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47
147화
* * *
21. 과거
먼 옛날 세상에는 나라가 여럿이었다. 왕이 많고 국경이 많으니 전쟁도 많았다. 지금보다 훨씬 물이 풍족한데도 사람들의 고통이 끊이지 않았다.
세상을 평정한 것은 북방의 광평왕이었다.
땅 위에 유일한 왕이 된 그는 온 땅을 같은 법으로 다스리고 질서를 온전히 할 것을 선언했다. 지씨 왕조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멎었다고 화평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왕이 사는 대운관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재화가 모두 대운관에 몰렸다. 그만큼 지방은 피폐해졌다.
지방이 정치력을 잃을수록 수도의 착취는 더 심해졌다. 남운관 역시 소금과 석유를 캐기 위한 변방 기지로 전락했다.
참지 못한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순리였다.
반란의 핵심에는 각 관성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젊은 법술사들이 있었다.
손을 잡고 세를 모은 이들은 단숨에 왕성을 점령하고 왕을 폐했다.
왕국이 해체된 후, 여덟 명의 관성 대표는 각 관성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협력하며 자치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무력으로 타지를 정복하고, 혈통으로 권력을 물려주는 시대가 끝을 고했다.
각지의 물산은 수도에 보내지는 대신 각 관성과 그 속령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게 되었다.
능력을 증명한 법술사만이 권력을 쥘 자격을 얻었고, 그만큼 백성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의무를 짊어졌다.
점점 물이 마르고 물산이 줄어드는 어려움 속에서도 팔대관성은 서로 침탈하지 않고 협력과 자치의 원칙을 지키며 거석의 공격에 맞섰다.
여덟 중시조가 세운 원칙은 후손들의 원칙이 되었고, 격을 가진 법술사들의 통치 원칙이 되어 세상의 질서를 지켜왔다.
여기까지가, 여행하는 동안 틈틈이 시현이 호란에게 이야기해준 세상의 역사였다.
호란은 그렇게 한참 옛날의 이야기는 자신과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시현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았다.
시현은 역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선대와 그 유산을 존중했다.
왕조를 폐한 중시조들 역시 특별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중시조 중 누군가가 쓴 책은 다 외우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책에 돌 인간이나 인류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던 거겠지. 호란은 시현의 망연한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지씨옥의 봉인고를 돌 인간이 만들어주었다. 중시조들은 당연히 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무얼 목표로 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떤 위기가 찾아올지 후대에 경고를 남긴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분명 진실을 알았음에도.
호란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시현도 온성도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넓은 방이 침묵으로 휑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단이었다.
“유하고 그 연구는 어찌하실 겁니까? 유는 지금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데요.”
시현이 얼굴을 들었다.
“아, 그렇구나. 그 문제도 있었지.”
“문이시여. 유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릅니다. 유가 그 물건을 얻은 것도,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은 것도 돌 인간이 나타나기 한참 이전입니다.”
온성이 황급히 말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조약과 연관된 귀물을 사유하고, 관에 보고 없이 임의로 다룬 것은 죄가 될 일이다. 허나 장유도 그대도 모르고 한 일이라는 것, 다른 저의가 없었음을 믿는다. 또한 기회가 닿자 내게 보고하고 목적을 밝힌 것 또한 참작한다. 죄를 사면하도록 하마.”
온성이 엎드리며 감사의 말을 했다. 시현은 손을 젓고 말했다.
“됐다. 해 진 지도 오래인데, 철보와 유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둘을 들라 하자.”
“잠시만요, 나리님.”
단이 다시 말했다.
“유한테 뭐라도 이야기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연구부터 중지시켜야죠.”
“당장은 놓아둘 생각이다. 일단 총치총령과 이야기를 하고, 짬나는 대로 유를 불러 돌 인간의 기술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는지 들어볼 것이다. 연구를 더 하게 할지 중지시킬지도 그때 결정할 것이다.”
“결정은 나중에 하더라도, 미리 언질은 줄 수 있잖습니까.”
“아니다. 지씨옥과 돌 인간에 관해서는 유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알면 도리어 유가 위험해질 것이다.”
“사면령을 내리신다 하셨잖아요.”
시현이 미간을 좁혔다.
“단. 지씨옥은 네 생각보다 훨씬 더 민감한 문제다. 본디는 입에 담는 것조차 죄가 되는 물건이다. 이미 쓰고 없다고 정치적 의미까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호란 앞에서 앞뒤를 소상히 이야기하는 것은 이 문제에서 내가 너희를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는 다르지 않으냐. 사면장을 쓰고 명을 내린다 해도 내가 떠난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문령이니 뭐니 해도 사람의 명은 원래가 온전히 실행되기 어렵다. 조심할수록 좋다.”
“…예. 알겠습니다.”
단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닥 수긍한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유와 철보를 부르러 갔다.
시현은 씁쓸하게 말했다.
“호란, 일찍 쉬어두거라. 내일 관과 이야기한 뒤 경우에 따라서는 바로 봉인고를 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네.”
호란은 잘 준비를 하려고 일어났다.
얽힌 사연은 복잡했지만 호란이 할 일은 평소와 같았다. 쉴 수 있을 때 쉬고, 싸워야 할 때 싸우는 것.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늘 밤 푹 쉬기 어려울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 * *
다음 날 아침, 온성의 집 담 앞에 우아하게 장식된 큰 수레 두 대가 와서 섰다.
사복을 입고 말을 탄 헌수가 하늘인과 반민이 섞인 스무 명 무리를 이끌어 호위로 동행했다.
시현이 쪽마루로 나갔다.
뜨락 가운데에는 눈매가 또렷한 땅인 여자 한 사람이 곧게 서 있었다.
넓은 띠를 하고 풍성한 치마를 입었으며 수 놓은 장포 위에 흰 영건을 드리웠다.
벌꿀색 피부에는 눈꼬리부터 얕게 잔주름이 비치고 있었으나 시현이 알기로 그는 아직 서른셋밖에 되지 않았다.
여자가 허리를 굽히지 않고 예를 한 후 말했다.
“다천관의 심자영 인이 문을 뵙습니다.”
시현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 말했다.
“마중에 사례를 표하오. 어찌 여기까지 직접 오셨는가.”
“문께서 창생을 염려하여 이 먼 길을 오셨으니 마땅히 성 밖에서부터 영접했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라도 성심을 다해 모시려 하니 느리고 모자라다 허물치 말아주십시오.”
시현이 미소 지었다.
“무슨 말을. 오히려 내 쪽이 전갈 없이 입성하여 무례를 범하였소. 내가 관을 찾지 않고 사가에 머무는 것은 여기 온의와 작은 인연이 있어 하는 일이오. 서운하게 여기지 말아 주었으면 하오.”
자영의 눈길이 짧게 온성에게 닿았다. 시현의 말은 관사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계속 온성의 집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자영은 난처한 내색을 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도리어 저희 사려가 닿지 못한 탓이 아니겠습니까. 수레에 오르소서. 독대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쪽 수레에 올랐다. 호란이 뒤를 따랐다.
거처를 옮기지 않기로 한 만큼 단은 일단 온성의 집에 남아 있기로 전날부터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수레와 병사들이 떠나고, 온성도 만날 사람이 있다며 철보를 데리고 바로 집을 나섰다.
단과 둘만 남자 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영과 병사들이 와 있는 동안 잔뜩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마중 오셨던 분, 굉장히 높은 분인가 봐요?”
유의 물음에 단이 한쪽 눈썹을 치켰다.
“모릅니까? 다천관 총치총령이시잖아요.”
“아아! 어쩐지!”
“어쩐지가 아니죠….”
자기 사는 관성 총치총령인데. 얼굴이야 모를 수 있다 해도 이름을… 보통 모르나?
단이 회의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데도 유는 싱글거리기만 했다.
“단 씨는 왜 같이 안 갔어요?”
“어르신들 말씀 나누시는데 제가 따라가서 뭐 하겠습니까.”
“그래도요. 단 씨는 똑똑하잖아요.”
“…….”
똑똑한 거가 무슨 상관인데요. 단은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유의 태평한 목소리만 들어도 속이 콱콱 막혔다.
시현이 다천관 총치부로 거처를 옮기지 않은 건 유 때문이었다.
문이 머문 것이 알려진 이상 이 집이 주목의 대상이 되는 건 피할 수 없다. 유나 수상한 물건이 그득한 광이 눈에 띄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시현이 계속 머무는 동안은 대놓고 들쑤셔볼 생각은 못 할 것이다.
온성이 누가 찾아오기 전에 제가 먼저 사람을 만나러 뛰쳐나간 것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하지만 유는 아무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뭘 들킬까 봐 걱정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가 살살 눈치를 보더니 은근하게 말했다.
“단 씨, 지금 안 바쁘면 나랑 같이 뒷마당 광에 잠깐 가요.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
“…….”
하나도 재미없을 것이다. 단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뒷마당 광에 화약이 잔뜩 쌓여 있고, 그걸 터뜨릴지 묻을지 치울지가 다 남의 손에 달려 있다. 근데 이 자식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좋단다. 같은 공기만 마시고 있어도 속이 터졌다.
“네? 단 씨, 바빠요?”
“그거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요.”
단은 일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유는 기가 죽은 얼굴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는데요, 그래도 좀 더 들어보면 관심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날 진짜 재밌는 얘긴 하나도 못 했거든요. 조금만 더 들어 봐요, 예?”
“그러니까, 이건 재밌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요….”
단은 한숨을 참으며 유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시현에게 채근은 했지만, 사실 유의 연구 문제는 단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뭘 말해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시현은 유가 너무 많은 걸 알면 그만큼 위험해진다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서 유가 딱히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마법 연구도 모자라서 돌 인간, 지씨옥, 땅인들이 숨겨온 비밀까지. 일단 뭐가 잘못되면 사람들은 유의 의도가 뭐였든, 무얼 알았든 몰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시현과 온성이 유를 제대로 보호한다고 해도, 일의 향방에 유의 뜻이 반영될 가망은 거의 없었다.
단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속이 터졌다.
단은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입을 열었다.
“유 씨, 잠깐 얘기 좀 해요.”
유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가 뒷마당을 향하며 말했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아니, 그거 보러 가자는 게 아니라….”
단은 말을 더 하려다가 포기하고 그냥 유를 따라갔다.
이렇게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하려면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이다. 단둘이 얘기하기는 광 안이 나았다.
신이 나서 뒷마당에 간 유는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광을 열었다.
유가 연구실로 쓰는 광은 겉보기만 곳간이지 안쪽은 꽤 제대로 된 연구실이었다.
삼면과 천장에 장대로 여닫는 큰 환기창이 있고, 곳곳에 큰 유등이 달려 조명도 충분했다.
크고 넓은 작업대 둘과 작업용 화로, 각종 공구와 장비가 잔뜩 갖춰져 있었다.
작업물과 재료로 보이는 물건들도 산 같이 많고, 자료를 모아둔 큰 서가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장소가 다 정리 안 된 물건과 먼지로 뒤덮여 난장판이었다.
집안에서 얘기하자고 할걸. 단은 얼굴을 덮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