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197
어린 떡갈나무 이야기
돌아온 가문에 바라는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버렸던 가문이기도 했고, 이세영은 그동안 오크 가문이라는 명예의 덕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단순히 일을 도와주러 온 것이다.
물론 목적이 그것만 있다고는 하기 뭐하다. 자신을 한 번 내쳤던 자들에게 인정 받고자하는 심리가 이세영을 독촉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성장했어.
아무것도 못한다던 아버지와 달리. 직접 이렇게 컸다고. 자신만만하게 그 낯짝 앞에 소리치고 있었다.
“이기적인 년.”
그런 그녀에게 세영의 언니, 이서현이 말했다.
가문에 돌아온 이세영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뭐?”
회사의 복도에서 서로를 마주 본 채 그녀들은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알아주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자매에게 욕을 들을 줄은 몰랐다.
깨닫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가 이세영에 대한 악담을 퍼붓고 다녔던 탓이었다.
자기들이 중매, 그러니까 접 붙이기를 당하는 이유는 사실 이세영 때문이다.
따위의 같잖은 말들을 꾸며내어 자신의 딸들에게 말을 한 것이다.
“이세영 네가 그렇게 살아서…… 너만 쏙 도망치니까 좋냐?”
“도망쳐 시발? 누가?”
도망친 건, 그딴 쓰레기의 말에 놀아난 너희들이지.
왜 가문에서 옷 한 벌하나 챙겨오지 않은 내가 도망친 년이 되는 건가.
“지랄하네.”
울컥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이세영은 상황을 타파할 방법을 알았다.
말싸움에 질 정도로 그녀가 순하지는 않았던 탓이다.
“도망치는 건 내가 아니지. 정신머리 없는 년아.”
던전을 돌파하다가 죽을 뻔한 기억.
같은 길드 사람들에게 미성년자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뜯긴 보수.
“너는 이딴 가문에서 소갈딱지만한 남자랑 약혼하는 걸 니 마음대로 납득한 거고. 시발 나는 아니었던거고.”
“뭐, 뭐?”
그깟 이만원에 무릎을 꿇은적도 있었다.
“환영하는 건 씨발 바라지도 않았어. 그런데, 그런데……. 하. 진짜. 기분 더럽네.”
몇 백원 부족해서 사지 못한 여러 음식들부터, 몇 번이나 돌려 입은 옷.
물만으로 견디던 어린 생활.
다행인 것은 목인이라는 특성 덕분에 물만으로도 어느 정도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이세영은 사는 방법을 알았다.
“근데 뭐하냐?”
“…어?”
“내가 지금 던전 확충하려고 온 년인데. 쌍욕을 박아?”
그녀는 그녀의 방식대로, 사과를 받아냈다.
하지만 그것이 딱히 충족감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돌아올 장소를 정말 잃어버렸다는 공허함만이 그녀에게 떠돌 뿐이었다.
A급 헌터. 고등학생이 막 된 이세영의 직함.
뒤늦게 가문에 돌아와 자리를 확보했음에도, 다른 자매들이 눈치를 보며 살살 기어도, 전혀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
이세영에겐 가족이 없었다.
사람의 따스함이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과 손을 2초 이상 마주 잡은 적이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포옹은 고사하고, 이성과의 눈맞춤조차 일지 않았던 젊은 나날.
누군가와의 교류보다 눈앞의 몇 천원이 더 소중했던 그녀다.
연애나 사랑.
그런 걸 할 짬이 어디 있을까.
아니지, 애초에 사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이세영에겐 불가능했다.
강제로 그 안을 침범해 온기를 나누려는 자가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깜냥조차 되지 않았다.
굳이 이세영의 어두운 속내를 전부 읽어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하물며 이제 오크 가문의 유일한, 권력을 지닌 여성이라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으므로.
그런 그녀의 마음을 강제로 열어 젖힌 건 몇 명 없었다.
대학. 아카데미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
조별 과제가 싫다.
이 망할 교수연놈들은 친구 없는 사람들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셋씩 짝 지으세요~”
칼질하고 망치질하려고 온 건데 왜 이론같은 걸 배우고 있는 걸까.
절대 친구가 없어서 투정을 부리는 게 아니다.
스무살일적의 이세영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 그냥… 적당히 철판 씌우고 다녀야지.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없는 거지. 동기의 전화번호는 잔뜩 있었다.
뭣도 모르고 친한척해 오는 생도들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조를 만드는 것은 별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따라 한 명의 모습이 눈에 걸렸다.
-우왕 좌왕.
쥐새끼같은 눈빛으로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노란 머리의 여자.
별 모양의 특이한 동공에 이세영은 놀랐다.
“저, 저기… 조-”
별 모양의 여자는 옆자리의 아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으나.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야야! 우리 같이 할래?”
결국 다른 생도들에게 타이밍을 빼앗긴 별 모양의 여자.
“…힝.”
잔뜩 기가 죽어선 혼자 우울해진다.
보고만 있어도 어깨가 축 처질 법한 모습이었다.
“야.”
“…힉, 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는, 그냥 반말 써. 동갑끼리. 조 같이 할래?”
흔하디 흔한 조별 과제, 어수룩한 애들이 또 ppt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든다.
그리고 좀 곤란에 처한 것 같기도 했고.
“이름 뭐야?”
“별… 별이.”
이세영, 별이, 그리고… 그런 둘 사이에 들어온 다른 생도.
조별 과제를 계기로 만났던 셋은 그 날 이후로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었다.
“…저기.”
“응?”
“게임 조아해?”
그 날 이후.
과제 한 번에 친구가 되기라도 한 것 마냥, 별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절하면 풀이 죽을 것 같은 물에 젖은 고양이같은 모습에, 세영이 눈가를 살살 찌푸렸다.
“……뭐?”
“게임! 같이 하자. 기숙사에 잔뜩 있어.”
귀찮은 년.
그렇지만 딱히 악담이 돌아서 나쁠 건 없기에 어울렸다.
다른 사람이랑 논다거나… 하는 경험도 많이 없어서 궁금했기도 했고.
그렇게 일주일.
“카트, 할래?”
“나 시간 없는데.”
“……히잉.”
“……가자.”
“와!”
한 달.
“세영쟝!”
“…그 호칭은 뭐냐?”
“왜, 왜 별로야?”
“쪼끔 등신같애.”
“…등신하지 뭐!”
일 년.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다 보니, 문득 이런 게 친구가 아닌가 싶더라.
기숙사의 방 안에서 이세영은 그걸 느꼈다.
“…쓰알 떴다!”
자신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나무 소녀들을 모으는 핸드폰 게임을 하던 별이.
입 안에 새우깡을 넣고 큼지막한 두 눈을 깜빡인다.
“그게 뭐가 재밌다고 만날 하냐?”
“게임이 재밌는 게 아니라… 우리 애 키우는 맛에 하는 거거든?”
“아 됐어. 영화 보자. 나 이번에 나온 거 보고 싶어. TV 킨다?”
“아아, 움직이지마 과자 떨어진… 꺄악! 내 침대!!!”
“쏘리.”
그렇게 둘이서 온갖 시트콤을 찍고 있으면.
“…니들 뭐하냐?”
세영과 별, 그리고 그녀들과 자주 놀던 운향이 한숨을 쉬며 뒷바라지를 했다.
“낑깡! 나 케이크 먹구 싶어. 세영쟝건 베리베리 블루베리 스트로베리 케이크로. 나는 치즈 케이크.”
“응 나가서 사서 드세요. 그리고 낑깡이 아니라 금귤이야 이년아.”
“그게 그거 아닌감?”
“전혀 달라. 니 스타후르츠가 아니라 카람볼라라고 부른다?”
“안 돼. 상큼한 이름이 더 좋아!”
친해지다 보니 술도 마시게 되고, 처음 알코올을 접한 세영도 마음을 터놓기 시작했다.
깨닫고 보니 셋 다. 여러모로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더라.
이세영, 별, 운향.
태어난 곳도 다른데 마치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구보다 남들의 온기를 느껴본 적이 없었던 세영인 만큼, 누구보다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기 시작했다.
그건 그 셋 전부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세영이 조금 더 병적으로 집착했을 뿐.
그녀의 친구 중, 운향이 죽었을 때는 더 그랬다.
별 건 아니었다.
그저 아카데미에서 일 년에 한 두 번씩 일어나곤 하는 사건에 의한 사망사고.
그 당사자가 그녀의 친구였을 뿐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던전에서 폭주가 일어났고. 운향이 세영과 별을 살리고 그 안에 갇혔다.
던전이 닫히기 직전 빠른 판단으로 세영과 별 대신 자신이 죽겠다는 선택을 한 것이다.
누군가 나 대신 죽는다.
그런 건 상상도 못 해봤고, 무엇보다 그 수혜자가 자신이 될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다.
“야.”
“…응.”
돌아오지 못한 운향. 폐쇄된 던전.
동기의 장례식에서 이세영은 멍하니 서 있다가, 앉아있는 별에게 말했다.
“…넌… 아니다.”
무슨 생각이 났었는데. 말로 나오지 않았다.
평생을 인연 없이 지내던 이세영이 처음 사귀었던 두 인연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소중하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감정인진 모르겠는데.
기분이 몹시 거지 같다.
잃고 보니 다시 이 친구랑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도. 전처럼 서로 무기를 겨누고 훈련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세영쟝. 울어?”
이세영은 몰랐지만 별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세영의 과거를 전해 들은 바도 있고, 그녀의 행동을 옆에서 쭉 보아왔으니까.
가슴이 공허한 만큼, 그것을 채우기 위해 집착한다.
어릴 적에 가족에게 심한 말을 듣고 혼자 자랐으므로. 그때 받지 못한 애정을 다른 곳에 정신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감정 표현은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머리보단 행동이 앞서는 게 아닐까.
별이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거의 반죽음으로 만들어 놨던 걸 보면……. 아마 분명하리라.
별이 내린 이세영에 대한 결론이었다.
*****
[…빠진 부분도 많이 있긴 하지만, 그게 맞을 거야.]핸드폰 전화 시간을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고, 답하고 하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세영이가 그런 사람이라서, 워낙……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려고 하는 그런 점이 있어.]물론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절친이 하는 말에는 전부 이유가 있는 법이고,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걔는… 누구 죽는 거에 민감해. 연인이라면 더 그렇고.]“그런가요.”
들으면 들을수록.
이세영 이 사람…… 별에게 내 온갖 비밀을 전부 말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강간까지 다 이야기 했을까.
그렇다면 별의 말이 한 층 더 신뢰가 든다.
이세영에게 별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니까, 비밀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입 단속을 그렇게 잘하던 양반이 말이다.
[……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별은 말했다.
[네가, 세영이한테 확신이 들게 해줬음 해.]“…….”
어떻게?
질문이 나오려 했지만 꾹 참았다.
“선생님이 그런 줄은 알았는데 거기까지 심할 줄은 몰랐네요.”
[히힝. 걔 집착 겁나 심해. 너 없는 곳에서 나 보이면 달라붙는다?]“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 들켰어?]우리는 서로 가볍게 웃었다.
아무튼, 이세영이 이상할 정도로 나한테 호의를 베푸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부터, 쭉 가지던 물음 중 하나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달래랑 비슷한 과였다.
왜 내 주위에는… 어딘가 결핍이 있는 사람밖에 없는 걸까?
[아 근데. 시헌아.]“네?”
[세영이 어제 비행기 타고 그쪽으로 갔어,]전화에서 울려오는 목소리.
그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야. 등신.”
전화를 받고 있는 내 등에 꼭 붙어오는 감촉.
풍만한 가슴이 날개 뼈에 닿아 뭉개진다.
“드디어 찾았네.”
별이의 행동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이세영이 너무 저돌적인 건가.
타이밍이 왜 이래.
나는 몸을 굳히며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기다란 세영의 녹발이 내 뒷목을 간질였다.
내 어깨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고 귓가에 속삭이는 선생님의 목소리.
“…별이 고년한테 다 들었어.”
그녀의 말에는 분노와 함께.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있었다.
“누구랑 전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