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616
세 가지 카드 (1)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리 나라고는 해도, 저 녀석은 선이 없다.
도저히 끝을 알 수 없는 강함이다.
‘저게 전력이 아니라니.’
수목의 왕은 차원을 넘어오며 여러 가지 제약을 몸에 걸쳤다.
수천에 달하는 헌터들의 마력이 소모되었다고는 하나, ‘탑’의 마법으로 소환된 존재.
설령 세계수를 흡수했을지라도 놈은 힘을 발휘하는데 제한이 있었다.
‘회복은요?’
‘거의 끝났어.’
‘…최대한 빨리 부탁해요. 상상 이상으로 저항이- 읏.’
놈은 현자가 일으킨 수많은 마법을 그대로 복사하여 따라했다.
중력을 뒤집으면 반대로 되돌리고, 유성이 낙하하면 반대측에서 날아온 유성이 이를 막았다.
마력의 여파에 살이 떨린다.
속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나 혼자서 이길 수 없는 상대다.
만약 녀석이 모든 권능과 힘을 꺼낼 수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강자들은 예고된 죽음을 기다려야 했으리라.
‘…반대로 말하면. 아직은 불완전한 몸이라는 거지.’
내가 던전에 다녀올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힘을 회복했을지는 몰라도.
왕은 지금 이순간에도 본래의 힘을 되찾고 있었다.
지금은 통하는 천마신공과 ‘가시’가 언제 막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금 잡지 않으면,
이 세계는 망한다.
─쨍그랑!
다 마신 포션병을 버리며 비축한 마력을 마기로 치환했다.
【 팔(八)의 형(形) 도원(桃園) 】
두 번째 오의.
단 한 번으로도 몸의 부담이 겹쳐지는 무공을 쉬지 않고 중첩한다.
혈과 단전을 마기로 침식시키는 천마신공의 팔의 형(形).
더 오래 사용할수록 신체는 마기와 동화되며, 힘은 곱절로 증가한다.
─드득!
안구의 실핏줄이 터졌다. 팽창한 근육이 압축되어 보다 단단해졌다.
마기에 침식된 인간의 몸이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
마기에 중독될수록 인체의 생명력은 급격히 추락한다.
내가 완성시킨 힘임에도 부담이 적지 않았다.
‘…네 번.’
천마신공의 극의는 지금 상태로는 네 번이 한계다.
계단식으로 폭주하는 힘의 구간을 잘 나누어 상대해야 했다.
몸을 아낄 생각은 없었고, 내상을 무릅쓴다.
현자의 마법이 꿰뚫림과 동시에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파앗!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날아든 검기가 수목의 왕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가가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간 검기가 악마의 어깻죽지를 찢어발긴다.
지금껏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유효타.
천마신공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와 비슷한 부상이 악마의 몸에 새겨졌다.
“…용사님!”
“말도 안 돼!!”
안젤리카의 비명이 들려오고, 기사단들이 탄사를 내질렀다.
악마의 시선 역시 내 등 뒤를 향해 있었다.
‘정시우인가.’
뒤를 보지 않고 기감으로 느낀다.
여러 색으로 응축된 거대한 마력이 살이 떨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용사.
과거 무수한 재해가 반복되었을 때. 당시 존재했던 강인한 세계수의 힘을 끌어모아 만든 미증유의 힘.
그 의지를 계승한 자의 재능은 누구와도 비할 수 없다던가.
─번쩍!!!
수십 갈래로 나뉘어진 검기가 다시 한 번 악마에게 쏘아져나갔다.
악마는 용사와 마찬가지로 대검을 휘둘러 검기를 잘라냈다.
“시헌아.”
코앞 직전까지 다가온 시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아카데미의 학우가 각 세력의 주축이 되어 만났다.
녀석은 용사라 어떻게 봐도 좋아보이지만 나는 좀 다르다.
악재. 괴물. 추잡한 짓을 일삼는 목령왕의 후예.
그래도 단순 자리로만 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정시우.”
“힘을 받았어. 잠시 동안이지만, 널 따라갈 수 있을 거야.”
“…따라온다고?”
성스러운 빛이 감도는 백발이 휘날린다.
하늘에서 내려온 볕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판도(Pando).
갈라지지 않은 수목의 줄기가 하늘을 장악해 정시우를 따라온다.
‘…….’
악마가 서울을 뒤덮었던 그 힘은 본래 정의의 세계수의 것이었는지.
새하얀 가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악마의 판도(pando)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버렸다.
─파르륵!
붉은 기사의 망토가 흩날린다. 샛노란 갑옷이 발광하며 성검은 성화(聖火)로 불타올랐다.
“내가 틈을 만들게.”
“…네가?”
정시우의 발언에 헛숨을 흘렸다.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그게 과연 될까.
“어떻게든 해야지. 난 여기서 죽을 이유가 없으니까.”
“정말 되겠어?”
“괜찮아. 이 이상 사람들이 죽는 걸 두고 볼 수도 없고.”
정시우가 손을 뻗자 아귀에 새하얀 창대가 나타났다.
커다란 붉은 깃발이 흩날리는 군기(軍旗)가 정시우의 손에서 나타났고.
-쾅!
그것이 아래에 내리 꽂히자 주변 국목과 기사단의 신체에 빛이 돋아났다.
“제 말을 듣는 국목 분들, 기사단 님께 부탁합니다. 왕에게 도움을 주길 주저하지 마세요.”
정시우의 말에 주변이 동요했다.
“무슨 소리를.”
“정시우 용사!”
한 기사단장이 첫말을, 안젤리카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정시우는 그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눈이 어떻게 된 게 아니라면, 지금 적이 누구인지는 분별할 수 있을 터.”
악마는 정시우의 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보면 힘을 비축하는 듯도 보였다.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전장에서 정시우의 카리스마가 모두를 이끌었다.
재능의 개화.
“설령 제 친구가 이후의 적이 될 지라도.”
정시우의 검이 왕의 미간을 노렸다.
나 역시 비축한 힘을 끌어모아 마기를 불태웠다.
“이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입니다.”
정시우는 자신의 정의를 따른다.
세계수의 항의가 좀 들어오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군기가 바람에 휘날린다. 공기에 섞인 은은한 희망이 기사단의 걸음에 힘을 불어넣었다.
-탁!
전쟁의 나팔이 불기라도 하듯. 온 힘을 다해 악마에게 덤벼드는 기사단.
그들의 몸에 갑피가 돋아나며 전력을 향해 부닥치기 시작한다.
국목들도 다르지 않았다.
각자의 길에서 최선을 다해 악마를 향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웅웅!
알바의 보조마법이 나와 정시우를 감싼다.
대검을 든 악마는 왕관을 진동시켜 마력을 끌어모았고, 우리는 나설 준비를 했다.
정시우가 틈을 만든다.
이해했다.
놈을 상대하기 위한 첫 번째 카드.
상황이 안 풀리면 혼자 부딪히려 했는데, 생각보다 좋게 돌아간다.
다른 카드를 쓸 일도 없이 끝난다면 좋겠지만. 글쎄….
일단 부딪혀 봐야 알 것 같았다.
*****
【 신속 】
악마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앞장선 기사들의 목이 순식간에 분리되었다.
가라앉은 바닥에서 ‘가지’들이 튀어나온다.
방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가지’들을 마크해줄 인원이 충분했다는 것.
악마와 부닥칠 역량을 지닌 이들이 수월하게 그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판도(Pando)의 힘을 일깨운 정시우가 앞장서 길을 뚫었다.
판도 아래 강화된 단단한 육신.
그를 지켜보는 세계수들의 힘을 모두 흡수했다.
일시적으로 ‘경지’를 넘은 몸은 목령왕과 비견될만 했다.
-탁, 타악!
두 사람의 발걸음이 얽히며 박자를 맞춘다.
주변의 기사를 몽땅 도륙내버린 악마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맞닿았다.
【 신속 】
다시, 권능.
【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
재차 펼쳐진 보법이 악마의 움직임을 빼앗았지만, 이미 한 번 사용된 힘.
순식간에 무공에서 벗어난 악마가 정시우와 검을 맞댔다.
─콰앙!
흑백이 뒤섞이며 검격이 난무한다.
이합(二合) 검을 걸친 용사와 악마가 산개하듯 떨어지고, 그 뒤를 이시헌이 받아냈다.
─파지직!
이번엔 마기와 마력이 부딪혔다. 이시헌이 물러섰다. 자리를 채운 정시우가 검을 휘두른다.
하나, 둘.
박자를 하나씩 맞추어 천천히.
아카데미의 수행평가라도 하는 듯. 완벽히 이어진 박자가 악마를 밀어붙였다.
네 번의 합 이후 이어진 천마의 오의가 악마를 몰아붙인다.
악마는 검을 휘둘러 무공을 잘라냈고, 정시우의 성검이 그 틈새를 찔러 왕의 갑옷을 두드렸다.
“다시!”
정시우가 소리친다. 이시헌이 틈을 노려 악마의 옆을 찔렀다.
유려한 투로를 밟은 이시헌의 공격과 동시에, 그게 끝나면 정시우가 달려들었다.
딱딱 맞아 떨어지는 호흡.
한 사람이 숨을 뱉으면, 한 사람이 들이쉰다.
호흡을 주기로 서로 바꿔가며 쉴 틈없이 공격을 이어나갔다.
엇갈리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엇박은 기회.
서로 바꿔가며 이어진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두 사람의 공격이 각각 다른 부위를 노려왔고, 악마의 미간이 찌푸러졌다.
【 왜곡 】
악마의 주변 공간이 뒤틀려 성검이 휘어진다. 주먹을 뻗은 이시헌의 팔이 뒤틀렸다.
-멈춰.
시선으로 대화를 나눈 이시헌과 정시우가 동시에 뒤로 물러섰다.
더욱 빨라지는 난전.
박자에 적응한 악마가 점차 두 사람을 밀어붙였다.
‘틈을 만들어야 해.’
호흡이 무너져 오버 페이스로 흘러간다. 정시우의 검격이 악마와 수십 번 맞아떨어졌다.
─쾅! 쾅! 쾅! 쾅!
‘어떻게든 시헌이를.’
팔이 무겁다. 손목이 얼얼하다.
찢어진 뺨과 목에서 피가 흐르고, 정시우의 눈앞이 아득히 멀어졌다.
아직 온 몸의 마력은 끊이지 않았건만. 몸이 먼저 지치겠다.
‘보내야만-’
노란빛 마력이 눈앞에 지나간 것은 그때였다.
─치이익!
미끄러지듯 나타난 귀여운 기사.
투구를 뒤집어쓴 골든 리트리버가 이시헌과 정시우의 사이를 비집고 나타났다.
산수유.
아카데미의 세 라이벌이 한 곳에 모인다. 우격다짐으로 앞으로 전진한 산수유가 빠른 찌르기를 연달아 내질렀다.
【 석조(石棗) 팔기나찰(八氣羅刹) 】
무지막지한 마력이 검 끝에 동그랗게 맺혀 악마의 명치를 꿰뚫으려 한다.
방어와 강인의 극한.
악마의 몸에서 무수하게 펼쳐진 권능과 마법을 모조리 흡수하여 막아낸 산수유.
코에서 피가 흐르지만 둘을 돕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 석조(石棗) · 산수유 】
마지막까지 검짓을 휘두르며 떨어진다.
“시언, 부탁-!”
이시헌의 손에서 마기가 응축되고, 정시우가 산수유의 뒤를 이었다.
다른 길을 걷고, 각자 강해졌다.
같은 자리에 서서. 비슷한 문양을 달고.
훈련장의 AI로 기록된 기계와 싸우며 검술을 기르고.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할 때도 있었다.
온몸에 백색 마력을 두른 정시우가 흉흉한 투기를 일깨워 달려들었다.
악마의 대검이 정시우를 후려친다. 경갑이 작살나고 이음새가 떨어져 나갔다.
직후 내리친 이격.
콰득!
정시우가 검을 치켜 올려 악마의 대검을 맞받아냈다.
“절대….”
눈을 번뜩인 정시우의 검에서 검기가 요동쳤다.
중간고사에 잠깐 술을 나눴던 그때가 떠오른다.
웃기지 말라며, 서로 봐주기 없기로 했던 그 시절.
이시헌은 우스꽝스럽게 먼저 쓰러졌고. 서로 병실에 실려 갔었다.
조금의 시간을 끈다.
이를 악문 정시우의 검이 일시적으로 나마 악마를 밀어냈다.
“…끄으으윽!!”
온 힘을 쏟아, 모든 마력을 담아. 검을 밀쳐내고 전진해 검격을 내리붓는다.
-쾅!
밀려난 악마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지금이다.
“이시-”
힘을 너무 지나치게 사용했을까. 말도 안 나온다.
악마의 검짓이 정시우의 상체를 갈라버렸다. 괜찮다. 정시우의 등 뒤에서 두 번째 천도(天桃)를 장착한 이시헌이 한 발자국 내딛었다.
“…….”
“……!”
악마는 자세를 빠르게 되잡아 보려고 했지만.
【 점멸(點滅) 】
점멸은 알바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시헌의 몸이 악마의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직후 배후를 점한 그가 온 힘을 다한 오의를 때려박았다.
【 천마신공(天魔神功) 칠(七)의 형(形) 천도(天桃) 】
눈앞이 마기로 점철된다.
하늘도 땅도 사라지고, 일어난 파동이 악마를 집어삼켰다.
직격타.
흑안개가 질척하게 주변에 달라붙고. 검은 꽃잎이 휘날린다.
팔 한 쪽이 검은 반점으로 뒤덮인 이시헌의 몰골은 처참했다. 산수유나 정시우도 마찬가지다.
─저벅.
그러나 직후 울린 발소리에 세 사람은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악마는 살아있었다.
여전히 거대한 마력을 품은 상태 그대로.
허무하고 절망이 가득찬 전선.
아직 이성을 놓지 않은 이시헌이 속으로 말했다.
‘파악했나.’
정령 여왕, 에리니에스에게 내뱉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