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hwa Manri RAW novel - Chapter 342
기수는 불안했다.
‘이놈! 나와 같은 전율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해!’
지난번에 쓰러트린 사도인 개방의 이곤도 그런 낌새가 있었다.
자기가 사도들을 감지하는 만큼, 그들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놈들 패거리는 지금 한창 예민해져 있는 상태니까 작은 느낌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려 할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기수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그 전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만, 지금 멸천제는 이상하다는 생각만 할 뿐, 그게 자신들의 숙적 출현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선방을 깔까?’
확실치는 않지만 멸천제는 적어도 이곤보다 강해 보였다.
‘어쩌면… 현현각주 사공명보다 강할지도 몰라.’
사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일단 죽이고 본다는 자신의 원칙에 따르자면 지금 선방을 날려야 했다.
하지만 그 뒷처리가 만만치 않았다.
자기 손으로 멸천제를 죽이면 혈천제와 암천제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선방으로 완전히 죽이지 못한다면 자칫 3대1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영과 한백랑이 지금 눈에 콩깍지가 씌인 상태라 최소한 자기를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다른 마령들이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적진 한가운데.
아무리 기수라고 해도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멸천제의 시선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내공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암천제가 멸천제의 주의를 끌었다.
“우리들이 힘을 합친다면 지금의 무림맹을 박살내는 일쯤 쉽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이런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대단히 중요한데 말야.”
멸천제의 인상이 구겨졌다.
“교주님이 내게 맡기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현장에선 약간 변화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거든. 그래서 제안하는데, 투표를 하는 게 어때?”
“투표라니?”
자영이 끼어들었다.
“모두가 원하는 사람이 수장이 되어야 지휘도 순조롭게 이뤄질 거 아냐? 그러니까 우리 네 사람이 각자 수장 될 사람을 추천하는 거야.”
“흥! 어째서 네 사람이란 말이냐? 의자에 앉았다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넌 감히 낄 자리가 못 돼.”
“뭐라고?”
흥분한 자영의 몸 주위로 붉은 강기가 확! 펼쳐졌다.
세 명의 천제와 그 뒤에 선 마령들 모두 그 가공할 살기에 깜짝 놀랐다.
마령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섰지만 천제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저마다의 호신강기로 멸절강기막을 방어해냈다.
기수는 그들의 순간적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암천제는 당황했지만 혈천제와 멸천제는 눈빛이 잠시 변하는 데서 그쳤다.
‘혈천제 너 많이 늘었구나.’
호신강기의 두터움만 봐도 헤어질 당시에 비해 훨씬 강해진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멸천제의 대응은 더욱 민첩하고 강력했다.
‘진짜 만만치 않겠는데…’
암천제가 자영을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손님들을 모셔놓고.”
자영은 강기막을 거둬들였다.
나름 위력시위를 한 셈인데 멸천제와 혈천제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자 살짝 실망한 기색이었다.
암천제가 다시 말했다.
“네게 투표권이 없으니까 다시 나서지 마라.”
그리고 혈천제에게 물었다.
“어때? 멸천제가 자격이 있다고 보나?”
혈천제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굳이 바꿀 이유가 없잖아?”
그녀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암천제의 안색이 굳었다.
그는 강해진 멸천제에 대응해서 혈천제가 공동전선을 구축해줄 거라고 나름 기대했는데 그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사실, 수장이 된다는 것은 교주님에게 점수를 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화살받이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천제는 꼭 자기가 수장이 되고 싶었다.
자존심이라도 보상 받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때 멸천제가 뜻밖의 말을 했다.
“원한다면 네가 수장이 되어도 좋다.”
“그게 정말이냐?”
“어차피 하나의 목적 달성을 위해 힘을 모을 건데, 명령을 누가 내리느냐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한 가지 조건만 수락한다면 기꺼이 네 지휘에 따르겠다.”
암천제가 한껏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뭐냐? 그 조건이란 것이.”
멸천제는 손을 들어 검지로 기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자를 내게 다오.”
“좋다!”
“안 돼!”
암천제와 자영 남매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봤다.
암천제가 인상을 쓰며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것이냐? 저 자는 너의 호위일 뿐, 마령도 아닌데.”
“내 호위니까 안 된다는 거지! 멸천제가 뭔데 감히 내 호위를 달래?”
멸천제는 코웃음을 쳤다.
“싫으면 그만 두고…”
암천제가 자영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놈보다 훨씬 실력 좋은 놈을 호위로 붙여줄 테니까 내게 다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자영에게 있어 양십삼은 절대로 잃을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자신에게 천상의 쾌락을 선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대법을 펼쳐서 내공을 엄청나게 증진시켜주는 인간 영약이기도 했다. 게다가 교주님도 풀지 못한 신공의 문제점을 해결한 무학의 천재가 아닌가.
그렇게 그에 대해 객관적인 정의를 내리고 보니까 지금 원탁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양십삼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영이 강경한 반응을 보이자 암천제가 달래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저놈. 한백랑과 애인 사이인데, 호위끼리 사귀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똑똑하고 무공도 고강한 여자 호위를 구해줄 테니 이번만큼은 내게 양보를 좀 해다오.”
자영은 고개를 돌려 기수와 한백랑을 번갈아 노려봤다.
어떻게 그 사실을 오빠에게 들켰냐고 힐책하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개를 되돌린 자영이 팔짱을 끼고 완고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안 돼!”
암천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기수는 멸천제가 자기를 요구하는 이유를 알았다.
전율의 정체에 대해 의심이 더욱 더 깊어진 게 분명했다.
그 정도로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면 기습 선방도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기수가 자영에게 말했다.
“아가씨. 저를 보내주십시오.”
“뭐라고? 안 돼!”
자영은 깜짝 놀랐지만 암천제는 기뻐했다.
“하하! 봐라. 이 녀석도 가고 싶다고 하지 않느냐.”
자영은 절대 보내고 싶지 않았다.
“왜 가겠다는 거야?”
“저는 이제까지 암천제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 왔습니다. 제가 필요하다고 하시면 목숨이라도 내어드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암천제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암! 그렇고말고. 하하하!….”
자영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연거푸 얘기해도 기수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었다. 오빠가 윗사람이기도 하고, 양십삼 본인이 가겠다는데 너무 고집을 부리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멸천제가 결정적인 말도 보탰다.
“무림맹을 공격하는 기간 동안만이야. 그 뒤엔 돌려보내줄게.”
자영이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양십삼을 원하는 이유가 뭐야? 어디에 쓰려고?”
“곧 큰 전투가 벌어질 건데 쓸 데가 없으려고?”
“이 녀석은 건곤방 출신이라 무공도 대단치 않아.”
“난 말야. 사람을 볼 때 출신성분이나 능력보다 느낌을 중시해. 저 친구는 왠지 모르게 나한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단지 그 이유로?”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자영은 결국 고집을 꺾었다.
“좋아. 돌려보내준다는 약속 지킬 거지?”
“당연하지.”
기수는 멸천제가 거짓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상대가 자기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고 있는데 현재 상태로 싸우면 승산이 없기 때문이었다.
빨리 이 모임을 끝내고 멸천제와 단둘이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그나마 가능성을 만들 수 있었다.
기수는 자영에게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곧 다시 모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군례를 올린 후 아예 멸천제의 뒤쪽으로 가서 두 마령 옆에 섰다.
멸천제의 마령은 둘 다 키가 크고 긴 머리를 뒤로 묶었으며 면도를 깨끗이 한 모습이었는데, 못마땅한 눈빛으로 기수를 노려봤다.
기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냐? 나도 너희들이 마음에 안 든다. 거기에 대해 말이 아닌 주먹으로 해결할 순간이 곧 찾아올 거다.’
그렇게 씩 웃는데, 순간 혈천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기수의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눈만은 언젠가 본 적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기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다.
기수를 팔아 수장이 된 암천제는 신이 나서 병력 배치라던가 집결지, 집결 시간, 보급을 누가 어떻게 하고 진격로는 어떻게 잡을지 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준비를 엄청나게 했다는 티가 났다.
안 시켜줬으면 정말 섭섭해 했을 것 같았다.
암천제가 혈천제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무림맹을 공격했을 때 방어진은 어떤 식으로 운용되었지? 본 대로 자세히 얘기해 봐.”
혈천제는 손짓을 했고, 그녀 뒤에 서있던 마령이 진법 전문용어를 써가면서 자세한 보고를 했다. 그녀는 도면까지 그려가지고 있었다.
암천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이거라면 파진법을 찾아낼 수 있겠군. 수고했어.”
기수는 천마교의 이번 공세가 무림맹에 큰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그러나 지금 자기의 목표는 멸천제.
그를 제거하기만 해도 무림맹에 가해질 위협의 3분지 1은 지울 수 있으니까 일단은 거기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암천제는 다시 한 번 집결지와 일시를 확인시킨 후 회의를 끝냈다.
“잊지 마. 늦으면 벌금이다!‘
원래 마음 같아서는 혼내준다거나 죽인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삼천제 중 자기가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이라 벌금으로 말이 바뀌었다.
모두가 해산하게 되자 기수는 자영에게 안심하라는 표정을 한 번 지어보였고, 혈천제 쪽은 차마 눈을 볼 수가 없어서 몸매만 한 차례 훑어보았다.
멸천제와 두 마령을 따라 그의 진영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멀었다.
한참 경공을 펼치는데 멸천제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두 마령과 기수도 그를 따라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밤. 달빛만 교교히 흐르는 어느 산중턱.
멸천제가 천천히 돌아선 후 기수에게 물었다.
“건곤방 출신이라고 했나?”
“그, 그렇습니다.”
기수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언제라도 강적과 싸울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호승심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건곤방 방주가 아니라 일반 방도 출신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특이하군. 호흡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다니.”
기수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까지 오는 동안 자기 내공에 맞춰 느린 속도로 경공을 시전했기 때문에 들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는데, 멸천제는 자기 호흡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기수는 피식 웃은 후 멸천제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단 하루도, 한시도 거르지 않은 운동이 하나 있어. 바로 숨쉬기 운동이지. 후후후….”
두 마령은 기수의 돌변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
“이놈! 천제님께 이 무슨 무례한 말투냐!”
멸천제는 오히려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그가 차분한 어조로 기수에게 물었다.
“누구냐? 너는.”
기수는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 정황을 한 차례 스캔했다.
반경 1km 이내에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네 사람만의 일이 되는 것이다.
기수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기수의 대답에 멸천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이 느낌이 바로 그거였어.”
두 마령은 멸천제와 기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멸천제가 그들에게 말했다.
“흑승! 등활! 그를 잡아라!”
두 마령은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움직였다.
기수도 즉각 반응하여 놈들에게 잔백지를 날렸다.
멸천제와 얘기하면서부터 진기를 끌어올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마령이 지풍을 튕겨내면서 열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만들어 기수의 팔다리를 움켜쥐어 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