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Devouring Mage RAW novel - Chapter 88
88화
EPISODE.44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발악을 준비하던 찰나.
자신을 보호하듯 앞을 막아선 돌벽에 러셀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이건…….’
평범한 4써클 마법인 어스 월(Earth Wall)이다.
하지만 그 속에 깃들어 있는 마력은 결코 가볍지는 않았던바, 돌처럼 묵직하면서도 단단한 마력에 러셀이 간신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음성이 들려온 방향을 응시했다.
“―?!”
난데없이 난입한 목소리에 놀란 건 휴스 역시 마찬가지.
고개를 비튼 그의 손가락이 당황을 숨기지 못한 듯, 파르르 떨렸다.
그럴 수밖에.
‘이 거리에서, 음성이 들려올 때까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아무리 지치고 상처 입었다고 한들, 자신은 소드마스터였다.
그런 자신의 감각을 속이고 여기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강하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달인(達人)급의 오러 유저, 마법사에 빗대자면 지방의 탑주 급 실력자라는 말이었다.
그런 생각에 대꾸라도 해주듯, 바위처럼 단단한 마력이 일대를 진감시켰다.
쿠르르르르-.
대지 전체가 길게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리에 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느껴지는 마력을 통해 상대가 예상외의 강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탓이다.
‘마스터-.’
벽을 넘어선 초인이 이곳에 와 있었다.
쿠르르르-.
어디선가 느껴본 것만 같은 마력에 고개를 갸웃하길 얼마간, 이내 마력의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
그의 얼굴을 알아본 휴스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마법사라기보다는 동방의 수도승에 가까운 외모와 구리빛의 피부.
전장에서 잃어버린 한쪽 눈을 숨기기 위한 안대까지.
니콜로 마키아벨리.
왕도 황탑의 탑주이자, 엔디미온 소속 최고의 황색 대마도사.
그가 지금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단은-.”
그가 손바닥을 가볍게 털며 말꼬리를 흐렸다.
“자랑스런 본국 마법사의 곁에서 당장 꺼져줬으면 하네만?”
실로 가벼운 한 수.
허나 그 한 수가 만들어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손가락을 타고 흘러나온 마력이 지표를 뒤덮는 것과 동시에, 대지의 일부가 꿀렁였다.
걸쭉한 액체와 같이 녹아내리며 삽시간에 늪의 형상으로 화했다.
콰르륵-!
발 딛고 있던 대지가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광경에 휴스가 바닥을 박차려 했다.
신형을 내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큭?”
걸쭉해진 대지가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콰르르륵-!
하반신이 무릎까지 매몰되는 것과 동시에, 늪처럼 변한 대지가 격류와도 같이 굽이쳤다.
쿠과과과과-!
그 기세 그대로, 휴스를 반대편에 처박았다.
쾅!
허리가 활처럼 꺾이는 고통에 휴스가 신음을 내질렀다.
“꺽-!”
일대가 파도처럼 거칠게 출렁거리며 대지가 무너져 내린다.
거미줄 같은 실금이 쩍쩍 번지며 구덩이가 생겨났다.
쩌적, 쿠과과광!
그 깊이가 수 미터.
“크헉-.”
만약 오러로 허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분명 으스러진 척추가 몸을 뚫고 나왔을 테지.
뼈가 몇 대는 부러진 듯한 고통에 휴스가 신음을 뱉었다.
그 사이, 어느새 러셀의 곁으로 다가온 니콜로가 포션을 땄다.
퐁-.
입안으로 쏟아 넣으며 러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은가?”
괜찮을 리가 없지.
한눈에 봐도 심각해 보이는 중상이다. 포션 한두 병으로 어찌 될 만한 상처가 아니었다.
‘으음.’
뒤틀린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선 일단 뼈부터 맞춰야 했다.
뿐만 아니라, 몸 안으로 침투한 오러를 몰아내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까지.
놀라운 점은, 이만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러셀의 숨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맥라이 휴스, 저 짐승 같은 자를 저기까지 몰아붙였단 말인가.’
소드 마스터에 오른 초인.
그 몸의 절반을 화상 입혀 태워 버리고, 왼팔을 완전히 날려 버린 재주는 결코 5써클 마법사가 벌일 만한 일이 아니었다.
비슷한 수준일 적의 자신은 물론, 헤밍웨이나 다리아가 오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라.
그런데 그 대단한 일을 이 청년이 해낸 것이다.
‘후배의 실력에 감탄을 넘어 경외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뒤이어 흘러나온 러셀의 음성이었다.
“……탑주, 님.”
“말을 아끼시게. 포션을 들이켰다고는 하지만 그건 응급조치일 뿐-.”
“사형은……휴버트 사형과 키옐의 사절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안위보단 타인을 걱정하는 모습이라니.
그 마음 씀씀이에 놀라며 니콜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라면 걱정하지 마시게. 후발대와 안전하게 만나 치료를 받으며 본국으로 이동 중에 있으니.”
“-그렇습니까.”
자신이 이곳에서 놈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던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단 사실에.
그제야 러셀이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고생했네.”
포션 한 통을 더 뜯어 입에 물려주며 니콜로가 손바닥으로 러셀의 이마를 짚었다.
슬립(Sleep).
수면 마법을 통해 고통을 덜어준 후, 몸을 일으켰다.
후둑, 후두둑-.
깊이 수 미터의 구덩이 속에서 맥라이 휴스가 몸을 일으켰다.
과연, 소드 마스터.
아무리 중상을 입었다 해도, 그 정도 상처로 즉사하지는 않았다는 것이겠지.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군.”
콰드드득-.
땅을 강물처럼 움직여 러셀을 뒤쪽으로 물리며 니콜로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꼴사납게 도주하던 패배자 따위가-.”
지지 않겠다는 듯, 휴스가 쏘아붙였다.
그 역시 작금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중상을 입은 몸으로 놈과 싸웠다가는 필패일 것이 당연지사.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스는 도주하지 않았다.
아니, 도주하지 못했다.
눈앞의 상대가 순순히 자신을 보내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했다.
“패배자라.”
틀린 말은 아니로군, 그렇게 말하며 니콜로가 손끝으로 자신의 안대를 훑었다.
전날 입었던 상처가, 이미 사라진 한쪽 눈동자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이런 걸 환지통(幻指痛)이라고 하는 것일 테지.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 실력을 갈고 닦았건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허탈감을 느껴야 하는 상황이지만 니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장소에서 제대로 복수를 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일곱 개의 써클을 빠른 속도로 회전시켰다.
“개인적인 원한을 사사로이 앞세울 수 없을 만큼, 그대는 본국의 대적(對敵)이니까 말이야.”
콰과과과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땅이 쩍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무저갱과도 같은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콰우우우우!
당장에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듯 입을 쩍 벌린 대지에, 휴스가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큭-!”
열에 녹아내리고 있던 살점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론 하늘에선 바위가 포화처럼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검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베어내고 도주하겠건만,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이라.
콰드드득!
팔 하나만을 이용해 간신히 바위 하나를 쳐내는 순간, 쾅!
솟구쳐 오른 대지가 그의 복부를 후려쳤다.
“컥!”
그의 몸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회전하며 튕겨져 나간다. 갈비뼈가 몇 대는 으스러진 것 같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스는 웃었다.
“멍청하기는-.”
가까이에 잡아 두어도 모자랄 마당에, 뒤로 날려 보내주다니.
이건 그야말로 도주하라고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틀려는 순간, 쾅!
묵직한 중력이 그의 몸을 짓눌렀다.
불꽃의 파생마법이 벼락이라면, 대지의 파생마법은 중력.
황탑의 계보, 그 정점에 위치한 니콜로에게 있어 중력 마법은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꺼억-!”
타의로써 바닥에 납작 엎드린 그가 비명을 내질렀다.
뼈와 근육은 물론 내장까지 짓눌리는 것 같았다.
천지사방이 몰려와 온몸을 쥐어짜는 격통.
“끄으…….”
그 속에서 휴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찌그러드는 몸을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것밖에 없었다.
오러의 양이 충분했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육체가 멀쩡하기라도 했더라면-.
‘이까짓 중력 따위.’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그리하기에는 그가 입은 상처가, 심력의 소모가 너무 많았다.
그 대다수가 러셀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였다.
“마법사의 수 싸움을 멍청하다고 비웃을 줄이야.”
“……?”
“우습지도 않군.”
대지를 이용해 놈을 튕겨낸 것은, 도주를 도와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준비해두었던 중력장 속으로 놈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지.
“버러지, 버러지. 그대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이었지.”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떤가, 벌레처럼 바닥을 꿈틀거리며 기어 다니는 감상은?”
휴스가 입술을 씰룩였다.
니콜로의 도발에 뭐라도 한 마디 쏘아 붙여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결코 네놈 때문이 아니라고.
그 비정상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꼬마 마법사 놈 때문이지.
그렇기에 네놈이 내게 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고.
그 순간-.
“으븝-!”
펑-!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압력을 견디다 못한 그의 폐부가 터져나가는 소리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콰득, 우드득!
펑, 뻐엉, 펑-!
뼈와 근육이 으스러지는 소리.
무엇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으브-!”
그로부터 불과 몇 초 후.
제대로 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고, 바닥을 질펀하게 적신 핏물과 고깃덩이로 화한 휴스를 보며 니콜로가 차갑게 일갈했다.
“생각해보니, 벌레는 사람 말을 못 하는군.”
.
.
“…….”
러셀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 꽤 시간이 지난 뒤였다.
화아악-.
빠른 속도로 주변의 풍광이 지나쳐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무시무시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성벽의 모습.
여전히 의식이 흐린 와중이었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무사히……돌아왔구나.’
본국으로.
가까워지는 성벽의 모습이, 지난날 출발했던 것과 일치해서였다.
아마도 지금 자신을 업은 채 성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는 니콜로일 테지.
그 추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니콜로가 바닥을 박찼다.
쾅쾅!
그야말로 수직상승에 가까운 기예라.
한 번의 도약으로 십수 미터를 솟구쳐 오른 그가 단숨에 성벽을 타 넘었다.
팟-!
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의료반, 어서 의료반을 불러오게!”
다급한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성벽까지 달려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들것, 들것을 준비해와!”
“깨끗한 붕대와 포션도 최대한 넉넉하게 챙겨오고!”
“접골, 접골에 능한 사람은 일단 다리뼈부터 맞춰!”
몰려든 의료진들이 러셀의 상태를 살피며 소란을 피워댄다.
‘으-.’
어쩐지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 것만 같은 감각에 러셀이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수마(睡魔)가 몰려들었고-.
[미션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을 지급합니다. 보상으로…….] [미션을 완수하셨습니다.] [보상을…….]그런 러셀의 귓가로, 알림이 들려왔다.
카멜 왕국의 특사 호위와.
소드 마스터의 위험으로부터의 생환.
두 가지 미션이 완수되는 소리였다.
용을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