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69
169화
* * *
정이 든 것은 호란만이 아닌지 유가 단을 붙잡고 뭐라 말하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새벽 조회를 빼먹고 인사를 나온 헌수도 시현의 손을 붙잡은 채 끝없이 걱정과 인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헌수는 호란에게도 일부러 말을 걸어 시현을 잘 모시라 당부했다. 예의범절 배우고 행실 조심하라는 잔소리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지막에 다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 처음 봤을 때와는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인사를 다 마치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성문 밖까지 배웅을 나가면 사람들 눈에 띌까 봐 온성의 집 앞에서 고별을 하기로 한 거였지만 인사가 길어지니 그것도 그리 의미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예를 나누고 시현이 마차에 오르려는데, 온성이 천에 싼 무엇을 불쑥 내밀었다.
“작은 전별이네. 일단 넣어두고 가면서 열어보게.”
모양새를 보면 꽤 두터운 종이 뭉치 같았다. 시현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기습적으로 건네는 것을 보면, 확인하지 않고 받아선 안 될 물건 같은데.”
“눈치가 나쁘지 않군. 이건 내가 사정 좀 잘 봐달라고 주는 뇌물이야. 단이 너무 고생시키지 말게.”
느닷없이 자기 이름이 나오자 마부석에 올라 있던 단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온성이 싱글벙글 웃었다.
“처음부터 그 말 한마디 하려고 자네한테 밥 먹인 건데, 알고 보니 얽힌 일이 너무 크지 않은가. 애가 고생 안 할 도리가 없겠더라고. 데려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뇌물이라도 주고 부탁해야지.”
“그건… 누구에게 부탁을 받지 않아도 나 역시….”
시현은 말하다 말고 눈을 내리깔았다.
단과 호란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야 당연히 시현도 크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온성에게 무슨 약속을 할 수가 없었다.
“아 그러니까, 이걸로 면할 수 있는 고생이 있으면 하나라도 면하라 이 말이야. 단도, 호란이도, 물론 자네도.”
온성이 시현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면서 보퉁이를 더 내밀었다.
시현은 살짝 웃고 보퉁이를 받았다.
“마음에 새기겠네. 어떻게 감사를….”
“에헤이, 인사 이미 다 했는데 얼른 가시게! 원래 청탁으로 뭐 받았을 땐 대놓고 고맙다 소리 하는 거 아니야!”
온성은 훠이훠이 손을 저으며 시현을 수레에 밀어넣다시피 했다.
고삐를 당기기 전 단은 온성에게 약간 길게 목례했다. 곧 말이 움직였다.
새벽 어스름 속에서 일행은 그렇게 온성의 집을 떠났다.
단의 옆자리에 앉은 호란이 물었다.
“뭘까? 온의 나리가 주신 거.”
“어, 소개장이랑 이것저것… 그리고 온의 나리 이름으로 된 백지 어음책. 어젯밤에 나한테 미리 언질 주셨어.”
“돈이야?”
호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방씨 온의의 백지 어음책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눈치였다.
“단순히 돈은 아니지. 돈은 나리님도 안 모자라.”
“그럼?”
“이제부터 갈 지역 사람들한텐 금은보화보다 거래처가 훨씬 절실하거든. 우린 대운관이 아니라 무너진 벽명관 쪽으로 가기로 했잖아. 그 동네 웬만한 어음은 다 휴지 조각이 됐겠지만 온의 나리 건 다르지. 액면의 환전 가치 이전에 연줄로서 가치가 생길 거야.”
호란은 단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온성이 조건도 아낌도 없이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려 했다는 것은 느꼈다.
온성은 남을 통해 이득을 얻는 데 스스럼이 없었고, 그만큼 남이 저를 통해 이득을 얻어가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도움을 잔뜩 받았는데도 빚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신기했다.
어쩐지 뭉클해진 호란이 말했다.
“온의 나리 굉장하네.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헤어졌는데도 여전히 든든한 기분이 들어.”
“그 나리가 좀 그렇지.”
“꼭 실질적인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나리의 마음만으로도 든든해. 진심이 느껴져서 그런가 봐.”
단은 거기 딱히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방씨 온의의 진심은 대체로 심정적 진정성보다는 그 실질적인 위력을 통해 전해지는 편이었다. 빠르건 늦건 일행도 그것을 경험하게 될 예정이었다.
23. 약탈
벽명관으로 향하는 길은 다천관 남쪽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다천관의 통제가 닿지 않는 북쪽으로 갈수록 무리 지은 거석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읍성은 피난민으로 포화상태였고 파괴된 마을과 수원이 도처에 숱했다.
다천관 속령을 벗어나자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거석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사람도 골치를 썩였다.
방랑족인지 피난민인지 구분 안 가는 하늘인 무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일행의 수레를 노려왔다. 어떤 무리는 혼쭐이 나서 도망갔다가도 멀찍이서 얼쩡거리며 틈을 노렸다.
밤낮으로 망을 보다 보니 호란은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흙탕물도 아까운 방랑족 놈들! 다음번에 오는 놈들은 전부 무릎을 거꾸로 접어버릴 거야! 양쪽 다!”
식사 후 풍로를 정리하면서 호란이 식식거렸다.
토막잠에 익숙지 않은 시현이 눈을 문질렀다.
“번 서는 것은 괜찮다만, 이것도 몇 날씩 계속되니 슬슬 지치는구나. 하루라도 마을 울타리 안에서 쉬고 나면 좀 나을 텐데.”
“말씀드리지만 저는 마을을 따라 길을 잡고 있습니다. 있었어야 할 자리에 마을이 없는 것뿐이에요.”
단이 불퉁하게 말했다.
계획한 여정이 망그러진 것도 기쁠 것 없지만, 거석에 짓밟히고 사람이 모두 떠난 마을의 모습은 매번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시현이 기운을 북돋우려는 듯 말했다.
“그러는 중에 무사한 마을도 만날 것이다. 아무리 벽명관이 함락된 지 오래되었다지만, 속령 중에 무사히 버틴 곳이 설마 하나도 없겠느냐.”
“글쎄요. 어차피 이렇게 분위기 흉흉하면 마을 안이라고 안심할 수도 없어서요. 사람이 문제면 뭐, 강도질에 안팎 있나.”
“그도 그렇겠다.”
시현이 씁쓸해했다.
“이럴 때는 일행 머릿수가 아쉽구나. 일전의 보화상단처럼 믿을 수 있는 일행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렵죠. 마력석 팔려고 내려오는 거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 벽명관 쪽으로 올라가려는 무리가 있겠습니까.”
“그래. 그냥 그러면 좋겠거니 해서 해본 말이다.”
시현이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시현은 다천관에서 관병들을 데려올 걸 그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운관이 아니라 무너진 벽명관을 향하는데도 타관 병사 데려가기를 껄끄러워하는 걸 보면 북방의 정세가 제법 복잡한 모양이었다.
자리를 치우고 다시 움직일 차비를 하는데, 시현이 북쪽 구릉 너머 먼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앞쪽에 하늘인 무리가 있구나.”
“또 방랑족 놈들일까요?”
호란이 양 주먹을 쥐었다. 시현이 말했다.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마는 우리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으론 한 무리가 아니다. 살기가 있는 것이 서로 충돌할 것 같은데.”
“자기들끼리 싸우는 거로군요. 그럼 우린 휘말리지 않는 게 낫겠는데요.”
단이 말했지만 호란이 반대했다.
“아니야. 방랑족 놈들이 강도질하는 거면 가서 도와줘야지. 귀찮다고 놔두면 나중에 우리한테 돌아와!”
“일단은 가서 상황을 보자꾸나.”
“네. 뭐 그럼.”
일행은 바로 움직였다. 구릉을 넘으니 곧 시현이 말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상황은 알기 쉬워 보였다. 말이 끄는 짐수레 두 대를 보호하며 도망치는 집단이 하나 있고 다른 무리가 그 뒤를 바싹 쫓고 있었다.
쫓기는 무리는 하늘인과 수레에 탄 반민이 섞인 반면, 쫓는 쪽은 전부 건장한 하늘인에 머릿수도 더 많았다. 쫓기는 쪽의 열세가 뚜렷했다.
수레는 짐 무게 때문에 속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금방 뒤쪽 수레에 추격자 한 사람이 올라탔다.
놈은 수레에 실린 가마니를 짓밟으며 앞쪽으로 갔다. 주먹을 치켜든 태세가 수레를 끄는 말을 공격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누군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손대지 마, 뻔뻔한 놈들아!”
인영 하나가 수레 위 공중으로 몸을 솟구쳐 추격자를 걷어찼다.
떨어져 바닥에 구른 추격자 위로 상대가 짓밟듯 착지해서 추가 타격을 먹였다.
“미친 게 어디 말에 손을 대! 오늘만 살고 말 거야?”
소리친 것은 젊은 여자였다. 키가 훤칠하게 컸지만 목소리엔 아직 앳된 기가 남은 것이 호란 또래거나 한두 살 많아 보였다.
“미친 건 너지! 오늘만 살 것도 너고!”
추격자 무리에서 수염 난 거한 한 명이 소리쳤다.
그걸 기점으로 두 무리의 하늘인들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이것들이!”
“꺼져!”
곧바로 고함과 욕설이 난무하고 피가 튀었다.
무리의 반민들은 수레를 몰아 도망치려 했지만 수가 남는 추격자들에게 바로 따라잡혔다.
수레에 뛰어오른 하늘인 하나가 마부석의 반민을 땅에 팽개치려고 했다.
“난란하라!”
싸우는 두 무리의 바로 위에 얇은 전광이 그물처럼 펼쳐졌다.
코앞을 스치고 머리칼을 쭈뼛 일으켜 세우는 빛과 전기에 다들 화들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싸움터에 거리를 둔 곳에 수레가 서고, 시현이 땅에 내려섰다. 한 보 옆에 호란이 양 주먹을 쥐고 섰다.
“무익한 싸움을 멈춰라. 당장 서로 떨어지거라.”
시현이 뚜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두 무리는 누구 할 것 없이 놀라는 모습이었다. 방금 시현의 마법은 전시효과만을 노린 것으로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땅인이 나타나 마법을 쓴 것만으로도 다들 대경해 있었다.
특히 추격자 집단은 완전히 사색이 되었다.
“과, 관군이다!”
“튀어!”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수염 거한이 팔짓을 하자 추격자 무리는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은 각자 다친 동료를 들쳐업고 두 무리로 갈라지더니 순식간에 반대편 고개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쫓기던 집단은 도망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들 겁먹고 불안한 기색이었다.
“따, 땅님!”
수레에 있던 나이 든 반민 하나가 땅에 내려와 넙죽 절했다. 그것을 보고 다른 반민과 하늘인도 주춤주춤 땅에 엎드렸다.
“다들 괜찮으냐. 상한 사람은 없느냐.”
시현이 질문하자 무리 중 두 사람이 고개를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소리쳤던 여자와 좀 더 나이 든 남자 하나였다. 남자 쪽은 방금 싸움에서 부상을 입었는지 다리를 조금 절뚝였다.
“나리마님. 덕택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시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어찌 된 연유냐. 사정을 말하거라.”
“이건 저희가 제대로 돈 주고 산 식량입니다!”
시현의 물음에 여자 쪽은 바로 방어적인 태도가 되었다. 그가 항변조로 호소했다.
“저흰 저희 식량을 운반하던 것뿐입니다. 놈들이 괜한 트집을 잡아서 뺏어가려고 한 거예요!”
“마을, 마을로 가던 중이었어요. 마을에 먹을 걸 기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직 어린 애들도 있고….”
남자도 말을 덧붙였다. 시현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변명조로 나오는 것이, 그간 여기저기서 시달림을 많이 당한 모양이었다.
시현이 어조를 더 부드럽게 했다.
“마을이 무사하다니 듣던 중 다행이구나. 너희 마을은 어디냐?”
“요 위쪽이요. 거리가 좀 되는데요. 위에, 산골짜기에….”
“골짜기 마을이라면 혹시 소릿골입니까?”
단이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현에게 말했다.
“예, 거기요.”
“멀리까지 나오셨군요. 빨리 움직여도 반나절 거리인데.”
“요즘은 아무도 거처 가까이에서 식량을 사고팔지 않아요.”
여자가 말했다.
“거래 장소에서부터 봐 놓고 따라오는 놈들이 꼭 있으니까요. 중간에 못 따돌리면 밤중에 거처를 습격당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