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35
00236 236화
수술가운과 마스크 등을 폐기물수거통에 버린 두 사람이 나란히 개수대로 향했다.
깨끗하게 손을 씻고 난 후 뻐근한 몸을 이끌고 외과로 향할 때였다.
두 사람의 앞에 병원장과 내과장이 나타났다.
시간을 보니 아침나절이다.
그들도 밤을 새워 수술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참관실에 누가 있다는 것조차 잊었었는지 하석준 과장이 아차 한 얼굴로 인사했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자네보다 더 할까.”
“저야 이제 쉬면 됩니다.”
“우리는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보다 말이야.”
병원장이 잠깐 말을 끊자 하석준 과장은 물론 태수도 집중했다.
일부러 대화의 여백을 둔 병원장의 입꼬리가 서서히 벌어져 갔다.
“두 사람 모두 수고했어.”
“감사…… 합니다.”
“그럼 오늘은 푹 쉬도록 해.”
병원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갔다.
하석준 과장의 가슴에 뭔가 뭉클함이 올라올 때였다.
남아 있던 내과장이 하석준 과장에게 말했다.
“이 사람.”
꽈악.
내과장이 하석준 과장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마주한 눈빛에 푸근함이 가득했다.
그거면 됐다.
하석준 과장은 그동안 있었던 껄끄러운 감정이 사르륵 녹는 걸 느꼈다.
“선배님.”
“됐으니까 쉬어. 난 ICU에 잠깐 들어갔다가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하석준 과장과 대화를 마친 내과장은 태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태우와의 일로 태수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은 건 사실이다.
아직 그 감정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수고했어.”
툭.
태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준 후 내과장은 멀어져 갔다.
작은 다독임이었지만 전보다는 감정이 많이 풀어졌다는 걸 증명하는 손길이었다.
모두 멀어져간 후 하석준 과장이 태수에게 말했다.
“치프. 정말 수고 많았어.”
“과장님이야말로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우리 지금 서로 얼굴 보고 있을 컨디션은 아닌 거 같지?”
하석준 과장의 물음에 태수는 얼른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일단 쉬고 이야기하자고.”
“댁으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절대 못가. 숙직실로 가자고.”
하석준 과장은 집까지 돌아갈 기운도 없는지 축 처진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기운이 없는 건 태수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하는 장시간 수술이다.
긴장이 풀리니 피로감은 몇 배로 더해져 갔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저 억지로 몸을 움직여 의국으로 향할 뿐이었다.
이내 의국에 도착한 하석준 과장과 태수는 아무 침대나 쓰러졌다.
침대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자기 침대 찾아갈 정신도 없었다.
누운 지 10초나 지났을까?
“드르렁.”
두 사람은 누구라고 할 거 없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숙직실을 가득 울렸지만 깊게 곯아떨어진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
수술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온 병원에 가득했다.
특히나 의사들이 모이면 수군거렸다.
“GIST 수술 성공했다며?”
“컨퍼런스 때 보니까 그 환자 장난 아니던데.”
“장작 12시간 수술이었대. 그뿐이야? 합병증도 아직까지 없다는 거 같던데.”
“덕분에 외과 분위기가 아주 심상치 않다는데 말이야.”
타과 의사들은 묘한 시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외과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태수도 수술 어시스던트와 병동 관리로 하루가 바빴다.
GIST 수술 성공에 대한 뿌듯함을 느낄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띠리릭.
갑작스러운 휴대폰 벨소리에 태수는 반사적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박성민의 전화였다.
태수는 바로 통화를 연결했다.
“선배님. 어쩐 일이십니까?”
“이거이거, 목소리부터 어깨에 힘 빡 들어갔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수가 의아하게 묻자 박성민은 약간 장난스러운 말투로 응대했다.
“평소라면 ‘네, 존경하는 선배님. 미흡한 후배 최태수가 인사드립니다.’ 이랬을 텐데 말이야.”
“다시 인사할까요?”
“됐다. 내가 엎드려서 절 받을 일 있냐? 그나저나 축하해.”
“감사합니다.”
태수의 수더분한 반응에 박성민은 또 한 번 딴죽을 걸어왔다.
“봐봐. 예전이라면 분명히 ‘아닙니다. 다 과장님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거라고. 목에 너무 힘주지 마라. 그러다가 부러지면 본전도 못 찾아.”
“축하 인사해 주시는 거 치고는 너무 살벌합니다만.”
“자식. 이건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고. 본론은 당연히 따로 있지.”
박성민이 뜸을 들이자 태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본론이요?”
“우리 과장님이 나한테 따로 물어보시더라. 내 후배라는 건 아는데 많이 친하냐고.”
“그래서요?”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다고 했지. 전에 수술한 것도 있으니까 이젠 철썩 같이 믿으시더라고.”
박성민의 넉살 가득한 목소리에 태수는 고개를 털었다.
“그렇다고 치고요.”
“뭐?”
“저 환자 보러 가야 합니다.”
“새끼. 각박해졌어. 좌우간 저번에 네가 이야기한 거 있잖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태수는 문득 비상사태 때 수술 후에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흉부외과에서 지원을 요청하면 수당을 따로 받으며 수술에 참가하겠다는 내용이다.
태수의 얼굴에 슬쩍 기대감이 떠올랐다.
“정말입니까?”
“아직 오케이 받은 건 아니고, 일단 우리 과장님은 널 눈여겨보시는 거 같더라. 우리 태수 많이 컸어.”
“좀 그렇긴 합니다. 어쨌든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태수가 인사하자 박성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다. 태수야.”
“네, 선배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 알지? 확실한 건 아닌데, 전문의들 중에 널 좀 언짢게 느끼는 싸가지들이 있어.”
“이젠 하도 맞아서 아픈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수의 심드렁한 반응에 박성민이 외려 더욱 좋아했다.
“그렇지. 그렇게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배짱이 필요하다니까.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그대로만 해.”
“그러다가 망치가 아니라 해머로 얻어맞으면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벌써부터 고민해서 뭐해?”
박성민의 호쾌한 대답에 태수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진리인 거 같습니다. 그럼 나중에 밥 한 번 사주십시오.”
“사달라고? 그래. 뭐 너한테 밥 한 끼가 대수냐. 먹어라. 아주 실컷 뜯어 먹으라고.”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해라!”
박성민은 시원하게 인사하며 먼저 끊었다.
휴대폰을 손에 든 태수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양으로 음으로 신경 써 주는 박성민의 한결같은 모습이 좋았다.
전문의들이 언짢게 생각한다?
상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현재 할 일을 마무리 짓는 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
동성종합병원에서는 매월 원보를 발행한다.
그동안 병원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을 기사처럼 꾸미는 병원 신문이다.
환자들에게 의료진의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번 달 원보 헤드라인에 커다란 문구가 실렸다.
마지막으로는 ICU에서 회복중인 김명식 환자의 인터뷰가 실렸다.
-처음 GIST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병원을 옮길까 고민했다. 처음 하는 수술은 아니지만 내 경우가 너무도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하지만 소문대로 의사들은 나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줬다. 또한 내 병을 고치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며 연구했다는 이야기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난 의사가 아니라 정확한 수치는 모른다. 확실히 알고 있는 건 내 몸이 점점 건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보는 대부분 외래 쪽에 비치된다.
내원한 환자들이 진찰받기를 기다리며 읽을 수 있도록 눈에 띄고 손에 닿기 좋은 곳에 놓는다.
환자들은 원보를 통해 병원의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병원 내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갔다.
안면이 있는 환자들끼리도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 외과면 얼마 전에 뉴스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렇죠. 저도 그거 때문에 이쪽에 왔으니까요.”
“과장님 실력이 진짜 좋은 가 봐요.”
“그러니까 어려운 수술도 척척 해내겠죠. 뉴스 보고 왔는데 선택 잘 한 거 같네요.”
두 사람만의 대화가 아니라 병원 곳곳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번져 갔다.
원보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송민규가 전화로 태수에게 병동으로 올라갈 환자를 보고했다.
“치프. GIST 환자입니다.”
“또?”
“네. 크기는 대략 3센티미터 정도로 복강경 수술을 생각하신다고 합니다.”
“올려. 자리 만들 테니까.”
“수고하십시오.”
송민규의 인사를 끝으로 통화를 종료한 태수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몇 명째야.”
태수가 중얼거릴 때 옆에 있던 정민수가 한마디 했다.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모양입니다.”
“그런데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건 또 내 성미에 안 맞아서.”
태수는 어깨를 들썩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GIST 환자만 늘어가는 건 아니었다.
위 질환, 그리고 종양과 관련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내원과 입원이 늘어갔다.
덕분에 하석준 과장이 바빴다.
특진비를 지불하더라도 하석준 과장에게 수술을 받길 원하는 환자들이 많은 탓이다.
그렇다고 하석준 과장이 모든 수술을 집도할 수는 없었다.
자연히 전문의들에게 위험도가 현저히 낮은 수술부터 조금씩 집도를 유도했다.
덕분에 전문의들도 GIST나 다른 종양에 대해 때 아닌 공부를 해야 했다.
“나 참. 의학 서적을 이렇게 심도 깊게 뜯어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 우리 외과가 위장, 종양질환 전문도 아닌데 말이야.”
배움에 끝이 없다지만 전문의까지 달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수술할 환자들이 늘어가니 집도를 해야 했다.
아직 하석준 과장과 같이 커다란 종양을 수술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대신 전문의들은 자그마한 종양부터 차근차근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
늦은 밤.
의국에는 당직을 서고 있는 태수와 1년차 강선호만이 자리한 상태였다.
태수는 두꺼운 의학서적을 천천히 뒤적이는 중이었다.
GIST 환자의 경우를 경험 삼아 각종 종양에 대한 공부를 이어갔다.
물론 태수의 머릿속에는 카프레네가 남겨준 지식이 있다.
그 안에는 각종 종양에 대한 원인파악, 증상, 수술방법, 케어까지.
모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수많은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고 수없이 많은 경험을 했다지만 기억력은 유한했다.
이미 알고 있는 병이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꼭 한 번 더 살펴보며 혹시 놓친 건 없는지 확인했다.
비단 GIST 환자로 인해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 건 아니다.
태수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의학 서적을 탐독했다.
가끔 귀찮을 때는 당직 침대에 누워 머릿속으로 카프레네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레지던트들이 입원한 환자들의 증상을 더욱 세세하게 연구하는 것도 태수의 모습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들에게만 무리한 주문을 하는 게 아니다.
태수도 같이 공부했기에 레지던트들이 군말 없이 따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위에서 모범을 보이니 자연스레 나타난 학구열이다.
이런저런 종양에 대해서 살펴보던 태수가 서적을 덮었다.
탁.
의학서적 겉면에는 선명하게 ‘카프레네’라고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