리고 요란하게 울리는 새의 지저귐에 엘비스가 몸을 뒤척였다.
“으음…….”
막 잠에서 깨어난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덥수룩한 수염.
이제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외모가 제법 세월이 흘렀음을 알려 주었다.
“끄흑… 아그, 머리야.”
침대 밖으로 발은 빼낸 그는 숙취로 인해 잠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빌어먹을 켄드릭… 내가 앞으로 그 자식이랑 술을 마시나 봐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또 며칠 뒤면 켄드릭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리란 걸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으그극!”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는 몸.
허리를 툭툭- 두들긴 엘비스가 몸을 일으켰다.
“후우우…….”
푸쉬쉬-.
길게 심호흡을 하는 그의 입에서 뿌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나를 돌려 몸속에 남은 술기운을 빼낸 것이다.
‘한결 낫네.’
훨씬 밝아진 얼굴의 엘비스.
침대를 빠져나와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옮긴 그는 집 밖으로 나섰다.
눈부신 햇살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얼마나 잔 거야?”
오랜만의 과음으로 인해 아무래도 꽤 오래 기절을 했던 모양이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밭에 나가 봐야겠네.”
인근 우물에서 가볍게 세안을 마친 그는 헛간에 놓인 작은 수레를 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렁- 터렁-.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니 수레에 담긴 농기구들이 달그락거렸다.
수레에서 들리는 소리를 음악 삼아 산책하듯 숲속 오솔길을 빠져나가니 광활한 평야가 그를 반겼다.
정열의 땅이라 불리는 여름 대륙.
그 명성답게 높은 일조량을 자랑하는 여름 대륙은 과일 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름 대륙 북쪽 지방은 포도를 닮은 ‘피유’라는 과일의 주산지였다.
피유를 활용한 많은 먹거리가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지만, 그중에서도 피유를 발효시켜 만든 술은 천상의 눈물이라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때문에 인근 마을 전체가 피유 재배 농가였다.
엘비스가 주로 키우고 있는 작물 역시 피유였다.
덜그럭- 덜그럭-.
그렇게 엘비스가 피유 밭 어귀에 들어선 순간,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오늘은 늦었구먼그려.”
인근 피유밭에서 가지를 손보고 있던 노인이 엘비스를 반겨 주었다.
“예, 어제 한잔 걸쳐서요.”
“아직 젊네, 젊어!”
“저도 마흔이 넘었습니다…….”
“그 정도면 아직 한창일 때지!”
“하긴 그렇죠, 그럼 고생하세요!”
“그짝도 고생하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눈 그는 다시금 수레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며 엘비스는 많은 사람을 만났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오늘 저희, 선생님 집 놀러 가도 돼요?”
엘비스가 글공부를 봐주고 있는 마을의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고.
“엘비스 씨, 저번에 봐주신 비료 살포기가 고장 났는데… 한 번만 더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엘비스! 파이가 아주 맛있게 구워졌어, 나눠 줄 테니 이따가 와서 가져가!”
“형! 엄마가 저녁에 잠깐 들르래, 할 말 있다고! 근데 내가 봤을 때 분명 형 장가가라고 잔소리할 거 같으니까 굳이 안 와도 돼!”
수더분한 얼굴의 청년과 마을의 아낙들.
그리고 이제는 가정을 꾸린 남동생까지.
엘비스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 탓에 20분이면 갈 길이 무려 한 시간이나 걸렸지만, 엘비스의 얼굴에 짜증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듯 보이는 얼굴.
‘오늘도 활기차구나.’
전생과 현생을 모두 합쳐 40년에 가까운 세월을 전장에서 보낸 엘비스였다.
그는 겨울 대륙에서의 마지막 싸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모자란 일손을 도와줄 겸, 다른 할 일을 찾을 동안만 잠깐 할 생각으로 시작한 농사.
하지만 이게 웬걸.
농사일이 그의 적성에 제법 잘 맞았다.
‘내 손으로 생명을 틔워 낸다는 게… 이렇게 보람찬 일이었구나.’
비록 농사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초보 농사꾼인 그를 도와주는 고향의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는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거기에 자신이 익힌 성법의 지식을 농사일에 적용해 지금은 마을에서 가장 넓은 피유 밭을 경작하는 농부가 되었다.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현자라 불렸던 내가 농사일을 하게 될 줄이야.’
자신의 현실에 엘비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곧이어 밭에 도착한 엘비스는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늦은 만큼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곧 있으면 수확 철이 다가올 피유들이 탐스러운 빛깔을 자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일에 몰두했을까.
바스락-.
피유 밭의 한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응?”
엘비스의 시선이 돌아가니 그곳에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구릿빛의 피부, 탄력적인 근육.
붉은 머리카락.
“어이.”
경망스럽게 손을 흔드는 그는 다름 아닌 마을 최고 어부로 통하는 켄드릭이었다.
“해장했냐?”
그리 말하는 켄드릭의 손에는 냄비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몇 마리의 물고기가 팔딱거렸다.
“얼큰한 해물 수프, 어때?”
씨익 웃는 켄드릭을 보며 엘비스도 덩달아 웃고 말았다.
“좋지.”
의기투합해 밭 근처 개울가에 자리를 깔고 앉은 두 사람.
켄드릭은 능숙하게 생선을 손질하고 요리에 들어갔다.
요리라고 해 봤자 거창한 것은 없었다.
물고기와 물, 들고 다니는 몇몇 조미료를 가지고 우려낸 간단한 수프.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둘은 꽤 많은 양의 해물 수프를 싹싹 비워 냈다.
“어흐… 살겠다. 이놈의 숙취는 진짜…….”
“그렇게 힘들면 술기운을 몰아내면 되잖아?”
“어허! 모르는 소리. 그럴 거면 뭐 하러 술을 마시냐! 자고로 이 숙취야말로 술을 마셨다는 증거이자 훈장 같은 거라고!”
열변을 토해 내는 켄드릭의 모습에 엘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때 켄드릭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꺼냈다.
“아, 얼마 전에 타니아한테 편지가 왔더라.”
“그래? 지금은 어디래?”
“이번에는 여름 대륙인가 봐. 쩌어어어어기 남쪽 어딘가라던데.”
켄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전쟁이 끝나고 로이스 일행의 여행은 끝을 고했다.
하지만 타니아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바로 ‘제로의 경지’.
눈앞에서 또 로이스를 놓칠 뻔했다는 사실이.
그 순간 자신이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이는 비단 타니아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랑 같이 가자!’
마지막 결전 당시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은 쌍둥이들.
이제는 경지를 초월해 아득한 곳으로 나아간 로이스를 좇기 위해 쌍둥이들도 타니아의 수련 여행에 동참했다.
그게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간간이 편지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대단하네.”
“독한 년이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거린 켄드릭과 엘비스는 그 뒤로도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옆 마을 소년 아무개가 가출했다느니.
누구네 말이 망아지를 낳았다느니, 등등.
지금 당장이라도 세상에 나선다면 명성을 떨칠 이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소소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동네 아저씨들의 수다 정도였다.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것없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둘이 느끼는 행복감이 물씬 묻어났다.
그렇게 한참을 나누던 이야기의 주제가 결혼으로 넘어갔다.
켄드릭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넌 결혼하지 마라…….”
“또 그 소리냐? 난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말해. 지금이 좋아.”
“그 마음가짐 변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계속해 주는 거라고! 결혼하는 순간, 네 행복과 자유는 끝이야!”
나 매우 진지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켄드릭.
그때였다.
크허허헝-.
어디선가 들려오는 호랑이의 울음소리.
이에 켄드릭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 화상이이이! 감히 외박을 해?”
호랑이 울음소리 못지않은 라비나의 우렁찬 고함이 쩌렁쩌렁 피유 밭에 울려 퍼졌다.
이를 들은 켄드릭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를 보며 엘비스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 어제 집에 안 들어갔냐?”
“눈 떠 보니 길바닥이더라…….”
다시 말해 어제 술 먹고 길바닥에서 퍼질러 잤다는 소리였다.
크허헝-.
다시금 들려온 호랑이 울음소리에 켄드릭이 자라목이 되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간다! 내일 저녁에 또 한잔하자고!”
“그래… 네가 살아 있다면 말이지.”
엘비스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켄드릭의 육신이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엘비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순간이었다.
타닥-.
작은 소리와 함께 엘비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크르륵-.
엘비스가 고개를 드니 거대한 뇌호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뇌호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그 머리에 올라탄 라비나였다.
“엘비스! 이 망할 인간 어디 갔어!”
입에서 불을 내뿜을 듯한 라비나의 고성.
이에 엘비스가 화들짝 놀라 말했다.
“조,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그 말에 라비나가 까득 이를 갈았다.
“아주 잡히기만 해 봐라!”
농도 짙은 살기였다.
‘연애할 때는 서로 좋아 죽더니만…….’
지금은 과연 저들이 부부인지 원수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엘비스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어서 빨리 라비나가 사라져 주기를 빌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라비나가 떠나려는 찰나.
“엘비스.”
“어……?”
“한 번만 더 술 먹자고 그 인간 꼬드겨 내면…….”
라비나가 엄지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취했다.
꿀꺽-.
애초에 먼저 술 먹자고 부른 거는 켄드릭이었지만, 차마 대꾸를 할 수 없던 엘비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라비나가 다시금 이를 갈았다.
“이 인간은 대체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가자, 나비! 사냥이다!”
-크헝!
당찬 울음소리를 낸 나비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라졌다.
순식간에 폭풍처럼 몰아친 상황.
마침내 혼자 남게 된 엘비스가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벨과 제롬도 최근에 딸을 낳았다고 했고…….’
티격태격 싸우는 라비나와 켄드릭도 사실 금실이 좋기로 마을에서 유명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전생의 자신과 친구들이 꿈꾸던 평화는 아니었지만, 세상은 어찌 되었든 평화로운 일상을 얻었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거면 충분하지.”
그리 중얼거린 엘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나머지 밭을 돌아보려면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하니까.
* * *
#철수의 이야기
경기도 가평의 한 모처.
깨끗하게 정돈된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말끔한 행색을 한 사내는 놀랍게도 왕철수였다.
그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노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흘렀구나…….’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
남들에게 말하면 미친놈의 헛소리라고 손가락질당할 사건.
얼마 전까지 왕철수는 그 일의 중심에 있었다.
[다음에는 네 이야기를 그려 봐. 그 전에 그림 연습 좀 더 하고.]그런 말을 하며 로이스는 자신을 다시 지구로 돌려보냈고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흘렀다.
단순히 꿈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경험이었다.
시작과 과정은 절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모순되게도 그 일이 왕철수를 바꿔 놓았다.
‘그건… 내 것이 아니었어.’
자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웹툰.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제 것이라 여겼던 작품에 자신이 관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부정도 해 보고 실의에도 빠졌었지만, 온전히 이를 받아들이니 결심이 섰다.
그렇게 지구로 돌아온 왕철수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모신 납골당을 찾았다.
사진 속 환히 웃고 계신 부모님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고 온 그는 십여 년간 어질러져 있던 집을 치우고 정돈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과거의 오점과 얼룩, 부정된 마음도 같이 쓰레기봉투에 담아 내버렸다.
그렇게 정리를 하는 데 들어간 시간만 무려 한 달.
그제야 왕철수는 온전히 마음을 비우고 비로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후우…….”
작게 심호흡을 한 그는 연필을 들었다.
‘그의 말처럼…….’
뭉뚝하게 깎인 연필의 심이 흰 종이에 닿고.
‘이번에는 진짜 내 이야기를 그려 보자.’
곧은 선 하나를 그려 나갔다.
사각사각-.
로이스의 말처럼 그림 연습을 하기 위해.
이번에는 그림다운 그림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가장 기초가 되는 선 긋기부터 연습에 들어간 왕철수.
‘무슨 이야기를 그릴까?’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장면과 이야기가 흘러갔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초능력자물.
그냥 일상적인 개그물 등등.
살짝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무협… 무협으로 하자.”
용(龍)이 나오는 무협이면 더 좋겠지?
그렇게 자신이 그릴 이야기의 뼈대를 상상하며.
사각- 사각-.
왕철수는 계속해서 선 긋기를 연습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