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unk Rock: Regenerating World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 * *
시현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그가 말했다.
“불가하오.”
“문이시여.”
“정씨 해인이 도리를 못 하였다 하나 악의가 아니라 미숙함에 따른 것이 아닌가. 그 나이에 극에 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를 아니 쉬이 폐격을 말하기 어렵소.”
그 말에 해성은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창희가 조용히 말했다.
“시문이시여, 그것은 사감입니다.”
“더 큰 이유는 달리 있소. 이 일은 선례로 남을 것이오. 문이 자의로 타관의 극상격을 폐하고, 그 결과 총치총령을 쉽게 갈아치운 예를 남겨서는 아니 되오. 자치의 원칙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오.”
“원칙을 논하자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문께서는 창생의 위에 계신 분이자 일세에 무이한 분이니 팔관성 전체, 백 년 후의 미래까지 생각하시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이곳 벽명관의 백성들은 당장 내일 해 뜨는 것을 보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것도 사실이나….”
시현은 고민스러워하며 말했다.
“설령 폐격을 고려한다 해도, 다른 방도를 강구한 연후에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해인께서는 벽명관에 와 있는 대운관의 관인들과 군이 여기 단구읍성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해성이 얼른 대답했다.
“압니다! 대운관 어사가 서로읍성을 떠나자마자 저도 나왔으니까요.”
“쉽지는 않겠으나 그들과 담판하여 해결을 도모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나도 최대한 도울 테니.”
“아….”
해성이 난처한 얼굴을 하고 창희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될까요? 여기는 허락 없이 온 것이라.”
시현이 놀라 물었다.
“허락이라니? 대운관 인사들에게 허락을 구한다는 말이오? 설마 현재 해인에겐 운신의 자유가 없는 것인가?”
“꼭 그런 건 아닌데요…. 아닌가? 그럴지도요.”
해성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벽명관이 깨어지고, 주위의 다른 읍성까지 차례차례 습격당해서 피난할 곳조차 못 정하고 있을 때 대운관군에게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관성 주위의 거석을 몰아내준 것도, 제가 수원을 되살릴 수 있도록 마력석을 지원해준 것도 사실이기는 해요.”
창희가 부연했다.
“그들이 수복한 건 여러 마력석 광산과 그 인근의 읍성, 몇몇 교통 요지뿐이었습니다. 이후에는 해당 지역에서 실질 점령군으로 행동하며 착취를 거듭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저와 다른 고관들을 보호한다며 자리잡은 곳이 서로읍성이었습니다. 다만 모든 일을 그들이 처리했습니다. 제게는 그들이 관리하는 지역의 치수를 청할 때 외에는 보고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들었습니다.”
해성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 말은 핑계만 대며 들어주지 않고,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감시의 눈이 따라붙으니 자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래도 이모님이 보낸 사람을 만날 때까지는 바깥 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몰랐습니다.”
시현이 물었다.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오셨는가? 서로읍성을 나올 때 대운관군이 막아서지는 않았는가?”
“잔뜩 막아서기는 했는데요. 그냥 나왔습니다. 이모님이 마력석을 좀 들여보내 주셨거든요.”
해성이 대수롭잖게 말했다.
“제가 치수만 공부한 수 과목의 인이라 다들 제게 무력이 없는 줄 압니다마는 극에 달한 법술로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요. 아, 문께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마냥 순하고 천진하게만 보였던 소년은 그 한순간 오연함을 드러냈다.
한 영역에서 절대적 강자가 된 자의 무심함, 어쩌면 무정함이라 말할 면모가 그에게도 있었다.
창희가 조용히 말했다.
“저 아이에게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무슨 일에 어떻게 쓸지를 모르는 것뿐이지요.”
시현이 말했다.
“힘 또한 위정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주위의 도움을 얻으면 지금부터라도 바른길을 찾아 나갈 수 있으리라 보는데.”
“저 아이가 성장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럴지도 모릅니다. 다만 성장하는 사이에도 사람이 계속 죽겠지요.”
해성이 고개를 떨구었다. 창희의 말투는 혈연을 대하는 것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매정했다.
창희는 심지어 한 번 더 폐격을 청했다.
“해야는 스스로 원해서 총치총령이 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벽명관에 21년간 극상격이 나지 않았던 탓에 할 수 없이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지금 상황은 해야에게도 가혹합니다. 저는 여전히 폐격이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운관 인사들을 먼저 만나 상황을 보도록 하지. 시간을 두고 숙고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시현은 일단 단구읍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대운관군 본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새벽에 벌여놓은 일을 정리해 두어야 했다.
창희는 대운관 측과 담판할 계획을 짜기 위해 시현의 거처로 초대되었다.
다만 정씨 해인이 벽명의 방랑족 무리에 함께 있다는 것은 잠시 숨겨두기로 했다.
이미 대운관도 알 것은 알고 있겠지만, 현 상황에서 총치총령이 불복종 집단과 함께한다는 것을 공식 표명하는 것은 벽명관에도 대운관에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시현이 읍성 안으로 돌아오자 성문 바로 지척까지 치읍감 소예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에 충돌이 있었을 때는 눈치를 보느라 나와보지도 않더니, 동이 튼 뒤에도 시현이 관아에 오지 않고 벽명의 방랑족들까지 나타나니 슬슬 몸이 단 모양이었다.
시현은 소예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소예가 허둥지둥 쫓아오며 말을 건넸다.
“문이시여…. 가, 간밤에는….”
“아, 그대인가.”
시현이 무감하게 말했다.
“태청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군. 그대들과 하는 일이 도무지 진척이 없어 당분간 내가 직접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그대 또한 그간 마음을 졸였을 텐데 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가서 쉬도록 하라.”
소예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문이시여, 마, 말씀을 조금만 들어주십시오. 제가….”
그는 종종걸음으로 시현을 쫓아오며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시현의 호위 중 관군 출신의 방랑족이 제가 이끄는 무리를 데리고 소예와 시현 사이를 쓱 가로막았다.
소예는 사람들 너머에서 뭐라 호소를 계속했지만 시현은 돌아보지 않고 대령된 수레에 올랐다.
함께 수레에 탄 창희가 짐짓 딱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의외로 잔인한 데가 있으시군요. 면직이나 휴직을 시키실 때는 좀 더 확실하게 ‘자택에 가서 한동안 쉬라’고 말씀해 주셔야 당사자가 쓸데없는 희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면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일하는 데 쓸모가 없으니 정말로 쉬라고 한 것뿐이다.”
“잔인한 분이 맞으십니다.”
창희가 빙긋 웃었다. 말은 그랬지만 아주 꼴좋다는 투인 것이 창희 역시 단구 치읍감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창희가 넌지시 덧붙였다.
“일 못 하는 관리에게 그리 매정한 분이, 해야에게는 너그러우시고.”
시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대는 내가 폐격을 망설이는 것이 사사로운 감정이라고 했지. 하지만 내가 꼭 정씨 해인에 대한 동류의식으로 그리 말한 것은 아니다. 이제껏 나는 한 번도 누구를 폐격한 일이 없다.”
“문께서 해야에게 동류의식을 느끼신다고요?”
창희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 생각하고 말한 것이 아닌가?”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문께서 법술사의 격을 그리 귀하고 신성하게 여기시는 것이 사적인 감정이라 말씀드린 것입니다.”
“…….”
시현은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창희가 말했다.
“격이 없어진다고 법술사가 실제 능력을 잃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격이란 오로지 숱한 법술사 사이에 서열을 정리해 편하게 정치를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정치를 안 할 사람에게 격은 필요 없습니다. 어쩌면 정치할 사람에게도 필요 없을 수 있고요.”
시현은 창희의 말에 반박하기도 수긍하기도 어려웠다. 이 세상에서 법술의 격은 단순히 능력의 지표가 아니라 사람의 위아래 그 자체였고 창희의 주장은 그 근간을 건드리고 있었다.
시현의 표정을 보고 창희가 웃음을 띠었다.
“당황하셨군요. 제 책은 전부 실무서라 이런 말까지는 쓰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대는 저서에서 분명, 백성을 위해서는 관리 될 자들이 법술만이 아니라 법과 행정을 더 많이 공부해야 한다고 하였지.”
“그 역시 제 진심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나중에 생각한 이유입니다.”
“시작은 다른 이유였다는 뜻인가?”
“예. 저는 법술에 재능이 없었습니다.”
창희가 이상하게 가뿐한 얼굴로 고백했다.
“저와 남동생이 아무리 노력한들 상격을 얻어 가문의 계승자가 될 사람은 기감을 타고난 여동생이란 걸 금방 깨달았지요. 그리 결론지은 후엔 책상 앞에 앉아도 딴생각만 나더군요. 정치 잘하는 것과 법술 잘하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싶고.”
“하지만 그대의 주장에는 보편적인 논리가 서 있지 않은가. 백성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자는 뜻을 근간에 두고 있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제 성품을 좀 아는데요, 제가 법술을 잘했으면 법술을 지금보다는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거 같습니다.”
창희가 말했다.
“모든 것이 사적 감정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법이 필요하고요. 제 생각에 극상격만 통치할 수 있는 지금의 법은 좀 멍청합니다.”
시현은 생각에 잠겼다. 수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소에 다다랐다.
* * *
“일을 이리 망쳐 놓고서 나더러 어쩌라는 것이야! 완씨 시문 앞에서 나를 망신 주려고 여기까지 오라 했는가!”
어사가 집어던진 보고서 뭉치는 태청을 맞추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태청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맞았다 한들 땅인이 던진 종이 뭉치 따위는 태청에게 가려운 느낌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사는 그런 앞뒤를 생각하고 성질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대운관 어사 길씨 남의와 그가 거느린 대운관군은 단구읍성을 반나절 거리 남겨놓은 곳에서 진군을 멈추고 있었다.
상황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태청은 보고하러 직접 달려왔고 그 결과 직접 깨지고 있었다.
욕을 퍼부으며 막사 안을 왔다 갔다 하던 남의가 조금 심정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마력석을 얼마나 빼앗겼나? 싸우게 될 경우도 패의 하나로 두어야 해. 그래도 그쪽은 한 명이고 우리는 법술사가 많으니. 전략을 짜기 따라서는….”
태청이 머리를 숙이고 말했다.
“남의시여. 완씨 시문이 행사하는 위력은 지닌 마력석의 양이나 법술사의 인원수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결국 변고 이전에나 잘 나가던 법술사지. 교문께서 하시는 만큼 마력석을 잘 다루지는 못할 것이 아닌가.”
태청은 숙인 채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이 작자는 보고서를 하나도 안 읽었나? 변고 이후 완씨 시문의 행적과 사용하는 법술에 대해 각지에서 올라온 첩보가 그렇게 많았는데.
하지만 태청은 이런 윗전들에게 익숙했고 이럴 때 대답하는 방법도 잘 알았다.
“어찌 감히 교문을 다른 이와 비교하여 입에 올리겠습니까. 다만 교문께서는 멀리 대운관에 계시고 완씨 시문은 목전에 진을 쳤으니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진 치고 행세하게 내버려둔 것이 네놈이 아니야!”
남의는 다시 역정을 내며 막사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쪽에 서서 그 모양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이 말참견을 했다.
“너무 질책하지 마십시오. 남방장군은 젊은 혈기가 넘치다 보니 이런 일은 다소 요령부득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주위에도 젊은 사람뿐이라 충고해줄 이도 없을 것이고.”
말을 한 것은 머리가 반쯤 희끗해진 하늘인 여자였다.
육체적 전성기는 한 옛날에 지나고 여느 하늘인이라면 중요한 자리에서 은퇴했을 연배였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무관복에 부절을 달고 장군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자가 살살 웃으며 덧붙였다.
“설마, 그 혈기를 부리다 시문의 근위에게까지 박살이 나고 망신을 당해 올 줄은 몰랐지만.”
태청은 다시 머리를 숙였다.
“연화 장군께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 대운관군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상장군이라고 하셔야지. 젊은 사람이 왜 자꾸 깜박깜박하시나.”
“예. 상장군.”
대답하는 목소리는 살짝 비틀려 있었다. 태청은 어사 남의를 대할 때와는 달리 들끓는 속을 다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남의는 두 하늘인 사이의 기싸움을 보고 기분이 풀리기라도 했는지 슬그머니 역정을 거두었다.
“이미 그르친 얘기는 됐으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지. 시문이 문제 삼는 게 정말 벽명관 백성들에 대한 처우 그것뿐인가? 따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