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DOS RAW novel - Chapter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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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그것을 세현만 알아챈 것이 아니었다.
화산파 장로 중 한 명이었던 단종리라는 이도 세현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는 세현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순전히 늙지 않는 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세현에겐 두 번째 기연이었다.
그렇게 20년이 흐르자, 세현은 어느새 장로직 후보가 되었다.
다시 10년이 흐르자 그는 장로가 되었고.
또 다시 10년이 흘러 그는 장문인이 됐다.
약 50년 전, 이름도 없는 숲에서 한낱 짐승들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던 청년이 어느새 거대 무림을 지배하는 열 개 단체 중 하나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그것은 때마침 화산파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던 때였고, 또한 화산파 자체가 핏줄을 중요시하지 않는 도가계열의 문파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모로 운이 좋았고 상황도 따라줬다.
물론 단순히 운만 좋았던 건 아니다.
근 50년 동안 오로지 무공 만을 미친듯이 파고들었던 세현은 분명하게 재능이 있었고 머리도 좋았다. 그리고 은밀히 다가오는 각종 암투를 방어하고 역으로 상대를 공격할 정도의 교활함과 과감성도 있었다.
그가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었을 때, 그는 무림에서 화산신검이라 불렸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는 한 손에 꼽았다.
“그러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술법사들을 찾아다니는 거였어. 소문이 도니까 알아서 먼저 찾아오더라고. 덕분에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아서 돌아올 수 있었지. 화산파 내부에서도 늙지 않는 내가 장기집권을 할까봐 우려하던 놈들이 꽤 있어서, 오히려 등을 떠밀더라고.”
“고생 많았구나.”
혜진은 그저 그렇게 말하면서 세현을 위로했다.
이야기야 간결했지만, 어찌 60년의 세월이 이 짧은 이야기에 모두 정리될 수 있을까.
아마 중간에 간단하게 생략된 수많은 사건들에서 세현은 세월이 무엇인지 직접 느끼고 겪었으리라. 혜진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근데, 이런 이야기 저 사람들이 들어도 되는 거야?”
혜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슬쩍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저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모를 김유린 가족이 있었다.
“걱정 마. 못 들었으니까.”
세현이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을 튕기자, 언제부턴가 세현과 혜진을 감싸고 있던 기막이 한순간 자색으로 번쩍였다. 혜진은 그제야 기막의 존재를 알아챘다.
“나도 이런 거 나중에 할 수 있어?”
“그럼.”
“이것 덕분에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거지? 그러면, 저 여자 어떻게 생각해?”
“저 여자?”
혜진이 한 쪽을 슬쩍 가리켰다.
“네 친구 어머니 말이야.”
“왜?”
“태도가 별로 고마울 줄 모르는 거 같아서. 무공 가르쳐줄 생각 아냐?”
세현은 피식 웃었다.
“일단 각성부터 시키고 쓸 만한지 보려고. 어떤 직업으로 각성하느냐도 봐야 하고.”
“난 그냥 좀 걱정이 돼서. 아무한테나 무공을 알려주면 손해만 볼까봐……”
“그런 건 내가 더 철저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는 혜진을 안심시키며 펼쳐놓은 기막을 해제했다. 식사도 대충 끝났으니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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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각성을 시켜줄 겁니다.”
세현의 담담한 말에 김인환과 이예슬, 김유린이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식사를 하면서 대략적인 설명을 해줬기 때문에, 각성이 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김인환 씨, 호텔이 어디 쪽이라고 했었죠?”
“저쪽입니다.”
“그럼 이동하면서 하죠. 어차피 번화가라 했으니 사냥감도 많을 테고, 그 전에, 우리가 좀비라 부르는 놈들의 약점부터 알려주겠습니다.”
일행은 김인환이 알려준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트의 뒤쪽으로 돌아 번화가로 들어서자 이전보다 더욱 난장판이 된 거리의 모습이 들어온다. 길가의 상점들 대부분은 유리창이 깨져 있었고 특히 편의점 같은 곳은 더더욱 난장판이었다.
“구르륵… 구르륵……”
사람이 많이 다니던 길인 만큼 햇빛을 피해 상점 안에 웅크린 좀비들이 꽤 많았다. 그것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구석에 숨어 알 수 없는 거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크흠.”
세현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놈들은 생각보다 청력이 좋지 않은 모양인지 별 반응이 없다. 몇 번 더 목소리를 높이며 숫자를 세던 그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그제야 가장 가까이 있던 좀비 몇 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청력이 그리 좋진 않네요.”
“캬아악-!”
먹잇감을 발견한 좀비가 날카로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 연쇄적으로 다른 좀비들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제각각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일순간 상점들을 뛰쳐나오기 시작한 좀비의 수는 적어도 40마리 이상!
김인환의 가족들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반면 세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미친듯이 달려오는 좀비들에게 양손을 뿌렸다.
그의 열 손가락에서 두세 차례 자색빛 탄지가 쏘아졌다.
그건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어지간한 공포영화보다 더 공포스럽게 달려들던 좀비들이, 전부 나무토막처럼 굳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짜고 치는 연극처럼 어색하기까지 한 광경이다.
“자, 그럼.”
가장 가까이 달려와 나뒹군 좀비는 젊은 남자였다. 태연히 그 좀비에게 다가간 세현이 혜진과 김인환 일행을 보며 말했다.
“잘 봐요.”
푹!
그의 손이 거침없이 좀비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꺅!”
“야, 야! 너, 너 미쳤어? 당장 손 빼!”
김유린의 짧은 비명과 함께 한혜진이 경악했다.
하지만 세현은 개의치 않았다. 잠시간 더 좀비의 몸통을 뒤적거리던 손을 빼냈을 때, 거기엔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징그러운 검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를 뺀 모두가 몸서리치며 몇 걸음이나 물러섰다.
“그렇게 뒤로 가면 잘 안 보일 텐데.”
“세현아, 제발 부탁인데 그거 버려!”
“걱정하지 말고 가까이 와 봐.”
태연한 어조로 계속된 재촉에, 결국 혜진을 비롯한 모두가 주춤대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세현의 손에 들린 기생충은 격렬히 꿈틀대며 제 징그러움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설명하죠. 이놈이 좀비의 핵입니다. 정확하게 여기, 오른쪽 어깨 쇄골 밑에 자리잡고 시체를 조종하죠. 그러니까 좀비를 죽이려면 여기를 공격해야 됩니다. 머리 같은 건 공격해도 소용이 없어요.”
그는 청월을 뽑아들고 방금 기생충을 뽑아낸 청년의 시체를 툭툭 건드렸다. 그 시체는 이전처럼 눈을 뒤룩뒤룩 굴린다던가 하지 않고 정말로 시체가 된 상태였다.
“이것들이 왜 사람을 공격하고 살점을 뜯어먹는지는 모릅니다. 대충 추측하자면 적당히 살점을 뜯어 에너지를 보충하고 남은 먹잇감에 알을 까든가 자가분열 같은 방법으로 번식하는 거겠죠. 그냥 그런 식이겠구나 하고 알아만 두세요. 아, 그리고.”
그는 들고 있던 기생충을 바닥에 내려놨다. 놈은 잠시 버둥버둥 요동치다가 갑작스레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가장 가까이 있던 세현을 향해서.
“헉!”
텁!
놀란 김인환의 헛바람이 무색하게도 세현은 무리없이 기생충을 다시 붙잡았다.
“봤다시피 이런 상태에서도 기습적으로 튀어오르니까 주의하시고요. 몸에 닿으면 모르긴 몰라도 유쾌하진 않을 겁니다.”
화륵!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가 든 기생충이 격렬히 타올랐다. 눈 깜빡할 사이 재조차 남기지 않고 타버린 기생충, 그걸 잡았던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다.
“그럼 이제 각성이란 걸 합시다. 김인환 씨부터 하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죽이세요.”
그러면서 세현은 거리에 쓰러진 채로 눈알만 뒤룩뒤룩 굴려대는 좀비들을 가리켰다.
“어떻게 죽이는지 알려드렸으니, 다른 좀비들이 튀어나오는 것만 주의하면 됩니다.”
“……저, 그게 끝입니까?”
“죽이다 보면 알게 돼요.”
잠시 더 머뭇거리던 김인환이 결국 앞으로 나섰다.
이전에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좀비를 죽여본 적 있는 그다. 그때는 어떻게 죽이는지 몰라 마구잡이로 내리쳤지만, 지금은 방법을 알았다. 무엇보다 가만히 바닥에 쓰러진 채 굳어버린 좀비들이었다. 못 죽일 이유가 없다.
“흐읍!”
퍽!
힘껏 내리친 배트에 가격당한 한 좀비의 몸이 덜컥였다.
그건 육체적으로는 쉬워도 정신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좀비의 오른쪽 어깨를 네다섯 번 넘게 내리쳐 마침내 목숨을 끊어낸 그의 호흡은 전력질주라도 한 것처럼 거칠었다. 어쩐지 쓰러진 비무장의 사람을 쳐죽인 듯한 죄악감이 그를 덮친다.
“그렇게 계속 하세요.”
세현은 혼란에 빠진 김인환에게 추가로 좀비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정신을 차리고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은 김인환은, 별 이유도 없이 베어나온 땀을 닦아내며 다음 좀비를 향해 움직였다.
여덟 마리 째를 잡았을 때 쯤, 그는 마침내 각성했다.
눈앞에서 떠오른 반투명한 창에 기겁하여 물러서다 넘어질 뻔하긴 했다.
그런 김인환의 행동을 지켜보던 세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했죠?”
“이게…… 이게 각성이란 겁니까?”
“맞아요. 이리로 와서 도움말부터 읽어보시고, 다음은 누가 할까요?”
세현의 시선이 김유린과 이예슬을 향한다. 의외로 성큼 나선 것은 김유린이었다.
“내가 할게.”
아버지에게서 야구배트를 건네받은 그녀가 잔뜩 긴장한 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가까운 좀비에게 다가가 힘껏 치켜든 순간, 세현이 제지했다.
“잠깐, 그렇게 잡으면 다친다.”
“응? 그, 그래?”
“줘 봐.”
세현이 친절을 발휘했다. 직접 시범으로 둔기를 어떻게 쥐는지 가르쳤다. 겸사겸사 어떤 느낌으로 휘둘러야 하는지까지도.
이런 시기에 손목이라도 삐면 그건 의외로 골치 아픈 부상이다. 사소하지만 분명히 제대로 써먹지 못하니까.
“시간 많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제대로 휘둘러.”
“고마워.”
세현이 뒤로 물러섰다. 김유린은 다시 각오를 가지며 야구배트를 치켜들고 앞으로 나섰다.
첫 번째 좀비를 처리하고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두 번째 좀비를 처리하러 움직였다.
꽤나 야무진 모습이다. 세현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약간 상향조정했다. 의외로 쓸 만할지도 모른다.
원래 그가 주목하던 사람은 김인환 뿐이었다. 김유린과 이예슬은 거의 곁다리로 취급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좋은 일이다.
김유린은 열 마리를 넘게 잡고서야 각성에 성공했다.
이제는 이예슬 차례였다. 그녀는 김유린과 마찬가지로 둔기형 무기를 다루는 방법을 교육받았음에도 첫 번째 좀비의 앞에서 우물거리기만 했다.
“정 힘들면 안 해도 됩니다.”
뒤에서 세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에겐 각자 적성과 한계라는 게 있죠. 불가능한 걸 시킬 생각은 없어요.”
그에, 이예슬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마침내 망설임을 떨치고 야구배트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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