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17
117====================
류한
“대련을요?”
“네.”
정현욱은 뜬금없이 찾아와 자신에게 대련을 요청하는 박수진을 보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안 됩니다.”
“왜죠?”
“그게, 음……”
자칫 그가 박수진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마 세현이 매우 싫어할 것이다.
그는 남궁세가의 무공을 익혔다. 그리고 세현은 남궁세가를 굉장히 싫어한다.
거의 대부분의 일에 이성적인 길드장 세현이 감정에 치우쳐서 대하는 몇 안 되는 일이 바로 남궁세가에 관련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정현욱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박수진은 세현의 제자, 그것도 가장 집중적인 지도를 받는 애제자다. 허락도 없이 함부로 대련을 해줬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다.
“강하신 것 다 알아요.”
“길드장님께 허락을 받고 오시면 해드리겠습니다.”
정현욱이 양보할 수 있는 최대였다. 허나 박수진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은 이미 받았어요.”
“예?”
“사부님께 허락을 받고 온 거예요.”
아,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대련을 해달라고 한 건가.
잠시 고민하던 정현욱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허락을 받았다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 역시 무림에서 칼밥먹고 살던 무인, 비록 대련이라지만 싸움을 피하는 성격이 아니다.
“어디서 할까요? 지하 훈련장?”
“아니요.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크로나드 숲으로 가요.”
지하 훈련장은 넓지만 항상 길드원들이 북적이는 곳이기도 하다. 박수진은 정현욱과의 대련을 그런 산만한 곳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
정현욱 역시 그녀의 속내를 익히 짐작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나드 숲으로 통하는 포탈은 멀지도 않다.
잠시 후, 곧장 이동을 시작해 목적지에 도착한 그들은 포탈을 지키던 길드원들에게 순찰이라는 용무를 대고 크로나드 숲에 입장했다. 지금은 딱히 류한 길드원들이 이곳에 들어올 시간이 아니니, 방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포탈에서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자리를 잡은 후, 박수진은 곧장 검을 뽑았다. 그녀가 든 것은 전설 아이템 바람 정령의 숨결이다.
정현욱이 든 검은 최근 길드의 전투원들에게 보급되기 시작된, 다르바드에서 난 금속과 샬란 장인들의 솜씨가 들어간 명검이었다.
– 다르바드의 샬란 장인들이 동맹 세력 류한을 위해 제작한 완성도 높은 명검. 제련 과정에서 베르제크의 심장으로 인한 악마의 숨결이 깃들었다. – ]
이전에 사용하던 크로나드 성기사단 장검보다 훨씬 좋은 옵션의 무기다. 정현욱은 제 무기를 뽑아들고 잠시간 거울처럼 매끄러운 회색빛 광택의 날을 살폈다.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검이다. 무림에서 이런 검이 있었다면 단번에 휘황찬란한 이름이 붙고 백대명검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들이 줄줄이 달렸을 것이다.
“제가 먼저 갈까요?”
그러는 사이, 박수진이 자세를 잡으며 물었다. 곧장 대련을 시작하려는 그녀의 태도를 본 정현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자세를 잡았다.
“선공하세요. 양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박수진은 사양없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그녀는 세현과 정현욱이 처음 이승원 소령의 캠프에서 만났던 날, 그곳에 김유린과 함께 있었다. 그래서 정현욱이 최소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다. 방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선공을 양보했으니 그 이점을 취해야 한다.
전력으로 펼쳐진 암향표를 타고 순식간에 접근한 그녀가 첫초부터 칠절매화검을 펼쳤다. 은은한 자색빛 검기와 함께 희끗한 바람이 칼날을 감싸고 매섭게 짓쳐든다.
그에 정현욱이 걸음을 옮기며 검을 들었다. 무한보, 그리고 청풍신법, 이어지는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
하늘을 연상시키는 선명하고 밝은 푸른빛 기운이 박수진의 검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선명하게 뿜어지며 사방으로 날아드는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검과 검이 부딪치고 폭음이 터진다. 현란하게 펼쳐지는 칠절매화검은 금방이라도 상대의 요혈을 꿰뚫을 기세였으나, 모든 공격이 깔끔하게 가로막혔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강렬한 충격과 함께 그녀의 검이 방향을 잃고 드러난 틈새로 한줄기 번개가 뻗어졌다.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
창궁무애검법과는 달리 극한의 쾌를 추구하는 검술.
박수진은 채 피할 틈도 없이 제 목 앞에 겨눠진 예리한 회색빛 칼날을 보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겨우 30초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가 25초 정도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부었고, 남은 5초에 공격이 가로막히며 검이 튕겨나가 방향을 잃었다.
그 틈새로 섬전처럼 날아든 칼날에 심장이 덜컥 멈추는 듯하던 느낌이 생생하다. 평소 사부인 세현과 대련하며 겪은 검과는 전혀 달랐다.
“좀 더 최선을 다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때, 정현욱이 그렇게 말했다. 박수진이 티나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방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상대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최선을 다하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가도 될까요?”
차분한 어조로 살벌한 말을 내뱉는 그녀를 보던 정현욱이 허허허, 웃음을 흘렸다. 듣기에 따라 상당히 건방질 수도 있는 말이다. 허나 그는 박수진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일 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이 직접 가르치는 애제자의 실력과 재능은 과연 어느 정도인가.
“그렇게 하세요.”
대답과 동시에 박수진이 다시금 땅을 박찼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으며 자색 검기를 머금은 공격을 뻗는 그녀를 향해, 정현욱은 웃음을 거두며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한 쌍의 남녀가 제각각 다른 빛을 머금은 검을 휘두르며 가공할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는다. 흡사 훌륭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었으나, 그런 꾸며진 영상으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흉포함 또한 있었다.
정현욱은 확실히 제법 까다로워진 박수진의 공격을 방어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던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진 그 공격들은 과연 검신의 제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마치 모범답안과 같은,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음이 여지없이 느껴지는 완성도 높은 검술이다. 펼치는 모든 초식들이 태엽처럼 맞물리며 정밀한 기계처럼 퍼부어지고 있었다.
칠절매화검 삼초식에서 일초식으로, 다시 이초식에서 이십사수매화검의 팔초식 후 삼초식에서 일초식으로.
그 모든 변화와 연계가 물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보다 하수라면 뭐 어떻게 해볼 사이도 없이 죽을 것이고, 비슷한 실력이라면 끊어지지 않는 첨예한 공세를 견디다 못해 결국 무릎을 꿇을 것이다. 설혹 보다 높은 실력을 갖고 있더라도 한 번 기세를 빼앗기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정현욱은 세현에게 주요한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어 검강을 다루는 경지에 올라선 후였다.
깨달음이란 단순히 검기에서 검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검술을 보는 시야가 그만큼 넓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현재의 박수진으로서는 미처 깨닫지 못할 단점이 눈에 보였다. 정현욱은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했다.
어느 한순간, 오로지 안전한 방어를 위해 움직이던 그의 검이 알 수 없는 확신을 담아 호쾌하게 전면을 베었다. 번쩍이는 푸른빛 섬광이 수십의 변화를 동반하고 날아들던 박수진의 공세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박수진은 간신히 검을 놓치지 않았다. 허나 손아귀가 찢어지는 부상과 함께 공격권을 빼앗겼다. 이제는 정현욱의 차례였다.
푸른빛이 번쩍일 때마다 그녀는 정신없이 뒤로 물러서며 방어에 급급했다. 처음 상대해보는 그의 검술은 세현의 것과는 다른 형태로 빠르고 강했다.
얼핏 단순하고 정직한 듯하지만, 예상했던 타이밍보다 한 박자 빠르게 도달해 그녀의 방어를 부숴버릴 듯 두들기고는 순식간에 물러선다. 그리고 다시 날아드는 참격, 참격, 참격.
정현욱은 철저하게 박수진의 수준으로 힘과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허나 지금 보이는 모습은 그가 압도적으로 박수진을 밀어붙이는 형세였다.
애초에 남궁세가의 검은 패(覇) 그리고 쾌(快)다. 속도를 타고 변화로서 나서야 할 화산의 검이 기세를 잃고 주춤하니 정면에서 쏟아지는 강하고 빠른 일격에 형편없이 밀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결국 손아귀가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박수진이 검을 놓쳤다. 주인의 손아귀를 벗어난 검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아 뒤쪽의 땅에 푹 하고 박혔다. 동시에, 정현욱은 검을 회수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박수진은 호흡을 고르며 피가 뚝뚝 흐르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가슴에서 용암이 끓는 느낌이었다.
질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져버릴 수 있는 건지.
그동안 그녀가 쏟아부었던 노력이 무색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예상보다 한참이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패배한 탓에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중간까지는 분명 유리했다.
이번 대련에서 정현욱은 그녀에게 수준을 맞춰준 상태로 임했다. 그런데도 고수가 하수를 가지고 놀듯 당해버렸다.
애서 마음을 추스르는 그녀의 눈앞에 불쑥, 선명한 붉은빛이 도는 액체가 담긴 상급 치료용 포션이 나타났다.
“쓰세요. 그 상태로 다시 대련할 수는 없잖아요?”
“……제가 어째서 진 거죠?”
“공격이 너무 정직하니까요.”
박수진이 미약하게 해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검술을 보고 정직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그건 틀린 소리가 아니다.
“검술의 형(形)이 변화무쌍해봤자 노리는 부위가 한정되어 있으면 그만큼 예측도 쉬워지는 법입니다.”
“아.”
“꼭 상대의 급소를 공격하거나 중상을 입히는 게 목적일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곳을 노려도 충분히 괜찮은데…… 그런데 박수진 씨는 원래 목표가 아닌 곳을 노릴 때 빈틈이 생기더군요. 그 부분은 좀 보완해야겠습니다.”
“……”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어요. 박수진 씨가 검을 익힌 시간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충분히, 아니, 과하게 뛰어난 수준이니까요. 오늘은 저와 실컷 대련이나 하고, 무엇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는 길드장님께 상담하시면 될 겁니다.”
정현욱은 그렇게 말하며 한차례 웃었다. 박수진은 고개를 끄덕임과 함께 그가 내밀고 있던 상급 치료용 포션을 받아들었다.
상급은 상급인 이유가 있다. 효과도 확실하거니와 치료될 때의 고통도 덜하다. 덕분에 빠르고 상쾌하게 원래의 손을 되찾은 그녀는 놓쳐버린 검으로 다가가 다시 그것을 집어들었다.
“다시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애초에 횟수 제한을 걸고 대련을 수락한 것도 아닌데요.”
정현욱은 그녀가 원하는 만큼, 가능한 오래 대련을 해줄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후학을 보는 기분이라 세현의 제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뭔가를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
검술에 대한 것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 하지만 경험에 대한 부분은 충분히 가르쳐줄 수 있다.
그는 건너편에서 전의를 불태우는 박수진을 보며 마주 자세를 잡았다.
가끔은 애들을 돌보는 것에서 벗어나 이런 일탈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듯하다.
============================ 작품 후기 ============================
부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참한 성의를 봐서 추천! 꾹! 부탁드립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