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06
가마 문이 열리고, 마침내 곽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환관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큰 키에 얼굴도 호남형으로 잘 생긴 사내였다. 나이도 어려서 20대 중반에 불과해 보였다.
기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예기에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만만치 않군. 최소한 진유룡 수준이다.’
이 정도 레벨의 고수를 단번에 후임으로 임명한 것을 보면 동창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아냐. 아무리 동창이라고 해도 고수를 그렇게 쉽게 길러낼 수는 없어. 아마 지난번에 진유룡을 업그레이드시켜 준 누군가가 또 다시 솜씨를 발휘한 걸 거야.’
그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동창의 창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들과 깊이 연관되었을 거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곽염에 대해서도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일단, 동창 자체가 자신이 궁주로 있는 혈매궁과 원수지간 아닌가.
기수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곽염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여유 있게 주변을 둘러본 후 주일비를 향해 정중히 포권을 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말투와 언행도 모두 겸손하고 조심스러웠다.
주일비가 황족이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무림맹과의 협조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무림맹 사람들 입장에선 동창에 대해 부정적이던 선입견이 어느 정도 완화되는 느낌은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사해문 소문주 호문평이 친근한 미소와 함께 다가와서 말했다.
“련주님도 들어가 보시지요.”
“내가요? 아닙니다. 격에 맞지 않습니다.”
무림맹주, 군사, 사신단 단주들이 앉는 자리에 비룡검문의 호법에 불과한 자신이 낄 자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련주님은 우리 후기지수들을 대표하는데 격에 맞지 않다니요?”
“나중에 맹주님의 허락부터 받은 뒤에 만나보겠습니다.”
대충 그렇게 얘기하고 그 장소를 벗어난 기수는 사하를 찾아갔다.
동창의 새 천호는 봤고,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게 그녀였기 때문이다.
보타문의 숙소로 가자 여제자가 안으로 들어가 연락을 했고 잠시 후 사하가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표독한 시선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억지로 태연한 어조를 짜내어 물었다.
“왜 여기 있어?”
“환관 구경하는 게 뭐 대수라고.”
냉랭한 어조였다.
기수는 이런 일에 시간과 정신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나한테 화났냐?”
“당연하지!”
기수는 심호흡을 하고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은 전과 같아.”
“흥! 나쁜 자식!”
사하는 주먹으로 기수의 광대뼈를 때렸다.
제대로 맞은 기수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가 천천히 고개를 되돌렸다.
때린 사하가 오히려 놀라고 당황했다.
무방비상태로 그냥 맞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기수가 입을 열었다.
“다른 여자 만난 것은 미안해. 하지만 난 자유롭고 싶어.”
말하면서도 정말 뻔뻔한 소리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상대편 여자가 매달리고, 자살하겠다고 떼를 쓰면 결혼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사하와 처음 잘 때도 분명히 현재에만 충실하자고 얘기한 바 있었다.
‘사하양. 이제 와서 이러면 곤란하지 말입니다.’
그게 기수의 속마음이었다.
그런데 사하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자유롭고 싶다는 사람이 사해문의 사위가 돼? 너도 결국 가문과 돈을 보고 배우자를 정하는 천한 놈이잖아. 그러면서 나한테 그런 가증을 떨었어?”
“웨이러 미닛!… 뭐라고? 누가 사위가 돼?”
사하는 냉소를 지었다.
“흥! 숨기려도 해도 소용없어! 호운혜가 직접 얘기했으니까.”
“아 놔, 씨발….”
욕이 저절로 나왔다.
어쩐지 호문평이 다가와서 친한 척을 하더라니.
자기를 매제라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사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혼한 거…. 아니었어?”
“이 년이 누구 혼사길 막으려고 뻥을 치고 다녀!”
기수는 즉시 호운혜를 찾아갔다. 아무리 못생긴 양십일이라고 해도 본인 동의 없이 정혼자가 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해문과 비룡검문의 결합이라면 모두가 축복해주긴 할 것이었다.
비룡검문의 지명도가 최근에 급상승했고, 특히 양십일은 연속되는 활약으로 용봉련의 련주까지 되지 않았는가.
사해문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고, 호문평이 웃는 표정 지을 만도 했다.
기수가 사해문 숙소로 들어서자 마당에서 문도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던 호문평이 반가이 기수를 맞았다.
“련주님. 어서 오십시오!”
“호소저는 어디 있습니까?”
호문평은 곧바로 그녀를 불러주었다.
“어머! 양호법님. 어디 갔다 오셨어요, 찾았잖아요.”
호운혜가 안기기라도 할 것처럼 달려왔다.
기수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멈추게 한 후 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날 아는 척 하지 마시오.”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우리가 정혼했다는 얘기를 하고 다닌다고 들었소.”
“호호!… 그렇게 하는 게 비룡검문에도 큰 이익이 되니까…”
“그러니까 내 의견은 물을 필요도 없다? 사해문이라는 거대방파의 사위가 되는 게 어디냐? 감지덕지하고 받아들여라. 그런 뜻이오?”
“아!… 그런 뜻은 아니고. 양호법님도 분명히 기뻐하실 거라는 생각에 제가 먼저 추진했어요. 설마 화나신 건 아니죠?”
호운혜는 애교 가득한 얼굴로 생긋 웃었다.
키가 남자보다 크지만 얼굴은 소녀처럼 순진해 보이는 게 호운혜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기수한테는 통하지 않았다.
“화 났소. 그러니 앞으로는 내 눈에 띄지 마시오!”
그리고는 호문평에게만 목례를 한 후 즉시 그곳을 벗어났다.
호운혜가 사색이 되어 따라 나오며 매달렸다.
“양호법님.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기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호운혜는 계속 매달리려 했지만 오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비룡검문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기수는 일단 냉수부터 한 사발 들이켰다.
‘아! 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 이 여자 저 여자 집적대다가 결국 양쪽 모두로부터 낭패를 보다니…’
양다리 행실에 대한 반성을 2초 정도 한 뒤 현실적인 생각을 했다.
‘전부 내 잘못이다. 6명으로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데 고작 2명으로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 건 전적으로 내가 여자를 잘못 고른 탓이야. 둘이 힘을 모아도 될까 말까 한데, 독차지하려고 싸우다니. 에잉~! 앞으론 초이스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겠어.“
채정과 키스하다 독을 먹었고, 호운혜와 숲에서 밤을 보낸 후 유부남이 될 뻔 했다.
세상 여자가 다 나쁜 게 아니라 단지 두 번 꽃뱀을 만난 거라 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지뢰를 조심하면 되는 것이다.
기수는 제자를 불러 출입을 통제해달라고 부탁한 후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지금은 여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단정홍보다 훨씬 파괴력이 강한 화류의 태포련.
그 구결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일단 북궁심법을 연공한 기수는 화류의 호신강기를 조심스럽게, 불이 나지 않을 만큼만 맞춰서 운기한 후 본격적으로 태포련의 구결을 시험해 보았다.
‘이거 좀 이상한데?’
뭔가 처음부터 흐름이 순조롭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한 바퀴 순환시키고 나니까 두 번째는 그나마 좀 나았다.
그래도 이질적인 느낌은 가시지 않았다.
기수는 진기 운용을 중단하고 몸 상태를 면밀히 체크했다.
하단전에 이전보다 강력한 열기가 뭉쳤다는 점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게 태포련인가?’
기수는 그 열기를 조심스럽게 장심으로 이동시켜 보았다.
그러나 그걸 몸 밖으로 발출하는 시도는 차마 해보지 못했다.
합비가 겁을 줬기 때문이다.
‘정말 손바닥이 터지면 어떻게 하지?’
내상이라면 시간이 지나서 회복이라도 할 수 있지만 뼈와 근육이 익으면서 터져나가면 외팔이가 되는 것 아닌가. 그것은 겁나는 일이었다.
결국 기수는 열기를 다시 단전으로 되돌렸다.
다행히 그것을 진기로 변환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화류의 진기운용에 익숙해졌기 때문인 듯 했다.
“아!~ 약해. 양기수. 그걸 못 해보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겁나는 건 겁나는 거다.
멋지게 짠! 하고 신기술을 선보였는데 상대는 멀쩡하고 자기 손만 박살난다면 그보다 더 바보 같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혹시 어르신이 제자 삼으려고 과도하게 겁을 준 거 아닐까?’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언제라도 뽑아낼 수 있도록 연습해두는 거야. 그 다음엔 아주 작게 만들어서 시험해보면 되지 뭐. 그럼 설령 잘못 되더라도 화상을 입는 정도에서 끝날 거야.’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배우고 싶었다.
단정홍이 투입하는 내공 대비 효과 면에서 탁월하긴 하지만, 치명적인 타격으로 따지면 화류의 태포련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어디건 붙잡고 1초 정도 있으면 그 부위가 익어버리는데, 겁먹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수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가는 거야.’
기수는 차분하게 운기를 시작했다.
그때, 제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호법님.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기수는 호흡을 정리한 후 말했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기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호운혜인지, 사하인지 모르지만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한테 중독되면 금단증상 심한 거 알아. 하지만 너흰 자존심도 없냐?’
기수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줄 생각으로 일어났다.
그러자 제자가 기수를 안내했다.
“객청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가 보니 기수를 만나자는 사람은 호운혜나 사하가 아니었다.
찾아온 사람은 놀랍게도 동창의 새 천호인 곽염이었다.
“늦은 시간에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곽염은 인상 좋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포권을 했다.
기수는 그의 인사를 대충 받았다.
곽염보다 훨씬 더 그를 놀라게 만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주 진백과 함께 서 있는 남자.
복장 상태로 보아 그는 개방 제자로 보였다. 일곱 개의 매듭은 장로 혹은 그와 동급인 서열을 의미하는데, 나이는 30대 중후반에 불과했다.
역삼각형 얼굴에 머리와 수염을 어수선하게 기르고, 큰 키와 잘 단련된 근육이 격투기선수를 연상시켰다.
그런데 그에게서 사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아!….무림맹 안에도 사도가 있었구나!“
무림맹주를 배출한 개방 안에 사도라니.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짐작컨데 다른 일을 하다가 최근에 무림맹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발견한 이상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지?’
당장 손을 쓰기는 어려웠다.
상대는 개방의 간부. 자신은 비룡검문의 호법이자 용봉련 련주.
싸울 명분이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혈매궁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창의 천호가 있는 자리.
기수는 일단 곽염에게 자리를 권하고 앉았다.
통성명을 하면서 개방 사내의 이름이 이곤이고 신분이 장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진백은 차를 내오도록 하여 모두에게 권했다.
곽염이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기수에게 말했다.
“제가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은 양호법님이 현현각의 루주를 제압하셨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수는 곽염보다 개방 장로 이곤 쪽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을 힐끔거렸다.
이곤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고 기수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저 자도 나와 똑같이 느끼는구나.’
상대편 입장에서 보면 기수도 신의 사도였다.
그러니 전율과 흥분을 느끼는 것은 이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다만, 경험이 많은 기수와 달리, 이곤은 그 현상을 낯설고 이상하게만 여길 뿐 아직 확정적으로 판단 내리지는 못하는 듯 했다.
‘내 존재에 대해 알아차리기 전에 해치워야 한다.’
그러나 당장은 손이 묶인 상황.
거기에 신경 쓰다 보니 곽염이 뭐라고 하는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진백이 기수에게 말했다.
“현현각 루주 잡은 것에 대해 얘기해보게.”
“예? 아! 예…. 음종의 수법은 기괴하지만 저에겐 통하지 않습니다. 일단 그 소리에 내성만 있으면 그 이후는 아주 쉽습니다.”
곽염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내성이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기수는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부담감을 느꼈다.
“그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냥 저의 진원지기가 음종과 상극인 것 같습니다.”
곽염은 애매모호한 대답에 실망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기수 입장에선 진실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대신 오행류 부분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자세히, 자기가 겪은 일들을 모두 얘기해주었고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해서 결국 곽염의 표정도 풀렸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곽염과 이곤을 전송하고 난 뒤 진백이 기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을 했나?”
“아!…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제삼자인 진백이 그렇게 느꼈다면 이곤에겐 좀 더 적대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기수는 주먹을 쥐었다.
현재의 여건이 어떻건,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