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586
정령의 여왕
에리니에스는 천 년을 넘게 그리워했던 절친과 재회했지만, 상황은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피보다 진한 영혼의 단짝, 과거의 영웅이자 정령술사인 아비가 남자에 의해 망가져 버리고 만 것.
그리고 그 남자가 왕관을 사용했던 왕의 후예라는 것.
‘왜 아바마마께서 왕관을 그토록 경계하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잘못되어도 뭐가 단단히 잘못됐다.
수 천년이라는 빈 공백을 통해, 마력의 양도 정신력도 약해져버린 아비.
저 남자가 왕의 후예라면 어렵지 않게 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비. 처음부터 제가 당신을 지켰더라면….’
에리니에스는 막심한 후회를 곱씹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런 가정은 무의미하겠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눈앞의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풋풋한 처녀가 아니다.
아비는 남자에게 겁탈당해 동화된 가여운 마을의 소녀일 뿐이었다.
에리니에스는 결심과 각오를 싸맸다. 수틀리면 왕관의 힘마저 사용할 작정이었다.
‘다행이에요. 제 손으로 안식을 되찾게 할 수 있어서. 그리고, 미안해요…. 아비.’
공략된 던전은 무너짐에 따라 아비는 영원한 안식에 잠들게 된다.
마음에서 우러나올 정도로 좋아했던, 상냥한 내 친구.
손을 뻗고, 남자를 노린다. 에리니에스의 몸에서 마력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짹? 주인님?]남자의 몸에서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그 우악스러운 손 위에 조그마한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지저귀었다.
‘이 목소리는-’
드센 손길에 잡혀, 짹짹거리는 조그마한 귀여운 나무발바리.
수십년 전부터 들어온 낯이 익은 목소리에 에리니에스의 동공이 지진했다.
‘설마…?’
날개를 쫙 펼친 나무발바리가 남자에게 잡혀 귀엽게 아양을 떤다.
에리니에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어 오르며, 남자에 대한 혐오감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아잉~ 주인님!! 저만 부르신 거예요~?]“응, 네가 필요해서.”
[후후, 여긴 어디에요?]적대하는 것도 아니고, 싫지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살갑게 구는 나무발바리의 몸짓.
에리니에스의 차가운 미소가 일그러졌다.
“엘레오노르…! 왜….”
에리니에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무발바리가 남자의 품에서 고개를 돌린다.
[어, 어마마마!? 그렇다면 주인님… 성공하셨군요?]“그래.”
에리니에스는 저 둘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속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
난 이미 저 남자의 판에 끌어당겨진 거구나.
저 드센 아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단 몇 초.
남자가 노리고 있던 건 그의 말대로 애초에 자신이었다.
“…저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 딸부터 친우까지…. 손을 뻗었다고.”
우아한 정령이라기엔 너무도 비틀린 마력의 형질.
분노로 점철된 그녀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엘레오노르.”
[어, 어마마마…. 화, 화내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전, 전 주인님이랑…. 아차!]주인님이라는 극존칭에 깜빡한 엘레오노르가 부리를 닫아버렸다.
공주라는 사람이 누군가를 모시는 것도 모자라, 주인님?
에리니에스의 머릿속에 며칠 전의 엘레오노르가 떠올랐다.
-어마마마. 인간계에 큰일이 있는데…. 제 계약자가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 혹시 도와주시는 건….
자신을 인간계에 부르도록 유도하듯이 질문했던 엘레오노르.
긴 모험 중, 시련을 맞닥뜨려 지친 딸 아이의 귀여운 투정이라고 생각했었다.
-헤헤… 헤헿.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요? 우리 공주님?
-아, 아녜요!! 히히. 오늘은 계약자랑 엄청 놀았어요!
생각해보면, 그 전에도.
-루시!! 루시 요년 어딨어!!!
-착한 말을 써야지요, 엘레오노르?
-하지만, 하지만!! 루시가 제 소중한 걸 훔쳐갔는 걸요!
그 전에도.
‘…3년이나.’
천천히, 내 혈육을 앗아간 것이로구나.
-드드득.
선명하게 도드라진 핏줄이 팽창하고, 머리에 바짝 열이 올랐다.
에리니에스의 눈앞에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엘레오노르의 투정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마마마! 저는 언능 커서 아바마마의 마력을 받을래요!
-어마마마~~! 푸딩 먹어두 되어요?
-히히 어마마마~ 사랑해요~!
아버지의 마력을 받아 스스로 잉태하고 키워낸 정령.
자신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자, 성내의 귀염둥이.
때론 장난기가 너무 심해 다른 이들에게 미움도 받지만, 늘 식사자리의 분위기를 달궈주는 내 작은 천사.
그런 내 딸 아이가.
이젠 자신을 막으려하고 있었다.
[…어, 어마마마. 손에 그 마력 거둬요.]“엘레오노르. 비키세요.”
[주, 주인님!! 도, 도망쳐요! 여긴 제가 막을 테니까.]“엘레오노르!!!”
에리니에스의 노성이 지축을 뒤흔든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에리니에스의 손길에서 남자를 완전치 쳐부술 마력이 솟아나왔고, 그녀의 머리 위로 왕관이 떠올랐다.
[짹, 째애액!]그 순간 번쩍-!
빛이 솟아나더니 공중에 날아오르던 새 한 마리가 소녀의 형상을 띄우기 시작했다.
충분히 늘어난 정령 감응과 재능, 그리고 마력이 풍부한 환경이 더해져 이루어진 현상.
구불구불하고 긴 머리에, 잠옷을 입은 소녀가 두 팔을 휘휘 내저으며 남자의 앞에 섰다.
“짹짹!!”
사람이 된 줄도 모르고 손을 흔들며 지저귀는 엘레오노르.
남자가 뒤에서 움직임을 보였고. 에리니에스가 마법을 발동하려 했다.
서늘한 분위기가 목젖까지 치미며, 아비와 베니스가 한 발자국 물러났다.
무어라 소리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에리니에스에게 들리지 않았다.
“쭈인님!”
남자의 팔이 엘레오노르의 목을 확 잡아채더니, 말랑한 배를 껴안고 끌어당긴다.
“…헉, 주인님?”
에리니에스의 마력이 직전에 멈추었다.
왜냐하면, 남자의 입가가 벌어지더니 짧은 순간 그녀에게 무어라 중얼거렸으니까.
-멈춰.
뻔히 알았다.
자신의 딸을 인질로 삼는다는 것쯤은.
하지만 적과 거래를 할 정도로 에리니에스는 멍청하지 않았다.
이성을 가지고 남자를 처리하려고 했으나….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마음.
짙은 모성이 가슴을 쥐어뜯었고, 에리니에스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벅찬 숨을 뱉었다.
“엘레오노르와는, 아직 단지 계약에 그치지.”
남자는 숨죽여 경고했다.
“다만, 언제 종속 관계가 될 지는 모르는 일이야.”
그의 우악스런 손길이 귀여운 엘레오노르의 입안에 들어갔다.
“주인님이 날 안았어…! 우읍?! 츄릅!”
“…엘레오노르! 큭, 그만 둬 주세요!”
종속 관계에 들어간다는 건, 더이상 엘레오노르가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계약 관계라면 빠져나올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종속이라면, 남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마음껏 엘레오노르를 휘둘러도 반항할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보란 듯이 소리쳤다.
“엘레오노르.”
“츄읍…네, 네헤 주인님?”
성냥 앞 설탕같이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엘레오노르.
귀여운 소녀가 남자에게 안겨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성적인 접촉은 일절 없었지만 왜인지 행복에 겨워 보이는 표정.
저 남자가 엘레오노르를 덮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어쩌면 이미 엘레오노르는….
“새로운 계약을 하는 건 어때.”
“무슨, 츄읍…. 계약이여?”
“네가 내게 되는 거지, 더 진한 마력을 공급받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 이상.”
“…이상?!”
홀라당 넘어갈 듯한 순진한 말투에 에리니에스가 참다 못해 소리쳤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얼굴이 이성보다 감정이 앞섬을 증명했다.
“그만!”
*****
“원하는 게 무엇이죠? 더 이상 제 딸을 능욕하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아요.”
기세가 한 풀 꺾인 에리니에스가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품이 잔뜩 묻어나오는 얼굴, 귀티가 나는 게 만지면 더러워질까 겁난다.
그 점은 엘레오노르도 동일했다.
실크 재질의 잠옷은 부드럽고, 그 안의 맨살도 말랑말랑 포동포동하다.
귀한 취급을 받았다는 게 천 너머로도 느껴진다.
‘…그런데 얘. 사람이었구나.’
엘레오노르의 모습을 개방시키는 건 지금 내 선에선 일도 아니었다.
정령산에서의 성관계를 통한 성장의 결과다.
“후욱, 후욱….”
가만히 있어 제발.
협박을 하는데 네가 좋아하면 어쩌자는 거냐.
엘레오노르의 자그마한 혀가 손가락을 자꾸만 핥는데, 간지럽고 미끈거려서 몹시 거슬렸다.
등 뒤에서 베니스가 낄낄대는 게 여기까지 들린다. 아비는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에리니에스를 흘기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해. 거물을 상대해야 하는데, 너 정도 되는 마법사가 필요하거든.”
“……고작 그런 이유로, 제 딸과 친구를.”
“장기적인 관계가 된다면 더 없이 좋지.”
에리니에스의 머리에 달린 왕관이 빛난다. 저 왕관에서 튀어나오는 마력의 출력이 상당했다.
지금 꽝 맞붙는다면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다.
최후에야 이기긴 하겠지만, 왕관의 조각에서 힘을 뽑아 쓴다고 할지라도 버거울 터다.
제 영역이 아닌 곳에서 싸우는 정령은 힘의 절반 정도밖에 쓰지 못한다던데, 이곳에서 이 정도의 힘이라면…. 왜 그녀가 정령의 여왕이라 불리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컹.
나는 엘레오노르의 어깨를 쥐어감쌌다. 아주 약간, 고통에 신음이 흘러나오도록.
“흐읏! 아앙~ 주인님!”
내 손길로 속박되는 걸 좋아하는 엘레오노르지만, 어미의 입장에선 고통의 비명으로 들리리라.
“…읏.”
많은 걸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충분히 제 딸을 버릴 수 있는 정령이었다.
나는 엘레오노르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세 손가락을 펴보였다.
“세 번. 내가 필요할 때, 네 힘을 쓰게 해줘.”
“그러면, 응당한 제 요구를 들어주세요.”
“뭘 믿고? 일단 계약을 먼저 해. 아까 말한 내용들 전부 담아서.”
“…….”
에리니에스가 조심스레 얼굴을 끄덕였다.
후회, 포기, 분노, 초조, 혐오…. 여러 감정이 섞인 눈길로 나를 노려보곤, 마력을 펼쳐 색다른 고동을 자아냈다.
-파아앗!
에리니에스의 품에서 황금색의 마력이 찬란하게 펼쳐지더니, 두 석상이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중심에 번쩍 솟아오르더니. 에리니에스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모든 정령의 아버지, 므두셀라님께 맹세하길. 저와 그의 말에 어떠한 거짓이 없음을….”
치욕스런 얼굴로 이를 꽉 물곤, 눈을 감는 에리니에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아직 의지가 남아있는 그 얼굴은 무척 살벌했다.
“여기서 선고합니다.”
에리니에스의 눈꺼풀이 올라가며, 그녀가 내게 요구했다.
“제 딸을 계약에서 완전히 풀어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그 어떤 강제적인 관계도 갖지 마세요.”
“콜.”
내 말이 끊어지기 무섭게, 엘레오노르가 반응했다.
“짹? 주, 주인님…? 계약에서 풀다뇨?”
“그렇게 됐어.”
“잠, 잠깐만요… 싫어요!! 전 주인님이랑 평생 같이 있을-!”
엘레오노르와 교환하여 여왕의 힘을 얻는다면 그만한 이득은 없다.
엘레오노르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소리쳤다. 황당무계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와 제 어미에게.
“싫어!! 어마마마!! 난, 난…! 주인님한테 조금 더 사랑을 받으려고… 이런 걸 원하지는 않았어!”
“엘레오노르. 다 설명할게요. 지금은 먼저 가 있어요.”
언제 또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이 있다.
나중에 또 계약할 수 있으니까. 지금 너무 패닉에 빠지지 말아라.
하지만 그 말을 전해줄 틈은 없었다. 울먹이던 엘레오노르가 내 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툭.
끊어진 연결선 하나.
하지만 보다 선명하고, 강력하며 색이 짙은 선이 나와 에리니에스 사이에 이어졌다.
“…세 번. 세 번이에요.”
엘레오노르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리니에스가 낮게 뇌까렸다.
“그 이상 제가 당신을 도울 일은 없을 거예요”
“모녀 관계는 이미 끊어진 것 같은데.”
“그 입 닥치세요.”
기가 상당히 세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왕관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다룰 수 없는 정령.
강제로 몸을 취하기도 불가능할뿐더러, 한다고 해도 쾌락으로 지배할 수 없다.
에리니에스의 정신력과 의지는 내가 꺾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을 들여 조교할 필요가 있겠어.’
하지만 이어짐이 있다면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첫 시도가 안된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수십 회를 넘게 두드리면 못 열릴 건 없으리라.
일단 지금은…. 나와 동등한 수준의 동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필요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